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 Page

불러들인 태풍 (Reaping The Whirlwind)

 

저자: 죠 크루스 목사, 미국의 대표적인 자영선교기관 중의 하나인 Amazing Facts 기관의 설립자이며, 전도 목사로서 봉사함.

 

제1장 거룩하지 못한 혼합 – 라오디게아 교회

    여러분은 아주 헤어나오기 어려운 깊은 구덩이에 빠져 본 적이 있습니까? 지금 저는 그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습니다. 지난 38년 동안 저는 재림 교회가 가지고 있는 놀라운 기별들을 비 재림 교인들에게 설교하고 전도 책자를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 왔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만족스럽고도 보람 있는 사업은 없었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모든 시간을 다 바쳐 전도에 전념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전도 사업을 통하여 매년 200명 이상의 영혼들을 하늘 왕국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여러 집회들을 통하여 사람들의 생애를 변화시키시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얼마나 스릴 있는 것이었는지요! 또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어메이징 팩츠(Amazing Facts) 기관에서 전하는 문서와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 사업을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하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 있는 비 재림 교인들이나 일반인들을 위해서는 분명하고 힘찬 기별을 전했던 제가 재림 교회의 교인들을 위해서는 무엇을 하고 어떤 기별을 전해야 할지 참으로 당황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저의 사역은 직접적인 공중 전도사업이었고, 남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리 가운데로 새로운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저술한 책 36권 중에 단지 한 권만이 유일하게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인들을 위한 책자입니다. 제가 쓴 다른 모든 책들은 우리가 사랑하고 잘 알고 있는 위대한 교리와 예언의 기별들로서 일반 사람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록된 책들 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에서는 저 처럼 이미 재림교회에 속해 있는 남은 교회의 교인들에게 특별히 드리고 싶은 말씀을 하고자 합니다.
    저는 미국과 캐나다에 있는 수 많은 우리 신실한 백성들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수백여 재림 교회들에서 집회를 인도해 왔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저는 재림 교인들의 여러 가지 영적인 투쟁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러한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은 그들을 향한 동정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 세상의 역사에서 마지막 시대의 남은 교회에 속해 있는 이 백성들보다 더 분명한 진리와 밝은 빛을 소유한 사람들이나 단체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에게 있어서 재림 교회는 최고의 증오 대상입니다. 사단은 여자와 그 남은 자손들에게 대하여 분노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님의 증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비록 요한 계시록은 우리의 교회를 – 남은(혹은 짜투리)교회- 라고 지목하지만, 재림 교회는 일곱 개의 예언적 교회 중 하나인 라오디게아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예수께서 오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불러내신 백성이라는 우리의 역사적인 사명을 부인해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도 요한에 의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된 라오디게아 교회의 특성을 솔직하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사도 요한은 마지막 시대의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대해서 기록하기를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이상하게 혼합된 교회라고 묘사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상한 형태에 눈이 어두워져서 그 교회는 자신의 구역질 나고 뜨뜻미지근한 상태를 인식도 하지 못한채 예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 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요한계시록 3:15-18.

    마지막 시대에 사단이 우리를 대항하여 사용하는 특별한 기만에 대한 하나님의 정확한 진단 결과를 미리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우리는 미리 경고를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이 치명적인 상태를 치유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치료제를 또한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눈 먼 것을 보게 할 안약과, 벌거벗은 것을 가릴 흰 옷과, 가난한 것을 부요하게 할 금을 우리 모두에게 제공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도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인으로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참된 증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19,20.
    이 성경절에서 저를 가장 흥분케 하는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비록 자기 기만에 빠지고 두 마음을 품은 봉사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 그 모든 질병을 고쳐줄 당신의 치료제를 받아들이라고 탄원하십니다. 그분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언어로 “회개하라. 내가 그대의 마음에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완전한 회복을 가져올 모든 처방들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그분이 의와 믿음과 성령을 우리에게 선사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비참하고 가련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우리들을 마침내는 당신의 보좌에 아버지와 나란히 함께 앉도록 하는 승리의 경험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전망입니까!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이 “회개하라”는 것과 예수님께 “문을 열라”는 것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이런 깊은 마비상태의 질병에 걸린 그들은 그들이 죄를 짓고 있는 것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부요 하여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미지근한 물이 사람을 이완시켰다가 나중에는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저들의 처절하고도 잃어버려진 상태를 모르고 있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요한계시록 3:17). 바로 그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입니다. 라오디게아는 참으로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세속적인 상태에 있는 그 교회의 가장 큰 비극은 교회가 그 자체의 비참한 곤경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것들과 일반적인 것이 너무 팽배하여 라오디게아인들은 그들의 상태가 그렇다는 것에 대해서 좁쌀 알만큼의 인상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이런 지긋 지긋한 태도를 회개할 필요에 대해 역설한 책과 기사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이 더욱 더 악화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그 기별이 주의를 끌지 못해오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의 발행물들에 실린 많은 호소들을 분석해 왔는데, 그 호소 들은 아주 멋지게 제시된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더욱 깊이 연구해 들어갔을 때, 그 호소들 중 거의 하나도 무엇에 대해 회개해야 할지를 밝히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갑자기 제게는 그러한 호소들에 대해 왜 그렇게도 적은 반응만이 있게 되었는지의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죄에서 돌아 서라는 능변의 호소들에 대해 반응이 없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죄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죄”라는 이름처럼 모호한 용어가 그들에게는 잘 먹혀 들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죄가 무엇인지 정의되고, 설명되고, 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갖게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단지 죄에 대하여 일반적인 호소들을 하면 성령님께서 죄에 대한 세세한 것들은 알아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저는 예언의 신을 더욱 깊이 연구했고, 화잇 여사가 죄를 죄라고 하는 바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사람들과 곧바른 증언을 담대하게 말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아주 단호한 책망들을 하신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경고의 나팔을 파수꾼에게 불도록 하여서 심지어 눈 멀고 꾸벅꾸벅 조는 라오다게아 교인일지라도 그 기별이 무엇인지를 알아 차리도록 하며 그런 경고의 기별을 하도록 맡긴, 그런 파수꾼들을 믿고 계시는 때가 지금의 이런 유예의 기간들이라는 것을 제가 깨닫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반쯤 잠들었을 때 그들을 완전히 정신 차리도록 하는 데는 그들을 더 많이 흔들어대는 자극이 종종 필요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또한 잠자고 있는 성도들을 깨우는 일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화잇 여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참된 증인의 증언은 반도 주의하는 바 되지 않아왔다. 교회의 운명이 달려있는 이 엄숙한 증언이 아주 무시되거나 아주 가볍게 취급되어 왔다. 이 증언은 깊은 회개를 하도록 해야만 하며, 그 증언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그 증언의 말씀을 순종하고 정결케 될 것이다”(1T, 181 ).
    우리는 그 기별을 적절하게 이해할 필요에 대해 우리를 깨우쳐 줄 더 심한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와 “죄를 죄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러야”하는 아주 명백한 증언들이 교회에서 들려질 필요가 아주 시급합니다. 죄를 죄라고 하는 바른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는 의미는 무슨 뜻입니까? 그 말은 간음은 죄요, 도적질하는 것은 죄요, 여차 여차 하는 것은 죄요 하는 따위의 말을 담대하게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온 세상에 퍼져있는 모든 재림교회 목사님들은 우리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충실하게 전해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잇여사는 그녀가 살던 당시에 그런 목사님들은 “참으로 적었다”(5T,3OO)고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좀 낫습니까? 곧 바른 증언이 교회 전체를 통하여 제시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왜 오래 전에 흔들림이 오지 않았습니까? 화잇 여사는 “어떤 이들은 그것(곧 바른 증언)을 대항하여 일어섰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있는 흔들림의 이유이다”(초기문집,277)고 말했습니다. 우리 한번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 보십시다. 간음,거짓말,안식일을 안 지키는 것 등은 죄라고 규명하는 목사님들을 대항하여 일어설 교인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교인들은 파수꾼들이 그러한 행위를 악이라 이름 붙여서 그에 반대하는 설교를 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의 곧 바른 증언에 대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일어서는” 이유는 그 증언이 죄가 무엇인지 정의할 뿐만 아니라 그 증언이 그 죄를 범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명백히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종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매끄러운 것들을 말해주기를 원한다. 만일 개인들의 잘못들이 말해지면 그들은 그 말이 너무 가혹하다고 불평하며,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동정 한다……진리가 자르도록 하라. 나는 목사들이 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를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들이 신자들의 감정을 상하기를 두려워하고, 예의 바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여 진리의 표준을 낮추는 까닭이다”
(영적선물 2권,284,285).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참된 기별은 교인들이 죄를 범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교회의 기관들도 죄를 짓고 있다고 담대하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유쾌하게 하는 이러한 악들이 교인들 가운데서 시정되지 않는다면 , 그 온 교회가 그 악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RH,1890.12.23).

    “아, 지상에 있는 성전이 정결하게 될 필요가 있다면 베틀크릭에 있는 기관들이 지금 그것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그대가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을 명백하고 분명하게 발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가장 겸손하게 탄원하지 않으려는가? 위험을 보고 경고를 발하여야 할 하나님의 파수꾼들은 어디에 있는가….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라….. 내 백성에게….그 죄를 고하라’”(목사에게보내는 증언,296).

    “침례 요한은 비천한 작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견책하였다. 그는 왕들과 귀족들이 기별을 듣거나 거부하거나간에 저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말하였으며 노골적으로 말하였다. 또한 그는 산헤드린의 바리새인들이 순결하고 자원하는 순종의 의를 따르지 않고 저들의 신앙이 외식으로 가득찬 것임을 견책하였다…..그는 헤롯왕이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에 관하여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마 I4:4)고 말하였다. ……우리들이 전해야 할 기별 역시 침례 요한의 기별처럼 단도직입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는 죄악 때문에 왕들을 견책하였다. 그는 헤롯 왕의 간음죄를 견책하였다”(가려 2권,181,182).

    저는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대하면 좀 불편하다고 불평 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만일 모든 사람들이 그 기별에 대하여 편안하게 될 때까지 그 기별을 깎고 다듬고 한다면 그 기별은 더 이상 라오다게아 교회에 보내는 곧 바른 증언이 되지 못합니다. 예언의 말씀은 “어떤 이들은 그것을 대항하여 일어설 것이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이 때를 위한 하나님의 참 기별이 분열을 초래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까? 그렇습니다. 그러한 곧 바른 증언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초래할 것입니다. 다음의 말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의 탐색하는 증언은 교회의 부패를 막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대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로부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분리해 낼 것이다. 잘못은 잘못이라고 불려져야만 한다. 탐욕적인 죄악들은 그 이름이 응당 불리어져야 할 그대로 불려져야만 한다”(5T,676).

    이제 저는 다시 저의 헤어나오지 못할 궁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 안에 있는 특별한 죄에 대하여 교회를 공격한다는 비난을 받음 없이 아주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지도력을 비난하고 그 형제들과 싸우는데 자기들의 온 시간을 보내는 많은 저격병들이 밖에(그리고 안에 조금) 있습니다. 물론 참된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기별은 교회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부터 주어져야만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기별에 대해 화를 내거나, 그 기별을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자기의 죄들을 지적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회들과 사람들은 직접 대놓고 하는 견책에 대해 똑같이 민감합니다. 그것이 그렇게도 많은 “곧 바른 증언” 기사들에 곧 바른 증언이 그렇게도 결여되는 것을 제가 발견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요? 기별은 주어져야만 하고, 죄는 노출되어야만 하며, 그 일은 사랑과 성실함으로 이뤄져야만 합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투쟁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그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저의 확신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다른 양심적인 목사님들처럼 저도 뜨뜻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불안하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완전히 세상으로 빠져들거나 차갑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있거나 뜨거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교회에는 많은 영역들에 있어 늘쩍지근함과 무관심의 분위기를 자아내 온, 찬 것과 뜨거운 것이 반반씩 섞인 혼합이 있었습니다.
    제가 교회가 세상과 타협한 모습 전면과 그 타협의 진정한 원인들을 과감하게 말하는 책을 한 권 써야 할까요?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많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신신학”의 위기로서 알아온 현상의 주요문제들과 그 비극적인 영향력을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영향력은 평신도와 목사 양자에게 다 끼쳐졌습니다. 저의 가장 큰 염려는 대부분이 헌신적이고 충실한 분들인 제 동료 목사들이 제가 생각한 것들을, 자신들을 빗나간 방법으로 공격하는 어떤 공격으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제가 잠자는 청중들에게 필요 된다고 느끼는 강한 확신의 신랄한 말을 저의 사랑하는 교회가 오해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책을 열고 다음의 이어지는 장들을 읽으실 때에 제가 하나님께서 제게 맡겨주셨다고 느끼는 이 문제들에 있어 저와 공감을 갖도록 부디 애써주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와 그 교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사랑합니다. 이 교회는 하늘 왕국까지 다다를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눈동자이며, 이 세상에 있는 그분의 가장 큰 관심과 사랑의 대상입니다. 저의 인간적이고도 빈약한 표현방법 속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이 교회를 깎아 내리거나 멸시하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책을 읽으신 후에 이전보다 더욱 이 남은 교회를 사랑하고, 반면에 교회를 우리 사랑하는 구세주에게서 분리시키는 죄들을 미워하게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우리는 교회의 뜨뜻미지근함과 타협에 관한 면에 초점을 맞출 것이지만 거기엔 간과해서는 안 될 두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몸이며, 그 몸은 남은 교회를 뒤엎으려고 하는 사단에 의해 영향을 받을 한 부분인 것으로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몸의 섬세하고도 영적인 구조들 안에는 수많은 상호 관련된 원인과 결과들이 작용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들에서 저는 교회 안에 공개된 사건들을 통해 사단의 전면적인 계획과 목적이 어떻게 펼쳐지는지의 관점에서 분석하려고 합니다. 왜 그는 교회라고 하는 몸 전체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교회의 어떤 부분에 어떤 상태들을 조성하려고 애쓰는 것일까요? 이 진리의 성채의 강한 방벽들을 점차로 부서뜨리기 위해 그가 개발해 온 기발한 전략들은 무엇일까요? 사단이 자기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간교한 농간으로 벌려놓은 사건들과 상황들을 진단해 보면 어떤 때 그것은 멋지게 홀리는 것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무시무시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가 여러 곳에 잠식해 들어갔고, 진리를 얼만큼 흐려놓는데 성공해 온 것은 틀림이 없지만 모든 지옥의 힘을 다하여 대항할지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 교회는 그저 단순한 한 종파가 아닙니다. 이 교회는 예언의 진행과정에 나타난 교회요 땅에 떨어진 진리를 회복시키기로 운명된 교회요, 쓰러질 수도 쓰러지지도 않을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최후 발악의 맹렬한 열화에 의해 교회가 꼭 소멸될 것 같이 보일지라도 이 교회는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요, 승리할 것입니다. 이 교회를 흔드는 것과 시련 하는 경험을 통하여 충실하게 남아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교회와 함께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사단이 시도하는 교묘한 계교를 노출시킴으로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져 왔고 앞으로도 놓여질 무시무시한 함정들을 피할 준비를 갖추게 되기를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