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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세의 확장인가? 아니면 복음의 전파인가?

저자: 마샬 그로스볼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맡기신 소명은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19,20. 재림 교회가 생긴 것은 바로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이 소명을 다 완수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태복음 24:14.

복음의 전파

먼저 우리는 무엇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인지 알아야만 한다.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이 안식일과 재림을 설교하는 것인가? 교회들을 세우는 것인가? 의료선교사업을 통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빈궁한 자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주는 것인가? 물론 복음의 전파가 이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 만으로는 진정한 복음 전파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안식일과 메시야의 초림에 대해 전파했으나 그들이 전파한 것은 복음이 아니었다. 많은 교파의 교회들이 침례를 주고, 교회들을 설립하며, 병든 자들을 치료하고, 빈궁한 자들을 돕지만 그들은 성경상 의미로 볼 때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전파는 단지 설교하는 것, 심지어는 진리를 설교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활동-심지어는 그리스도인 봉사 활동들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복음은 단순한 말씀의 전파나 행위의 실천 이상의 것이다.

신약 교회의 위대한 복음 전파자인 바울은 말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고린도전서 2:4.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죄인들을 성도들의 변화된 생애에 나타날 때까지는 아직 전파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오순절 때처럼 심령이 감동을 받아 죄를 자백하게 되는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을 말한다. 명백한 것은 성령이 없이는 어떠한 복음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복음사업을 그처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부재(不在)이다. 학식과 재간과 능변과 선천적 혹은 후천적인 온갖 재능을 소유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영의 임재가 없으면 마음을 전혀 감동시킬 수 없고, 결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그 반면에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면, 가장 보잘것없고 무식한 그분의 제자라도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는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우주에서 가장 고상한 감화가 흘러 나가게 하는 통로로 삼으신다.” 교회증언 8권, 영문 21,22.

오늘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각자 다른 개성을 소유하고 있지만 여러 다른 수단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복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하여 당신의 성령을 부어줄 수 있는 교회의 신자들이다. 교회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라 불려져야 한다(고전 3:9). 모든 교인들은 기별을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복음 전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성령님께서 각자 다른 능력을 가진 각 개인들을 사용하셔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린도전서 12:8-10.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5, 6.

이런 식으로 복음 전도는 성령님의 지도하에 각기 다른 직임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교회 전체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의료 선교 사업, 가르치는 것, 설교하는 것, 복음 전도, 자녀 교육, 문서를 인쇄하고 분배하는 것, 성경 공부를 시키는 것, 그리고 수 많은 다른 활동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각 활동은 그 활동이 진정한 복음 전도가 될 수 있기 전에 성령의 효과적인 역사에 의해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

각 개인과 한 교회로서 우리가 우리 가운데서 죄와 이기심을 없애버리고, 성령의 부어주심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업을 마치기 위한 봉사 사업에 바칠 때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전도하도록 허용할 성령의 능력 있는 은사를 받게 될 것이다. “교회에 있을 성령의 강림이 장래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으나 교회가 지금 그 은혜를 받는 것이 특권이다. 성령의 강림을 위하여 구하고, 그것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그것이 있을 것을 믿으라. 우리는 그것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리고 하늘은 그것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복음 전도 682. “우리가 하나님의 사업에 온전히 헌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을 한량없이 부으심으로써 그것을 인정하실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지 않는 한 성령을 부으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교봉사 309.

복음 전도의 목적

복음 전도의 명백한 목적은 영원을 위하여 영혼들을 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맡겨주신 소명을 완수함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하여 다시 오실 수 있도록 하는데 있다. 그러나 그 명백한 목적이 항상 우리에게 진실한 목적인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현실에 있어서 정책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있을까? 영혼 구원 사업이 이기적인 동기로 행해지는 것은 가능할까? 영혼구원 사업이 “성공의 계단을 오르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영혼 구원 사업은 개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교회 전체로 봐서도 이기적인 노력이 되기가 매우 쉽다. 교회나 대회 혹은 심지어 지회의 교인 녹명책에 교인 숫자가 더 많이 적혀 있을수록 교인 숫자를 늘리려는 정책은 더욱 강행된다. 교회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 교회는 더욱 더 이름이 난 교회가 된다. 영혼 구원 사업이 정책적인 영향력 아래 수행될 때 그것은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 되며, 복음의 진보를 저해하는 것이 된다. 복음을 진전시키는 대신에 이 같은 종류의 복음전도는 그 복음을 뒤로 물러서게 한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주님과 동역하는 자들로서 각자가 씨 뿌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씨 뿌리는 비유의 두 번째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종류의 씨 뿌리는 자, 즉 선한 자와 악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다. 씨가 뿌려지는 밭은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말한다(실물교훈 영문, 70). 씨를 뿌리는 두 종류의 사람들은 두 종류의 개심자들을 생산하는데, 한 그룹은 가라지요, 다른 그룹은 알곡이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마태복음 13:38. 이제 우리는 사람들의 동기를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한 가라지를 뽑아버리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가라지가 천국의 아들들이 자고 있는 동안 “원수”에 의해 뿌려진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마 13:25). 마찬가지로, 진정한 복음 전도가 교회의 목적이지만 거기에는 사단이 회심하지 않은 자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모조 복음 전도가 있다는 것도 알아야만 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사단의 가장 큰 목적은 사람들을 교회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더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다. 교회의 표준이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낮아질 때마다 복음의 대 원수가 우리 안에서 그 능력을 행사하도록 초청하는 것이며, 이것은 거짓 복음 전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인들을 받아들이는 일에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단이 거짓 형제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그럴 듯한 계획들을 세우기 때문이며 그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 더욱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 전도, 308.

만일 사단이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서 교회를 장악하려 든다면 우리는 그가 그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회심한 영혼들을 끌어들이는데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단순히 숫자만 늘리는 식의 전도는 원치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진심으로 회심한 모든 개인들을 받아들이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공중 봉사 기간 동안 당신을 따르는 자들의 숫자를 늘리려 하시는 대신에 숫자를 감하려고 종종 애쓰셨다. 그분은 그분을 따르는 많은 자들이 진정으로 회심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과,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실제로는 당신의 사업을 강화시키기 보다는 약화시킬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당신의 많은 제자들이 돌아서는 원인이 될 시험하는 진리를 제시하였을 때에 그는 당신의 말씀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을 아셨다. 그러나 그는 성취하실 자비의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 시대의 소망 2권 147.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단지 반만 회심한 미지근한 자들 수천 명보다 진정으로 회심한 소수의 사람들이 더 효과적으로 일을 수행할 것을 아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노력의 결과로, 명목상으로 공언하거나 전적으로 회심하지 않는 60명을 갖게 되는 것보다 진리에 진정으로 회심한 6명을 갖게 되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 … 목사들은 진리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날마다 자아 희생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고, 품어 왔던 많은 것들이 복종되어야 하며, 많은 의무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행해야 함을 가르쳐야 한다. 사업적 관심사와, 사교적인 애정, 안락, 영예, 명성, 요컨대, 모든 것은 더 우선적인 그리스도의 최고의 요구에 종속되어야 한다.” 교회 증언 4권, 317.

우리는 영혼들을 사랑하는 까닭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지와 친절을 발휘해야만 하지만 진리의 표준을 결코 낮추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높여야만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때문에 진리의 표준을 낮출 수는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물론, 우리는 그들에게 모든 진리를 단번에 제시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람들이 장신구를 차고 교회에 오는 것을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으나 장신구를 찬 채로 침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매일 헌신의 생애를 사는 것, 올바른 식사법과 복장, 그리스도인 청지기 직분, 예언의 신에 관한 이해와 신조, 그리고 하나님의 남은 교회의 운동의 모든 특징적인 국면들에 관해서 한번에 한 계단씩 가르침 받아야 하며, 자라나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한번에 한 계단씩 가르쳐야 하지만, 그것들은 침례 후원자들이 침례를 받기 전에 철저하게 가르쳐져서 실천에 옮겨져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게 조심한다고 해서 완만한 성장 결과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나는 헝가리를 방문하는 동안 늘 궁금한 것이 있었다. 거기에는 믿음 때문에 제적당하여 이제는 “소 위원회(samall committee)” 교회들 중 한 부분에 소속된 일단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있었는데, 그 교회들에서는 침례 받기 위한 수준이 극히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교회는 생동력있고, 젊은이들과 새로운 개심자들이 가득하였다. 나는 그들이 침례 받기 전 얼마나 오랫동안 공부하는지를 물었다. 1년에서 2년이란 말을 나는 듣게 되었다. 다른 주유 주의적인 재림교회들이 회심자들에게 그같은 열매를 요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쪼그라들고 젊은이들을 잃고 있는 듯이 보이는 동안에, 그 교회들은 강하게 자라고 있다. “우리의 수효가 지금의 절반일지라도 그들이 모두 헌신한 일꾼들일 것 같으면, 세상을 흔들 능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교회 증언 3권, 영문 405.

그러나 만일 침례 받기 전에 완전한 회심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많은 회심자를 불러들이지 않고, 심지어는 반대와 조소를 불러들일지라도 그 계획이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계획이다.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벧전 2:7,8.

예수님께서는 안일을 사랑하는 백 명의 사람들에게 반대를 받는 단 한 명의 진지하고도 참으로 구원받은 영혼을 원하실 것이다. 오직 거짓 희망을 품으면서 자신들이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며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다가 뒤늦게 자신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될 수백 명의 사람들을 갖는 것보다 더 기꺼워하실 것이다. 참으로 회심한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그러나 명목상으로 회심한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것은 교회에게 저주가 된다. 예수님께서 만일 진리의 표준을 낮추셨다면 그분께서는 수많은 회심자들을 얻을 수 있으셨다. 젊은 부자 청년 법관이 예수님께 왔을 때 그는 표준이 너무 높은 것을 발견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유다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 유망한 젊은이를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여야 되었었다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 젊은이는 계명을 지키는 자였고, 기꺼이 주님을 따르고자 했었다. 분명, 그가 그의 생애에서 필요로 하는 변화는 제자가 된 후에 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 법관에게 제자가 되는 조건을 제시하셨을 때에 유다는 불쾌하게 여겼다. 그는 예수께서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법관과 같은 사람들이 신자에 가담할 수만 있다면 저들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유지함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시대의 소망 3권, 231.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유다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죄를 품고 있으면서 그분과 연합하는 것이 마음을 강퍅하게만 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것이 바로 유다 자신이 한 경험이었다. 유다는 “크신 선생을 사랑하였으며 그와 함께 있기를 간절히 사모하였다. 그는 품성과 생애에 있어서 변화함을 받고자 하였으며 자기 자신을 예수와 연합함으로 이를 경험코자 희망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복종시키는 지점에 이르지 않았다.” 상동 226.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헌신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그분께서 설교하시는 가장 위대한 설교들을 들었었다. 그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그분과 동참하였다. 그는 구원 받기를 원하였으나 굴복하지는 않았다. 그가 예수님과 더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그 마음이 더 강퍅해졌는데, 마침내 주님을 배반하기까지 강퍅해졌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되지 못한 자신들의 마음을 그저 교회와 연관을 지음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희망하는 모든 자들의 경우도 그러할 것이다. 솔로몬의 이방인 아내 중 하나가 회심한 것처럼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 온 후에 회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된 회심의 전적인 굴복이 결혼 전에 환전한 서약이 먼저 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침례 받기 전에 있어야 한다. 침례 받을 때에 그 사람의 생애에 성장과 성숙이 필요 되는 많은 영역이 있을지 모르나 굴복은 완전한 것이어야 하며 그 사람의 생애의 열매로 확증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침례 받기 위해 침례 요한에게 왔을 때 그는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였다(마 3:8). “마음이 새로워지지 않고 생애가 개혁되지 않은 교인들의 교회 가담은 교회가 약해지는 근원이다. 이 사실이 흔히 무시된다. 어떤 목사들과 교회들은 교인들이 증가되는 것을 너무도 바라기 때문에 비 그리스도인적 습관과 행실을 정죄하는 성실한 증언을 하지 않는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들이 이름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고 있으면서 행동으로는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들은 사단의 백성이었지만, 지금부터는 그리스도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생애는 그들의 주인이 바뀐 것을 증거해야 한다.

일반 대중의 견해는 그리스도교의 공언에 호감을 갖는다. 경건의 모양을 옷 입고 교회의 명부에 이름을 등록하는 데는 극기나 자아 희생이 별반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일없이 교회에 소속된다. 이런 점에서 사단은 승리한다. 이런 회심자들은 사단의 가장 효과적인 도구이다. 그들은 다른 영혼들을 유혹하는 자가 된다. 그들은 부주의한 자들을 멸망으로 유혹하는 거짓된 빛이다. 그리스도인의 길을 속인(俗人)들을 위하여 넓고 유쾌하게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칠고 좁은 길을 평탄하게 하시거나 넓히지 않으셨다. 우리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걸어가신 것과 동일한 길-겸손과 극기와 희생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교회 증언 5권, 영문 172.

극단주의

우리가 진리의 표준을 결코 낮춰서는 안 되는 반면에, 우리는 종교를 행위에 의존하는 것으로 만들어서도 절대로 안 된다. 행위는 침례 전에 드러나게 될 것이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만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다. 죄인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와서 자신의 마음을 자신을 구속하기 위해 생명을 버리신 사랑의 구세주께 굴복시켜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의 품성 계발을 위해 제시해 주시는 모든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우리의 현재와 영원의 기쁨을 위해 제시하신 것이다. 또한 그분은 새로 태어남에 수반되는 우리 품성의 변화에 있어서 변화를 가능케 하는 능력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자기 중심의 종교인 행위 중심의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며, 또한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어떤 자들은 거짓된 시험거리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 들였으며 저들 자신의 개인적인 이념과 의향들을 하나의 표준으로 삼아가지고 신자들의 교제 관계에 대한 작은 문제들을 크게 확대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비판의 정신과 트집 잡는 버릇과 분열의 사상이 교회 안에 침투하게 되어 큰 해를 끼쳤다. 그렇게 할 때에 안식일을 지키는 재림 신자들은 한 떼의 광신자들이며 극단주의자들이라는 인상을 불신자들에게 주었고 저들의 특이한 믿음이 저들 자신을 오히려 불친절하며 무례하고 품성 면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비 그리스도인적 특성을 갖게 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소수의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행위로 말미암아 대중에게 미칠 진리의 감화력을 막아버렸다. 어떤 자들은 의복 문제를 가장 중요한 일처럼 들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이 입는 옷의 모양을 가지고 비판하며 저들의 견해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항상 서슴지 않고 정죄하였다. 또 어떤 소수의 무리들은 사진들을 정죄하고 나서며 둘째 계명이 금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런 종류의 것은 무엇이든지 없이해야 한다고 권고하였다. …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이끌어가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들을 마치 유대인들이 안식일 준수를 까다롭게 한 것처럼 성가신 짐이 되게 하는 양심이 있다는 말이다.” 가려뽑은 기별 2권, 영문 318. 침례 받기 전에 열매가 있어야만 하지만 그 열매들은 주님께로부터 온 열매들이어야지 우리 자신이 고안한 열매들이어서는 안 된다.

거짓 복음 전도의 결과들

교회가 숫자에 그 강조점을 두기 시작하고, 숫자에 중점을 둔 프로그램들을 계발하며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할 당시에 그랬던 것처럼 숫자를 크게 과시하기 시작할 때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이 거짓 표준을 중점으로 삼고 그에 따라 이 세상의 사업가가 자기 회사의 경제 상황을 분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계 숫자를 늘이려 애쓰기 시작한다. 세상의 사업에서의 이익과 같이 침례 숫자가 발전의 표준이 된다. 회심하지 않은 자들은 그 시스템이 최고에 달하도록 정책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교회들은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로 차게 된다. 그러한 결과는 불가피한 것이다. 이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은 자신들을 즐겁게 할 교회 직원들과 사람들을 뽑기 시작한다. 그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신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너무나 자주 곧바른 기별을 전하는 설교자는 이러한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에 의해 거절 당하는 바 된다. 그들이 대회에 그런 설교자들에 대한 불평을 말하면 충실한 목사들은 교회에 소동을 가져왔다는 비난을 받게 되며,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을 계속 즐겁게 하는 자들이 칭송과 인기를 얻고 있는 반면에 진리와 원칙에 충실한 목사들은 어느새 작은 무명의 교회들로 좌천된(?)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의 영향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자녀들은 재림교회의 학교들에 보내진다. 그에 따라 학교들은 이런 학생들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교육 프로그램을 재편성한다. 남녀가 함께하는 오락과 스포츠, 그리고 낮춰진 표준들이 허용이 되고, 심지어는 권장되기까지 한다. 농담이나 허튼 말이 신중한 그리스도인의 품행의 자리를 대신한다. 사실, 이같은 타락하는 풍조는 영적으로 신중한 학생이 자신이 완전히 잘못된 자리에 왔다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이런 학생들은 여러 가지 전공들을 선택한다. 어떤 학생들은 목사나 교사나 의료요원이 되어 교회 안의 여러 방면에 고용이 되어 교회의 미지근한 상태는 뿌리를 내리고 고질화되게 된다. 제 2대째 재림교인들인 이런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과 교사들은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뜨뜻미지근한 종교, 그들이 그들의 교회와 교육받은 과정에서 보았던 종교 이외의 어떤 다른 종류의 종교는 결코 알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뜨뜻미지근한 것인지 조차도 알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들이 부요하여 영적인 것들이 증가되었다고 믿는다. 이제 그들은 교회의 더 높은 직원을 뽑기 시작하고 그들이 동일하게 가졌던 결점을 지닌 새로운 신자들을 이끌어 들이기 시작한다. 또한 이런 뜨뜻미지근한 교수들이 증가할 때 예언의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졌고 교회가 높은 경험의 수준까지 향상되기를 보기 원하는 자들은 교회에 대해서 비판적이라 생각되어지며, 거절하는 바 된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교회 안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우려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을 나는 보았다.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네냐’고 물었을 때처럼 그들은 명백한 증언을 하는 자들을 혐의와 의심의 눈길로 쳐다본다. 그리고는 아합처럼 질책 받아야 마땅한 잘못을 간과해 버린다.” 영적 선물 2권, 284.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한 한 기별을 가지고 계신다(계 3:14, 22).

그러나 그 기별과 그 기별을 전하는 자들은 이들 뜨뜻미지근한 목자들에 의해서 거절되는 바 될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능력이 주어진 개혁을 위한 기별에서 그들은 “오직 그들의 눈 먼 상태에서 자신들이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것과, 그들의 두려움을 자아낼 것들만 보며, 그것에 저항하기로 자신들을 무장할 것이다.” 리뷰 앤 헤랄드 2권, 454. 그런 식으로 “사단의 종들은 승리를 얻는 한편, 책망해 주는 하나님의 성령은 발아래 짓밟힌다. (교회 증언 5권 210, 211; 77, 209, 211. 참고). 이렇게 하여 사단은 교회를 장악할 틈을 찾는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의 시작은 숫자를 늘이는데 중점을 두는 데서 시작된 것이다. “목회 사업에 종사하는 우리 형제들은 주님께서 지시하는 방법을 따라 저의 사업을 수행하지 않음으로 결정적인 실패를 하고 있다. 저들은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완전하게 이끌지 못하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체험이나 그리스도인 성품을 조성하는 참된 지식에 대하여 경험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이 거룩한 의식에 참여할 자격이 없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 집착하여 있는 상태에서 침례를 받는다. 저들은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였고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복음 전도 313.

그런 식으로 “사단은 거짓 형제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들(여서)… 그런 자들을 통해 더욱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약화시킬 수 있다.” 상동 308.

“원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손에서부터 하나님의 표준을 취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자신의 표준을 그 자리에 놓으나 그들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한다. … 오직 교회가 순결하고 비이기적인 교인들로 구성될 때에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교회 장부에 이름들을 첨가하는 일에 너무나도 성급하게 일이 처리됐다. 교회에 가입한 어떤 이들의 품성에서 심각한 결점들이 보인다. 그들을 허용한 자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먼저 그들을 교회 안에 이끌어 들인 다음에 그들을 개혁시킬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고 계시는 결정적인 증거를 그들이 보일 때까지 교회 관계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들과 절대 연합시키지 말라.” “그 이름이 교회 장부에 등록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그들은 자신들을 이기심과 죄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아왔다. 그들은 자아 부정과 자아 희생으로 가득 찬 그리스도의 생애를 공부하는데 실패해 왔다.” 리뷰 앤 헤랄드 4권, 301.

“우리에게 현저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은 우리의 수효나 부가 아니라 사업에 대한 헌신, 도덕적 용기, 영혼에 대한 열렬한 사랑, 지칠 줄 모르고 쇠하지 않는 열심이다.” 교회증언 3권, 404.

지금이 바로 변화를 위한 때

“만일 그대가 인기를 얻고 숫자를 늘이기 위해서 표준을 낮추고 이러한 숫자의 증가가 그대가 기뻐할 기쁨의 근원으로 삼는다면 그대는 굉장히 눈이 먼 것이다. 만일 숫자가 성공의 증거였다면 사단은 그 면에 있어서 탁월한 자이다. 이는 이 세상의 대다수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번영에 대한 시금석은… 바로 도덕적 능력의 정도이다. 기쁨과 감사의 근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교회들을 구성하고 있는 백성들의 덕과 지성과 경건이지 그 숫자가 아니다.” 온 세상이 회심한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여기실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명의 회심하지 않은 세속적인 사람도 교회 장부에 그의 이름이 오르는 것을 금하신다. 숫자를 강조하는 이러한 정책이 교회를 그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분과 분리시켜왔다. “너무나 자주 설교되는 부드러운 설교들은 지속적인 인상을 주지 않는다. 나팔은 확실한 소리를 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음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하고도 날카로운 진리로 자르지 않는다….그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기별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아 방종과 안일을 사랑하는 정신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영예와 영혼들의 구원을 첫째로 구한다. 이 사랑을 간직한 자들은 명백하게 말한 것 때문에 불쾌한 결과가 오는 것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진리를 감추지 않을 것이다. 영혼들이 위험 가운데 있을 때에 그들은 자기를 생각지 한고 자신들에게 주신 말을 말할 것이며, 변명하거나 악을 꾸며서 말하기를 거절할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힘과 용기와 모든 감화력이 필요 되는 위기의 때에 옳은 것을 위해서 굳게 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사용할 수 없으시다.” 리뷰 앤 헤랄드 6권, 358.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진정한 복음전도의 정신을 부흥시키시어 모든 교인들이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성령에 의해서 사용되며, 단지 숫자가 아닌 진정한 회심이 성공의 증거가 되는 참된 부흥이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