Select Page

축제식 예배, 손 흔들며 찬양하기 전에 생각해 봅시다!

저자: 랄프 랄슨 박사

– 서론 – (편집실)

    미국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에 있는 안식일 교회내의 공통적인 고민이 있는데 그것은 매년마다 많은 교인들이 안식일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많은 안식일 교회들에서 청년들이 재림 신앙에 흥미를 잃고 교회를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재림 교회의 어떤 목사님들은 요즘 바벨론 교회에서 유행하는 축제식 예배 형식을 재림 교회 안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축제식 예배 형식은 원래 천주교회에서 시작하였는데, 오순절파 (순복음) 교회들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고, 지금은 거의 모든 일요일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배 형식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어떤 재림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축제식 예배 형식을 재림 교회에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 안의 두 부류

    축제식 예배 형식에 대해서 좀더 깊이 있게 언급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성경에 나오는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질문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질문입니다. “복음을 전파해야 할까요? 아니면 교회를 성장시켜야 할까요?” 우리는 재림 교인으로써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현재, 재림 교회 안에는 이 질문에 대한 두가지 입장이 존재합니다. 한 부류는 복음과 진리에 초점을 맞춰서 그것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면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리를 올바로 세우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는 일에 강조점을 둡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른 한 부류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교회를 빨리 성장시킬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촛점을 맞춰서 일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는 방법론에 대하여 골몰하게 되는데, 그들은 교인 수가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한 나머지 진리와 원칙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교인 수를 늘일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일반 기독교 계에서 유행하는 축제 예배 형식을 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눈을 감고 손을 흔들며 복음 성가를 부름으로써, 감정적으로 흥분된 상태하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고 그것을 통하여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가 바로 축제식 예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 방식은 사람들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하는 성령의 음성을 소홀히 여기게 이끌어 갑니다. 왜냐하면 일단 감정적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러한 교회들은 더 이상 교인들의 죄의 문제와 회개에 대한 촉구를 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인들의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깨뜨리는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지만, 사단은 인간의 감정을 통하여 접근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대개, 감정적 예배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무엇이 진리인가?”, 또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감정적 만족과 행복감을 맛볼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축제의 기분에 들뜰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전에서 손을 들고 몸을 흔들면서 복음 성가를 부를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드럼과 현란한 조명으로 교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해서는 안될 때입니다. 지금은 예수께서 지성소에 계시는 대속죄일입니다. 지금은 자신의 죄와 마음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살아야 할 때입니다. 거룩한 천사들마저 하나님 앞에서는 날개로 얼굴과 몸을 가리우며 깊은 경외심을 나타내는데, 어찌 우리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경박한 음악과 몸짓과 손동작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남은 교회에게 주신 예언의 신에는 “하나님이 교회 안에서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제식 예배를 받아들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 편집실 –

축제식 예배, 손 흔들며 찬양하기 전에 생각해 봅시다!

       오순절 주의(Pentecostalism) – 흔들어 대는 손과 몸, 극히 감정적인 설교들, 크고 쿵작거리는 음악, 실신하여 쓰러짐, 방언을 말함, 기적적인 치료들 – 우리들은 전에 이것을 많이 보아 왔다. 그리고 이것은 얼마동안 우리 주위에서 맴돌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일까? 우리가 심지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 정당한 것일까? 다음의 항목들을 주의깊게 읽어주기를 바란다.

       항목 1: 나의 45년간의 사역중 거의 3분의 1이 전도사업에 바쳐졌다. 나는 도시마다 다니면서 우리 기별에 대해 반박하는 그리스도인 그룹 중 오순절파(순복음 교인들)처럼 강렬한 반박을 해온 그룹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다.

       항목 2: 전에 부대총회장이었다가 은퇴하신 비-츠(R. R. Bietz) 목사님이 방언을 하는 한 오순절파 교인과 만난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사람은 자신이 한 방언이 독일어였다고 비-츠 목사님께 말했다. 비-츠 목사님은, “아니오. 형제여, 독일어는 내 모국어요. 당신은 독일어는 한마디도 안 했소” 라고 답했다.

       항목 3: 전 평신도 선교부 지도자였던 본(A. D. Bohn) 목사님은 자신이 시카고에서 어떤 날 저녁 한 오순절 교회의 장막 집회에 참석해서 한 부인이 중국어로 방언을 하는 것을 들었고, 자신이 아는 한 중국인 세탁업자가 청중 가운데 있는 것을 보았다. 후일 본 목사님이 자신의 세탁물을 찾으러 그 중국인 세탁업자가 하는 세탁소에 가서 말했다. “당신이 전에 그 장막 집회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고 묻자, 그 중국인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얼굴을 찡그렸다. “재미 없어요” “왜요? 그들은 그 부인이 당신네 나라말로 방언한다고 하던데요.” 그 중국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중국말로 하는 것은 맞았는데, 욕지거리 하는 것이 마치……”

       항목 4: 하와이 섬 북부 연안에 살고 있던 한 젊은 포르투갈 여인이 자기네 교회에서 드리는 의식들에 실증이 나서 오순절 교회 집회에 참석했다가 그 교회 교인이 되고 말았다. 그녀는 심지어 방언을 말하기까지 했다. 열렬한 선교정신으로 그녀는 한 필리핀 사람들의 야영회에 참석하여 포르투갈 말이 섞인 엉터리 영어로 필리핀 사람들에게 증거하려 했으나 언어 소통이 어려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좌절한 그녀는 잠시 멈춰서 방언의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다. 기적적으로 그녀는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유창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에 당황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든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든지, 그녀를 흘겨보든지 하였다. 놀란 그녀는 방언을 멈추고 엉터리 영어로 물었다. “무어시 잘못됐습니까?” 하고 그녀가 물으면서 말했다. “왜 여러분들은 나 여러분들 말 하는 것 싫어합니까? 나, 일로카노(Iiocano) 말 하는 겁니다. 아닙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한 사람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당신이 일로카노 말은 잘 하는데, 당신이 하는 말은 순전히 입에 담지 못할 소리들이란 말이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이 일로카노 말로 음담패설을 토해냈다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성경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결국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이 되어서 자신의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더 언급하기를 방언을 말한 후 그녀는 자신이 정신을 잃었었던 것을 종종 두려워했다고 덧붙였다.

       우리는 계속 더 말할 수 있다. 오순절 주의는 우리 곁에 한동안 있어왔다. 많은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그에 대한 가장 중요한 요점들이 예언의 신 가운데 있다.

       남은 교회의 영감받은 하나님의 사자는 대쟁투, 464에 우리 앞에 있는 가장 고무적인 약속을 기록해 놓았다. 이것은 위대한 부흥에 대한 전율할만한 예언이다.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세상에 내리기 전에 하나님의 백성 중에는 사도 시대 이래로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근본적인 경건을 위한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과 권능이 그 자녀들의 위에 부어질 것이다. 그때가 이르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사랑하는 대신에 이 세상을 사랑하는 그러한 교회들에서 떠나 나올 것이다. 그리고 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이 주의 재림을 위하여 특별한 백성을 준비시키고자 이 시대에 전파시키고자 이 시대에 전파되고 있는 큰 진리를 즐거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문단의 후반부에서 우리는 한 두려운 경고를 발견하게 된다. 예언들을 열심히 연구한 사단은 이 큰 부흥이 가까이 이른 것을 알고 그 성격상 오순절 식의 굉장한 거짓 부흥을 미리 일으킬 것이다. 그는 자기의 거짓 부흥이 먼저 있도록 고안한다.

       “그러나 사람의 원수 사단은 이 일을 방해하려고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꾸며 냄으로써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속이는 권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보여서 소위 큰 부흥이 일어난 듯이 일반에게 생각되도록 나타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볼 때에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신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사 놀랄만한 일을 행하신다고 기뻐 날뛸 것이다.”

       어떤 교회들은 사단의 기만적인 권력 아래 모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유의하라. 거기에는 마치 큰 종교적 부흥이 있는 것처럼 나타내질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볼 때에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영, 즉 사단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사 놀랄만한 일을 행하신다는 생각으로 미혹될 것이다.

       거짓 부흥과 참 부흥이 우리가 곧 통과해야만 할 두가지 경험이기 때문에 우리가 첫번째 것인 거짓 부흥과 그 다음 것인 참 부흥을 구분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공부하는 것이 참으로 필요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의 지혜로만 추측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대쟁투, 27장에 나오는 “신앙부흥과 참된 회개”와 22장, “재림신도의 시련기” 즉 1844년의 부흥에 관해 기록한 우리에게 필요한 정보를 너그럽게도 제공하여 주셨다. 거짓 부흥의 성격이 현대 오순절주의와 너무도 유사하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진짜 부흥

       우리의 주의는 계속 하나님의 말씀이 충실하게 전파되어 교회 역사에 있어 진정한 부흥들을 가져온 모든 열매들이 나타나는데 쏠린다. 그런 모든 진짜 부흥들에서 남녀들은 죄를 깊이 자각하고 구세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낌으로 자백과 회개로 용서를 발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었다.              “그 사람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다. 그들은 믿고 침례를 받았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생애를 하기 위하여 일어났다. 그들은 전에 행하던 그들의 정욕을 따라 자기 자신들을 꼴 짓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그들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전에 미워하던 것을 이제는 사랑하고,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되었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었다. 허영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이 착실하고 조심성 있게 되었다……믿지 않는 사람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생애가 변화된 것을 인정하였다.” (대쟁투 461) 

       그리고는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위에 말한 것이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의 결과이다. 개혁이 없는 회개는 참된 회개는 아닌 것이다.”

  거짓 부흥

  대쟁투 27장에는 거짓 부흥들의 성격이 묘사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l      “상상력에 호소”

l       감정을 자극

l      “무언가 새롭고 깜짝 놀랄만한 것에 대한 사랑”을 불러 일으킴

l      성경 진리에 과히 귀를 기울이고자 아니함

l      무슨 감정을 일으키는 색채를 원함

l      냉정한 이성에 호소하는 기별 같은 것엔 아무 반응이 없음

l      진짜를 거짓과 혼합함

l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볼 때에 그 실상은 전연 다른 신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사 놀랄만한 일을 행하신다고 기뻐 날” 뜀

l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그릇된 태도

l      마음과 생애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음

l      “그리스도로 더불어 연합함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참가하게” 됨

     이런 거짓 성령의 이상하고도 비극적인 기만의 역사에 관하여 가려뽑은 기별 2권 35~37페이지에 언급된 경고의 말씀이 있다.

     “그런데 저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고와 대쟁투에 나오는 위의 기록을 비교해 볼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모든 기만들 중에 가장 두려운 기만(사단의 기만을 성령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에 참여하고, 사단의 기만의 목록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에 깊이 관여된 것을 볼 때 두려운 전율이 우리의 영혼에 느껴진다. 가려뽑은 기별에 나오는 두가지 경고는 화잇 선지자가 무슨 주제를 두고 주신 것인가? 이것은 시간과 장소가 명시되어 있는 예언이다. 이 예언은 예전에 우리 교회안에 한번 일어났던 사건을 말하고 있으며 이 일은 미래의 어떤 시간이 오면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시간은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직전”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일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있으리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옛날에 처음 이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야영회”였다. 거기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여기 열거해 본다.

l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음악과 춤추는 광경

l      악기들의 오용

l      “잡음의 광태”

l      북새통을 이루는 사단의 대리자들의 능력

l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된다.”

l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제 다음에 주신 권면을 유의하라(35-37페이지).

l      “성령께서는 결코 잡음의 광태와 같은 그러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l      “성령께서는 …… 잡음의 혼란과 온갖 괴상한 소리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시다.”

l      “이러한 요란스런 행동들 가운데 마귀들이 인간의 형태로 나타” 남

l      “소위 부흥 집회인 줄 알고 참여했던 자들은 마치 저들 자신이 정처없이 표류하고 있는 것과 같은 감상을 받게” 됨

 

     이 장에는 올바르게 사용되었더라면 축복이 될 음악이 잘못 사용될 때는 사단의 효과적인 도구가 되는 것에 대해 많이 쓰여졌다.

     최근에 나는 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에서 안식일 오후에 유명한 음악단이 하는 연주회에 참석하였다. 그때 들려진 많은 “잡음의 광태”는 어떻게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증폭기와 전자 악기들이 쟁쟁거리며 내는 소리는 엘렌 화잇이 계시 가운데서 들은 것을 기록했던 “잡음의 광태는 감각들을 충격시키고”(36)라고 했던 그것이 틀림없는 것이었다.

     최근 여러 주동안 지금 우리 교회 내 여러 곳에서 자신들의 예배 형태를 “축제 예배(Celebration Service)” 라 부르며 옹호되고 발전되고 있는 오순절 주의에 관한 질문들이 담긴 편지들과 전화들이 나에게 쇄도해 오고 있다. 이러한 교회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하나님의 사자에 의한 영감받은 예언들 사이의 밀접한 유사성은 엄숙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만일 축제 예배가 전혀 교회에 나가지 않던 자들을 교회에 오도록 한다면 좋은 것이 아니냐?” 고. 그러한 분들에게 나는 다음의 말씀을 인용한다.

     “지난 정월에 나에게 보여진 바 우리 장막 집회에 있을 사업을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악기들을 사용함으로 난잡한 음악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 (상동 36)

     사단의 거짓 부흥이 진짜 부흥 이전에 온다는 예언을 생각해 볼 때 대쟁투, 22장과 27장에 묘사된 진짜 부흥에 대한 묘사를 주의 깊이 공부해 보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22장에는 1844년의 부흥이 이렇게 묘사되었다.

     “이 운동은 흔히 경험하는 바와 같이 흥분적인 것에만 의존하고 하나님의 성령의 통제력이 없음으로 생기는 극단적인 일은 전혀 아니었다. 그것은 옛적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견책의 기별을 받았을 때 즉시 마음을 겸비하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간 일들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었다. 거기에는 각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구별해 주는 특징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열광적인 기쁨은 별로 없고, 오히려 마음을 깊이 살피고, 죄를 고백하고, 세상을 버리는 일들이 있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는 그들의 번민하는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부담이었다. 그들은 끈기 있는 기도와 확고한 헌신을 주께 드렸다……

     사도 시대 이래로 모든 위대한 종교운동들 중에서 1844년 가을의 재림운동만큼 인간적 결함과 사단의 간계에서 벗어난 운동은 없었다. 그 후 여러 해를 지낸 오늘날에 있어서까지도 그 당시의 운동에 참가하여 진리의 토대 위에 굳게 섰던 사람들은 누구나 당시의 그 복된 사업에 나타났던 거룩한 감화력을 깨닫고,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운동이었음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대쟁투, 400, 401)

     진정한 부흥에 대한 이같은 묘사가 27장에 나오는 진정한 부흥에 대한 묘사와 유사한 것을 비교해 볼 때 진정한 부흥에 대한 개념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또한 거짓 부흥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유사성도 또한 동일하게 자명하다. 이런 사실은 모든 사려깊은 교인들로 하여금 지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심사숙고하도록 한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 이전에 올 그 큰 거짓 부흥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라는.

     대쟁투에 묘사된 예언을 잊지 말도록 하자. 오순절파 형식의 프로그램들이 무리들, 심지어는 “대중”을 끄는 데 있어서 굉장히 성공적일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표면적인 결과들로 거짓 부흥을 판단할 수 없다. 그러한 교회들에 몰려들 대중들에 관한 두 문단에는 그에 대한 경고가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다. 피상적인 회심이 넘칠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한 적이 없는 많은 대중들이 그 교회에 들어올 것이다.

     항목 5: 나는 “성령 부흥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목사”라고 소개된 한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회집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는 미국 북서부에 있는 한 오순절 교회를 방문했었는데, 그곳의 전 회중이 소리를 내어 기도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즉시 깨닫고 말하기를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은 기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 목사와 한 친구가 그 회집으로부터 집으로 차를 몰고 오는데 그 친구가,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대해 가르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목사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 고 하면서 “우리가 그들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고 답했다.

     이 성령 부흥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목사는 자신이 무엇을 했으며 무엇을 하고 싶어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축제 예배” 라 불리우는 오순절 교회의 예배 형식을 도입해 들여왔다. 그 예배는 크고 꿍꽝거리는 음악과, 손과 몸을 흔들며, 성경은 조금 가르치는 형식의 것도 포함된 예배였다. 거기에는 “기도의 동산”이 있는데, 그것은 기도하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있으면 그 목사가 그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다. 그 목사는 자신이 매 안식일 아침마다 자신의 교회에서 치유의 기적들이 있을 날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축제 교회와 다른 도시에 그와 같은 축제 교회들 – 아마 이 기사가 출간될 때에 있게 될 더 많은 교회들 – 은 어마어마한 무리들이 모이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군중들” 이라고 부른다. 미래에 기대되는 군중들을 수용하기 위한 거대한 건물을 지을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

     또한 어떤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지도자들은 이 때를 위해 주신 이 문제에 관한 주님의 권면을 알지 못한 채 이러한 축제 예배를 칭송하고 확장시키며, 전 교회가 오순절주의로 쏠려 들어가도록 추천하고 있다. 대쟁투, 22장과 27장, 가려뽑은 기별 2권, 35-36에 언급된 예언의 신의 세 문단은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조류에 휘말려 들어갈 것인지, 혹은 휘말려 들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진짜 부흥이 있기 직전에 나타날 사단의 거대한 거짓 부흥의 시작이 이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에 대한 유사성은 참으로 충격적인 것이다.

껑충껑충 뛰기 전에 먼저 살펴 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