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러들인 태풍 (Reaping The Whirlwind)
제10장 곧 바른 증언을 해야 할 때
진실로 모든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세속적인 정신과 자만심의 죄에 대해 알고, 이러한 육과 영이 교묘하게 섞여진 미지근한 혼합을 반대하여 외칠 사람들과 연합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전파하기 위하여 비난을 감수할 자세가 되어야만 합니다 . 물론 귀를 즐겁게 해주는 수많은 주제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부드러운 것들을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잠들어 있는 교인들은 더 이상 부드러운 기별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잠에서 깨야 할 때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침례요한이 전한 기별이 너무 강하고 노골적이라고 생각하시면 오늘날 사람들을 인도하셔서 전하게 하시는 기별에도 여러분들은 대항하여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가 왕에게 부당한 결혼을 했다고 했을 때 그가 너무 직선적이었습니까?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곧 바르게 말해야 합니다. 다음의 증언의 말씀을 잘 고려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바로 직전인 이 두려운 때에 하나님의 충실한 전도자들은 침례 요한이 전했던 것보다 더 예리한 증언을 해야만 할 것이다. 중요하고도 책임 있는 사업이 그들 앞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부드러운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을 당신의 목자들로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두려운 화가 그들 위에 임한다.” (1T, 321)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이 견책을 받을 때에 자신들을 침례 요한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보다 더 낫다고 느낄 것입니까? 우리들은 라오디게아의 자기 의로 물들여진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 의해 표현될 동일한 분노를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 어떻게 감히 참 교회를 잘못하고 있다거나 배도했다고 말할 수 있을런지요!
“고대에,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전할 하나님의 기별을 가지고 왔을 때 백성들은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지나치게 혹독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선민들인 자신들을 죄인이라고 견책하며 그들의 범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심판으로만 그들을 깨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의 정신이 나갔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하였다. 사단과 그의 부하들은 경고의 기별을 발하고 죄를 견책하는 사람들을 대항하여 음모를 꾸며왔다.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의 사업을 가능한 한 어렵게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은 영혼들의 원수와 연합하게 될 것이다.” (3T.261)
이러한 분리와 시험하는 기간들 동안에 책임 있는 목사들과 지도자들의 봉사가 공포의 정신으로 물들여져서는 안됩니다. 시온에서 잠든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친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엘리처럼 매우 부드럽고도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확고부동함의 결핍이 엘리가 거절 당하도록 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엘리의 선한 성품과 행실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할 수는 있지만 그는 죄를 반대하여 타협하지 않는 정신으로 공중 앞에 강력하게 서기를 너무 두려워 했습니다.
“엘리는 부드럽고 사랑이 많으며 친절한 사람이며, 하나님께 대한 봉사와 그분의 사업의 번영에 진실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기도에는 능력이 있었으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반역을 꾀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죄를 견책하고 죄인에게 공의를 행사하는 확고부동한 성격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이스라엘을 순결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존하실 수 없으셨다. 그는 그의 믿음에 용기를 더하지 않으므로 적당한 때와 적당한 장소에서 안 된다고 말할 능력이 없었다. 죄는 죄이고, 의는 의이다. 경고하는 뚜렷한 나팔소리는 들려야만 한다. 우리는 두려울 정도로 사악한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정신차리고 깨어있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대한 경배는 타락하게 될 것이다.”(4T. 5l7)
하나님께서 죄들을 노출시키거나 견책하지 않는, 부드럽고도 친절 한 듯한 목사들에게 책임을 물으실까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명백한 죄가 있으나 만일 하나님의 종들이 무관심하게 그것을 간과한다면, 그들은 실제로 죄인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며, 죄인과 동일한 허물을 갖게 될 것이요, 반드시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죄인들의 죄악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기 때문이다.” (3 T. 265.266)
“만일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 위에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가져온 죄들을 열심히 찾는 일을 등한히 한다면 그들이 그 죄들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3 T,269)
“너무나 잘못을 책망할 용기가 없는 자들이나 게으름과 관심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정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순결하게 하는 데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저희가 의무를 태만히 함으로 초래한 악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는 그 악한 행위가 우리 자신의 것처럼, 부모로서 혹은 목사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여 저지할 수 있었던 악에 대하여 꼭 같이 책임이 있다.” (부조와 선지자 하권. 252)
하나님의 특별한 남은 무리들의 율법에 대한 확신을 잃게 만들려고 사단은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는데 교회 안을 회심하지 않은 교인들과 헌신하지 않은 목사님들로 채워서 그 일을 하리라는 것이 그럴 듯한 전략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과거에 치러졌던 전쟁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그러한 장기적인 전술을 시도하리라는 것이 확실함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문자 그대로 굉장한 연극의 종막에 살고 있기 때문에 사단의 모든 전략들을 거의 다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 그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써왔던 모든 속임수를 쓰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상황들이 한 구심점을 향하여 모이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상황들이 단지 이곳 저곳에서 터지는 파편과 같은 쟁점들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우리는, 그것들이 모두 큰 원수인 사단에 의해 완벽하게 조종되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드러나기 시작하는 윤곽의 놀랄만한 체계를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던 작은 문제들이 지금은 다 한 덩어리로 모여 커다란 문제로 발전되었습니다. 사단의 궁극적인 목적에서 보면 모든 결과가 다 타당한 것입니다. 점점 더 커지는 타협의 세속적 쐐기가 서서히 영적인 표준을 허물어뜨리도록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 그가 고안해 낼 수 있을까요? 동시에 그는 많은 사람들이 광신과 율법주의자들로 불리울까 두려워하게 함으로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으며, 속죄사업은 십자가에서 다 마쳐졌고 성화는 강조할 바가 못 된다는 기초부터 뒤흔드는 개념을 도입해 들여온 것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온전한 순종의 열매가 없이도, 침례를 통하여 새로운 교인들을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경향에 사로잡혔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이런 목사들과 세상을 사랑하는 교인들의 영향력 아래 교회는 “신신학”의 폭발적인 영향력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으며, 특히 매주 신신학적인 설교를 통하여 분분한 견해를 가진 수많은 젊은 지지자들을 얻게 된 것입니다.
제 마음은 그런 저지하기 어려운 배도의 조류를 멈추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대해 제게 편지를 보내온 수백 명의 충실한 재림교인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이전에 충실하게 간직해왔던 원칙들이 하나하나 무너져 간 것을 인식하면서 그 원칙들을 지키기 위해 고독하게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는 제 권면은 항상 동일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십시오. 특히 기도와 성경 연구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꼭 달라붙어 계십시오. 당신이 건전하고도 역사적인 진리의 토대 위에 서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절대 타협하지 마십시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무엇입니까? 물론 그에 대한 답은 교회 안에 있는 흔들림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문제들로부터의 진정한 답은 그리스도와의 아주 깊고도 영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성도들에 대항하여 전개하는 사단의 반대가 내포하고 있는 진정한 성격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기의 앞길을 방해하는 자들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악의 모든 독소를 뿌려 댈 것입니다. 흔들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흔들릴 것입니다.
대도시들은 폭력과 위험의 중심지들이 될 것이며, 안식일 준수자들은 대도시의 아무 곳에서도 안전한 곳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도시들을 떠나서 시골의 한적한 곳을 확보하라는 경고를 거듭거듭 받아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머뭇거림으로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하지 못한 돈과 소유물은 사람들에게 올무와 위협이 될 것입니다. 부가 가진 진정한 기만성은, 재림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수백만 불의 재물이 다가오는 경제적인 파탄에 의해 다 날라갈 때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애와 소유를 제단 위에 바친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위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살피는 기도와 성경 연구를 통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아마겟돈의 대전쟁을 위해 준비해 왔습니다. 대쟁투가 그 종막에 이를 때 각 사람은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벌어지는 치열한 전투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미리 준비해 온 사람들에게만 안전이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화해적인 태도를 취해오던 사람들은 그 시험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라오디게아에 보내는 하나님의 호소는 회개하여 믿음과 사랑과 그리스도의 의와 성령을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매체들과 협력할 모든 영혼들에게는 희망과 언약이 있습니다. 옛날 다니엘처럼, 우리는 사형선고에 직면할 준비를 갖추기 전에 먼저 작은 일에 충성해야만 합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서 확고부동한 충성심을 개발시킴으로 그 영혼은 강하게 되며 승리는 확실한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떠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우리가 마지막 때에 살고 있다는 더 많은 징조들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준비하는데 있어서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은혜의 사업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하루에 적어도 한 시간씩 말씀 연구와 기도로 보내지 않으신다면 여러분들의 태만에 대해 뭐라고 변명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정말로 하기를 원하는 것을 할 시간을 찾습니다. 사단이 즐겨 사용하는 기만은 단지 명목상의, 피상적 경험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안전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그분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의 날마다의 생활을 이른 아침과 저녁에 기도와 성경연구로 보낼 수 있도록 계획하십시오. 여러분의 생애에 하나님을 첫째로 삼으려는 지속적이고도 필사적인 결심은 정신의 놀라운 단련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때에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의 뜻 안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드디어 우리는 그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곧 그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실물교훈, 324)
얼마나 신나는 가능성입니까! 전체를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그분과의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게 합니다. 우리가 그 경험을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주리고 갈망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낼 때 우리의 소망은 자라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러한 향기로운 관계를 갖게 될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그 생애를 채우게 됨을 발견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은 시간을 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 우선권을 둘 때 비가 내린 후 분명한 성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 부흥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를 우리 앞에 모시고 또한 우리 마음에서 그분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애 가운데서 항상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마치 우리가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형식이 될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당신의 오묘한 뜻을 말씀하여 주실 것이며 예수의 임재로 평안함과 즐거움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우리 마음은 때때로 그가 에녹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때에 뜨겁게 될 것이다. ” (실물교훈,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