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성소 뜰에서 – 칭의의 경험
저자: 강병국 목사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 지니라”출25:8,9.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소를 지으라고 명령하시면서 그에게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형을 자세하게 보여 주시었다.(히 8:5참조) 식양을 보여주신 후에는 정확하게 그대로 지어야 한다고 이르셨는데 그 이유는 지상 성소는 하늘 성소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인간의 구속 사업을 어떻게 이루고 계신지에 대한 정확한 청사진이기 때문에 인간의 아이디어로서 성소를 지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이 성소는 하나님께서 인간들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친구의 집에서 약 일년 동안만 같이 먹고 자며 한 집에서 지낸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 친구가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싫어하고, 무슨 음식을 먹고 어떤 일을 하며 어떠한 가정 생활을 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알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가운데 오셔서 같이 거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희생을 치르셔야 하는지를 보여 주셔서 죄인들의 사랑을 도로 찾으려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상 성소는 인간이 볼 수 있게 휘장으로 가리워서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이니,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나타내는 건축물이다. 이 성소의 모든 기구와 재료와 모형들은 모두가 다 한결같이 예수께서 어떠한 분이시요, 어떻게 구세주의 역할을 담당하시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성소제도는 하나님의 머리에서 만이 나올 수 있는 지혜인 것을, 연구하면 할 수록 느끼게 되어, 공부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 탄복하여 찬송하게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소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뵙기 위하여서 어떠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를 보여 주신 사실이다. 완전한 구원이란 죄인이 다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서 죽지 않고 영원히 같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죄인들에게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소제도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쉐키나 영광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즉 지성소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 위하여 죄를 어떻게 용서 받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어떻게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수 있어서, 결국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이해에 도움을 주기 위하여 다음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지난 해에 우리 집 앞에 있는 밭에다 여러 가지 채소들과 함께 배추를 심었다. 가을이 되자 배추는 싱그러운 색갈과 함께 통이 큰, 보기에도 탐스러운 일 등급 배추로 잘 성장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는 우리가 사는 죠지아주에 이른 된서리가 내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서리 맞은 배추가 떠 오르는 햇빛을 받고는 시들시들 녹아내리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태양빛은 배추에게 생명과 활력과 기쁨을 주는 원천이 되어 왔었다. 그러나 서리를 맞은 어느날 갑자기 배추에게 있어서 태양빛은 죽음과 파멸을 가져다주는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태양빚은 여전히 같은 태양인데, 서리 맞은 후에 배추의 본성이 바뀌어져 버린 것이다. 더 이상 태양빛 아래서 살 수 없는 본질로 말이다. 죄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 막았다 (이사야 59:2).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기쁨이 충만하여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창조함을 받았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연고로 본성이 바뀌어 하늘에 거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어 다시 하늘에 들이시기 위하여서는, 적당히 죄를 덮어 주어서 용서하심으로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 하심으로 만 가능한 것이다. 이 일은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사업이다. 자! 그러면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고안하셨으며, 과연 우리가 어떠한 경험을 가져야 하나님의 앞에 나아가 그리운 창조주와 대면하여 살 수 있게 만드셨는지를 성소의 위대한 그림을 통하여서 살펴 보도록 하자.
성소의 경험은 죄를 지은 사람이 희생양을 (혹은 염소나, 비둘기) 흠 없는 것으로 고르는 일부터 시작이 된다. 그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어진 것이다. 정죄와 심판의 두려움만 서려 있게 되었다. 그는 행복하지 못하고 생애에 즐거움이 사라져 버린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 그에게는 용서가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그 순간 그는 성소를 향하여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의 구름이 지성소 윗편에 머물러 있어서 회개하는 죄인들을 오라고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끄심을 느끼게 된다. 또한 성소 뜰 번제단으로부터 타오르는 연기가 하늘을 향하여 치솟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양을 끌고가 지은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희생의 제사를 드리고 나면 자기의 죄도 마치 저 타오르는 연기처럼 사라져 없어지고 다시는 기억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죄인이 성소를 바라보는 순간 성령께서 강력하게 그의 마음 속에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의 경험은 성령께서 죄인을 하나님께로 이끄시기 위하여 감동하심으로 초청하시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죄인이 양을 고를 때에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가장 흠 없고 정결한 것으로 준비하여야만 한다. 우리에 있는 양을 살펴 보면서, 상처가 있는지, 흠이 있는지, 절지나 않는지, 눈이 멀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흠 없는 제물을 골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흠 없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나, 아울러서 죄인의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는 순전한 회개를 상징하는 것이다. 레위기 1:3,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문 앞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순전한 회개의 동기로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가야 한다. 열납될 수 있는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시편 51:17.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요.” 고린도후서 7:10. 지은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슬퍼하는 참된 회개의 제물을 열납되도록 준비하는 일이 성소로 가는 첫 계단이라 하겠다.
우리가 성소를 볼 때에 두 가지 목적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성소 제도는 첫째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우리를 위한 구속 사업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요, 두 번째로는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르는데 어떠한 경험을 하면서 어린양을 따라가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약도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를 볼 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과정을 보다 밝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죄인이 양을 끌고 성소를 향하여 갈 때에는 겸비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양을 끌고 가는 사람을 모든 동네 사람들이 쳐다 보면서, “이번에는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양을 끌고 가지?” 라고 속삭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부족함과 죗됨을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게 인정하며 나아가는 경험을 갖게 한다. 성소로 나아가면서 죄인은 눈에 들어오는 세가지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곧, 흰 세마포로 만든 성막 울타리와 (출 38:16), 타오르는 연기와, 성소 위에 떠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다. 그것은 이 죄인에게 큰 소망을 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저 성소 뜰에 가서 양을 제사로 드리기만 하면 나는 저 하얀 성막 울타리처럼 깨끗한 의로 감싸줌을 받게 될 것이고 나의 죄악들은 저렇게 연기처럼 태워져 없어질 것이요, 드디어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리겠구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성소의 입구에 다다르자 죄인은 아름다운 색깔로 만들어진 넓은 휘장 같은 문을 대하게 되는데 그 휘장은 홍색, 청색, 자색실, 그리고 가늘게 꼰 베실(흰색)로 수놓아 만들어져 있다 (출애굽기 38:18). 의아하게 생각하여 이것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 사람에게 옆에 서 있으며 안내를 맡은 제사장 중에 하나가 오더니 친절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여 준다. “이 색깔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구속사업의 특성을 말해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요.” 청색은 성경에서 항상 “순종”을 상징한다 (민수기15: 38-4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법을 기억하여 순종하라는 표로 그들의 웃 소매에 청색술을 달고 다니도록 명하신 것이다. 이 청색은 하나님 아버지의 계명을 완전하게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상징한다 (요한복음 14: 30,31). 홍색은 구세주의 속죄의 희생의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 붉은색 물감은 그 당시에 “스칼렛”이라는 붉은 벌레를 말려서 채취한 것으로서 (그 벌레이름을 따서, Scarlet 즉 “붉은 색”이라는 영어의 단어가 파생된 것임) 그것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시어 “벌레”같은 생애를 사신 후 속죄의 붉은 피를 흘리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22:6에는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라고 부르짖으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자주색을 채취하기 위하여서 그 당시에는, 지중해 속에 살고 있는 특수한 조개들을 많이 캐내어야 했는데, 그것들을 말려서 자색 물감을 만들어 내었었다. 귀족이나 왕이 입는 한벌의 옷에 자주 물감을 들이기 위하여서 수 많은 조개를 캐내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비싼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자주색은 청색과 홍색을 섞으면 만들어지는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와, 주의 힘을 의지하여 사는 우리의 순종의 생애가 우리를 자주색이 상징하듯이 하늘의 왕족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무언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휘장의 기본 바탕은 가늘게 끈 베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다른 색깔의 실을 다 뜯어 낸다고 할지라도 바탕이 하얀 베실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속들이 순결하고 깨끗한 의로운 생애와 성품을 상징하는 것이다.
죄인과 그가 끌고 온 양을 보고 희생제사를 맡은 제사장은 그를 안내하여 먼저 양이 흠이 있는지 없는지를 점검하는 일을 행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현대 제사장들, 즉 목사들이 해야 하는 일로서 그들의 회개의 경험이 진정한 것인지를 알아보며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가져온 양이 흠이 없는 제물인 것을 확인하고 나면 제사장은 죄인으로 하여금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자기가 지은 모든 죄를 고백하도록 한다. 그것은 죄인의 죄가 양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예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기는 하나, 그저 덮어주시고 잊어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죄 없는 구세주가 죄인들의 죄악들을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나 그 대가는 갈바리이다. 죄없는 자가 대신 죄의 대가를 지불해 주기 때문에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5:21.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고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실 정도로 계명을 어긴 죄를 그냥 묵과하실 수가 없으며, 계명을 파하실 수가 없다는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죄인이 양위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한 다음에, 제사장이 이제는 용서받았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고 한다면, 그 죄인이 용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제사장이 그 양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휘장앞에 뿌리고 그를 위하여 속죄하는 중보의 기도를 드린 후에야 속죄함이 있다고 명시한다. “제사장이 그 범한 죄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얻으리라”(레위기 4:26,35, 5:10,16, 6:7). 속죄는 십자가에서 완성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속죄는 십자가에서 시작된 것이지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중보사업을 이루고 계시는 일은 십자가에 못지 않게 중요하며 또한 속죄 사업의 한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죄인에게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며, 어떻게 죄를 사함 받는 것이며, 어떻게 정결하게 되는지에 대하여 잘못 가르쳐 준다면 그 사람은 용서 받지 못한 채 마치 구원이 이루어진 양 안심하며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신신학의 치명적인 무서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과 죄의 용서의 문제를 잘못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쯤 해두고, 이제는 실재로 성소 뜰에서 무슨 일이 이루어지는지에 대하여 연구해 보도록 하자. 성소 뜰에서 드려지는 제사들을 보면 속죄제가 제일 먼저 언급되어야 하겠으나, 레위기가 설명해 주는 순서를 따라 번제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