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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의복 개혁

저자: 샐리 혼버거

    나는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어떠한 환경가운데서도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을 나타내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나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상충될 때 그분께 나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내가 무엇을 입을까?” 또는 “나는 어떻게 입어야 되는가?” 라고 말하면서 너무 많은 신경과 노력을 나의 외향적인 것에 소모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마태복음 6:31-33.

    좀더 엄숙하고 중요한 문제는 “나는 그리스도를 옷 입고 있는가?”에 놓여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자아를 섬기는 일로부터 나를 변화시키고 억제하고 구원토록 하기 위해서 나는 날마다 그리스도를 옷 입으며, 내 마음의 보좌에 그분의 임재하심을 허용하고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그리스도의 믿음과 덕의 필수적인 속옷을 입히시도록 자아를 굴복시키는 일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가 아닌가? (베드로후서1:5) 우리가 이러한 원칙들을 우리 각자의 삶에 질서있게 적용시켜 간다면, 그 원칙들은 우리로 하여금 좀더 완전한 의복인 그리스도의 의의 외투를 받도록 준비시킬 것인데, 이 옷은 죗됨과 자아 숭배로부터 하나님과 거룩함을 존중하는 변화된 성품과 기질을 나타낸다. 이러한 성품의 특성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나야 하며,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행로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나타나야 하고, 모든 이기심으로부터 나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의의 옷을 계속 유지하는 데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기울일 수 있는 가장 큰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런 실패없이 그 옷을 굳게 지키는 일을 요구하며, 이 일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온 세상 앞에 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벌거숭이로 내보이지 않도록 그것을 계속적으로 입는 경험을 해야 한다.

우리 모두 참된 의복 개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영적인 교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인의 정숙함 이란?

하나님의 뜻과 나의 이기적인 의지가 일치하지 않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의지에 “Yes”(네) 라고 대답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힘을 다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게 될지라도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No”(안돼)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옷 입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어떠한 옷이라도 치워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단호함과 결정적인 자기 억제는 어디서부터 나올 수 있을까? 그것은 매 아침 마다 예수님의 발 아래에서 보내는 거룩한 시간과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하에서야 비로소 그분께서는 나의 이기적인 옷을 벗기시고 당신의 거룩한 성정으로 나를 옷 입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옷을 제대로 잘입기 위해서 부모에게 협력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옷 입는 과정에서 그분과 협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가 옷을 입을 때 그의 부모의 손에 의지하는 것처럼,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올바른 그리스도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께 실질적으로 의존해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안으로부터 밖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알고 있다. 속 마음의 정숙함은 진실된 외모의 정숙함을 향상시킨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일을 배워야 하는데, 그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의복에 관한 선택권을 그분의 지배 아래로 놓을 수 있게 될 것이며, 하늘의 정숙함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의복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는 것까지 그분의 뜻대로 하게 될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

내가 자아를 치워버리고 그리스도의 의지, 힘, 지혜, 비 이기적임, 순결함 그리고 순종을 받아들이기로 선택했을 때, 나의 수치스런 불의는 벗겨지고 참된 정숙함이 입혀지게 된다. 그런데 사단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의의 옷을 위조한 모조품은 무엇일까? 물론 그것은 무화과 잎이다. 인간이 만든 옷인 무화과 잎은 불순종을 지지하는 논쟁과 변명을 의미한다. (성경주석, 1권 1084를 볼것) 사단의 모조품인 무화과 잎들은 나의 불순종에 대해서 변명해주며, 다른 사람과 환경 때문이라고 핑계해준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수치스런 벌거벗음을 부인하게 된다. 그것들은 자아를 위한 옷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아담과 하와가 무화과 잎들을 그들의 벌거벗음을 가리기 위한 대용품으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불순종을 변명하고 부인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그들이 불순종하여 범죄했을 때, 그들의 삶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빛의 옷과 분리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돼”라고 말씀하실 것을 두려워하여 아예 그분과 의논하지도 않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며 의복을 입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위험스럽고, 자신이 고안해낸 자기 기만적인 무화과 잎을 입기 보다는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옷 입히시도록 원하고 있는가? (시대의 소망, 영문 581-584를 볼것) 그렇다면 먼저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기울여서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로 선택해야 하며, 우리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옷을 벗기시고 당신의 옷을 입히시는 그분의 손에 협력해야 될 필요성을 느껴야 한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갚진 것이니라.” 벧전 3:3-4

    좀더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무화과 잎은 나로 하여금 나는 나의 의복 스타일을 “개혁하기 싫어”라고 말하게 하거나, 어떤 핑계를 대면서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하게 한다. 이러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우리의 현재의 느낌과 취향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기로 결정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저항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감각과 취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구세주께 요청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의복 스타일에서 생기는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옷 입고자 하는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욕망을 넣어주실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를 입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 것이며, 우리 생애의 모든 것을 그분께 완전히 굴복시키기 위해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된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의복에 있어서 더 높은 수준의 정숙함을 요구하셨던 때를 기억한다. 첫번째 단계로 그분께서는 좀더 여성답게 옷을 입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내게 불어 넣어 주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는 치워버릴 필요가 있는 옷들을 내게 보여주시기 시작하셨다. 그분께서는 나의 바지, 짧은 치마, 앞가슴이 깊이 파인 옷, 몸에 달라붙는 옷, 내가 아끼던 투피스 수영복 그리고 조금 나중에는 다른 부적당하고 몸매가 드러나는 옷들을 내가 치워버리길 원하셨다. 나의 양심에서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그리고 여러가지 감정들 사이에 치열한 투쟁과 전쟁이 생겼다. 즉, 치워버리고자 하는 마음과 아끼던 것을 붙잡고 싶어하는 마음 사이에서. 자신과의 계속되는 투쟁은 정말 치열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도 나에게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으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나에게 이러한 옷들이 경건함을 공언하는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에게 적당하지 않은 이유를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옷들은 내 주위에 있는 남자나 여자들에게 모두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될 것을 내게 보여 주셨다. 또한 그러한 옷들은 주위의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스타일의 옷을 계속해서 입도록 조장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있어선 질투내지 시기를 일으키게 할 수 있고 남자들에게 있어선 저열한 욕구를 자극할 수 있다. 내가 그분을 허용하기만 한다면, 그분께서는 나에게 이러한 옷들에 대한 민감함을 내게 주시길 원하셨으며, 옷에 대한 나의 취향을 변화시키고자 하셨다. 나는 더 이상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주의와 관심을 이끌기 위한 도구가 되기 싫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옷들이 얼마나 타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대한 충분한 증거들을 내게 보여 주셨다. 그분께서는 내가 요란한 블라우스와 바지를 입을 때마다 나에게 진리를 일깨워 주셨다. 꽤 빠른 기간내에 나는 나의 권리를 포기했으며, 하나님의 방법이 나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최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만족감과 평화로 내게 옷 입히셨다. 우리가 그분께 협력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

우리는 의복을 개혁하는데 있어서 또 다른 극단, 즉 자루같이 불룩하거나, 단정치 않거나, 매력적이지 못한 스타일의 의복을 입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러한 옷들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할 것이다. 정숙함과 순결함을 향한 변화 속에는 취향과 질서와 적당하게 몸에 맞는 차림새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이점에 관해서 교회증언, 1권 영문 464 와 재림신도의 가정, 영문 254를 읽어보라.

말씀에 일치하는 의복

“그들 의복의 모든 점들을 안내하고 지침하는 정확한 규칙으로서의 어떠한 스타일의 의복도 내게 주어진바 되지 않았다.” 과거의 건강개혁 스타일의 의복이 정확하고 유일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안내하는 기본적인 원칙에 대해서 화잇 부인에 의해 주어진 불변의 교회증언이 있다. “우리의 자매들로 하여금 의복을 검소하게 입도록 할 것이며, 좋은 재료와 질기고 정숙하며 이 시대에 적당한 의복을 준비하라. 옷에 관한 문제가 마음을 채우지 않도록 하라.” 교회증언, 1권 718.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다르게 옷을 입음으로써 스스로를 유별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고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의복을 정숙하고 건전하게 입는데 관한 의무감을 따름으로 그들이 유행에 뒤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을지라도 그들은 세상과 같아지기 위하여 그들의 옷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에는, 온 세상이 그들과 다를지라도 그들은 바르게 설 수 있는 고상한 자립성과 도덕적 용기를 나타내야 한다. 만일, 세상이 성경과 일치되게 점잖고 편리하고 건전한 모양의 의복을 소개한다면, 그와 같은 스타일의 의복을 입는 것이 하나님이나 세상과의 관계를 바꾸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들의 의복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게 만들어야 한다. 그들은 극단을 피해야 한다. 그들은 칭찬이나 비난에 개의치 말고, 겸손하게 솔직한 태도를 취하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올바른 길을 고수해야 한다” 교회증언, 1권 458.

우리가 개인적인 연구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는 뜻을 알고자 하는 신실한 자들을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다. 예를 들면 그분께서는 치마의 길이에 대해서도 우리로 하여금 균형을 지킬 것을 바라고 계신다. “내가 본 장면들은 현재 유행하고 있는 잘못된 것들, 즉 땅 위를 끌고 다닐만큼 지나치게 긴 드래스와 무릎까지 올라온 지나치게 짧은 치마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상동, 464. 나는 하늘이 인정하는 적당한 의복에 대하여 여러분들이 가질 수 있는 의문점들을 스스로 연구하여 해결할 것을 권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도와주실 것이다.

기억하라. 만일 진실로 내가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었다면, 나의 외적인 의복은 자존심과 과시로써 빛나지 않게 된다는 사실을. 오히려 정숙함, 정결함, 단정함, 질서 정연함, 취향에 맞음 그리고 단순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반사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은 성경에 이미 계시되어 있는 빛들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의복에 관한 나의 취향을 포함한 인생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한다. 내가 그분의 뜻에 굴복했을 때, 그분께서는 내 안에 역사하셔서 나의 잘못된 취향을 변화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하나님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일은 시대의 유행이나 관습, 전통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에 기초할 것을 요구한다.

여성과 바지

신명기 22:5에 말씀하시길,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 이것은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명백한 진리이다. 그러나 내가 바지를 버리고 여성적인 치마를 입었을 때, 나와 가깝게 지내던 그리스도인 자매들 중에서 적지않은 적의와 동요가 일어났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입도록 권하거나 강요하지 않았으며, 조용히 내 자신이 하나님을 따라갔다. 이 성경절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여러번의 논쟁과 변명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내 마음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셨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같단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더 깊은 연구와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나는 내가 가는 이 길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됨을 깨달았으며, 인간의 논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인, “주께서 가라사대”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여성들이 그들의 의상과 외모에 있어서 남성들의 그것을 따라가고 있는데, 특히 여성들의 의상은 남자들의 의복과 흡사한 유행이 나날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증한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교회증언, 1권 421.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딤전 2:9.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적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청바지나 몸에 꼭 끼는 바지를 입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또한 단정치 못하고 펑퍼짐한 바지는 어떨까? 그러한 옷들이 단정함과 순결함을 나타내는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바지는 절대 입어서는 안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자랄 수 있는 여유를 서로에게 허용하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의 자매들이 인간에게서가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권면을 구할 것을 권고한다 배우기 위해서 마음을 다하여 연구하라. 그리고 자신을 위해 변명하지 말고 우리와 같은 개념을 가지지 않은 자매들을 정죄하지 말라.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 바를 보여주라.

정죄하거나 서로에게 불필요한 논쟁을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오늘 우리의 마음과 삶에 그분께서 역사하시도록 하자. 어떤 자매가 특별한 경우, 즉 말타기, 사다리 오르기 등과 같은 경우에는 정숙하고 몸에 꼭 끼이지 않는 바지를 입어도 된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자매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종교적 자유를 인정해야 되지 않겠는가? 물론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외적인 것들이 그들 종교의 총체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만 얻을 수 있는 참된 예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영문 196. 또한 우리의 외적인 요소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참된 증거가 된다는 사실도 기억하도록 하자.

유행

    “유행이 아닌 때에 그것들 중의 몇가지가 온당치 못하다는 말을 듣겠는가? 그리고 몇가지가 고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여자들에게 부적당한 것으로 판명이 될 것인가?” 치료봉사, 290.

사랑하는 친구들이시여, 우리는 가슴을 노출시키고, 몸매를 드러내는 치마와 같은 유행뿐만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의복에서 너무도 공공연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말하고자 한다. 사단의 간계가 진정 무엇인지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사단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를 파괴시키기 위해서 유행을 성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좀더 가깝게 들여다 보자. 새로 산 옷에 맞는 색깔의 구두를 고르기 위해서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세일도 아닌 때에 판매 광고 잡지를 뒤적이는 많은 시간의 낭비는 어떤가? 이런 것들은 우리의 시간과 재정을 잘못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시간과 재정을 사용하라고 분부하셨는가?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목적과 의도를 알 수 있지 않는가? 그는 분명 세상을 사로잡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경고받을 필요가 있다. 유행이 우리의 시간과 재산을 점령하고 있으며 갉아먹고 있다.

    유행의 변화는 우리로 하여금 진정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것을 긁어 모으도록 우리를 자극시킨다. 더 이상 유행에 따라서 살지 말고, 원칙에 따라서 살 것을 선택하자. 회개하고 주 앞에 정직하게 기도하자. “주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저는 저의 잘못을 알겠습니다. 오늘 이후로 나의 옷장이 주님의 성품을 반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저에게 잘못된 것들을 보여주시고 당신을 따르고 신뢰하도록 가르쳐 주세요. 저는 그리스도를 옷 입기로 선택합니다. 먼저 저의 속 마음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원칙이 저를 지배하도록 해주세요. 또한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저의 외적인 면모도 당신을 반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이와 같은 회개와 헌신을 통하여, 우리의 옷장은 우리 속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시는 거룩한 자기 부정의 모습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러한 옷장은 어떻게 보일까? 잘 어울리는 몇가지의 색깔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을 잘 구별하는 조심스런 계획이 각 계절들을 위한 옷들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자신을 부인한 결과들이 옷장 안을 장식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단순하고 정숙한 옷들은 3년이 지나도 여전히 입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미국 사람들은 그들의 의복을 닳아서 입지 못할 때까지 입지 않는다. 옷에 대해서 쉽게 싫증을 내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 되었다. 왜냐하면 옷이 너무 많기 때문에. 나는 나의 옷장을 꽉 채우는 데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해왔다. 아, 그것이 지금에 와서는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지! 나는 결코 만족해 본 적이 없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원칙대로 계속 살았다면, 우리는 좀더 적은 수입을 가지고 좀더 적은 집에서 살 수도 있었을텐데 … 일단 이러한 정숙한 옷장이 정리가 되면, 이제 필요한 것은 옷이 헤어졌을 때 정숙한 옷으로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은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

    이제 나는 그분께서 어떻게 나를 구원하였는지를 명상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에 대한 이러한 현명한 사용은 나의 마음을 자신을 섬기는 것으로부터 거룩함으로 옮겨갔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안과 밖으로 나에게 그리스도를 옷 입히시고 계신다. 그분의 온유하고 조용한 정신이야말로 오늘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모든 아름다움의 창시자시므로 다만 우리가 그분의 이상에 일치될 때만 진정한 미의 표준에 접근해 갈 수 있다.” 치료봉사, 267. 그리스도께서 내재하시면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과 의복에 있어서 아름답게 된다. “감사합니다 주님, 저를 유행의 고된 모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셔서.”

    사랑하는 친구들이시여,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의 중심으로 모시도록 하자.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우리가 입고 말하고 행하는 것에 의해서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표현될 수 있도록…. 이때에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생애 속에 구세주가 계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이 주는 의복의 유행과 관습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선택의 권리를 주시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