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들인 태풍 (Reaping The Whirlwind)
제3장 이미 박혀버린 세속주의의 쐐기
세속주의가 교회에 그 쐐기를 박을 것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면들에 매우 명확하게 경고되어 온 것입니다. 사단은 자신들을 위해 연구하지 않고 있는 성도들을 쉽게 매혹시킬, 경계를 넘을까 말까 한 타협들을 성도들간에 영리하게 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위장된 탈선이 교인들 간에서 자리를 굳히게 되자 그 탈선의 간격은 세상과 더욱 협력하여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서서히 넓어졌습니다.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교회의 영적 상태에 있어서의 변화는 점진적이요 거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졌다. 교회가 세상의 칭찬과 우정을 구하게 되자 교회의 믿음은 약화되고, 교회의 영성은 식어지고, 교회의 열렬한 헌신은 죽은 형식으로 대치되었다.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매 발걸음은 하나님을 등지고 떠나가는 발걸음이 되었다.” (5T,240)
변화는 늘 경계를 넘을까 말까한 것들이기 때문에 목사들은 자신들이 율법주의적이며 정죄하는 자라는 낙인이 찍힐까 두려워하여 그 변화를 문제 삼기를 꺼립니다. 망대 위에 있는 파수꾼의 침묵을 더욱 확실시하기 위해 사단은 그에 저항하는 목사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수로서 보이도록 하는 준비작업을 조심스럽게 해놓았습니다.
매우 민첩하게 사단은 주의 깊은 순종에 관련된 것은 어느 것이든지 율법주의에 속한다는 식의 미묘한 개념을 안식일 준수자들 간에 점차적으로 도입시켰습니다. 많은 충실한 목사들은 성화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재림교회들에서 전하여지는 안식일 설교들은 그 형태와 강조점들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다루는 기별들이 점점 더 적어져 가고, 이내 예수님의 품성의 사본인 율법 자체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원수로서 취급되게 되었으며, 어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신학자들은 죄는 율법을 범하는 “불법”이라는 성경적 정의를 부인하고 죄란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는 진리요, 얼마는 오류를 담고 있는 그런 식의 재간 있는 말장난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로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롬 7:12)한 율법을 얕보도록 이끌었습니다. 순종은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아직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행위로 의한 구원”이나 ‘믿음을 부인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 얻으려고 한다’는 식의 은근히 비꼬는 말에 의해 기를 못 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신학사조 하에 전해지는 설교의 주제는 모든 보기 좋은 거품들을 다 제해버리고 나면 단지 칭의와 십자가만 인정하고, 그와 관련하여 복음이 동등하게 요구하는 순종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순종을 포함한 모든 것을 하셨으며,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은 단지 믿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같은 상태를 화잇 자매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전에는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이며, 극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제시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너무도 쉽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는 하나님을 믿노라고 공언하는 백성들이 흑암의 권세들과 타협하였기 때문이다…분명 곧 바른 증언의 부흥이 있어야만 한다. 하늘로 가는 길은 우리 구세주께서 사시던 당대보다 지금 더 매끄럽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죄 들은 없어져야만 한다. 우리의 신앙생애를 방해하는 모든 애지중지하는 방종들은 잘라버려져야 만 한다.” (5T,222)
이러한 권면은 새로 나온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에서 강조하는 것과는 양립될 수가 없습니다. 재림교회의 청년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도록 경고를 받고 있으며, 특별히 그 죄들을 극복하려고 ‘노력’도 하지 말도록 장려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모자람을 보면 볼 수록 율법을 순종하려고 애쓰는 ‘일(행위)’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되는 유혹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믿도록 가르침 받고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은 율법주의적으로 진정한 복음에 대해 부인하는 것임이 틀림없다고 가르침 받습니다. 이러한 인기 있고 값싼 은혜의 중독이 만연한 가운데서, 많은 목사들이 교회 안에 쐐기를 박은 세속주의의 요소들이 살금살금 참석해 온 것에 대항하여 설교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교회 안으로 의문스러운 행습들이 도입될 기초가 어떻게 놓여졌는지를 보실 수 있으십니까? 어느 누가 부흥을 위한 진정한 도구처럼 보이는 감화력을 파괴시키기를 원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율법주의의 사슬에서 빠져 나와 처음으로 진정한 회심의 경험을 가졌다고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 무도 이상한 것은 이런 새로운 자유의 감정적 격류를 타고 높은 감정적 흥분 위에 올라 선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수준이 저하될까봐 염려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욱 더 비판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들은 행동의 어떤 변화나 개혁이 포함된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그에 대항하여 음성을 가장 높이 올리는 반대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런 프로그램은, 옷소매가 짧거나 음악의 박자 같은 사소한 것에 너무도 신경을 쓰는 ‘일’을 하게 하는 것으로 몰아 부치기에 좋은 끄나풀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과거에 일반적으로 등한시되어 왔다는 것에 꽤 동조하는 때문에 이러한 새롭고도 흥분시키는 강조점이 그 이론에 부여될 때에 사람들은 아주 신속히 그것을 받아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증대되어 가는 세속주의에 대해 어떤 사람이 의문을 제기하면 그 사람은 즉시 “율법주의다!” 라는 부르짖음에 의해 침묵 당하고 맙니다. 재림교인들의 생활양식에서 속속 증가하는 작은 변화들에 대한 새롭고도 수용적인 태도는 갈수록 그 자리를 굳혀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서히 “정선된” 텔레비전 프로그램, 결혼반지, “적당한” 화장, “훌륭한” 영화, 3% 카페인, “단정한” 수영복과 짧은 바지, “특별한” 이혼 사례와 유니섹스(Unisex) 복장 등에 더욱 더 조화를 이루려고 할 때 예언된 교리적 혼란은 이미 발전되기 시작 했습니다.
사단은 남은 교회의 위대하고 견고한 기둥들에 대해의심과 의문들을 도입하기에 적절한 분위기를 이미 만들어놓았습니다. 세속적 교육을 받은 몇몇 신학자들의 지성주의를 활용하여 모든 충실한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의 믿음을 대항할 어마어마한 공격이 자행된 것입니다. 그 공격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랐는데, 그 것은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는 주범이 바로 우리 안에서 나오리라고 기대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데스몬드 포드(Desmond Ford)가 전하는 개념은 그의 불신실이 입증되기 오래 전에 그의 인격과 역동적인 말솜씨에 사로잡힌, 그를 존경하는 수백 명의 젊은 학생들에게 각광을 받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