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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들인 태풍 (Reaping The Whirlwind)

 

제2장 교리적 의문들을 진단함

    여러분들은 오늘날 남은 교회 안에 왜 그렇게 교리에 대한 의문들이 많이 논의되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왜 그렇게도 많은 목사님들이 성소와 율법, 그러고 예언의 신에 관한 신학적인 질문들을 가지고 씨름하다가 믿음을 저버렸습니까? 교회에서는 많은 청중들이,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된 듯한 표준과 수정된 신조를 가진 독립된 교회 – 형제우애 교회들(FeIlowship Churches)을 조직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교회를 빠져 나갔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교리와 표준이 거의 전혀 무시된 일요일을 준수하는 인기 있는 교회들에 다니고 있습니다.
    이들 “신 재림교인들(Neo-Adventists)”이 재림교회의 위대하고도 역사적인 기둥들을 허물어뜨리려 제시하는 논쟁들은 제가 1947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할 당시에 사용되던 논법과 동일합니다. 거듭 거듭 저는 제가 공중 전도회를 하고 있는 동안 맹렬하게 저를 공격해왔던 반대자들의 판에 박힌 듯한 동일한 반대에 맞서야만 했습니다. 어떤 때는 그리스도 교회(church of Christ) 목사들의 안식일과 성소, 그리고 앨렌 지 화잇과 같은 주제들을 가지고 공개토론을 하자는 도전을 받기도 했습니다. 가끔 제가 이끄는 장막 집회에서도 그들은 일어나서 자신들의 반대 견해들을 설명하려 애썼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연약한 신자일지라도 우리 믿음을 반대하는 원수들의 공격에 의해 혼돈을 겪는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배도라고 하는 것이 거의 없던 때였으며, 기별에 대한 의문 때문에 배도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때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서 나간 사람이 다른 교회에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만일 어떤 교인이 남은 교회를 떠났다면 그것은 육체적인 정욕이나 세상이나 혹은 마귀의 장난에 의해 떠난 것이지 그들이 교리에 대한 믿음을 잃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 왜 40년 전에는 아무도 건드릴 수 조차 없었던 재미도 없는 동일한 논쟁들이 오늘날 우리 백성들을 그렇게 뒤흔들어 놓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에 대한 답을 몇 몇 성경절들을 연결시킴으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교리적 의문들에 대한 이유들을 명백하게 묘사하며, 예언의 신도 그 이유들에 대해 동일한 빛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사랑 받는 사도인 요한은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완벽하게 요약했습니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 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한일서 4:5,6)
    이 말씀은 세상을 따르는 자들은 진리와 오류를 식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킵니다. 가짜와 진짜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은 세상과 떨어져 있을 때 가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2에 다음과 같은 동일한 원칙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국제역 성경은 그 하단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때에야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시험하고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권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성경의 틀림없는 법칙임을 부디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인들에게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12).
    여러분들은 이 모든 성경절에 있는 진리의 아름다운 교리들을 즐겨 따르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 둘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신령한 원칙 위에 관석을 씌우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I7).
    여기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교훈이 참이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5-17). 아무도 요한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그것이 어떤 교훈이나 교리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어떤 원인과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관련성을 나타낸다는 엘렌 화잇의 기록에 의해 지지되는 사실일까요? 그녀가
한 다음의 기록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이 세상의 관습과 행습과 세상적인 영향력으로 인해 너무도 흑암 가운데 있으며, 너무도 혼돈된 상태에 있어서 빛과 어두움, 진리와 오류 사이를 분별할 만한 모든 능력이 파괴된 듯이 보인다.” (5T, 62).

    위의 증언은 교회 안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재의 신학적 사상의 형성을 볼 때 새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두 가지 상태가 늘 함께 병행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두 가지는 세상과의 타협과 교리적 불명확함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흥미로운 의미를 자아내게 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내에서 이 두 가지 요소들이 두드러지게 보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안에서 세상과 타협하는, 점차적으로 발효시키는 과정이 우리 가운데 현재의 “신신학의 위기”를 몰고 왔다고 믿을 수 도 있지 않을까요?
    세속적인 것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전통적인 입장이 약화되어 왔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텔레비전의 치명적인 영향력 아래서 재림교인들의 생활 양상은 심각할 정도로 파괴되고 세속적이 되어 왔습니다. 재림교회의 골격구조 안에서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행습들이 이제는 믿음의 충성을 지키는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개의 경우 교회가 공식적으로 그 태도와 입장을 바꾼 예는 별로 없지만 표준은 낮아지고 태만으로 인해 무너진 바 되었습니다. 그 표준들은 교회 신조를 적은 연감에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에 대해 청중들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님들이나 사역자들, 혹은 전도자들의 백분율은 해를 거듭할수록 꾸준히 낮아지고 있습니다. 복장, 식습관,십일조, 영화관람, 커피 마시는 것, 안식일 준수, 그리고 이혼에 있어서 전에 고수하던 입장은 태만 시 되고 있는 것이 명백한 현재의 상황입니다.
    저는 세상을 향하여 휩쓸려 들어가는데 대해 항의하면 그에 대해 반응과 논증이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가 변하고 있으니까’ 혹은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생활 양식을 조정해야만 해’라는 말이 분명히 나올 것을 압니다. 우리 주위의 관습이 어마 어마하게 많이 변한 것은 매우 명확한 사실이며, 우리가 기별을 제시하는 방법을 필요에 맞 게 적응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결코 변경시켜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진리라고 불리는 어떤 것,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결코 수정하거나 양보하도록 의도하지 않으신 것을 양보하는 것을 발전이라고 부르는데 대해 어떻게 마음을 놓아야 좋을지 모르는 두려움을 품고 있습니다.
    재림교회 청년들이 극장에 몰려다니고, 그 시간에 그 부모들은 아슬아슬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것과, 또 교회 안에서 인공적인 장식품이나 단정치 못한 의복을 입은 것과, 또 단상에서 바벨론의 음악이 쿵작 거리는 것과,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이혼율이 세상의 이혼율과 맘먹는다는 사실을 보거나 들을 때 여러분이 그 사실에 대해 어떻게 평하든 그것은 여러분의 자유지만 제발 그것을 ‘발전’이나 ‘진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도록 하십시오.
    슬픈 사실은 한 교회로서 우리는 우리가 여러 해 동안 옹호해 오던 재림교회의 원칙들이 문자 그대로 파괴되어 온 것을 교회 조직 안에서 만족한 듯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출판소들을 통해 간행되는 공식적인 출판물들을 조정하는데 실패함으로 우리는 이미 현재의 교리적인 궁지의 씨앗들을 얼만큼 심어왔습니다. 역사적인 진리를 교묘하게 침식시키고 상이한 신조들을 제시하는 기사와 설교들의 가중되는 영향력은 교회 안에 살금살금 기어들어오고 있는 타협정신을 무르익게 하여 속수무책의 문제 거리들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견고히 서도록 특별한 격려를 필요로 하는 청년들은 이미 상당한 정도로 이 타협의 물결에 휩쓸렸으며, 그 청년들이 새로운 자유화를 주장하는 타협운동의 목표가 되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간에 현재 그 정신은 교회생활의 모든 국변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청중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 이미 예고된 결과는 어떤 것입니까? 원인은 신속하게 그 결과를 몰고 오고 있습니다. 바람을 심은 우리는 지금 태풍을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견고한 수준을 세우고 그 수준을 지켜야 할 선을 그을만한 용기의 심각한 결핍으로 인해 우리는 한때 우리를 독특하게 구별해주고 , 우리의 힘이 되어왔던 아름다운 원칙들을 허물어오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함으로 조장된 이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영적인 감각력을 무디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두는 때 입니다. 낫질을 할 때 거둬지고 있는 태풍은 우리의 사랑하는 교회에 우리가 감히 인정하려는 것보다 더욱 더 파괴적으로 휘몰아칩니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용기를 내고 힘을 모아서 하나님께서 그어놓으신 선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황폐는 계속 심해질 것입니다.
    영감의 기록은 세상과 일치되는 것이 진리를 인식할 능력을 상실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과 일치되는 것은 교리적인 의심과 믿음의 불명확함이라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이미 일어났습니까? 우리는 이미 그 일이 일어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교회들은 세속주의로 침해 당하는 것에 못지 않게 ‘신신학’의 침투로 고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현재 교회 안에서 이 두 가지 상태가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은 흔들림이 그 상황을 처리해버릴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거듭 거듭 화잇 자매는 박해의 불길이 번진 후에 있을 어마어마한 떨어져나감에 대해 생생한 묘사를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녀가 문제를 어떻게 평가하고, 그 문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해 알기를 원하시면 다음에 나오는 깜짝 놀랄만한 증언들과 문맥들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모든 잘 알려진 인용문들에서 그녀는 교회가 ‘세상과 일치됨’ 혹은 ‘세상과 연합’한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탄원하고 있습니다.
    “모든 영혼에게 시험이 올 시간은 멀지 않다. 우리들은 거짓 안식일을 준수하도록 강요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 사이에 투쟁이 있을 것이다. 차츰 차츰 세상의 요구에 굴복하고 세상의 습관에 동화하는 사람들은 조롱과 모욕을 당하기보다 오히려 투옥과 죽음으로 위협하는 세력에 복종할 것이다. 그때에는 금 이 찌끼에서 분리될 것이다. 참된 경건은 겉치레만의 경건과 분명히 구별될 것이다. 그 광택 때문에 우리들이 감탄하던 많은 별들이 그 때에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성소의 장식으로 보였으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지 않은 사람들은 그 때에 자신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낼 것이다.”(선지자와 왕,179).

    “나는 우리가 가장 엄숙한 시기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내게 주어진 지난번 계시에서 나는 지금 진리를 공언하는 사람들 중 아주 적은 무리만이 진리로 인해 성화되어 구원 받을 것이라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보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 사업이 지닌 단순성을 무시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세상과 일치할 것이며, 우상을 품으며, 영적으로 죽는 자들이 될 것이다.” (1T,608,609).

    “폭풍우가 임박할 때에 셋째 천사의 기별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진리를 완전히 순종하여 성결함을 받지 않은 많은 사람은 그 신앙을 버리고 반대 편으로 들어갈 것이다. 저들은 세상과 연합하여 그 정신이 같아짐으로 모든 것을 거의 속된 사람과 한가지로 생각하게 될 것이요, 그리하여 시험이 이르는 때에는 곧 평안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편을 택할 것이다. 일찍이 진리를 순종한 자들로서 재능이 있고 말 솜씨가 좋은 사람들은 그 능력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할 것이다. 저들은 이전에 형제 되었던 자들에게 가장 심한 원수가 될 것이다. 안식일 지키는 자들이 법정에 호출되어 그 신앙의 취조를 받을 때에 이 배교자들은 저들을 그릇 증거하고 비난하는 사단의 가장 유력한 대표자들이 될 것이요, 거짓 보고와 풍자로 법관들을 선동하여 저들을 반대하게 할 것이다.” (대쟁투 , 670)

    “교회는 평화롭고 번영할 때 하지 못한 사업을 가장 낙망적이고 위험한 환경에 처한 무서운 위기를 맞이하여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세상을 따름으로 침묵해왔거나 전하지 않은 경고는 믿음의 원수들에게서 오는 가장 맹렬한 반대 아래 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사업의 진전을 꾸준히 지연시켜 온 피상적인 믿음의 부류에 속한 자들은 믿음을 버리고 그들의 동정을 살피며 오랫동안 기울여 온 공공연한 원수들 편에 가담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배교자들은 가장 심한 적의를 나타내고, 있는 힘을 다하여 이런 형제들을 압제하고 중상하며, 그들에 대하여 분노할 것이다. 이런 날이 우리 앞에 박두해왔다.” (5T,463;증언보감 2권,170)

    “세상과 연합하고 있는 자들은 세상의 본을 받고 있으며 짐승의 표률 받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자아를 신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고, 진리를 순종함으로 심령을 깨끗게 하는 자들이 바로 하늘의 본을 받아들이고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 자들이다.” (5T,2I6;보감 2 ,69,70)

    여기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생명력을 문자 그대로 먹어버리는 계획의 경과가 어떠함을 보게 됩니다. 선지 자의 말씀은 세속적으로 치우치는 경향과 그에 동반되는 믿음의 상실이 결국, 저들(한 큰 부류)의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도록 이끌 것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똑똑 듣는 것 같은 작은 배도의 물방울이 홍수와 같은 배도의 물결로 변할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 있어서의 의심들, 교리적인 혼돈과 배도는 교회와 세상을 분리시켰던 벽을 틀림없이 허물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제 우리는 성경과 예언의 신의 증언들 전체를 통하여 흐르고 있는 반복되는 진리의 강하고도 공통된 주제들을 함께 모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그 요점들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장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기 인용한 구절들은 더 인용할 수 있는 수 백 개의 인용문들 중 단지 몇 개의 견본에 불과합니다.
    아마 이러한 영감의 기록들에 나타난 가장 충격적인 요소는 배도하는 숫자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대다수의 신도들이 실제로 믿음을 저버리고 안식일을 포기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자, 이제 이 교회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려는 사단의 전술들을 알아보기로 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