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성소 뜰에서 – 칭의의 경험
D. 속죄제와 새 언약의 경험
우리는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는 사람의 마음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 조건이나 내용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례와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면 그들을 당신의 나라와 백성들로 삼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약속인 것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것인데,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이루지 못하였다.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이 언약을 그들의 생애에 이루는 자들이 곧 참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요, 우리는 그들을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고 있으며, 사도 바울은 그들을, 다시 말해서, 그 언약을 이루는 교회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갈라디아서 6:14-16.
여기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점은 참으로 거듭난 자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개심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심령이 준비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고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로마서 8:7,4). 참된 거듭남을 화잇 여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설명하여 주셨다.
“사람이 거듭날 때 마음은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며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과도 일치된다. 이 강력한 변화가 죄인에게 생기면, 그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죄악에서 거룩함으로 범죄와 반역에서 순종과 충성으로 옮겨지게 된다.”마라나타, 235.
“이전의 본성, 곧 혈육으로 나고 육신에 속한 의지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낡은 방법들, 유전적인 기질들, 이전의 습관들은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은혜는 물려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듭나는 것은 새로운 동기와 새로운 취미와 새로운 성향을 갖는데 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생애가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었다 … 진정한 개심은 악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유전적이거나 습관화된 성향들을 변화시킨다.” 마라나타, 241.
이러한 진정한 개심의 경험이 바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속죄제의 경험에서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부어질 때에(로마서 5:5)계명을 지킬래야 지킬 수 없이 타락하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하며 순종하기를 즐기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재창조의 신비인 것이다. 이것은 그러므로 이론이 아니라 경험인 것이다. 죄인들이 이러한 영적인 재창조의 경험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속죄 제사를 고안하신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매일 주님의 은혜로 유지해 나가야 하는데 그것을 가르켜 우리는 성화라고 부른다. 필자는 이 진리를 뼈속 깊이 새기게 하는 어릴적의 한가지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다음의 나의 간증이 독자들로 하여금 새언약의 경험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국민학교 5학년 때라고 생각이 된다. 내가 동네 친구들과 제일 즐기던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던 어느날이었다. 우리는 대나무를 쪼개어 칼을 만들고 손잡이를 종이로 그럴싸하게 만들어 달고는 또다시 나무들을 휘어서 활들을 만들었다. 모래들을 퍼 와서 성을 높다랗게 쌓고는 돌들을 주어 모아다가는 총알들과 대포알들로 변신시키어 두었다. 우리들은 돌격 소리와 함께 일제히 성에서 뛰어나가 칼 싸움도 하고, 달려오는 적군들을 향하여 활들을 쏘아 대었다. 그리고는 돌들을 서로 던져대면서 총알과 대포알이 날라가는 양 신나 하였다. 워낙 정신 없이 전쟁놀이를 하다 보면 서로 다치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전쟁놀이는 위험하니 제발 하지 말라는 당부가 매일의 일과이었다. 필자의 부모님들도 예외 없이 전쟁놀이에는 참가하지 말라는 부탁의 말씀을 여러 번 하신 터였다. 특히 나의 어머님은 돌 던지는 전쟁놀이 일랑은 다시는 하지 말라고 엄히 당부한 바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동네 친구들이 신나게 뒹굴면서 뛰어 다니며 함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더군다나 부모님 말씀이 무서워서 뒤로 빼는 작자들은 비겁하고 나약한 배신자들로 취급 당하기 때문에 그 유혹이란 여간 견디기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날도 여전히 유혹에 져버린 나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정신 없이 전쟁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우리 진지를 향하여 달려오는 한 적군을 향하여 돌로 된 총알을 멋지게 던져 대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던진 돌이 그만 길을 지나가던 한 행상 여인의 이마를 정통으로 때린 것이었다. 소리를 치며 땅에 주저 앉은 여인의 이마에서는 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온 누리가 조용해진 것 같았다. 아이들의 들뜬 소리들은 간데 없어지고 공포와 걱정의 분위기가 갑자기 우리의 마음들을 휘감았다. 모든 즐거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죄의 대가를 한눈에 보는 나는 그 몇 초 동안 얼마나 후회를 하였는지 모른다. 넘어져 있는 아주머니를 향하여 “아주머니 미안해요! 죄송해요!”라는 말을 여러 번 뇌까리면서 엉겁결에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너무 겁이 났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나는 무조건 뛰었다. 뛰어가 숨는다는 곳이 우리 집 앞 마당에 있는 작은 나무들 뒤로 달려가 몸을 숨겼던 것이다. 내가 가 봐야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한참이나 숨어있으려니까, 갑자기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어머님이 급하게 나가서 문을 여는 모습이 나뭇잎들 사이로 보이었다. 대문 밖에는 동네 친구들로 둘러 싸인, 내가 던진 돌에 다친 그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그때 어머님은 약품들을 꺼내와 일단 치료를 하고 나서는 그 여인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양 싶었다. 나는 나무 뒤에 그냥 숨어 있었다. 아버지 한테 혼이 날 생각을 하니 한심하였다. 얼마가 지난 후에 어머니가 돌아오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마는 그 아주머니는 나 때문에 이마를 다섯 바늘이나 꿰매여야 만 하였으며, 어머니는 그 분에게 돈도 얼마 주어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병원에서 돌아오신 다음에 전혀 나를 찾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태연하게 일들을 하시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안을 치우고 계시는게 아닌가! 그때 나는 더욱 더 불안하게 되었다.
또 얼마인가 시간이 지난 다음에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고 땅거미가 지려고 하자 어머니는 내가 숨어있는 작은 나무들 있는 쪽으로 다가 오시더니 이렇게 조용히 말씀하시는게 아닌가! “병국아, 이제 그만 나와서 저녁 먹자!”아니 지금까지 어머니는 내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를 다 알고 계셨단 말인가! 나는 너무나 무안하고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 속으로 없어져 버리고 싶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머니를 따라서 방으로 들어간 나는 다시 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너무나 맛있게 보이는 진수성찬이 상 위에 차려있지 않는가! 식사를 시작한지 얼마가 못되어 초인종이 울리더니 아버님이 회사에서 돌아오셨다. 나는 속으로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하였다. 집에 들어 오시면서 아버님이 물으셨다. “오늘 별일 없었소?” “예, 별일 없었어요.” 한참 부모님과 내 동생들과 나는 저녁식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목이 메어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가 복 바쳐서 치밀어 올라오는 듯한 것이 있었다. 나는 숫갈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훌쩍거리는 나를 바라보는 아버님이 그 연유를 물으셨다. 아무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운 것은 얼마 후에 아버지 한테 맞을 매가 무서워서 운 것이 아니었다. 창피하여서 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운 것은 어머니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감동되어서 운 것이었다.
갑자기 전쟁놀이 하고 싶은 욕망이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이기기 어렵던 유혹이 이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이 내 가슴을 채워왔다. 어머니의 용서와 사랑은 나의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전쟁놀이의 욕망을 눈 녹듯이 녹여 버리었다. 그 이후로 나는 더 이상 한번도 전쟁놀이에 참가해 본 적이 없다. 어머니의 사랑이 내 두뇌와 생각 속에 율법을 기록해 준 것이다. “다시는 전쟁놀이를 하지 말도록 해라!” 그전까지는 그렇게도 지킬 수 없었던 그 법이 이제는 순종하기에 아주 쉽게 되어 버렸다. 이제는 갑자기 어머니의 말씀을 기꺼이 순종하고 싶어진 것이다. 순종할래야 할 수도 없었고 순종하고 싶지도 않았었던 그 법들의 요구사항을 드디어 이루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 1O:16은 새 언약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거기서 나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새 언약관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시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대로 순종하는 생애를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판이 두려워서도 아니고 하늘이 그리워서 만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되어 다시는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새 마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제사를 통하여 갈바리의 십자가를 볼 수 있게 되고 거기에 엎드려 우리는 새 언약의 경험 속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이 경험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속죄제를 고안하시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적으로 경험하며 매일 상기하지 아니하면 다시 똑같은 죄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유혹의 힘이 다시 그 기세를 회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은 매일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한번 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매일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매일 하나님과 걷는 매일의 경험이지 한번 주어지면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식의 희사물이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마는 매일 승리를 주시는 매일의 경험인 것이다.
“사랑은 힘이다. 지적 도덕적 힘이 이 원칙에 포함되며 그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거듭나지 아니한 마음은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사랑의 나무를 생기게 하거나 자라나게 할 수가 없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때만 살며 번영한다. 사랑은 행동없이는 살지 못하며, 모든 행동은 사랑을 증가시키며 강화하고 확장한다 … 사랑은 그 본질에 있어서 파급적이며 그 활동에 있어서 조용하나, 큰 악을 정복하는 그 목적에 있어서는 강하고 힘차다. 사랑의 영향력은 녹이고 변화시킨다.”교회증언,2권, 영문, 135.
“구속주께 대한 완전한 사랑의 불길이 그의 영혼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독소를 제거한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되어, 순결하고, 고상하고, 세련되고, 거룩하게 된다.” 마라나타,234; 영문,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