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성소 뜰에서 – 칭의의 경험
A. 번제 (Burnt Offerings)
번제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친다는 헌신과 봉헌의 의미로 드려지는 제사로서 레위기 1장 제일 처음부터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이 번제를 하루에 두 번씩 즉 아침 저녁으로 드리도록 명령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이러한 생애를 살기를 바라신다는 의미인데 번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과 가장 깊이 숨어 있는 동기까지도 정결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번제에 대하여 공부하면서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성화의 경험은 매일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먼저 레위기 1:3-8까지 읽어 보도록 하자.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없는 수컷으로 회막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의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놓고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 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번제는 하나님께 헌신과 봉헌을 뜻하는 제사로서 일종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제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번제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과정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종류의 회개와 굴복의 경험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먼저 번제를 드릴 때에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하며, 그 희생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의 모든 죄를 또는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고백하고 나서 제물을 끌고 온 죄인 자신이 자기 손으로 그 동물을 칼로 죽이는 것이다. 명백하게 그것은 자기의 죄가 혹은 우리의 죄과가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죽게 했다는 가르침과 나아가서는 그것을 현실로 느끼며 보게 되는 경험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그 희생제물의 피를 번제단 주위 단 사면에 뿌리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온 세상 방방곡곡에 효험이 있다는 보혈의 능력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요, 나아가서 주님의 피는 우리를 구속할 뿐만이 아니라 땅을 저주의 세력에서 구속하여 해방시킨다는 예증이 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9-21절은 피조물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원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이룬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 때문에 저주를 받은 피조물들이 이 땅을 포함해서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되기를 기다린다는 말씀이다. 그리고는 그 동물의 가죽을 벗기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구대로 우리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살아온 교만의 가면을 벗어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을 위하여 다시 살아가겠다고 서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다음에는 제물의 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르고 나서 그속에 있는 내장들과 모든 창자들까지 끌어 내어 맑은 물로 씻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생애의 부분들을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의미로서 다음과 같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이 폐를 저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탁한 공기를 마셔가며 심지어는 담배 연기까지 흡입해 가면서 살아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폐를 가지고 당신의 영광만을 위하여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하여 살겠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까지 저의 위장을 가지고 제 입맛을 위하여 마음껏 먹고 나만을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주님 저는 이제 회개합니다. 이제부터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든지 마시든지 하겠습니다….” 일일이 내장들을 물로 씻으면서 철저한 굴복의 경험을 하도록 고안된 것이 바로 이 번제이다. 물은 성경에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는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깨끗이 씻고 고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는 새로운 마음을 받는 것이다.
제물의 머리를 자르고 두 다리를 자르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우리의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들과 동기와 묵상들까지라도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을 의미하며, 두 다리는 우리의 사는 생애와 겉으로 보이는 행위들을 맑은 물 즉 성령과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서는 그 모든 부분들을 번제단 위에 올려 놓고 태우는 것이다. 그 때, 그 냄새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이 죄인이 온전히 굴복하고 죄를 버리며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는 냄새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기가 타는 냄새를 맡을 때에 역겨운 기분을 가지게 되지마는 하나님께서 동물의 기름이 타는 냄새를 흠향하신다고 하였다. 속죄제를 연구할 때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겠지마는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죄를 포기하고 나아오는 것처럼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한가지 확실하게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완전한 굴복과, 회개와, 죄를 버리는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칭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다. 신신학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진리를 인정하거나, 예수를 믿게 될 때에 칭의를 받게 되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죄가 덮어짐을 당하는 것이고 성화의 과정에서 죄가 하나씩 해결되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죄의 문제는 칭의의 경험 때에 해결되는 것이고, 그와 같이 깨끗해진 상태를 주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움으로 유지해 나가는 생애를 성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실수나 연약하여 넘어지는 죄들을 위한 하나님의 용서와 도움이 다 마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죄인이 회개할 때에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셔서 의롭게 재창조해 주시면서, 다시 말하자면, 참으로 그 속 사람을 의로운 사람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를 의롭다고 칭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칭의”의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속이 아직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덮어서 칭해 주실 수가 없다. 그 자체가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칭의와 성화의 경험을 이번 성소 연구를 통하여서 더 밝히 이해해 나가게 될 것이다. 또 한가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복음에 대한 이해,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어떠한 것을 진지하게 믿는다고 해도 그것이 진리에 맞지 않으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오류를 믿고 살면서, 마치 구원의 길에 확실하게 서 있는 양 느끼고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물교훈은 다음과 같이 우리를 경고하고 있다.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외식하는 자는 아니다. 저들은 진리를 존중히 여기고, 또 진리를 옹호하였고, 진리를 믿는 자들에게 매혹되었다. 그러나 저희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지 않았다. 저들은 예수이신 반석위에 떨어짐으로 저희의 옛 성질을 깨뜨려 버리려 하지 아니하였다. 이 계급은 또한 돌밭에 떨어진 씨로 묘사된 청중을 대표한다. 저들은 주저하지 아니하고 말씀은 받았으나 그 말씀의 원칙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다. 그 말씀의 감화력은 순간적인 것이었다. 성령이 마음 가운데 역사하게 되고 그 당사자가 이를 바라보고 승락할 때에 그의 안에는 새로운 품성이 심어지게 된다. 그러나 미련한 처녀로 대표된 계급은 단지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행위로 만족하는 자들이다. 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쳐다보고 살 줄도 모른다.”실물교훈,411
번제에 대한 설명을 마치기 전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데 그 내용인즉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창세기 22:1,2에서 다음과 같은 쇼킹한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들 번제로 드리라.”
우리가 정말 똑바로 읽었는가? 다시 한번 읽어 보도록 하자. “…그들 번제로 드리라.” 아니, 이것이 사실일까? 하나님께서 과연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진짜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단 말인가? 모세가 혹시 단어를 잘못 사용한 것은 아닐까? 방금 공부한 것처럼 번제란 그 희생제물의 배를 가르고 모든 내장을 꺼내어 물에 씻고 머리와 다리를 잘라내고 제단 위에 올려 놓고 태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대한 명확한 절차를 그 당시에는 잘 몰랐을 것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소와 염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다시 말해서 번제에 쓰이는 동물들을 가져다가 배를 가르고 두쪽을 내어 땅위에 늘어 놓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의 불로 그 가운데로 지나가시면서 그 번제들을 직접 태워 주심으로 아브라함의 헌신을 받으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장면을 읽게 된다. 그 사실을 미루어 보아 아브라함은 번제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이 없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었을 때에 아브라함은 얼마나 놀라고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였다. 하나님과 오래 사귀는 세월 동안 그는 자기의 불신과 실수들을 회개하고 이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으며 주의 명령이 아무리 엄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라가 온전히 순종할 준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삭을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니 도대체 이해할수 없는 명령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자기가 20년 동안이나 정들여 온,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자기 아들을 죽이는 것도 상상조차 못할 일인데 게다가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고 토막토막을 내어 불에 사르어야 한다니,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일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시다니!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다. 분명히 정당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것을 그는 믿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불가능에서 아들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면 자기 아들을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아브라함이 어떠한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자주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 곧 야고보서가 말해 주듯이 행함으로 증명하는 믿음, 즉 모든 것을 아낌 없이 헌신하면서 순종하는 믿음을, 아니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모든 죄를 승리하고도 남음이 있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고 할수 있겠다. 이러한 믿음을 배운 자들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요 또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곧 교회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깨우지 아니한 데에는 그 충분한 이유가 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이삭이 모리아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아버지에게 “불과 나무는 여기 있거니와 번제할 양은 어디에 있나이까?”라고 물었을 때의 심정을 아버지들이시여 상상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 이레 —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아브라함의 답변을 들으며 우리는 믿음이란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믿음은 “왜요?”라고 묻지 아니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온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드디어 모리아산 정상 위에서 아들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고 말해주자 순종하는 이삭의 모습을 보라. 그는 늘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버지를 보아왔고 아버지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배워 온 터였다. 떨리는 아버지의 손을 도와서 자기를 묶도록 한 다음에 단위에 드러눕는 이삭은 우리의 자신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에 있어서의 훌륭한 모본이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까지 하도록 요구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독자들이시여 로마서 12:1 을 읽어 보도록 하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내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는 척 가장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의 손으로 칼을 아들을 향하여 내리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눈물로 얼싸안은 아버지와 아들의 귀에 양의 울음 소리가 들렸고, 그들이 바라본즉 한 수양이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가서 끌고 와 기쁨으로 번제를 드렸다. 성경은 바로 이 장소가 성소의 번제단 자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역대기하 3:1. 결국에는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헌신이다. 번제의 의미를 생생히 말해주는 이 장면을 설명하면서 선지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영감적인 말씀을 기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표와 약속을 통하여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셨다 (갈라디아서 3:8). 그리하여 그의 믿음은 오실 구세주에 붙들어 매이었다….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린 어린 양은 우리 대신으로 희생당하기로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을 예표하였다.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여 죽을 운명에 처하였을 때에 아버지께서 그분의 아들을 쳐다 보시며 죄인에게 ‘살라 내가 대속물을 찾았노라’하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시는 동시에 복음의 실재를 그의 마음에 새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무서운 시련의 어두운 날 동안 그가 참은 고통은 자기의 경험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가르치신 무한하신 희생의 위대성을 깨닫게 하시려고 허락된 것이다. 어떤 다른 시험도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처럼 아브라함의 영혼에 고통을 주었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고민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게 주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치욕과 영혼의 고민을 목격한 천사들은 이삭의 경우와 같이 그 희생을 가로막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하였다. ‘족하다’고 부르짖는 아무 음성도 없었다.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영광의 왕이 생명을 버리셨다. 이것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동정과 사랑이 주실 수 있는 얼마나 힘있는 증거인가?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희생은 다만 그의 유익을 위함만도 아니요 후대의 이익을 위하심만도 아니다. 그것은 또 하늘과 다른 세계들의 무죄한 지적 존재자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와 사단의 대쟁투 곧 구속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장소는 우주의 교과서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의 결핍을 보였었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그가 언약의 조건을 따르지 못하였다고 비난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그를 고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온 하늘 앞에서 그분의 종의 충성을 시험하여 완전한 순종만이 받으시는 바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구속의 경륜을 더욱 완전히 저들 앞에 밝히 하셨다.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이삭의 순종이 시험 당하던 광경을 목격하였다. 이 시험은 아담이 당한 것보다 훨씬 더 냉혹한 시험이었다. 우리의 첫 조상에게 주어진 금지령을 순응하는 데에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나, 아브라함에게 하신 명령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희생이 요구되었다. 온 하늘은 아브라함의 확고 부동한 순종을 경이와 감탄을 가지고 보았다. 온 하늘은 그의 충성을 칭찬하였다. 사단의 고소가 거짓됨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에게 네가 네 아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사단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네가 하나님을 경외 하는 줄을 아노라고 선언하셨다. 다른 세계의 지성들 앞에서 아브라함에게 맹세로 굳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순종은 보상을 받으리라고 증거하였다.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을 제물로 드리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에 온 하늘 존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저들은 긴장된 열심을 가지고 이 명령이 성취되는 단계마다 주시 하였다. 그러나 ‘번제할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한 이삭의 물음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을 때에,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에, 아버지의 손이 멈추어지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이 이삭 대신에 드려졌을 때에, 그 때에 구속의 신비 위에 광명이 비치고 천사들도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놀라운 준비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였다(베드로전서 1:12).” 부조와선지자 154-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