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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들은 견고한 토대를 후원하는가?

저자:  편집실

회상

    지금부터 6년 전을 생각해 봅니다. 당시에 견고한 토대는 오늘처럼 셋째 천사의 기별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목사들과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이 일어나서 견고한 토대의 테잎과 월간지에 실리는 기별들 위에 “극단과 오류”라는 도장을 확신과 신념을 갖고 찍었습니다. 그리하여 견고한 토대가 전했던 세째천사의 기별은 그때부터 남은 교회 안에서 어떤 “분파”가 전하는 “극단과 오류”의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별을 전했던 우리들에게 특별히 눈에 보이는 위로와 격려의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죄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식의 바벨론의 기별이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킨다”는 셋째 천사의 기별을 남은 교회 안에서 압도했습니다.

    한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과 그분의 승리 만큼은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없다는 가설이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씨로 태어나셨고 모든 면에서 한결같이 우리와 같이 시험 받았다”라는 진리를 남은 교회 안에서 의심스러운 상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동안, “예수께서 이 땅에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그 순간까지 아무도 죄를 완전히 승리할 수 없다”는 거짓 위로가 남은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승리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빼앗아 갔습니다.

    한동안, 넉넉히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는 책자가 모든 교회 안에서 승리와 영광의 기별을 압도하는 듯 했습니다. 거의 모든 교인들은 마치 그 책이 교회를 “극단과 오류”의 위기에서 구하기나 한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한동안, 진리 위에 거짓의 검은 보자기가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진리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신실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이 부족한 사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우셨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 속에 갑작스런 투쟁이 생기게 함으로서 잠자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과연 무엇이 진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만드셨고, 어떤 때는 진리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성경을 읽다가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끄시는 주님의 지혜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교회 안에서 진리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남은 교회 안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극단과 오류”로 도장 찍혔던 세째 천사 기별이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책자를 통하여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섭리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안식일 학교 과정책을 통해서, 거의 모든 진리의 쟁점들이 밝혀졌고, 지금도 계속 밝혀지고 있는 것을 누가 감히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1995년도 3기 과정책 (성령으로 말미암아 계몽됨)에 나온 거의 모든 과목들은, 마치 견고한토대에서 “이것이 참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입니다”라고 외침으로서 이단과 극단 취급을 받게 되었던 바로 그 기별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 신실한 종들이 이곳 저곳에 남아 있어서 “옛 진리”를 고수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조용한 승리

    주님께서는 은혜롭고 자비로우셔서 세상에 보내는 당신의 마지막 기별을 짓밟고 조롱하였던 남은 교회를 끝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대하시면서, 동시에 당신의 마지막 기별을 선두에 나서서 반대하였던 지도자들과 목사들의 머리 위에 조용히 숫불을 올려놓으셨습니다. 제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견고한 토대가 승리하였고, 교회가 패배하였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의 욧점은 남은 교회 안에서 조용한 승리를 거두고 계신 주님의 역사하심과 그분의 신실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몇해 전까지만 해도 서로 앞을 다투어가면서 “견고한 토대가 전하는 것은 위험한 광신”이라고 진심으로 경고하였던 지도자들과 목회자들까지라도 이제는 조용히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듯 합니다. 물론 여전히 여호와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가끔씩 엉뚱한 옛날 이야기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계속적인 무관심과 무지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지만, 적어도 말씀을 개인적으로 연구하는 정직한 재림 교인들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제 아무도 견고한 토대가 전하는 기별 위에 “극단과 오류”라는 도장을 정직한 확신을 가지고 찍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견고한 토대라는 “기관”에 대해서 의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견고한 토대가 전해온 “기별”에 대해서는 누구도 감히 확신을 가지고 부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별은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한 말씀의 증거를 가지고 각 개인들에게 도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견고한 토대라는 기관을 변호하고 입증하기 위해서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를 거부하여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거부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인간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열정과 열심을 소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견고한 토대라는 “기관”의 번영에 대해서 우리는 조금의 관심이나 가치도 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위해서 주께서 6000년 동안을 준비해오신 진리와 기별을 위해서는, 우리의 생애와 최고의 헌신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견고한 토대를 후원하는가?

    견고한 토대에서 하는 사업을 위해서 헌금을 보내주시는 재림교인들은 마지막 시대를 위한 진리와 기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늦은비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는 재림교인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안식일에 교회에서 듣기 원하는 설교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기별입니다. 그들은 참된 거듭남의 경험만이 죄에 대해서 완전한 승리를 약속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듣기 원하는 말씀은 어떻게 거듭나며, 어떻게 거듭남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의 기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강력한 부흥과 개혁의 기별이 외쳐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듣기 원하는 기별은 참된 건   강 개혁 기별과 참된 교육에 관한 기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과 교우들이 뜨거운 형제로 연합하여 힘있게 전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늘 부담으로 교우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말씀의 진정한 이해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도시 생활의 위험성과 시골 생활의 필요성에 대한 강력하고 정직한 권면이 발하여지기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듣기 원하는 기별은 마지막 사건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것을 위한 오늘의 준비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현대진리를 매 안식일 마다 듣게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소 진리와 조사 심판, 그리고 재림 운동에 관한 변질되지 않은 “옛”진리를 매우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으로 강조하는 설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끝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가 자녀들과 가족들이 매 안식일마다 다니기에 “안전한” 교회가 되기를 깊이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왜 견고한 토대를 후원하고 있는가?

    만일 그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자신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믿고 있는 진리들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공공연하고 공개적으로 진리의 기둥들을 부인하면서 그것들을 가치없는 율법주의나 완전주의로 몰아간다면, 그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신뢰는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들 자신들이 말씀에 근거한 확증을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의 인성,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 늦은비를 받을 수 있는 조건, 이른비의 경험의 실체, 거듭남에 대한 진리와 그 경험, 그리고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진리들이 차례 차례 무시당하고 무너져가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만일 여러 독자들이 그들의 입장과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 것같습니까? 바로 이것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 입니다. 그들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마지막 남은 교회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확증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은, 강력한 믿음이 없이는 재림 교회를 마지막 남은 교회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진리를 부인하고 거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남은 교회가 가르치고 설교해야 할 진리가 무시되고,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깊은 슬픔과 고뇌의 늪으로 빠져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마지막 남은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가장 독특한 기별 중의 하나인 건강 개혁 기별을 전하는 복음 사역자들이 고기를 자신들의 식탁 위에 음식으로 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동시에 음식물의 절제와 개혁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또 다른 딜레마로 빠져들어 갑니다. “하나님의 기별자로서,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는 비뚤어진 식욕의 방종에 대해서 결정적인 증언을 하지 않을 것인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주어져 있는 가장 엄숙한 진리를 선포하는 복음 사역자 중의 어떤 사람이 애굽의 고기 가마로 돌아가는 모본을 보일 것인가? 하나님의 창고로부터 나온 십일금으로 지원받는 자들이 자기 방종에 빠짐으로써 혈관에 흐르는 피에 해독을 끼치도록 허용할 것인가?” 라는 경고의 중요성을 생각하면서, 그들은 마지막 기별의 선봉장들에 대하여 깊은 회의감을 갖게 됩니다 (교회증언, 9권, 159).

    안식일 예배 후의 파트락(점심 식사) 시간에는 잘 차려진 채식으로 된 건강 음식을 즐기면서, 가정에 돌아가서는 육식을 탐하는 부모들과 교회의 집사님들과 장노님들과 목사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자녀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들은 두가지의 다른 모습 즉, 거룩한 것과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것을 가정과 교회 안에서 함께 보면서, 또 하나의 라오디게아인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성장했을 때, 그들 역시 부모들과 교회의 본을 따라 두가지 얼굴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각종 오락이나 스포츠나 재미있는 교회 프로그램이 아니라, 자신들의 가정과 교회에서 바라볼 수 있는 “모본” 입니다. 그렇게 성장한 그들이 과연 침례 요한의 기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엘리야의 기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마지막 기별을 듣게 될 때, 그들은 그 기별을 대항하여 일어서는 또 다른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필자가 과거에 다녔던 교회에서 일어난 웃지못할 슬픈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실제적인 도움이 될 것같습니다: 그 당시 교인들 모두는 일요일 교인들을 대상으로한 건강 전도회를 열기 위해서 열심으로 일했습니다. 재림교인인 신실한 의사 한 분을 강사로서 모시고, 전도지를 돌리고, 신문에 광고를 내고, 친구들과 이웃들을 전도회에 데리고 올 수 있도록 안식일 마다 교인들을 격려했다. 정해진 날짜가 되자 전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전도회가 시작되자 예기치 못했던(?)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 강사가 동물의 살과 피를 먹지 말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과학적으로, 성경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인들 모두 무안한 얼굴을 마주보며 묘한 표정을 짖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 대다수가 고기를 먹고 있는 형편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재림교인들이 진정한 자신의 형편을 모른채, “전도”를 위해서 열심히 뛰어 다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앉아서 자신과 가족을 돌아보는 시간도 잊어버린채 그저 열심히 뛰어다니는 현대판 아히마아스들 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고기를 조금만 먹는 사람들이 고기를 조금 더 많이 먹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것을 언제부터 우리는 건강 전도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까?

    바로 이러한 현상들이 재림 신도의 가정과 교회의 각 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재림 교인들에게 있어서 배도는 더 이상 배도로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배도가 온 교회에서 너무도 대담하고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게 될 때, 사람들의 눈에는 더 이상 배도가 배도로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재림 교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는 “교회 안에 배도가 어디 있는가?” 입니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예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오실 때까지 죄를 완전히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입니다”라는 가르침과 설교가 성행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배도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거의 모든 교인들이 동물의 살과 피를 음식물로 생각할 때,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애굽의 고기 가마로 돌아가는 “모본”을 보여도 그것이 더 이상 위험스러운 일로 생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교회에서 넉넉히 이기느니라 라는 책자를, 세째 천사의 기별을 방어하는 대책으로서 삼았을 때, 우리의 눈으로 배도를 식별하고 지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수 많은 지도자들이 “축제식 예배”를 단순한 “실험적인 예배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할 때, 대다수의 백성들이 그것의 정체와 목적을 정확히 분별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의 모습과 현상들을 보면서 외로움과 슬픔을 느끼는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 “재림 교회가 바벨론이 되었으니 거기에서 나와야 된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라고 조용한 확신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어떤 지도자들과 사역자들이 연약함으로 인해서 실수와 부족함을 보였을 경우, 하나님의 종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실수와 배도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선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십일조와 각종 헌금을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신실하게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 헌금의 전부가 강력한 복음의 전파에 사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에게 거듭남과 변화의 기쁨을 선물로 가져다 줄 수 있는 참된 복음을 전하는 사업에 자신이 드리는 헌금의 전부가 사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지막 기별에 대한 강력한 확신과 목적을 가지고 헌신하는 복음 사역자들에게 그들이 가진 모든 재물이 쓰여지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징조와 사건에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는 기별을 전하는 현대판 노아들에게 자신들이 드리는 헌물의 전부가 사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완전한 순종과 승리의 생애를 사모하며, 자신과 가족을 희생과 헌신의 제단 위에 올려놓는 일꾼들을 위해서 그들이 바치는 헌금의 전부가 사용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왜 견고한 토대를 후원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왜 교회와 주위 교우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견고한 토대를 후원할까요? 그들은 왜 기차와 버스를 타고 5-6시간씩 힘든 여행을 하면서 견고한 토대의 야영집회에 나올까요? 그들이 왜 견고한 토대의 테잎과 월간지를 남은 교회에서 나오는 책과 테잎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왜?

    누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가 그들의 외로움과 고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까? 누가 그들의 슬픔과 탄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까? 누가 그들로 하여금 십일금을 자영선교기관에 보내도록 만들었습니까? 만일,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하나님과 성령의 음성에 따라서 정직한 생애를 살기로 결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에 제시된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 문제의 표면을 허옇게 덮고 있는 거품들을 제거해 버려해 합니다. 우리가 그 거품을 제거하여 문제의 중심을 볼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십일조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누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까? 남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기별을 전하기 위해서, 보장된 월급과 안락한 생활을 포기한채 내일에 대한 아무런 보장이 없는 자영선교의 길을 선택한 자들에게 모든 책임이 올려져야 합니까? 또는 그러한 자영선교인들을 정직한 양심을 가지고 후원하는 자들에게 모든 책임이 얹혀져야 합니까? 아니면, 바벨론의 신학을 가르치고, 죄와 배도를 적당하게 가리우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충성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기별자로서의 절제와 희생과 헌신의 모본을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모든 책임이 돌려져야 합니까?

증세보다는 원인을!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병의 증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예언의 신에 대한 무시와 무관심, 축제교회를 옹호함, 건강개혁에 대한 불순종, 시골 생활의 중요성에 대한 무시, 교회 학교 속에 존재하는 경쟁정신, 광신적인 자녀 교육열, 교회 병원의 세속화, 교회 안에 존재하는 각종 법정 소송 사건들, 급증하는 이혼률, 경쟁적인 화장술, 장식품, 각종 유행, 세상적인 사고방식….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지금 교회가 겉으로 나타내고 있는 증세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증세들은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증세들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정말 이러한 문제들이 일부분에 해당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재림 교회가 전체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심각한 증세들입니까?

    그런데 왜 교회는 이러한 증세를 나타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종종 증세만을 쫓아다니다가 병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잊어버리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무엇이 진짜 핵심 원인일까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교회가 겪고 있는 병의 원인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사모하고 믿는 사람이 육식에 대해서 절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완전한 순종을 사모하며 믿는 사람이 “나는 시골 생활을 하기 싫어요” 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늦은비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분명하게 믿는 사람이 “우리는 예수께서 오실 때, 홀연히 성품이 변화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원인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바벨론의 가르침 입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남은 교회가 100년 전에 받았던 진리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진리가 변질됨에 따라서 사람들의 신앙과 사상 또한 변질되었습니다. 신앙과 사상이 변질됨에 따라서, 각종 세속적인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수 많은 목사들과 장노들과 집사들이 고기를 먹지 않아야 될 이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는 신앙 안에서는, 절제와 종교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은 건강 개혁에 대한 참된 가치와 부담을 잃어버렸습니다.

    수많은 교사들이 노동과 근로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그리스도인 교육과 노동을 아무 상관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쟁을 통한 성공”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교회 병원들이 천연치료의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속에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치료법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병원의 확장과 기업화를 통해서 더많은 이윤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재림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 속에는 더 이상 재림에 대한 신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남은 교회의 교인들이 죄에 대한 승리와 완전한 순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순종과 승리의 생애를 믿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증세들의 총체적인 원인이 될 것입니다. 장, 감리교식의 구원론이 남은 교회 안에서 판을 치고 있는 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증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씀의 실현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흔들리게 될 때, 예언의 신에 나와 있는 모든 절제와 개혁의 기별들은 전혀 가치없는 율법주의의 유물로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흥과 개혁을 외치면서, 변질되지 않은 “옛 진리”를 외치는 자들을 대항하여 수많은 재림교인들이 일어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옛 진리”에 대항하여 “신신학”의 깃발을 들었고, 부흥과 개혁의 촉구인 “곧바른 증언”에 대항하여 “사랑과 연합”의 깃발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장 혼돈한 시기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배도를 배도라고, 죄를 죄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영적 식별력이 있고, 용기있는 복음 사역자들과 장노들과 집사들이 남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제단 위에 올려 놓아야 할 때입니다. 다음의 두 말씀은 오늘날 남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한 엄숙한 도전이 될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의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그분에게는 지혜와 사랑이 부족하다는 도전이 생기게 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법을 지킬 수 없다면, 법을 만든 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사단의 지배 하에 있는 자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단의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당신의 신성에 인성을 입으심으로써 인간 가족을 대표하는 머리로서 서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훈과 모본으로서 육체 안에 죄를 정죄하셨고,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사단에게 돌렸다.” 시조, 3권, 264 (영문)

    “마음 속에 주의 사업과 영혼들의 구원을 향한 열심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참 백성들은 죄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죗된 특성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죄들을 다루는데에 있어서 항상 신실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특히, 교회를 위한 봉사를 끝마치는 시기인 144,000을 인치는 시기가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잘못들에 대해서 깊이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손에 살육하는 무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강력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그릇을 차고 서있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고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겔 9:4.

    “이 때에 누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있는가? 공언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의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변명하며, 죄를 견책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는 아닐지라도 마음 속으로 불평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죄를 견책하는 사람들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하며,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동정하는 사람들을 그분의 말씀 위에 서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만일 그들이, 시온에 있는 죄인들을 옹호하면서, 사업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사단의 일로부터 떠나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할 것이다. 인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파멸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살육하는 기계를 가진 나머지 다섯명의 하는 일로서 표현되고 있다. 이 점을 유의하라.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에 의해서 쳐지는 표로서 상징되며, 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진리의 순결한 표를 받는 자들은 교회 안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 그리고 순결함을 향한 그들의 사랑은 고통 가운데서 탄식하며 우는 것으로서 표현되고 있는데, 그들은 죄, 그 자체의 엄청난 죗됨에 대해서 너무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에스겔 9장을 읽어라.” 교회증언, 3권, 영문 266-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