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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들인 태풍 (Reaping The Whirlwind)

 

5장 듣기 좋은 말만 들을 때가 아님

    저는 진리를 허물어 버리려는 경향이 점점 거세되어 가는 것을 몹시 염려하고 있습니다. 재림교회의 어떤 전도자들은 청중들을 실망시킬까 두려워 더 이상 짐승의 표에 대해 설교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대항하는 이같은 종교연합적인 분위기와 태도는 진리를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많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그 기만적인 영향력을 뻗쳐 왔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결전에 대한 이 어마어마한 문제를 보면서 침묵을 지킬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지혜가 필요 되지만 기별은 반드시 전파되어야만 합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빙빙 돌려서 말해질 수 없는 언어로 선포된 진리를 들음으로 기만 당하지 않아야만 합니다. 종종 우리가 더 많은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가 옳은 일을 위해 서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을 너무나 다듬고 다듬어서 우리의 태도에 있어서도 너무 다듬어지고 희미하게 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이에 대한 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믿습니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셋째 천사의 기별을 전파하는 일이 묶여 있도록 사태를 꾸미고 있다. 우리는 사단의 계획과 방법을 경계하여야 한다. 진리의 음성을 낮추는 일이나 이 때를 위한 기별을 소리를 죽여서 전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세 째 천사의 기별은 강화되어야 하고 확증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 18장은 어떤 틀에 박힌 방법보다도 담대하고 능력 있게 진리를 증거해야 할 중요성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그 동안 세 째 천사의 기별을 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점을 다루지 못하고 지엽적인 문제만을 다루는 일이 비일 비재 하였다. 기별을 전할 때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만큼 분명하고 뚜렷하게 증거하지 못하였다.” (복음전도,228)

    “사람들은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과 주일 중 첫 째 날을 지키는 자들과의 차이가 별반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다 쓸 것이 다.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단의 사람들이 내 앞에 나타났는데, 그들은 우리를 독특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는 깃발이나 표시가 지나치게 뚜렷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논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기관 들이 성공을 거두기 위한 최선의 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증언보감 2권. 436).

    우리가 너무 기관만을 생각한 나머지 우리의 위신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위험이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일 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증거를 저는 제시할 수 있습니다. Amazing Facts 방송의 제의가 4곳의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대학 방송국에 의해 거절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Amazing Facts가 마지막 경고의 기별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단도직입적이라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단지 두 방송국에서 만이 매일 기별로 가득 찬 방송을 내보내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제 의한 계약을 취소한 대학방송국 경영인들의 회답을 아래에 적어 봅니다.

    “Amazing Facts의 방송제의를 거절하기로 한 결정의 배후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만 그 주된 이유는 듣기 좋은 것을 내보내는 우리의 방침과 관련시켜 볼 때 Amazing Facts의 프로그램을 맞지 않는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들은 Amazing Facts의 접근방식이 비교적 간접적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안식일과 일 요일 문제에 있어서 너무나 강력한 교리적 강조점을 두어서 취급하는 것은 우리가 이곳 ______ 에서 하는 사업의 동기와 방침에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로서는 우리 방송국의 매체를 통하여 우리의 이웃들과 친구들이 일평생 지켜오던 위치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이 지혜로운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_______ 방송국에서 Amazing Facts의 프로그램을 내보낼 수 없습니다. 저는 Amazing Facts의 프로그램이 많은 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확신하지만 우리가 하려고 하는 접촉의 방식에는 들어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청중들을 접촉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Amazing Facts의 프로그램은 종교적인 성격에 있어서 너무 강합니다.”

    분명 이러한 편지들은 우리가 긴급한 마지막 경고의 기별을 전하는데 있어서 부드러운 태도를 취하지 말라고 경고한 화잇 자매의 말이 옳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듣기 좋은 것”만을 들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때를 위한 진리를 전파하도록 우리에게 시설들을 제공하셨는데 우리는 그 시설들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방송국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시설들을 사용하도록 간청하지만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는 방송국들에서는 어떤 값을 주고서라도 방송 시간을 살 수 없다는 말을 Amazing Facts는 듣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지금 우리의 위치가 알려지도록 하지 않는다면 사형선고가 우리 앞에 닥칠 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침례 요한이 엘리야의 사명을 이룬 것에 대해 말하면서 화잇 자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도 솔직히 자기의 의견을 토로하려 하면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할 필요가 무엇인가? ‘라고 말할 사람이 많다. 또한 무엇 때문에 침례 요한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과도한 책망을 하였을까? 또 헤롯에게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사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함으로써 헤로디아의 노를 살 필요가 무엇인가? 그가 그와 같이 솔직하게 타인의 과오를 지적하기 때문에 도리어 자기의 목숨을 빼앗기게 되지 않았는가? 헤로디아의 분노를 일으키지 않고는 될 수 없었는가?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다.(복음사역자,151).

    경고의 기별이 큰 외침으로 확산되는, 다가오는 위기의 때를 위해 우리는 다음의 약속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대의 위기의 때에 엘리야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란 방편을 일으키셔서, 침묵시킬 수 없는 기별을 전하게 하실 것이다…엄중한 견책의 음성이 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임명한 사람들은 교회와 세상과의 연합을 담대히 탄핵할 것이다.” (선지자와 왕, 177,178)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교회와 세상과의 거룩하지 못한 연합에 대해 경고 받을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미 발견한 바 있는 “신신학 “의 오류들이 그러한 거룩하지 못한 연합을 조장하는데 얼마나 이바지 해 왔습니까! 재림교회의 어떤 목사님들은 교리적 문제들, 개혁적인 기별 들이나 성화에 관한 주제들이 너무 거칠고 사랑스럽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방종들을 멀리하도록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것은 “너무 행위에만 의존한다”는 말을 듣기 쉽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알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경고하기를 두려워하는 파수꾼들에 대해 말씀하실 어떤 것을 가지고 계십니까?

    “죄를 경한 것으로 여기고, 죄인인 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도록 하는, 무엇이든지 다 좋다는 식의 종교는 죄인으로 그가 계속 죄를 지며 죄 가운데 있는 동안이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으로 믿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진리를 믿노라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방식이다…세상과, 세상의 관습과, 세상의 행위와, 세상의 유행들에서 떠나도록 모든 신경과 정신과 근육을 바짝 잡아 죄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 (가려 3권. 155)

    성령님의 직접적인 감화 아래서 화잇 자매님은 수준을 낮추는 문제 자체에 관해서 가장 강력한 권면과 경고를 수 백 페이지에 기록하였습니다. 그녀는 어떤 이들이 그녀가 한 강력한 말로 낙심하게 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E 형제는 내가 의무에 대해서 적게 말하고 예수님의 사랑에 관해서 많이 말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제언한다. 그러나 나는 주의 성령님께서 나를 감동시키시는 대로 말하고 싶다. 주님께서는 이 백성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가장 잘 아신다. 나는 오전 동안 이사야 58장을 기초로 기별을 전하였다. 나는 절대 빙빙 돌려가며 말하지 않았다.” (가려 3권. 64)

    “교회는 거듭 경고에 경고를 받아왔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와 위험들은 명백하게 드러난 바 되어왔다. 그러나 세속적인 요소가 그들에게 너무 강력하게 작용된 것이 판명되었다. 영혼을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게 하는 관습과 행습, 그리고 유행들이 여러 해 동안 백성들의 마음을 점령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취하는 노선이 그들 자신의 눈에 옳게 보이게 되었고 성령님의 음성을 거의 들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때까지 성령님의 경고들과 초청들에 대해 문을 닫아버렸다. ” (5T, 103)

    왜 우리가 오늘날 이러한 위험에 대해서 그토록 조금밖에 들을 수 없습니까? 백 년 전에 세속적인 표류에 휘말려 드는 일이 그토록 심했다면 선지자께서 오늘날의 슬픈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기록하시겠습니까?
    저는 이 주제에 대해 왜 침묵이 지켜지고 있는지 말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교묘하게 과거의 사실에 기초하여 율법주의가 현재의 재림교회에 야기된 큰 문제라는 견해를 발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가 현재 우리 가운데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만 그것은 아무 것이나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데서 야기되는 문제와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사소한 것이라고 저는 주장합니다. 참으로 가끔, 진짜 율법주의적인 광신자를 보게 되기는 하지만 교회를 방문할 때 자유주의적인 신신학의 지지자들을 못 보게 되는 예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 되는 것은 값 싼 은혜에 대해 전하는 명백한 경향에 대해 반기를 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화에 대한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남은 교회 안에 잔재하는 느슨해진 면들을 특별히 꼬집어서 말한 자료들이 얼마나 됩니까? 실제적으로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백성들을 믿음과 칭의, 사랑, 자기에 대한 가치, 그리고 용서에 관한 책의 늪 속으로 빠뜨려 왔습니다. 물론 그러한 주제들에 있어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주제들은 중요한 주제들입니다. 그렇지만 왜 우리는 진정한 칭의가 가져다 주는, 성화시키는 효력에 대해 말하는데 있어서 균형을 이루지 못해오고 있습니까?
    두 가지의 대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글을 쓰는 이들과 편집인들은 재림교인들이 이미 너무나 많이 ‘행위로 말미암는 의’ 에 의해 교육받아 왔다고 추정하며, 다른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주의자들로 불릴까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 백성들은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문제와 실제적인 경건에 관한 진정한 재림교회의 설교들의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남은 교회 안으로 그 기만적인 고속도로를 만들고 있는 세속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책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됩니까? 문제의 심각성과 예언의 신에 할애된 부분들과 비교해 볼 때 그러한 주제를 다룬 책들은 더 많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가 경고와 권고를 말하는데 등한히 해 온 실제적 결과들을 보기 원하신다면 여러분이 참석하실 재림 교인들의 대 야영회 같은 곳에 가서 둘러 보시면 잘 아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시게 됩니까? 물론 야영회가 종교적인 회합이긴 하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일반적 인 외양과 바벨론의 거리들을 활보하는 무리들 사이에 큰 차이점이 없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있었던 한 야영회에서 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어머니가 몸에 찰싹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십 대의 자기 딸에 대한 염려를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최근에 개종하였고 그녀의 남편은 하나님을 믿지 조차 않는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딸이 너무 난잡한 옷차림을 했다고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최근에 개종한 그 어머니는 자기가 다니기 시작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무신론자인 자기 남편이 명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단정치 못한 복장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여 당황한 기색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을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소경 신세에 관한 얼마나 적절한 설명입니까!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잘못된 것으로 알고 있는 것을 묵과함으로 우리 자신을 더욱 더 소경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대총회의 청년 선교부는 청년활동에 있어서 혼합수영을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표준은 청소년들의 경우에만 변경된 것이 아니라 교회들에서 아주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정상적인 활동이요, 심지어는 목회자들의 야유회나 수양회에서도 남녀 혼합수영이 장려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한 혼합수영이 자신들에 대한 거룩한 부르심에 어울리지도 않고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목사님들은 극소수에 불과한 듯 합니다. 한 사역자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 당시의 제사장들로 그 벌거벗은 것이 층계의 단에 노출되지 않도록 층계로 단에 오르지 말라고 명하신 것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출애굽기 20:26)
    저는 우리가 우리 교회에 침입한 세속주의가 깜짝 놀랄 만큼 깊이 침투해 왔음을 여기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취하는 노선에 너무나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우리가 참 원칙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알고 말하는 사람들은 종종 극단주의나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게 됩니다. 그들 자신이 그러한 불쾌한 누명을 뒤집어 쓰는 것을 꺼리는 이유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험은 그러한 책임을 맡도록 지정 받은 파숫꾼들에 의해 노출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인기 경연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그것이 사람들을 즐겁게 하든 안 하든 말해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건설적인 태도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신 이상으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해 진리를 말하고 있는 한 우리는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며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 결코 두려워 해서는 안됩니다.
진짜 문제는 계속되는 타협이 우리의 많은 백성들로 진리와 오류 사이를 분별치 못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굉장히 진실된 마음으로 그들은 교회 안에서의 개혁사업을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반대할 것입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 이러한 말보다 더 희망이 없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만이 자신들이 눈 먼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필요와, 그들의 죄와, 그들의 눈 먼 것을 인식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은 치료제를 찾아 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거듭 그 슬픈 말이 들려집니다. “…알 수가 없어,” ” …알 수가 없어…”
    우리 백성들이 세상의 사물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나라(미국)의 많은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들은 기도회 모임을 취소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직장과 집과 다른 일들로 인해 너 무 바쁘기 때문에 제 삼일 저녁 기도회 모임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많은 교인들에게 있어서 청년 집회라는 말은 과거에 있었던 유물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 순서지는 그 주일에 있을 활동에 관한 광고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활동의 대부분은 그 성격에 있어서 사교적 모임에 관한 것들입니다. 한탄스럽게도 성경공부와 기도회에 관한 광고는 그 길다란 광고의 한 구석자리만을 차지하고 있고, 흥미진진한 활동들에 관한 광고들이 줄줄이 열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교회는 굉장히 성공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도대체 교인들로 어떤 일에 참여하도록 하려는 것입니까?
    분명 전도회나 영혼구원에 참여시키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이 글 을 쓰기 몇 주전 저는 40~50명의 충실한 교인들이 대부분이 비 재림교인들의 무리들이 참여한 전도집회에서 매일 밤마다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교회의 나머지 750명은 그 당시 어디에 있었습니까? 저는 왜 삼일 저녁 기도회가 그 교회에서 취소되었었는지를 거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왜 우리 백성들은 심판의 때에 살고 있다는 엄숙한 감각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 속죄일에 이스라엘이 가졌던 마음을 살피는 태도가 오늘날 안식일을 준수하는 무리들 사이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것이 마음을 살피는 태도였습니까? 고백하고 버린 모든 죄에 대한 깊은 염려입니다.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은 대제사장의 옷에 달린 방울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중보를 위해 대제사장이 지성소로 들어가려 할 때 마음으로 그를 따라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똑같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우리는 복되신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해 지성소에서 봉사하시는 하늘 성소로 따라 들어가 그분께서 마지막 대속사업을 하고 계신 것을 주시해야만 합니다.
    매일마다 우리는 우리가 그저 다른 종파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이 교회는 이제까지 허물어져 왔던 진리의 기초들을 회복하고 과거 세대에 있어 왔던 위대한 개혁 사업을 완수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지정 받은 교회입니다.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예언적 인 사명을 잊고 서서히 모든 다른 종교운동들을 혼합시켜 뜨뜻미지근한 상태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우리의 교회들과 기관들 안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온 미묘한 변화들을 눈치 채지 못 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 일 때문에 울었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문제를 야기시킨 장본인들이 되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마음 깊숙이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구와 기도를 등한히 하며,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거절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좌절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전도활동을 위해 벌떼처럼 몰려드는 벌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흥미진진한 기별을 가지고 구석에서 다리를 쭉 펴고 낮잠이나 자라고 부르심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여러 천 년을 거쳐 계속되어온 대쟁투가 우리에게 공개된 데는 한가지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 신비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믿음을 받아들인 매 새 신자들은 즉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들을 투자해야 합니다. 남녀들은 다같이 화해를 위한 개인적 봉사를 시작하도록 하나님의 명령과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안수하는 것이 필요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다 동일한 사업에 종사하도록 부르심 받은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영혼구원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선물(재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라오디게아 상태에 있는 정신이 전도와 성경연구와 개인적인 선교활동에 미치는 영향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 백성들 중 너무도 많은 이들이 어떤 복음전도 사업에 들어서는 표징으로서 어떤 특별한 감정적 경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령을 약속 받았으며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느낌이 아닌 믿음으로 받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시작한 자들만이 늦은비를 받을 것이며 큰 외침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곳에서 헌신한 남녀들은 그들에게 밝혀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빛을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행한 것처럼 그들의 빛을 계속 비추게 할 때에 더욱 더 성령의 능력을 받는다. 이리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야 하였다.” (사도행적 56)

    성령의 침례를 받는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증인으로 삼으려는데 있다는 것을 부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행 1:8) 바울은 성령의 약속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갈 3:14) 우리들은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보여줍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그래서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증거하는 능력을 약속 받았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그 일을 시작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우리 안에 어떤 능력을 느끼든지 느끼지 않든지 간에 우리가 증거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화잇 자매는 그 사업이 시작 될 때 “더욱 더 큰” 성령의 능력이 제공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이리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야 하였다.”
    얼마나 굉장한 생각의 주제입니까! 영혼구원 사업에 있어서 아 무 경험도 가져보지 못한 자들은 성령의 능력이 주어질 때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지 몰라 어쩔 바를 모를 것입니다. 이미 그 일을 시작하고 있는 자들만이 늦은 비를 받을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며 큰 외침에 참가하게 될 것입니다. 인 치는 경험을 전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남은 교회를 영혼구원 사업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로 분주하게 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현란한, 그리고 우리의 영성을 무디게 하는 세상적인 매력들을 대부분의 교인들 앞에 제시하여 그들을 승천을 위해 준비시키는 바로 그 사업을 하지 못하도록 거의 완전무결하게 일을 해내온 것입니다.
    이 중대한 시간에 꼼짝 못하는 많은 성도들이 영적인 마비 상태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요! 곧 바른 증언의 분명한 나팔 소리는 세속이라는 파괴공작이 진행되어 갈 때 더욱 더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조차 우리가 우리의 강조점을 변경시킨 것을 알아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Christianity Today)”지, 1984년 10 월호에서 전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인 필자는 “안식일은 살아계신 하나님 의 인이며, 일요일 예배는 짐승의 표” 라고 주장하는 “옛날의 안식일 주의자”의 접근방법이 변화되고 있다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녀는 계속 말했습니다. “그러한 주장이 아직도 재림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지만 그 열렬했던 정신은 결여되고 있으며, 오늘날 재림교회 내에서는 그와는 상당히 다른 별개의 접근방식이 전개되는 것을 여러분은 들을 것이다.” 그 다음에 그녀는 아직도 안식일에 대해 설교하는 유명한 재림 교회 신학자들에 대해 야야기 하면서 “그들은 주일 중 일곱째 날에 대한 강조보다는 그 날의 질에 대하여… 재림교인들이 하는 것처럼, 안식일 을 준수하지 못한 사람들의 처참한 운명보다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강조했다”고 묘사했습니다.
    안식일과 짐승의 표를 제시하는데 있어서 취하는 이런 부드러운 태도가 심지어 우리 교인들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도 명백히 인식되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흥미로운 일입니까! 죠운 크레이븐(Joan Craven)이 이 유명한 개신교회의 월간지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재림교인들이 자신들이 지키고 있는 주일 중 어떤 특정한 날에 대해서는 관심을 점점 더 적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화잇 자매에 의해 예언된 마지막 때의 무서운 배도의 전조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 백성들이 율법과 제 칠일 안식일을 점점 덜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 그 예언을 성취하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크레이븐 여사는 우리 신학자들이 안식일을 가볍게 여기는 길로 백성들을 인도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녀가 그 솔직하고도 비범한 기사에 묘사한 그 경향은 우리가 교황권에 대하여 나타내는 타협적인 태도, 우리 기관들이 계속 정부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 세계 교회 협의회와의 사이에서 진행 중인 담화, 여자 목사를 선출하려고 하는 것, 적그리스도에 대한 위대한 예언들을 강조하는 일에 있어서의 심각한 변화를 통해 나타난 경향과 동일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