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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강병국

 여러 해 전에, 우리 교회의 영향력 있는 한 교수님이 다음과 같은 강의를 하는 것을 듣고 난 후 저는 얼마 동안 저의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갈등을 해소하지 못해 전전 긍긍하던 때를 회상하게 됩니다. 그 분의 말씀은 화잇 부인의 시골생활에 대한 증언은 더 이상 우리 시대에 맞지 않는 지난 세대에 필요했던 권면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수님의 강의를 간단하게 줄여 옮겨 본다며, 그 당시에는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많은 부분이 천주교인들이었으며, 소나 말들의 오물들이 도시 길거리에 너무 많이 깔려 있었으므로 아주 불결하였던 것이 큰 이유 중에 하나였고, 가장 큰 이유는 옛날에는 많은 인구가 시골에 살았지만 지금은 많은 인구가 도회지에 몰려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재림교인들은 도시에 살면서 전도하는 것이 현시점의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의 말들이 증언의 말씀과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이 아무리 논리 있는 말이라 해도 정녕코 아침 빛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교수님의 강의와 비슷한 인간의 이론들을 많이 들어온, 아니 그러한 식의 이야기를 해주어 우리들의 상태를 위로해 주는 논리들을 듣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서슴없이 하나님의 증언을 무시하는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하고 있는 모습들을 봅니다.

 저의 갈등을 종식시켜 주고 하나님의 증언의 말씀에 더 큰 신뢰심을 불러 일으킨 여러 가지 말씀들 중에 한가지만 소개해 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백성으로서 도시를 떠나야 한다. 우리는 에녹이 한 것처럼 도시 안에서 일하되 그 안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나라안에 불법이 성할 때 롯의 음성이 소돔성에 들렸던 것처럼 경고와 교훈을 주는 어떤 음성이 항상 들려야 한다. 그렇지만 롯이 악하고 타락한 도시 안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자기 가족을 많은 악에서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롯과 그의 가족이 소돔 안에서 행한 모든 것은 도시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살면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나 소돔성의 롯처럼 온갖 종류의 폭력과 사악으로 타락한 도시 안에서 생활하지 않았다.” (복음전도, 80)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도시외곽 전도센터(Outpost center)에 대한 하나님의 청사진을 무시하며 살아 왔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우리 마음에 맞는 증언들만 순종하려고 애써온 우리의 불순종의 정신인 것입니다.

Wildwood의 창시자인 W.D. Frazee목사님께서 처음 외곽 전초지점을 와일드 우드에 세우고 선지자의 증언의 말씀을 따라 요양원과 전도 훈련원을 시작 하였을 때, 우리 교회가 그를 광신이라 지목하였고 교회에 물의를 일으킨다고 판정 그의 목사 자격증을 빼앗았고, 오늘날처럼 그의 참다운 취지를 이해해 주기까지 십여 년 간을 냉대해온 슬픈 역사를 우리는 외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40년 동안, 불신과 불평과 반역의 정신이 고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였다. 그와 꼭 같은 죄들이 현대 이스라엘을 하늘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체 시켰다. 이 두 가지 경우에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에는 전혀 잘못이 없다. 죄악과 슬픔의 세상에 우리를 이처럼 오래 동안 머물게 한 것은 주님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백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신이고 세속주의와 미지근한 상태와 분쟁이다…… 복종하지 않으므로 여러 해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될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백성들은 저들 자신의 잘못된 행동 노선의 결과를 하나님께 돌리므로 죄에다 죄를 첨가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전도, 678)
 
 우리는 이제 불순종하는 고집들을 뉘우치고, 침상을 들고 일어나 걸어가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교회에 들어와 있습니다. 단과 낭실 사이에서 우는 자들에게 인치는 사업이 한창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에 서 계십니까? 하나님 편입니다? 아니면 바알의 편입니까? 다시 말해서, 전적인 순종의 편입니까? 아니면 적당한 순종의 편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 하지 않는 것은 결국에 가서 거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종하지 않는 정신이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적당한 기회만 생기면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술책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놀라운 말씀을 유의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주 많은 무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공언하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의 소유로 여기시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신다. 사단은 종교적인 심리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도록 조장하였다. 그는(사단) 심지의 그들이 예수를 믿고 그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과 그의 부활까지 믿게 되기를 바랐다. 사단과 그의 천사들도 이 모든 것을 믿고 두려움으로 떨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이 믿음이 선한 일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생애를 따르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사단의 경우와 똑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자칭하고 그들의 마음은 아직도 육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그들이 공언하지 않을 때보다 더 잘 이용할 수 있다.” (초기문집, 233, 234)

 우리 증언의 말씀에 대한 태도는 교회의 운명을 좌우 합니다. 이번 호의 시골 생활 문제와 참교육에 대한 말씀들을 읽으시면서 여러분의 서 계신 좌표를 재 발견 하시고 하나님의 단순한 청사진들에 대한 신뢰심을 회복하시는데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