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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에 오셔서 사셨던 그리스도 (우리를 체휼 하셨던 분) (Touched with Our Feelings)

 

 

제 13장 논쟁의 절정

 

25년 이상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논쟁이 계속된 후 이제 얼마 동안은 논쟁이 없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논쟁의 절정이 1980년과 1985년 사이에 일어났다.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이 대중성을 얻고 있을 동안, 신신학은 그 힘을 잃고 있었으며, 그의 지지자들에게 새로운 문제점들을 찾도록 제안하고 있었다. 전에 없었던 강한 반대를 맞고 있던 신신학 지지자들은, 이 두 반대되는 견해들이 모두 동등한 가치와 중요성이 있는 것처럼 화합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전통적 그리스도론의 열심 있는 수호자)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위랜드와 쇼트는 그리스도의 개성과 사업에 관한 새로운 해석에 관하여 제일 먼저 교회에 경고를 발한 사람들이었다.(1) 이 문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대총회는 특별한 회를 조직하였으며, 몇 회의를 거친 후 그 연구 결과가 팜데일 합회의 보고서와 함께 출판되었다. 그 결과에 진정으로 불만족한 위랜드는 1977년 어떻게 아기 그리스도가 죄 없으실 수 있을까 하는 제목의 책을 발간함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2) 1979년 그는 전통적 그리스도론에 관한 추가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썼다.(3)

 

선교사로서 경험이 있는 위랜드는 아프리카의 풍속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아프리카에 다시 초청 받았는데, 그 주된 이유는 그곳에서 남-사하라 대륙의 기독교인들에게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여줄 여러 책들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아프리카에 있을 동안, 1981년 그의 여러 연구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책, 깨어진 연결이 출판되었다.(4)

 

서론을 통하여 위랜드는 그 책의 목적을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분명하거나 또는 가정적인 대립들을 해결하기 위함”이라고 적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의 온전하심은 근본적인 것이고, 이미 이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를 둔다. 우리가 연구하고자 하는 문제는 어떠한 인성을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셨을 때에 취하셨느냐 하는 것이다. 그의 성육신 속에 온전한 신성을 유지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5)

 

위랜드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엘렌 화잇의 여러 증언들 가운데 몇 대립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문맥을 따라서 엘렌 화잇의 증언들을 연구하면, 이러한 패러독스들은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관하여, 조심하라, 매우 조심하라’고 한 자신의 경고를 신중이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화잇부인은 이 문제를 피하지 않았으며, 우리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모든 것,’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묶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묶는 황금 사슬이며, 그 사슬에 어떠한 깨어진 고리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6)

 

위랜드에게 “사도시대 이후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가장 확실하고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것은 아마 그리스도의 의에 관한 1888년 기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별은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한 걸림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순수함이 모독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윌랜드는 그렇지 않다고 확언한다. “1888년 기별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는 그(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와 같은 인성 안에 나타났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해하고 받으면 그들도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대로 승리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7)

 

위랜든 32개의 질문을 내놓았고, 이에 대한 응답으로 성경과 엘렌 화잇의 증언들을 인용하였다. 먼저, 위랜드는 성경 안에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대립적인 요소가 없음을 제시하였다.(8) 그리고 그는 엘렌 화잇이 절대로 와그너와 존스의 가르침을 반대하지 않았음을 나타내었다.(9) 그는 1895년에 쓰여진 베이커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들의 견해를 불신임하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설명하였다.(10) 베이커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포함된 몇 증언들에 대한 그의 분석은 그 증언들이 엘렌 화잇의 다른 증언들과 대립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1)

 

위랜드는, 예수께서 죗된 인성 속에서 죄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견해를 이해는 하지만 받아들이지는 않는 사람들의 연속적인 요구에 대하여 답변을 하였다. 그는 교리에 관한 질문들로부터 몇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예수께서 죄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라는 잘못된 언급을 다음과 같이 논박하였다: “엘렌 화잇은 스스로 절대로 이러한 말을 한번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말들은 오직 편집인들의 가정에 의한 것이다.”(12)  간략하게 말한다면, 이 연구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여러 기본적 질문들에 대한 자세한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

 

1983년, 태평양 출판사는 불로 단련된 금(Gold Tried in the Fire)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을 통하여 위랜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리자가 되시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곧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불로 단련된 금”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위랜드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시험들을 우리가 받는 것처럼 받지 못한다면 그는 우리의 대리자가 되실 수 없다. 그는 우리의 원수를 원수의 집, 원수의 소굴에서 만나야만 하며, 거기서 그를 정복해야 한다.”(14)

 

후에 위랜드는 로마서 8:3,4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바울이 말한 ‘같은(likeness)’의 의미를 ‘같지 않다’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만약 예수께서 성육신 하실 때에 실제로 죗된 육체는 아니었지만, 죗된 육체처럼 보이는 것만을 취하셨다면, 바울이 말한 육체, 즉 ‘죄 아래 팔린’ ‘죄의 법’이 거하는 그 육체에 죄를 정하셨다고 공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은 큰 기만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같다(likeness)’라는 단어를 (타당한 이유로) 그리스도와 우리의 온전한 동질성을 표시하기 위하여 쓰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가 어떠한 경우라도 우리의 죄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그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셨다’는 사실에 입각한 것이다.”(15)

 

이러한 “승리”에 관한 결론을 통하여 위랜드는 그의 독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죄를 정복하라고 권한다: “당신이 누구든지, 어디에 있던지, 그가 바로 당신의 위치에 섰었으며, ‘죄 없었음’을 기억하라. 그를 바라보라. 그를 ‘보라’. ‘죗된 육체의 형상 안에’ 존재하는 그의 의의 진리는 모든 속임수의 먹구름을 몰아내었다. 당신을 유혹하고 있는 죄들이 ‘육체에 정하여’졌었음을 기억하라. 당신은 그를 믿는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다.”(16)

 

(안식일 학교 교과에 수록된 새로운 그리스도론)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77년 허버트 더글러스가 쓴 안식일 학교 교과에서는 예수께서 아담이 죄를 진 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반대로, 남부 미션 대학의 성경 교사로 있던 노르만 굴레이가 쓴 1983년 첫 기 안식일 학교 교과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본성은 타락 전의 것을, 육체적 본성은 타락 후의 것을 취하셨다고 가르쳤다. 굴레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이렇게 두 가지로 이해하는 것은 서로를 강하게 하는 것이라고 증명하려 하였다.

 

그의 견해를 표출하기 위하여 굴레이는 이 확장된 이론을 그의 책 그리스도 우리의 대리자에 자세히 기록하였다.(17)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신이시자 온전한 사람이었다고 믿는다. 우리는 ‘온전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 (1)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타락 전 인성을 가지고 있었던지, 아니면 (2) 타락 후의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것이 옳은가? 그는 두 가지 다 취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 전 인간의 영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었고, 육체적으로는 타락 후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18)

 

굴레이는 이 두 가지 해석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는 엘렌 화잇도 그렇게 믿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섰다: “만약 엘렌 화잇이 그의 죄 없음을 지지하고 있다면 타락-전 사상이 지지되고 있는 것이며, 만약 그녀가 그의 연약한 인성을 지지하고 있다면, 타락-후 사상이 지지되고 있는 것이다.”(19)

 

이러한 설명은 언뜻 보기에 흥미롭게 보인다. 최소한 이 이론은 정면으로 대립되고 있는 두 가지 생각의 장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두 가지 인성을 더한다는 것은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논증한다. 비평과 반대이론이 어드벤티스트 리뷔우의 독자란에 많이 실려있다. 다음은 도날드 K. 쇼트의 글이다.

 

“엘렌 화잇은 ‘타락전의 인성’이라는 단어를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으며, 이러한 시도는 엘렌 화잇이 그렇게 말한 것처럼 말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화잇 부인은 어느 곳에도 예수를 그의 백성들과 분리시키지 않았으며, 타락 전 본성주의와 타락 후 본성주의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 부분도 없다. 어떻게 이러한 혼란이 ‘교회 안의 단일성’이라는 명분으로 나타날 수 있겠는가?”(20)

 

허버트 더글라스는 1983년 크리스마스에 출판될 어드벤티스트 리뷔우에 실기 위하여 “왜 천사들이 베들레헴 위에서 노래를 불렀는가”하는 의미 깊은 제목의 두 기사를 보냈다.(21) 더글라스의 전체적 의견을 재차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가 인용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엘렌 화잇의 글과, 유명한 신학자들 글로부터 인용된 다음과 같은 특별한 표현들을 볼 수 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심,’ ‘타락한 아담의 자리를 대신하심,’ ‘죗된 육체의 형상… 안에 있는 인성, 그리고 모든 자녀들이 받는 그 사단의 시험을 받으심,’ ‘범죄자 아담의 본성,’ ‘인간의 반역적인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 등, 여러 표현들을 보면, 이 학자들과 엘렌 화잇은 구주께서 가지고 있었던 타락되고, 저하된 인간의 능력이 구주를 생각이나 행동으로 범죄 하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는 비록 안과 밖 양쪽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셨지만, 흠 없고 순결하셨다.”

 

다른 항의들은 대총회 안식일 학교부장이었던 H. F. 램톤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그 중 하나는 1983년 1월 19일 캘리포니아에 있는 앤더슨 교회의 지도자들이 보낸 것이었다. 그들은 안식일 학교 교과를 통하여 “미묘하게” 제시된 “심각한 교리적 오류”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우리는 이 교과들이 고의적으로 지지자들을 ‘약화시키고’ 안식일학교 학생들로 하여금, 성경적 원칙과 예언의 신에 기초한 전통적 재림교 신앙에 완전히 반대되는 신신학을 받아들이게 하는 준비를 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23)

 

“1월 15일 교과는, 의도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본성 사상을 편드는 상태에서, 성육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혼란 가운데 처하게 한다.”(24) 또한, 그들이 인용하기 위하여 선택된 엘렌 화잇의 증언들을 다음과 같이 비평하였다: “‘그리스도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은 신신학 개념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사단은 ‘신신학’의 개념을 재림교회 안에 들여오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1950년대에는, 사단이 지도적 신학자들의 그룹을 통하여 이 ‘그리스도론’을 고무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교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은 사단이 안식일 학교를 이용하여 이 일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25)

 

비록 교단의 출판물은 아니지만, 정기 간행물이 현대진리의 음성은 안식일 학교 교과를 통하여 교회 안에 제시된 “신신학”에 의하여 분개한 교인들과 단체들의 편지들을 출판하였다. “재림운동의 근본적인 원칙을 제시한다”는 사명으로 출판된 이 간행물은 1983년 3월 호 전부를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하기 위하여 바쳐졌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허버트 더글러스와 데니스 프리브 같은 저자들의 글들이 사용되었다.

 

(현대진리의 음성 (The Voice of Present Truth))

 

허버트 더글러스가 쓴 글의 제목은 “인간의 원형(The Model Man)”으로 첫 장에 큰 글씨체로 쓰여졌다. 이 글에는 사실 그가 전에 말하지 않았던 것은 없었다. 이 글의 목적은 새로운 진리를 내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옛 진리를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더글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께서는 남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지상으로 반만 내려오지 않으셨다: 그는 동정 어린 천사로서 내려오지 않으셨으며, 모든 인류의 고생과 연약함으로부터 끄덕도 하지 않는 슈퍼맨으로서도 오시지 않았다. 하늘과 땅을 잇는 그 사닥다리는 죄인들이 있는 낮은 곳까지 내려왔다. ‘만약 그 사다리가 단 한 발판 때문에 지상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오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로 당신의 본성을 취함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시대의 소망 311, 312 영문).”

 

근본적으로, 더글러스의 글의 목적은 “예수께서 다른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같은 본성을 취하심으로 인간 가족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오직 그가 죄 짓지 않았다는 것만 제외하고는 진정으로 예수는 진정한 인간이셨다.”(28) 그렇지만 그는 우리처럼 모든 일에 시험을 당하셨다. 그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하여 더글러스는 이 문제에 관한 가장 힘있는 화잇부인의 글을 인용한다.

 

특히 그 중에서도, 더글러스는, 만약 예수께서 정말로 모든 인류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들처럼 그도 시험에 굴복 당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엘렌 화잇의 답변을 다시 제시하였다. “만약 그가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없다. 만약 그가 우리의 인성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인간이 시험 당하는 것처럼 시험 당하실 수 없으셨다. 그가 시험에 굴복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의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하여 싸움을 싸운 것은 엄숙한 사실이다. 그가 받으신 시험과 이루신 승리는, 인류가 반드시 그 모형을 그대로 따라가야 하며, 거룩한 본성의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가려뽑은 기별, 1권 p. 408)” (29)

 

데니스 E. 프리브가 패서픽 유니온 대학의 성경교사로 있을 때에 쓴 글도 또한 주목할 만 하다. 그에게는 “중추적 교리, 즉 그 두 이론의 방향을 설정하는, 그 논쟁의 전체의 근본적이며 전제적인 문제는 바로 ‘무엇이 죄인가’하는 것에 있다. 보라, 복음의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떻게 죄에서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에 있다. 죄가 바로 우리를 잃어버림 바 되게 만들었고, 복음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지를 말하는 희망의 기별이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는 죄의 정의에 대하여 생각하여보지 않고 죄가 무엇인지 안다고 추측한다.”(30)

 

프리브는 먼저 원죄의 문제에 대하여 설명한다. 개혁자들에 의하면, “원죄는 우리가 아담의 아들과 딸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 된다는 사상이다. 이 교리는, 선과 악 간의 어떠한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본성적으로 죄 있는 사람이라고 가르친다.”(31) 프리브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견해 안에서는 연약성, 불완전함, 성향 등은 모두 죄가 된다. 개혁자들이 그들의 원죄의 교리를 예정설의 전제 위에 세웠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고 중요한 요지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예정설을 거절한 상태에서도 아직도 계속 원죄 사상을 올바른 복음전도의 바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인 것이다.”(32)

 

“분명하게, 그리스도는 반드시 당신과 내가 태어나면서 유전 받은 것과는 전혀 다른 죄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죗된 본성은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사상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절대로 우리의 죗된 본성과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33)

 

죄의 본질에 관한 프리브의 견해는 많이 달랐다. 그는 이렇게 믿었다: “죄는 근본적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인간이 하는 선택이다. 죄는 마음이 그 호감 가는 일에 동의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에 이루어진다. 유전된 본성에 관계된 죄를 거론하는 것은 중요한 책임의 범주를 간과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대한 인류의 반역에 참여시키지 않는 한,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항하고자 작정하지 않는 한, 죄는 들어올 수 없다. 죄는 인간의 생활과, 하나님을 대항한 인류의 반역, 고의적인 불순종, 그리고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교란된 상태에 관련된 것이다. 죄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죄에 대한 책임이 관련되어 있다면, 타락된 인간의 본성이 필연적으로 인간을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필연성과 책임성은 도덕적 범위에서 서로 배제적이다. 그러므로 생각과, 말, 또는 행동으로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반역할 때에 죄가 성립된다. 이러한 복음 안에서, 죄는 하나님의 의지에 대항하여 우리가 고의적으로 우리의 죗된 성향을 행사하려는 선택에 있는 것이다.”(34)

 

프리브는 그의 죄의 정의를 그리스도의 인성에 적용하였다. 그는 이렇게 썼다: “만약 죄가 타고난 성질이 아니라 선택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이 되시지 않고도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으실 수 있다. 그는 온전히 죄 없으셨다. 왜냐하면 그의 양심의 선택이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였기 때문이며, 절대로 그의 타락된 본성이 그의 선택을 지배하도록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받으신 유전은 우리의 것과 똑 같았다. 예수가 마리아로부터 인간의 모든 것을 물려받지 못하도록 특별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아담의 죄와 그의 자손들의 죄로 인하여 타락된 인간의 상태로 내려오는 굴욕을 자원하여 당하셨다. 인간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에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의 영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결정적인 노력이 필요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떨어진 그 깊이까지 내려오셔야만 하였고, 그는 자신 안에서 인류를 새로운 생명의 경지로 이끌어 올려야만 하였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또한 우리를 들어올리시기 위하여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다.”(35)

 

그리고 프리브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성,” 또는 아담의 타락 전의 인성을 취하셨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인가를 고려해본다. 그는 “타락에 의하여 영향받지 않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는 인간이 도움이 필요할 때에 옆에 계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 다시 제출한 자들과 예수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격을 만들 것이다… 만약 예수께서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면, 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간격을 메웠을 것이지만, 타락한 인간과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거리를 연결하여야만 하였을 것이다.”(36)

 

“만약, 그렇지만,” 프리브는 이어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나누었다. 그리고 그의 중재의 사업을 통하여 타락한 인간과, 그들이 긴박하게 필요로 하는, 하나님과의 끊어진 간격을 다시 이으셨다. 그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서는, 가장 깊고 온전한 의미에서 우리의 입장으로 들어오셔야만 하고, 온전히 우리와 같이 되셔야만 한다. 타락한 육체가 아닌 다른 어떤 상태에 오셨다면, 이것은 원수에 의하여 도전 받았을 것이며, 우주의 거민들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37)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이렇게, 프리브가 쓴 것처럼, 이해하는 것은, 엘렌 화잇의 분명하게 지지했던, 바로 1888년에 존스와 와그너가 선포하였던 기별이다. “사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애를 이해하는 것은, 타락한 육체 속에서 하나님께 충성하셨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별의 강한 능력이었다.”(38)

 

칭의의 기별의 실제적인 적용과 관련되어, 프리브는 이 문제를 두 가지로 접근한다: “여기서부터 복음의 기별은 우리의 상황으로 이동한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또한 재생시키신다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좋은 기별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하나님의 공포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죗된 인생을 회복하심으로, 차츰, 우리가 그의 형상으로 복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음은 법적인 평결과 변화의 능력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믿음의 열쇠이며, 이 믿음을 통하여 칭의가 받듯이 일어나야 한다. 복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이 연합으로 우리는 의롭다고 선고되는 칭의와 , 계속적으로 자라나는 믿음을 매일 행사하는, 또한 이 것에 의하여 의롭게 되는 성화를 포함한다.”(39)

 

1985년 프리브는 태평양 출판소에서 출판된 진정한 복음과의 직면을 통하여 그의 모든 논증들을 각각 자세히 기술하였다. (40) 여기서는 그 중에서 가장 적당한 한 글을 인용해보겠다: “교회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분야를 공식적으로 정의 내리지 않았다-죄, 그리스도, 그리고 완전. 이 분야에 대한 우리의 불확실하고, 분리된 견해 때문에, 우리는 지난 40년 간 신학적 불확실함과, 좌절의 사막에서 헤매었다. 더욱이 우리가 이 분야들에 대하여 대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기별과 사명에 대하여 확실히 설명할 수 없었다.”(41)

 

여러 다른 그리스도론간의 대립적인 요소들을 해명해 줄 책이 1984년 안식일교 그리스도론 안의 대립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에릭 클라우데 웹스터가 쓴 박사학위 논문으로서 남아프리카 케입 지방의 스텔렌보쉬 대학교에서 통과되었던 책이다.

 

(안식일교 그리스도론 안의 대립)

 

유능한 외과 의사처럼 에릭 클라우데 웹스터는 이 주제에 관한 안식일교 그리스도론의 핵심을 여러 책을 통하여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먼저, 첫 장에서 웹스터는 여러 역사적 배경에 따른 그리스도론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 다음 장에서, 그는 가장 저명한 안식일교의 4명의 저자들의 그리스도론을 분석하였다: 엘렌 화잇, 엘렛 J 와그너, 에드워드 A. 헤펜스터, 허버트 E. 더글라스: 두 명의 초기 선구자들과, 두 현대 저자들. 마지막 장에서 그는 안식일교회 그리스도론의 서로 다른 경향들과 대립들을 대표하고 있는 이 4 저자들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요약하였다.

 

우리는 이미 이들의 그리스도론을 검토해 보았으므로 재 언급은 피하겠다. 흥미롭게도 웹스터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개인적인 특별한 식견이 있었다. 그는, 예를 들어서, 엘렌 화잇과 헤펜스터의 이론을 존재론적 그리스도론으로, 와그너의 이론을 추론적, 더글라스는 기능적 그리스도론으로 분류하였다.

 

웹스터는 각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자신이 생각하기에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축출하였다. 엘렌 화잇, 와그너, 헤펜스터에게는 예수의 개성이, 더글라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업이 중심이었다. 각 저자들이 추구하였던 주목적에 관하여 그는 설명하기를, 엘렌 화잇은 하나님의 성품의 계시에 관하여 강조한 반면, 와그너는 인간 안에서의 거룩함의 완성을 강조하였고, 헤펜스터는 구속의 주제를 중점으로, 더글라스는 그리스도를 닮는 문제를 다루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웹스터는 이 저자들에 관하여 우리가 지금까지 내린 결론들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그가 엘렌 화잇에 관하여 내린 결론은 어떤 중요한 문제들에서 달랐다: “죄에 관하여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께서는, ‘전가된 죄와 세상의 죄악과 함께, 순수한 허약성과 인간의 연약함’을 지니신 채로, 타락 후의 인간의 본성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죄의 정죄와 형벌을 대신 지셨으나, 그는 죄 없는, 타락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은, 죗된 경향과 성향 또는 죄의 흔적이 없는 본성 안에 있었다고 하였다.”(44)

 

웹스터는, 그리고, 엘렌 화잇의 타락후의 입장을 재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허약성”을 엘렌 화잇의 표현인양 한 인용문 안에 넌지시 집어넣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엘렌 화잇은 이러한 표현을 절대로 사용한 적이 없다; “대리적으로”라는 말을 한번도 쓰지 않은 것처럼 엘렌 화잇은 이 말을 절대로 그녀의 글에 쓴 적이 없다.

 

그의 개인적인 견해를 표출함에 있어서 웹스터는 근본적으로 헤펜스터와 의견을 같이 한다.(45)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성육신 하셨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신이시기 위하여 그의 신성을 사용하셨고,… 완전한 인간이시기 위하여 그의 인성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기 전이 아니라, 아담이 타락한 후의 인성을 가지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는 유전의 법칙에 의하여 영향을 받으셨으며, 자신을 연약함과, 허약함, 그리고 유혹 아래 두셨다.”(46) “그러나,” 웹스터는 덧붙여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한 인성 안에 오셨지만 그의 인성은 원죄에 더렵혀지지 않았으며, 죄에 대한 어떠한 성향과 경향 없이 태어나셨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절대적인 결백함에 대하여 오해할 필요가 없다.” (4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만 빼고, 자의로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시기로 선택하셨으며, 또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로 오심으로, 우리의 죄악과 형벌과 분리됨을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심으로, 고통과 외로움과 잃어버림의 공통된 경험을 취하셨다.”(48)

 

웹스터의 연구는 현재 안식일교회 그리스도론적 대립의 핵심적인 문제를 이해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금 광산이 될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타락후의 입장은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호의적인 표를 던진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웹스터의 입장 안에서 대립되는 것도 있다. 한쪽으로, 그는 “예수께서 유전법칙의 결과를 받으셨다”고 하였으나, 다른 한쪽으로는 그가 “원죄에 영향받지 않았으며, 죄에 대한 어떠한 성향과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한 성향과 경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오직 “순수한 허약성”만 유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한 우리들의 반대 이론은 웹스터에게도 적용된다. 사실, 이러한 언급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엘렌 화잇의 글과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면으로 만난 두 그리스도론)

 

이 논쟁에 응답하여, 미니스트리 잡지의 편집인인 J. 로버트 스팽글러는 이 문제에 관한 두 전문가들에게 재림교회 목회자들을 위하여 그들의 견해를 써줄 것을 부탁하였다. 1985년 6월 편집인 사설에 그는 다름과 같이 적었다: “여러 해 동안 우리는 고의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글들을 실지 않았다. 1978년 4월 미니스트리의 편집인 사설은 이 문제에 대한 나의 개인적 갈등을 담고 있다. 나는 나의 확신을 표현하기에 내가 부족함을 느끼고 있음을 지적하였었다.”(49)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의 본성에 대한 이해에 교회의 흥망이 달려 있다고 진실 되게 믿는 사람들의 견해와, 이 문제들에 대한 대화와 재개된 인쇄물들의 견해 안에서, 나는 양쪽의 견해들이 다시 검토되어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리는 두 재림교회 학자들의 다소 긴 글들을 내놓는다.”

 

스팽글러는 두 해석 안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요소를 강조하는데 무척 고심하였다: “양쪽 모두,  우리 구주께서는 완전한 인간이시자 완전한 신이셨으며,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받으셨고, 죄에 굴복 당하여 구속의 경륜이 완전히 중단될 수도 있으셨으나, 그는 한번도 죄를 짓지 않으셨다. (크게 보면, 이 다른 견해들은 죗된 본성을 이루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관한 서로 다른 이해에 귀착되는 것 같다. 이 논쟁은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분리되는 요소들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공통적인 핵심들을 검토한 후에, 그는 이 논쟁에 걸려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을 숙고하여본다. “구주께서 인성 안에서 다른 모든 아담의 자녀들이 시작한 것처럼 시작하셨는가? 그리스도께서 타락 전 또는 후의 인성을 취하셨는가? 만약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성이 영향을 받았다면, 그리스도의 인성도 그렇게 영향을 받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가? 만약,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인성을 받으셨다면, 그가 우리와 비교하여 더 유리한 상태에 있었는가? 그가 대리적으로 타락된 인성을 취하셨는가? 그가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면, 그 ‘타락한’ 요소는 육체에만 연결되어 있고 그의 도덕적인 성격과는 연결되지 않았는가? 기독교회가 2000년 간 고투하여 온 그리스도의 본성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가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정확하고 최종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오점 없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가 (물론, 죄 짓지 않은)?” (52)

 

이러한 물음들이 그 두 임명된 신학자들이 답변해야 할 문제들이었다. 작가들의 영향력을 피하기 위하여, 그 두 보고서들은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다음 호에 그 실명들이 공개되었다: 노르만 R. 굴레이, 허버트 더글라스.

 

1. 굴레이: 타락 전의 인성

 

굴레이는 타락 전의 입장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이 견해를 동조하는 다른 사람들의 관습과는 달리, 그는 엘렌 화잇의 증언에 그의 입장을 기초하지 않았다. 그의 연구는 연대기적 성경 구절의 해석에 중점을 두었다. (53) 그는 모든 교리적 진리는 반드시 성경에 입각해야 한다고 믿었다.

 

굴레이는 헬라어인 sarx, hamarita, isos, homoioma, monogenes, prototokos와 “아브라함의 자손” (히브리서 2:16), “다윗의 자손” (로마서 1:3)이라는 중요한 표현을 정의하기 위하여 언어학적, 신학적인 연구를 하였다. 그의 요점은 이렇다: “이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에 육적으로는 그 시대의 다른 사람들과 같은 본성을 취하셨던 반면, 영적으로는 죄 없는 본성을 취하셨다는 놀라운 증거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54)

 

그는 오직 한 구절만 육체와 죄와 직접 연결된다고 주장하였다:“이것은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7). “그러므로 ‘sarx’가 반드시 ‘죗된’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3:16에는 sarx가 아니라 soma라고 쓰였다. 이 의미는 단순히 ‘육체로됨’이며, ‘죗된’이라는 의미가 아니다.”(55)

 

그리고 굴레이는 “예수께서는 죄로 영향받은 육체적인 몸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만 다른 인간들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있어서 그분만이 오직 죄 없었다.”(56)

 

죄에 관해서, 굴레이는 이것을 단지 “행동”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너무 표면적인 정의이다. 비록 죄가 잘못된 선택들, 그러므로 잘못된 행동들, 그리고 심지어는 생각까지도(마태복음 5:28) 포함하고 있지만, 이것은 또한 본질도 포함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처음 행동으로 또는 생각으로 죄를 짓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구세주가 필요 없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죄의 비참한 결과와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에 (요한복음 14:6; 사도행전 4:12) 큰 해를 가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만약 그리스도께서 죗된 육체로 오셨으나 죄에 굴복 당하지 않으셨고, 만약 어떤 사람이 그렇게 똑 같이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필요 없게 된다는 의미도 된다.”(57)

 

시편 51:7; 22:10; 139:13 등을 인용하면서, 굴레이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죄 없다는 사실이 무염시태설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위하여 구제의 역사를 할 수 있다면, 왜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기 위한 그 모든 고민들을 당하실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만약 마리아가 그리스도 없이 완전하였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업에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58)

 

성경의 언급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특유하고”-monogenes; “처음 태어난”-prototokos 자였다. 분명히 이러한 표현들은 직역을 해서는 안 된다고 굴레이는 지적한다. “이것들은 그가 한 종류 중 하나였다는 의미이다. 그의 사명은 그 종족의 새로운 아담, 즉 새로 처음 태어난 자, 또는 머리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를 우리의 대표자, 대제사장, 그리고 이 대 쟁투의 중보자가 될 자격을 갖추게 한다. 예수께서는 태어나심으로가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하여 우리의 모본이 되신다… 우리가 죄인으로서 태어날 때에, 그는 구세주로서 우리의 필요가 되시기 위하여 죄 없이 태어나셨다.”(39)

 

굴레이에 의하면 성경에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언급한 것은 “그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가 (죄 없는 또는 죗된) 태어난 유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성이 아니라 사명을 가리킨다.”(60) “그가 죽기 전까지는 그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며,’ ‘우리를 위하여 죄가’ (고린도후서 5:21, KJV)되시지도 않으셨다. 그 시각까지 죄가 그를 아버지로부터 분리시키지 아니하였으며, 이 분리가 그로하여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마태복음 27: 46)라고 부르짖게 하였다. 인간 예수께서는 죽으실 때에 그의 사명 안에서 죄가 되었지, 그의 태어난 본성 안에서 된 것이 아니다.”(61)

 

그의 “Doxology”에서 굴레이는 강조하여 말하기를 “그리스도론은 신학의 중심이자 심장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큰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진정한 인간의 가장 좋은 계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인간으로 독특하다. 그는 죄에 연약하여진 육체와 연합된, 그러나 양쪽 본성 안에서 동등하게 죄 없으셨던, 죄 없는 신성이셨다.”(62)

 

굴레이는,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론은 숭배와, 순종과, 찬미로만 완성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명상함으로 우리가 그를 닮게 된다(고린도후서 3:18)고 설명한다. 또한, 굴레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그리스도론은 다음의 외침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나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오직 이러한 종속적인 연합에 의하여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있다-태어날 때의 본성이 아니라.”(63)

 

그의 선배들은 그들의 주장을 주로 엘렌 화잇의 글에만 의지하였었으나, 오직 성경에만 입각하여 전개했던 굴레이를 어느 누구도 비방하지 않을 것이다.(64) 그러나 그의 주석은 선구자들과 엘렌 화잇과 대립을 이루는 Orthodox 신교 신학자들과 비슷하다.

 

2. 더글러스: 타락 후의 인성

 

허버트 E. 더글러스가 그의 독자들에게, 만약 그들이 1950년대 전에 살았었다면 현재 일어나는 논쟁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꽤 일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20세기의 후반기가 시작되기까지 안식일교 대변자들은 예수께서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시종일관 주장하였기 때문이다.”(65)

 

더글러스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라는 문제로 그의 독자들을 주목시킨다. 그의 의하면, “구속의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왜 되셨는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성육신은 신비이다. 그러나 이 신비는 왜 신과 인간이 섞여졌는가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데에 있다.”(66)

 

사실, “이 문제는 왜 그가 그러한 길을 걸으셨는가 하는 질문을 우리가 던지기 전까지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를 올바르게 대면하지 않으면, 모든 성경의 다른 주제들이 곡해되어질 수 있다.”(67) 그러나, “왜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의 모든 아기들처럼, 아담의 ‘에덴에서의 순결함’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의 상태를 취하셨는가?”하는 질문을 던지게 될 때에, 구속의 경륜은 단순하게 나타난다.(68)

 

여러 비 안식일교 신학자들도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전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전통적인 입장에 도전하였으며, 타락 후의 입장을 취하였다. 더글러스는 이들 중 15명의 이름을 적었다.(69) 더글러스는 말한다: “이들 중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생각이나 행동으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께서 죗된 육체를 취하셨으므로 구세주가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죗된 육체라는 단어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든 면에서 영향을 받은 인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본성은 안과 밖으로부터 오는 시험에 연약하다. 초기에 기독교 정교 안에 널리 퍼져 있었던 그리스의 이원론에 반하여, 육체는 악이 아니며 죄 자체도 아니다. 비록 육체는 도덕적이지 않지만, 인간의 의지가 성령에 의하여 계속해서 지도 받지 않을 때에, 육체는 죄에게 장비와, 기회와 자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죗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죄인이 되지는 않는다.”(70)

 

예수께서 죄 없는 본성을 취하셨다는 가르침의 의도가 무엇인가? “그리스도께서 유전적 연약성으로부터 면제받은 상태에서 태어났다고 가르치는 것은, 죄와 육체의 본질을 혼동하였던, 로마 천주교회가 시작한 그 길로 내려가는 것이다… 마리아와 예수 사이에서 인간 유전법칙이 끊어졌다는 성경 상 증거는 없다.”(71)

 

인자(마태복음 8:20; 24:27, 등)라고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과, 바울이 그리스도와 아담사이에 확립한 유추법만큼(로마서 5장, 고린도전서 15장) 예수와 인류의 결속을 잘 나타내는 표현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 5:12절을 모든 남녀가 죄인으로서 태어난다는 것을 증명하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논증이 아니다. 그는 단순히 죄의 물결이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그 분명한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담의 자손들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는다. 예수께서 아담의 타락전 인성을 취하셨다는 가설은 바울의 병행적 비교와 결속적 원칙을 무너뜨린다. 바울의 아담-그리스도 유추법은 오직 예수께서 타락한 인성 안에서 협력하실 때에 가능해진다. 즉 오직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가 있는 곳, 즉 ‘아담 안에서,’ 죄를 만나서 안과 밖에서 오는 모든 이기적인 욕구를 정복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안에 있는 자들이 그의 구속 사업의 결과와 협력하여 연합되기를 계획하셨다. 그러나 이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그는 타락한 상태 속에 있는 인류와 결속적으로 연결되었어야 하였다.”(72)

 

더글러스는 바울이 로마서 8:3절을 쓰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그 단어를 선택하였다고 지적한다. 왜 그가 “en sarki hamartias” (죗된 육체 안에서)라고 쓰지 않고, ”en homoiomati sarkos hamartias” (죗된 육체의 형상으로)라고 표현하였는가?(73) 더글러스는 두라함 대학의 신학과 교수인 C.E.B. Cranfield의 글을 인용한다: “그 의도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sarx hamartias에 대한 의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 진실로 sarx hamartias를 취하셨지만, 그는 절대로 sarx hamartias나 그보다 더 한 것이 되지 않았고, 성령에 의하여 존재하는 sarx hamartias도 되시지 않았다.” “우리는 바울의 생각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homoioma를 쓰는 문제에 대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와 똑 같은 인성을 취하셨으나, 그의 경우 인성이 그의 모든 것이 되지는 않았다-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끊어지지 않으셨다는 것이다.”(74)

 

히브리서에 나타난 (2:11-18; 4:5; 5:7-9) 그리스도론에 관한 성경절을 분석하면서, 더글러스는 대 제사장은 인성과 결속한 상태에 있어야 함을 나타냈다. “히브리서의 가장 중요한 주장의 하나는 바로 대 제사장의 자격은 그가 얼마나 그가 중보하는 자들과 가깝게 동질화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정신적으로나(시험) 육적으로(결성과 죽음) 인간의 상태와 진정으로 동질화되었기 때문에 완전한 대 제사장이 되신다.”(7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낳아갈 것이니라 (히브리서 4:15, 16).”(76) “예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연약성과 불리한 점을 가지시고도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 ‘나아간다면’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께서 의지하셨던 그 도움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다.”(77)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대 제사장이 되시기 위해서, 히브리서는 다음을 요구한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능력(equipment)에 관해서는 모든 면에서 인간과 같이 되어야 한다 (결속의 원칙). 그러나 인간의 행동(performance)의 관점에서 볼 때에 그는 죄인으로서 그들과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성육신 하실 때에, 구세주께서는 모든 근본적인 면에서 인간이 되셨다. 그는 모든 인간의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육신 하실 때에 존재하였던 인성을 그대로 취하심으로 예수께서는 하늘과 땅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그는 모든 인간이 의지할 수 있는, 하늘과 땅에 안전하게 심어진 사다리가 되셨다.” (78)

 

더글러스는 여기에 어떠한 의심의 그림자도 없다고 말한다: “20세기의 후반기가 시작되기까지 안식일교 대변자들은 예수께서 타락한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다른 많은 비 재림교회 학자들처럼, 그들은 예수께서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고 믿는 것은 또한 그가 죄인이었다고 믿는 것이며, 그도 구세주가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라는 반대에 당황하였을 것이다.” (79) “어떤 경우에도 예수에게는 죄의 흔적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로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악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죄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욕망들을 이기적인 방법으로 채우려하는 실제적인 시험들과 유혹들을, 의심할 바 없이, 우리 구주께서는 이것들에 굴복 당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안에서 경험하셨다. 그러나 ‘한 순간이라도’ 예수께서는 그 유혹으로 인하여 죄를 마음에 품거나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는 또한 잠재하는 유전적인 죗된 성향에 대항하여 자아와 혹독한 전쟁을 치르셨다. 그러나 그는 성향으로 하여금 죗되게 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야고보서 1:14, 15를 보라). 모든 다른 인간이 ‘예’라고 말할 때에, 그는 ‘아니다’라고 말하였다.”(80)

 

끝마치면서, 더글러스는 모든 연구를 그리스도의 인성에 이끌 또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는가?” “그가 오신 이유가 그가 오신 길을 결정한다-그렇지 않다면 그의 오심은 그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영광스럽게 악을 물리치셨다. 그는 진정한 대리자, 인류의 선구자와 모본이 되셨다. 그는 그가 구원하러 오신 남녀들이 받은 똑 같은 유전적 법칙 안에서, 어떠한 것도 면제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 모든 것들을 최악의 환경가운데서 성취하셨다.”(81)

 

더글러스의 연구도 굴레이의 것처럼 모두 신약성경만을 이용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의 결론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더글러스는 엘렌 화잇의 증언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27명이 재림교회 학자들과 그들의 글들을 인용하였다.(82)

 

(논제들과 반제들에 대한 상호간의 비평)

 

후에 미니스트리 편집장은 그 두 작가들에게 상대방의 글들을 비평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것을 1985년 8월 호에 실었다. (83)

 

먼저 시작한 더글러스는 굴레이의 견해가 1950년대에 처음으로 재림교회에 등장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지난 30년 동안 교회 안에 충격과 신학적 분리를 조장한 장본인이다.”(84)

 

더글러스는 지적하기를, 굴레이는 “죄의 결과로 인하여 낙후된 인성 안에서 유전 받은 지체와 능력을 분리하지 않은 것이다.”(85) 사실, 굴레이가 제시한 예수의 인성은 “예수께서 타락하기 전의 인성을 취하셨다는 거룩한 육체설과 일치된다. 그 운동의 참가자들은 예수께서 마리아로부터 죄로 인하여 연약하여진 육체적 본성을 물려받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성령으로부터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영적인 본성을 받았기 때문에 유전법칙의 모든 결과들을 물려받지는 않았다고 믿었다.” (86) 현재, “성육신에 관한 한 잘못된 이해가 매우 불행한 분명한 결과를 맺었다. 특히 진리와 오류를 섞으려할 때 더 그렇다.”(87)

 

구원론 관하여 더글러스는, 굴레이가 자기 자신의 그리스도론에 의하여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나타냈다. “나에게는, 왜 예수께서 인간이 되셨는가 하는 주제는 오직 대 쟁투의 관점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정교-신교주의와 천주교 주의 안에는 없는 것들이다. 예수께서는 용서하시기 위하여 피가 필요한 화난 하나님을 만족시키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며, 신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나, 아담이 죄 짓지 않고 순종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이려고 오신 것도 아니다.”(88)

 

굴레이는 이에 맞서서 “예수께서는 태어남으로 죄인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며, 그 이유는 ‘죗된 육체 안에 태어나는 것이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더글러스의 글을 논박하였다. (89)

 

굴레이에 의하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 순종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처럼, 아담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된다.’ 정확하게 더글러스는 로마서 5장의 비교를 간과하였다. 우리는 태어남으로 죄인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다. 오직 두 아담만 죄 없이 이 땅에 들어왔다. 다른 모든 자들은 죄인으로서 태어난다.”(90)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탕자로 온셨던 것이 아니라, 신인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으로서,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셨다 (골로세서 1:15; 히브리서 1:1-3)” (91) 더욱이, “성향에 관한 더글러스의 견해는 너무 피상적이다. 성향은 죄의 행동 전에 타락한 본성 안에 존재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성향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그 안에서 어떠한 악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14:30)… 하나님의 창조적 형상은 타락과 전혀 관계가 없다. 이것은 인간의 형상에 대한 것이다.”(92)

 

굴레이는 “그 안에 ‘죄의 흔적이나,’ 어떤 ‘악한 성향’ 또는 우리들처럼 죄에 연약하여진 의지가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타락 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한 더글러스의 모순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면제는 그와 우리의 동질성을 파괴하는 것이다.”(93)

 

“더글러스는 왜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오셨는가 하는 문제가 어떻게 인간이 되셨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가에 대하여 말하였다…그러나 더글러스가 말한 6가지 이유는 모두 예수께서 죄로 연약하여진 육체와 죄 없는 영을 가지고도 다 만족될 수 있다.”(94) “우리는 신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인성에 결속된 그리스도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단지 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셨다.”(95)

 

마치면서, 굴레이는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시험받아 실패할 수 있었던 실제적인 인간이셨으며, 그가 하나님께 의지하였던 것은 우리에게 모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죄 없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더글러스의 예수는 지나치게 인간이 아닌가? 그가 올바르고 적당하게 그의 신성을 인정하였는가?”(96)

 

이 상호간의 비평은 그 전과 다름이 없었다. 각 저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고집하였을 뿐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 논쟁은 단지 의미론적인 것이었다: 이 두 저자들은 근본적인 성경과 신학적 단어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과한 것뿐이었다.

 

(미니스트리의 독자들로부터 온 견해와 질문들)

 

범위를 더 넓히기 위해서, 미니스트리는 독자들에게 자리를 할당하였다. 가장 중요한 논평은 1985년 12월과 1986년 6월에 출판되었다.

 

아주 면밀한 비평을 한 조 E. 크루즈의 글은 특별한 지목이 필요 된다. (97) “그는 [굴레이] 죄와 죄의 영향을 혼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죗된 본성과 죄 자체를 동일시하는 경지까지 갔다… 죗된 본성 자체가 죄 자체나 죄를 짓는 것과 같기 때문에, 모든 아기들은 그들이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전에도 구속이 필요 된다. 이 의미는 예수의 본성이 다른 모든 아기들과 다르지 않았다면, 그도 태어나면서 죄 있게 된다는 것이다.”(98)

 

“그가 죄와 죗된 본성에 대하여 혼동하였던 것처럼, 그는 죄의 결과와 죄 자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지는 것과 타락한 본성, 악한 성향과 자연적 성향을 혼동하였다. 그는 악한 성향을 ‘죄에 기대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악한 성향들은 (죄에 기대는 것) 두 방법으로 습득되어진다: 죄를 짓는 행동과, 죄인으로 태어남으로. 그리스도는 둘 다 아니었다’”고 썼다.(99)

 

“나는 예수께서 죄를 졌다거나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을 전혀 만나보지 못하였다. 또한 예수께서 ‘죗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는 사람도 만나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죗된 본성을 가지고 우리처럼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께서 ‘자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믿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자연적인 성향이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경향이다. 죄는 한쪽에 포함된 것이지만, 다른 쪽에는 아니다. 성향에 굴복하기 전에는 죗되지 않다.”(100)

 

아니말 리베라(Anibal Rivera)라는 한 다른 독자는 예수의 인성에 관하여 안식일교회 안에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경악한다.(101) “우리들의 선구자들과, 예언의 신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서 서로 대립되지 않았다. 이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일요일을 지키는 것이 다 옳다고 믿는 것과 다름이 없다. 분명히 우리의 역사적 입장에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102)

 

어떤 독자들은 제 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안에서 견고히 설립된 교리에 관하여 찬 반론을 쓰는 기사가 미니스트리에 났다는 것 자체를 놀랍게 생각한다. (103) 예를 들어서, 다음은 오스트리아 사람인 R.R.D. 마크가 쓴 글이다: “엘렌 화잇이 사망하기 사분기 전에 나온 안식일 학교 교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다고 강조하였으며, 엘렌 화잇도 그 공과를 공부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공부하라고 하였으며, 이 주제에 대한 그러한 그르침에 관하여 한번도 반대하지 않았다. 1909년 둘 째기 공과 8쪽을 보라: ‘그 거룩한 씨는 하나님의 영광을 죗된 육체 안에 구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는 어떠한 육적인 성향에 대하여도 완전하고 절대적인 승리를 이룰 수 있었다.’”(104)

 

캘리포니아에 사는 에델 와일드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하였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본성으로 왔다면 인간들은 그의 임재로부터 도망하였을 것이다. 죄는 아담의 영광을 빼앗아 갔으며, 그는 자신이 벌거벗었음을 알았다. 모세의 얼굴은 적은 양의 하나님의 영광과 순수함으로 빛났으며, 사람들은 그를 무서워하였다. 그는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가려야만 하였다. 그가 사람들 가운데서 걸었을 때에는 인성 안에 가려져 있었던 그 영광으로 오실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위와 산들 아래 그의 영광으로부터 숨으로 할 것이다. 그 영광은 악한 자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것과 같은 본성 안에서 거하셨으며, 모든 유혹을 극복하셨다.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계심으로 그와 같은 것을 네게 이루실 수 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자.”(105)

 

(토마스 데이비스의 또 다른 견해)

 

같은 미티스트리 잡지에 토마스 테이비스는 그의 책 예수께서 우리와 정말로 같았을까?에 실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중간적 견해를 폈다. (106) 그는 그의 견해가 더글러스와 굴레이의 해석간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것이며, 양쪽에서 내린 문제들에 대한 적당한 해결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히브리서 2:17절에서 예수께서 ‘그의 형제들과(거듭난, 성화된 자들) 모든 면에서 같았다’고 읽는다. 나는 이러한 연결이 문체적으로 틀리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우리는 단지 진술 순서의 법칙을 적용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뜻은 단순히 한 문장 초기에 먼저 언급된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을, 다른 특별한 지적이 없는 한, 뒤에도 계속 유지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에 의지하여, 우리는 개심한 사람의 것과는 다른, 거듭난 사람의 본성으로 성육신화 되었다는 사실에 중요한 요지가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고안 안에서 미니스트리에 논의된 그 두 견해가 연결되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107)

 

데이비스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온전한 인성을 가진 인간이 되셨다 (온전한 신이시면서 동시에). 그러므로, 육체 안에서, 그는 인성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리처럼, 죄에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 아래서, 시험의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에서 그는 타락하지 않은 마음과 정신과,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께 온전히 또한 계속적으로 의지하였고, 성령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과 같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요지에서, 개심한 자들과 예수께서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108)

 

이러한 해석은 매우 흥미롭게 보인다. 그러나, 히브리서 2장의 문맥에 따르면, “형제”라는 단어가 엄격하게 개심한 자들을 가리킨다는 생각에 문제가 제시된다. 게다가, 예수와 그의 “형제”들을 비교한 것은 그들의 영적인 비슷함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나눈 “피와 육”의 자연적인 비슷함을 비교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언급한 “모두 한”(11절) 근원을 가지고 있는 “자녀들”(14절) 모두를 위하여 예수께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1절).

 

(참고문헌)

1See our chapter 12. .

2Robert J. Wieland, How Could Christ Be Sinless as a Baby? (Chula Vista, Calif: 1977)

3_, Answers to Some Questions (Chula Vista, Calif.: 1979).

4_, The Broken link (Kendu Bay, Kenya: Africa Herald Publishing House, 1981). This book was also printed in Australia by Elijah Press. This study had already been the object of a brochure published in 1975, at the time when the committee on righteous- ness by faith was held at Palmdale.

5Ibid., p. 2.

6Ibid.

7Ibid., p. 5.

8Ibid., pp. 9-11.

9Ibid., pp. 11-14.

10Ibid., pp. 14-16.

11Ibid., pp. 16-19.

12Ibid., pp. 33, 34.

13_, Gold Tried in the Fire (Mountain View, Cali£: Pacific Press Pub. Assn., 1983).

14Ibid., p. 73. .

15Ibid., p. 75.

16Ibid., p. 77.

17Norman R. Gulley, Christ Our Substitute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82).

18Ibid., p. 33.

19_, in Adventist Review, June 30, 1983.

20Donald K. Short to William G. Johnsson (editor of the Adventist Review) July 4, 1983. Quoted in Bruno W. Steinweg, The Doctrine of the Human Nature of Christ, p. 21.

21Herbert E. Douglass, in Adventist Review, Dec. 22 and 29, 1983.

22_, in Adventist Review, Dec. 29, 1983.

23The Voice of Present Truth (platina, Cali£: review published by Unwalled Village Publishers, 1983), p. 13.

24Ibid.

25Ibid., pp. 18, 19.

26Ibid.,p.l.

27Herbert E. Douglass, in The Voice of Present Truth, p. 1.

28Ibid., pp. 1, 2.

29Ibid., p. 2. (Italics supplied.)

30Dennis E. Priebe, in The Voice of Present Truth, p. 12.

31Ibid., p. 13.

32Ibid.

33Ibid.

34Ibid., p. 14.

35Ibid., pp. 14, 15.

36Ibid.

37Ibid., p. 15.

38Ibid.

39Ibid.

40_, Face to Face With the Real Gospel (Mountain View, Cali£: Pacific Press Pub. Assn., 1985).

41Ibid., p. 9.

42Eric Claude Webster, Crosscu”ents in Adventist Christology.

43Webster was born on August 26, 1927, in South Mrica. After finishing his theo- logical studies at Helderberg College, near Cape Town, he received a Master ofDivinity from Andrews University .Since 1948 he has ministered in the Adventist Church in var- ious capacities.

44_, Crosscurrents in Adventist Christology, p. 156. The expression “innocent in. firrnities” has to be atttibuted to Henry Melvill. See our chapter 14.

45Ibid., pp. 450-452. See suggested propositions made by Webster in his conclusion pp. 450-452. .

46Ibid., p. 451, propositions 8 and 9.

47Ibid., proposition 10.

48Ibid., proposition 11.

49RobertJ. Spangler,in Ministry, June 1985, p. 24.

50Ibid.

51Ibid.

52Ibid.

53Norman R. Gulley made a study of the Ellen G. White texts in the Adventist Review, June 30, 1983.

54_, in Ministry, June 1985.

55Ibid.

56Ibid.

57Ibid.

58Ibid.

59Ibid.

60Ibid.

61Ibid.

62Ibid.

63Ibid.

64See Ministry, Apri11957; Questions on Doctrine, Appendix B, pp. 647-660.

65Herbert E. Douglass, in Ministry, June 1985.

66Ibid.

67Ibid.

68Ibid.

69Ibid.

70Ibid.

71Ibid.

72Ibid.

73Ibid.

74Ibid. The quotation is from C.E.B. Cranfield, The Epistle to the Romans, International Ctitical Commentary (Edinburgh: T. T. Clark, Ltd., 1980), vol. 1, p. 379.

75Ibid.

76Ibid.

77Ibid.

78Ibid.

79Ibid.

80Ibid.

81Ibid.

82Ibid.

83Ministry, August 1985.

84Ibid.

85Ibid.

86Ibid.

87Ibid.

88Ibid.

89Ibid.

91Ibid.

92Ibid.

93Ibid.

94Ibid.

95Ibid.

96Ibid.

97Joe E. Crews, in Ministry, December 1985.

98Ibid.

99Ibid.

100Ibid.

101Anibal Rivera, in Ministry, December 1985.

102Ibid.

103Ibid.

104R.R.D. Marks, in Ministry, June 1986.

105Ethel Wildes, in Ministry, June 1986.

106See our chapter 12.

107Thomas A. Davis, in Ministry, June 1986. 108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