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가 해결책인가?
랄프 랄슨
한마디로 답하면 아니다이다. 우리는 어떤 곳들에서 자신들에게 나타내는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순수한 역사적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는 많은 교인들에게 비동정적인 태도를 보이길 원치 않는다. 아마 가장 심각하게 느껴지는 문제는 거의 매주 자녀들로 하여금 무엇이 진리이며 안식일 아침에 주어지는 가르침에 어떤 잘못된 가르침이 있는지를 이해시키는 부모들이 겪는 고충일지 모른다. 그보다 더한 것은 자녀들에게 왜 안식일 아침에 가르쳐지는 오류를 가만 보고만 있어야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의 동정심은 두려운 상황에 직면하면서도 용기 있게 우리 믿음의 기둥들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충실한 교인들에게로 향한다. 그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분명 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것과 당신 자신의 지혜로운 방법으로 교회를 정결케 하신다는 것과, 또한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문제를 푸는 하늘이 지정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예언의 신의 확언을 믿어야만 한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결국 쫓겨날 때까지 유대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지도자 가운데 배도가 편만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명확하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분명 그녀가 구원이 배도한 유대 지도자들의 태도를 모방하므로 그녀에게 임한다고 이해하기를 원치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후일 사도 바울이 기록한 진리를 그녀에게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3:1-4).
죽어가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의 기별을 전하도록 분부 받은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계 12:17)를 지키기를 거절하지 않은 백성인 남은 교회라는 것은 명백하다. 남은 교회의 어떤 교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신성한 책임에 불충실하거나 그 책임을 맡을 자격이 없는 것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미리 경고 받은 것도 똑같이 명백하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는가? 분명 그렇지 않다. 진리는 설 것이고, 남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기만 당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으며, 그들의 원수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설 것이다. 그들은 교회증언 5권, 136에 나와 있는 부정적인 영향력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충만하게 드러내는 경험을 할 것이다: “다수가 우리를 버릴 때 진리와 의를 옹호하기 위하여 굳게 서고, 용사가 적을 때 주님의 싸움을 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시험이 될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냉(冷)에서 열(熱)을, 그들의 비겁에서 용기를, 그들의 반역에서 충성을 취해야 한다.” 만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오심의 징조가 되는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해 주신 것처럼 큰 배도에 대한 세부사항이 우리에게 미리 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큰 실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징조들인 사건은 아주 괴로운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징조들이 나타날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눅 21:28)고 말씀하셨다.
영감의 증언은 큰 배도가 ⑴ 우리의 신학적 문제에서의 변화, ⑵ 우리의 예배형태에서의 변화, ⑶ 큰 거짓 부흥으로 특징지워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신학에 있어서의 변화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의 글을 읽는다: “큰 당혹과 혼란의 때가 신속히 다가오고 있다……모든 교리의 바람이 불게 될 것이다”(5T, 80).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깨우실 것이다. 만일 다른 수단이 실패하면 이설이 그들 가운데로 들어와서 그들을 흔들어 알곡과 겨를 분리시킬 것이다”(상동, 707). “마지막 배도의 사업이 진행되기 전에 믿음에 혼란이 있게 될 것이다…진리는 하나씩 차례로 부패될 것이다”(Signs of the Times 3권, 118).
“바로 우리 가운데서 거짓 교사들이 일어나서 그 교리가 사단에게서 기원한 미혹하는 영에게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이런 교사들은 제자들로 자신들을 좇도록 이끌 것이다”(RH 5권, 9).
“많은 이들이 그들의 손에 지옥에 있는 사단의 횃불에서 점화해온 거짓 예언의 횃불을 들고 우리의 강단에 설 것이다”(TM, 409, 410).
“진리가 온 민족들에게 증인으로서 선포되어온 후에……이정표를 없애고 우리 믿음의 기둥들을 부수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다. 거짓 안식일을 높이려는 더욱 결정적인 노력이 있게 될 것이다”(본교 성경주석 7권, 985).
“원수는 성소가 없다는 것과 같은 거짓 교리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이것은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이론들 중 하나이다”(Counsels to Writers and Editors, 53).
“원수 마귀는 과거의 기별들에 대한 우리 신앙의 초석들을 믿는 신자들의 신뢰심을 뿌리 채 뽑아 버리기 위하여 온갖 활동을 하고 있으나 이 신앙의 초석들은 우리를 영원한 진리의 고상한 토대 위에 올려놓았고 사업을 이룩하였으며 그 사업의 특징을 살려 놓았다”(가려 2권, 495, 496).
이런 두려운 예언들은 가능성으로서 제시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안식일과 성소가 공격의 목표가 된다는 특별한 언급이 있다. 모든 것 중에 가장 강력한 증언이 Signs of the Times 3권, 264에 나와 있다: “사단은 아담의 아들 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지혜와 사랑이 결여된다고 책임을 돌렸다. 만일 그들이 율법을 지킬 수 없었다면 율법을 주신 분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사단의 휘하에 있는 자들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 하나님을 대항한 이런 고소를 되풀이한다.”
우리의 예배에 있어서의 변화를 예언한 것은 화잇 부인의 기록 중 두 가지 주요한 문구를 대조해 볼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예배 형태는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단순성에 강조를 둔 개혁의 원칙에 일치되는 것이었다. 덧붙여서 우리에겐 어떻게 예배드리는지에 관한 영감적인 권면이 증언보감 2권, 201-211에 “하나님의 집에서 취할 태도”에 실려 있다. 이 11페이지에 해당하는 권면에는 우리가 성스러운 것과 평범한 것 사이의 차이를 결코 간과하지 않도록 주는 10가지의 권면이 있다. 세상적인 분위기에서는 받아들여지는 태도와 말과 품행이 예배에서는 안 받아들여진다는 글을 우리는 읽게 된다. “참된 예배와 참된 경건에 대한 바른 사상을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주지 않을 것 같으면,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통속적인 것과 같은 수준에 놓는 경향이 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신앙을 모독하게 될 것이다”(증언보가 2권, 210, 211).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이런 권면이 거절당하고 사단의 감화력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어떤 야영회와 예배시간에 나타나게 될 때가 올 것이라고 우리에게 충실히 경고했다. 우리는 독자들에게 가려뽑은 기별 2권의 처음 71쪽 까지를 유의하여 연구해보도록 권한다. 여기에는 성스러운 것과 통속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경고들이 반복되었고, 그와 더불어 감정과 정서 및 흥분이 우리의 종교 예식 가운데 나타나는 것에 관한 주의가 실려져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신앙적인 활동이 한갖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들의 감정이 크게 자극을 받게 될 때에 저들은 크게 축복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 저들이 추구하는 목적은 오직 흥분에 도취되는 것이며 만약 저들이 이러한 도취 감정을 느끼지 못할 때 저들은 모든 것이 낭패한 줄로 여기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잘못된 줄로 상상한다”(p. 20). 이것과 큰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자는 우리에게 권한다. “우리들이 말하고 노래하며 모든 영적인 의식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모든 참된 자녀에게 자극을 주는 침착성과 위엄과 경건한 두려움을 나타내야 한다”(p. 48). 우리는 어떤 이들이 이런 권면에 콧방귀를 뀔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하나님의 사자는 다음의 사실을 보았다. “인디아나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대들이 묘사한 것과 같은 일들이 집행유예 기간(은혜의 시기)이 끝나기 직전에 있을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셨다.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며 춤추는 광경을 재연할 것이다.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저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p. 40).
이 진술의 문맥에 의하면 이런 악이 우리 야영회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어떤 예배 형태에 나타나게 될 것이 명백하다. 또한 이 문구는 사단이 이런 예배 형태에서 감각을 혼란시키기 위해 강력하게 활동하는데, 특별히 잘못된 음악을 사용함으로서 그리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사람이 사단과 그의 천사들과 접촉하기 위해 강신술 집회에 가서 죽은 자들과 교제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유의할 가치가 있는 말이다. 똑같은 일이 잘못 행해지는 예배 순서에 참여함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린 경고 받는다.
우리는 괴이한 예배 형태에서 사단의 계교에 의해 그 감정이 자극되는 사람들은 실제로 사단의 영향력을 성령의 역사인줄로 오해할 것이라는 말도 듣는다. 이 같은 기만은 우리로 하여금 큰 배도의 세 번째 특성인 큰 거짓 부흥, 즉 성령의 역사로서 일컬어지는 굉장한 범위의 어마어마한 거짓 부흥으로 이끈다. 대쟁투 하권, 251에서 우리는 항상 가장 위대한 참 부흥은 주님께서 오시기 직전에 있을 것이라는 글을 읽는다. 그러나 무언가 아주 다른 성격의 부흥이 먼저 올 것이다.
“사람의 원수 사단은 이 일[위대한 참 부흥 운동]을 방해하려고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꾸며 냄으로써 이를 막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의 속이는 권력 아래 모이는 교회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내린 것처럼 보여서 소위 큰 부흥이 일어난 듯이 일반에게 생각되도록 나타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볼 때에 그 실상은 전연 딴 신의 공작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저들을 위하사 놀랄만한 일을 행하신다고 기뻐 날뛸 것이다. 이와 같이 사단은 종교적 가면 아래 자기의 세력을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확장하기에 최대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 인용문은 대쟁투, 27장의 “신앙부흥과 참된 회개”라는 장에 나온 것인데, 이 장은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의 특성의 차이를 지적해 준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 장과 38장의 “최후의 경고”와 연결해서 주의깊이 연구해 보기를 권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전하는 이 같은 냉혹한 현실이 우리 앞에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녀가 교회의 전망은 희망이 없고 결국은 붕괴되어 사라질 운명에 처할 것이라는 말을 할 것이라 기대를 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기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조직을 해체시키거나 독립된 단위로 분열시켜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아무런 일관성이 없으며 그러한 일이 있어야 한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가려 2권, 80).
그러나 이 증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시키실 때까지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있을 것이라는 증언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교회 내에 신학적인 배도와 예배 형태의 변화가 큰 거짓 부흥으로 이끌어 수백만이 아니라면 수천명의 신자들을 휩쓸어 버릴지라도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결론지어야만 한다. 우리는 교회가 어떤 형태로 살아남을지에 대한 자세한 증언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한 교회를 가지고 계신다. 그 교회는 큰 성당이 아니요, 국가적인 협회(national establishment)eh 아니요, 각기 다른 교파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들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자들 몇 명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이는 영원부터 계신 높고 거룩하신 분의 임재만이 교회를 구성할 수 있는 때문이다”(The Upward Look, 315).
이 증언을 “교회는 그 조직을 해체시키거나 독립된 단위로 분열시켜서는 안”된다는 말씀과 연관 지어 볼 때 우리는 이들 소그룹들과 어떤 종류의 조직 사이에 교류나 연결이 있어야 할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 소그룹들은 독립된 단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조직은 옛 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조직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형태의 새로운 조직도 구성할 수 없”(가려 II, 498)다.
나는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 조직을 해체시키거나 독립된 단위로 분열시켜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아무런 일관성이 없으며 그러한 일이 있어야 한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습니다
이 증언은 현재의 우리 조직과 어떤 형태의 조직이 서로 공존하며 끝까지 갈 것처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교회의 형태가 어떻든 간에 그 형태 자체의 문제와 염려 속에 모두 흡수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명심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 예수님께 적은 그룹들을 당신의 임재로 영예롭게 하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의 의도가 아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 형제 자매들이 서로 협력하고, 함께 우려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의 정신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 사실은 어떤 형태의 교회 조직이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나 화잇 부인의 글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교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단과 책들이 분배되고 있지 않느냐고 여러분은 질문할 것이다. 그렇다. 있다. 나는 공책 크기에 약 1.5센티 두께나 되는 한 책을 보았는데 거기에는 예언의 신의 인용문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 인용문 중 단 하나도 충실한 자들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떠나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적힌 것이 없었다. 그 인용문들은 전부 그럴 때가 올 것이라는 의미를 지지하기 위해 사용된 것인데 말이다.
그런 자료를 읽을 때 우리는 절대로 어떤 진술과 그에 대한 해석 상이의 차이점에 대해서 간과해서는 안된다. 진술은 저자가 의도한 것과 저자가 말한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해석은 저자가 의도했으나 말하지 않은 것을 누군가가 말해주려는 시도이다. 그런고로 그것은 해석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지 저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해석이 100가지가 됐든지 1,000가지가 됐든지 간에 사실은 여전히 진실로 남아 있다. 아무리 많은 해석의 숫자라도 한 가지 진술과 맞먹을 수 없다. 천 곱하기 영(0)은 여전히 영(0)이다.
화잇 부인은 “흔들림의 시기”라고 언급하면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내에 큰 배도가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모든 예언들 가운데 흐르는 일관된 주제는 겨는 불리워 나갈 것이고, 어떤 총명한 별들은 떠나갈 것이며(5T, 81 참조), 많은 무리가 우리를 버리고 반대하는 자의 편에 가담할 것(대쟁투, 670 참조), 등등이다. 우리가 이런 예언들을 볼 때 충실한 자들은 교회를 떠나야만 할 것이라는 증언을 찾으려 한다면 헛수고만 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한 전략은 아마 필요할 것이다.
화잇 부인은 “교회 안에 분열이 있을 것이다. 두 무리가 형성될 것이다”(가려 II, 139)고 분명히 예언했다.
“시련이 우리 주위에 두껍게 덥힐 때 분리와 연합이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다”(6T, 400).
배도한 무리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과격하며 오만해 질 때 우리 주님과 그분의 진리에 충실하게 남아있기를 원하는 자들은 간절히 주님을 찾아구하고, 서로 간에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연구와 기도를 위해 따로 만나야 할지 모르며, 진리가 영화롭게 될 야영회에 모여야만 할지 모른다. 그들은 비난과 조소와 반대와 거짓 고소들을 참아야만 할지 모른다. 가인이 아벨을 대항하여 노를 발하며 일어선 이래로 늘 하나님의 뜻에 진실로 충실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불충실한 자들이 박해해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시다. 지옥의 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그분의 교회를 대항하여 이기지 못할 것이다.
위를 보라! 머리를 들라! 구원의 날이 가까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