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성소 첫째간 – 성화의 경험
성소 뜰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바라보며 거듭나고 죄를 깨끗하게 씻은 바 된 죄인이 이제는 성소 안, 즉 첫째칸 안으로 들아가서 거듭나고 깨끗하게 된 양심을 계속적으로 성결하게 유지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구원이란 한번 받았다고 영원히 자기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마는 구원이 아울러 우리가 아는 것은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우리들 마음 속에는 특별한 변화가 생기는 사실이다.
이러한 변화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매일 지켜 나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주 안에서 거듭날 필요가 있으며, 매일 구원의 경험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발견하게 된다.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러므로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이다”가 아니라, 우리가 그 받은 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힘입어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서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주께 항상 바쳐야 하며, 우리의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행함과 노력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쳐서 복종하고 의지를 굴복시키는 노력이 없이 아무도 구원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 성소 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소를 통과하여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종결지어 지는 사실을 우리는 성소 제도를 통하여서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구속의 은혜가 마련된 것이요, 구원이 준비된 것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들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편에서 믿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킨다고 하였다 (요한복음 l4:15,21). 혹자는 성소 문제를,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구원을 성사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도말하시거나 구원을 인치실 때에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당사자의 협력과 헌신 없이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결코 자신을 안전하다고 믿거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유혹에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구주를 받아드린 사람들이 아무리 철저히 개심했을 지라도 구원 받았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도록 가르쳐서는 결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소망과 믿음을 가지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으셨다는 것을 알 때에라도 우리는 유혹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 시험을 견디는 사람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만족한 상태에서 향상하기를 그쳐서는 안된다. 이런 생각을 품을 때 경계와 기도 그리고 더욱 높은 표준으로 전진하기 위한 열렬한 노력을 위한 동기가 없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기까지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거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제일 먼저 영원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과 어린양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마라나타, 240.
화잇 여사께서는 그래서, 성화란 칭의를 유지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얻기 이전에 그 심령의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신다. 인간이 의롭다 하심을 보유하기 위하여서는 계속적인 순종을 하여야 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활동적이며 살아있는 믿음을 통하여 그 영혼을 순결케 하여야 한다…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기 위하여서는 그의 믿음이 마음의 모든 애정과 충동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야 한다. 또한 믿음 자체가 완전함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오직 순종에 의해서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366.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에 이르렀다고 믿는다 할지라도 죄를 이기는 경험을 내적으로 하지 아니하면 진정한 구원의 즐거움과 평화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불안과 죄책감이 영혼 속에 숨어 살고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구원얻은 상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위의 설명들을 종합하여 보면, 결론적으로 성화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칭의에서 구원이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화란 좋은 열매이지만 구원에 필수적인 요건은 아니라고 하는 가르침은 비성서적일 뿐만 아니라, 거짓 안정감을 가지게 하는 사단의 기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다음과 같이 성화를 구원의 일부분으로 말씀하셨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성화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사도행전 26:18.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성화)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데살로니가후서 2:13. 다시 언급하지만 성소 제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유일한 청사진이다. 그 성소제도가, 칭의의 경험을 경험한 죄인이 성소 첫째 칸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은혜와 방법을 통하여서 어떻게 구원을, 아니 칭의의 경험을 유지하는지에 대하여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는 것이다. 성소 뜰은 칭의를 가르쳐 주고 성소의 첫째 칸은 우리에게 성화의 과정과 성화를 위한 힘의 근원을 가르쳐 주고 있다.
A. 성소안의 기구들
자! 이쯤 해 두고, 이제는 믿음으로 주님을 따라서 성소 안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성소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눈에 들어 오는 기구란 세가지 밖에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금 촛대, 떡상, 그리고 분향단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가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을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의 계시이다. 이 방법 밖에는 우리의 구원을 유지시키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성소뜰에 있는 기구들은 무슨 금속으로 만들어졌는가? 번제단과 물두멍은 놋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면 성소 안의 기구들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촛대, 떡상, 분향단, 법궤 모두가 다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왜 그러할까? 순금으로 만들 때에도 망치로 쳐서 만들도록 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망치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9. 금은 믿음을 상징함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또한 그 진리 때문에 오는 시련들을 통하여 잘 다져진 믿음을 가르키며, 불순물이 없는, 순전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생애를 상징하기 위하여 순금으로 만들도록 지시하신 것이다 (베드로전서 1:7; 갈라디아서 5:6 참조). 놋은 동과 주석의 합금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주석은 죄를 상징한다.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사야 1:25. 여기에서 “혼잡물”은 영어로 “Tin” 한국말로 직역하면 “주석”이다. 그러므로 성소 뜰에서 죄, 즉 혼잡물을 가지고 들어와 씻는 경험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성소뜰의 기구들을 혼합 금속인 놋으로 만들도록 하신 것이요, 불순물이 없이 깨끗해지고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성화의 과정을 상징하기 위하여 순금으로 성소 안의 기구들을 만들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B. 금촛대
성소안의 기구들을 살펴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단순한 방법을 보게 된다. 금촛대는 하늘을 향하여 여행하고 있는 신자들의 앞 길을 비추어 주는 빛을 발하여 주고 있는 것이요, 떡상 위의 떡은 여행자들에게 여행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요, 분향단은 중보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여행 길을 끝마칠 때까지 그들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고 또한 필요한 은혜를 공급하며 낙심치 않게 위로하기 위하여 고안된 것이다.
먼저, 금촛대를 살펴보도록 하자. 금촛대는 일곱가지(Branch)를 가진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은 완전한 빛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래서 스가랴 6:32은 그리스도를 “순”(branch)-즉, “가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촛대는 빛을 주기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유일한 빛이시다. 그 빛을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었다. 금촛대의 빛을 내기 위하여서는 감람유(올리브 기름)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감람유는 성령을 상징하였다. “겟세마네”의 뜻은 “기름짜는 곳”이란 뜻이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성령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 죄를 대신 지시는 고난의 길을 가셨다.
시대의 소망 464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당신을 나타내실 때에 빛은 항상 그의 임재하심의 상징이 되었다.” 빛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 그러므로 빛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인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한가지 우리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성소 안에는 창문이나 지붕에 구멍이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외부로부터 빛이 들어올 구멍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우리 영혼에게는 참 빛되신 하나님의 진리 이외에는 외부의 빛이 들어 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인간적인 철학이나 이론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금 촛대의 빛만이 성소안을 밝혀 주게 되어있었던 것처럼. 깜깜한 방 안에서 하나의 성냥을 그어 빛을 내면 갑자기 어두움은 쫓겨가 버리게 된다. 아무리 적은 빛이라도 그 빛을 어두움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태양이 떠오를 때 온 누리에 덮혔던 어두움이 쫓겨 가고, 그 빛이 비칠 때 나무나 담장 뒤에 숨어 있던 모든 어두움의 그림자들이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나는 세상에 빛이라”고 주께서 말씀 하셨다 (요한복음 8:12). 빛이 우리 마음에 들어 오면 모든 오류와 잘못된 것들이 쫓겨나 나가버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진리의 말씀으로 정결함을 받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1:22). 우리는 빛을 따라가는 빛의 아들들이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의 말씀과 계명을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빛을 좇아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 안에 거할 수가 있는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10.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는 예수 안에 거할 수가 있다 .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이 제단 위에 놓여져서 산 채로 태우는 희생제물로 드려지기 전까지는 아무리 아름다운 봉사라 할지라도 받지 않으신다. 그들은 거룩해져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에는 확실하고 건강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요, 그러한 좋은 열매만이 하나님께 받으시는 바 되는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거듭나야 하며 헌신되어야만 한다. 동기들이 순수해져야 한다 (여기까지는 성소 뜰의 경험 –필자주). 영혼 안의 촛대가, 금 가지를 타고 금잔으로 흘러드는, 하늘의 기별자들(신구약성경-필자주)로부터 흘러오는 기름으로 공급을 받아야 한다.” 교회증언,7권 249. 이 말씀은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가 그 촛대 양 옆에 서서 금촛대와 연결되어 계속적으로 기름을 공급하고 있는 광경에 대하여 언급하신 말씀이다. 독자들이시여, 여러분들은 이렇게 계속적인 말씀의 공급을 받고 있는가? 성령의 임재하심을 충만히 경험하며 살고 있는가? 열 처녀의 비유 가운데서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이 없으므로 버림받게 되어 버린다. 그들은 늘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 속에서 사는 경험이 없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기 때문에 신랑의 길을 비출 수 있는 빛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마태복음 25:4). 다시 말하자면 주의 말씀을 통하여서 성령의 역사를 계속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등잔(하나님의 말씀) 말고 또 다른 그릇에 기름을 준비하여 함께 가지고 갔다고 말하였다. 등잔 이외에 다른 그릇은 기름을 예비하여 두는 그릇으로서 혹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언의 신으로 해석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성경과 예언의 신의 말씀에 심취하여 매일 말씀을 먹고 말씀으로 사는 것이 성화의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이 구원을 유지시키는 하나 밖에 없는 방법이다. 이외에 다른 방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 문제가 생길 때, 유혹이 엄습할 때, 시험이 닥쳐 올 때에도 말씀 속으로 들어가 영혼 성소의 문을 닫자.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든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
C. 떡상
성소 안의 두번째 기구는 떡상인데, 이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기구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화의 경험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힘과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성화의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도록 하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I7:3. 요한계시록 2:37에서 우리는 흥미있는 말씀을 발견하게 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이기는 경험을 위하여서는 감추어진 만나를 먹는 경험이 필요하다. 감추어진 만나, 어디에 있는 것을 말하는가?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아 먹던 기적의 양식인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 법궤안에 두었던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다 (출애굽기 16:32-35). 만나는 이 땅에 내려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울러 만나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것이 우리가 먹고 사는 생명의 떡인 것이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35,63). 만나가 이 땅에 내려 왔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이지?”라고 말했는데, 그것이 곧 만나의 뜻이었다. 만나가 이 땅 표면 위에 내려와 덮인 것처럼, 참 생명의 떡이신 예수께서 인간중에 하나가 되시어 죄인의 본성을 가지시고 이땅에 내려 오시어 말구유에 누워 계실 때에도 사람들은 주님을 보고 “이 사람이 누구야?”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 만나이시다. 만나가 밤에 내렸던 것처럼 이 세상이 죄와 오류로 깜깜할 때에 주께서 오시었다. 만나는 또한 이른 아침에 나가서 구해야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스러져 없어지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에 만나를 구하여 그날을 위한 영적 양식을 먹어야 한다. 복잡한 하루를 시작하고 나서 잡다한 생각으로 마음을 채우고 나면 하늘의 만나가 사라지는 것이다. 만나는 내일 먹기 위하여 쌓아둘 수가 없었다. 만나는 그날을 위한 하루의 양식이다. 만나는 우리가 농사를 지어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서 우리를 위하여 내리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만나를 구하기 위하여서 우리는 수 마일을 여행해 갈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나가보면 그들의 텐트 주위에 만나가 소복히 내려 있었다. 우리도 만나를 구하기 위하여 차를 타고 멀리 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한다. 그 만나를 먹으면 우리는 소생할 수 있고 모든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에 대하여 불평을 시작한 장면을 읽게 된다. 민수기 11:4을 보면 섞인 무리가 그러한 불평을 조장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의 만나를 향하여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한다”고 말하였다. 그들의 세속적인 입맛이 그들에게 만나에 대한 입맛을 잃어버리도록 하였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적인 책들과 재미 있는 글들이나 이론들이 우리를 위한 하늘의 생명의 떡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한다. 그때에 불뱀이 나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서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쓰러졌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리시기 위하여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셨고 그 뱀을 믿음으로 쳐다본 자들은 다시 살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단순한 말씀의 꿀맛 같은 경험을 잃어버리게 될 때에 죄의 불뱀에게 몰려 죽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 구원을 위하여 소리치며 믿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를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그 때에 속죄제의 경험을 다시 하게 되고 영혼이 다시 정결함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는 일에 게을리 하는 사람은 영생을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독자들이시여! 여러분들은 매일 만나를 먹고 있는가?
떡상 위의 떡이 만들어지기 위하여서는 밀알이 떨어져 죽어 싹을 내고 드디어는 곡식을 내는 일이 있어야 한다. “나사렛”은 “싹,” 혹은 “가지”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위한 생명의 떡이 되시기 위하여 나사렛에서 사시었다. 씨를 땅에 심은 후 농부는 눈물과 땀으로 가꾸어야 하듯이 예수님의 생애도 고난과 눈물의 얼룩진 생애이셨다. 곡식이 추수된 후 농부는 맷돌로 그 낟알들을 갈아서 떡을 만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은 인류의 죄의 짐 때문에 짓눌리시고 갈리시는 고통을 당하셔야만 하였다. 유대인들의 역사서에 의하면, 레위인들이 성소를 위한 진설병을 구울 때에 다 익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창처럼 생긴 긴 포크로 그 떡의 옆구리를 찔러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다 익었을 경우에는 그 위에다 십자가 형식의 표시를 해 놓았다고 전해 진다. 얼마나 우리 주님의 경험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는 예법인가!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살을 먹고 살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안식일에는 음식을 요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는데, 성소의 떡은 안식일 아침에 굽도록 지시되었다 (레위기 24:8).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특별히 안식일 아침에 풍성한 하늘의 양식을 먹도록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몸소 체험한 생명의 양식을 매 안식일 아침마다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식은 떡이나 지난 주일에 구운 떡들을 나누어 주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거룩한 말씀을 연구하자. 그 말씀이 가는 길에 빛이 되고 아울러 여행자에게 힘을 주는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이다.
D. 분향단
“너는 분향단을 만들지니 곧 조각목으로 만들되 장이 일규빗, 광이 일규빗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고는 이 규빗으로 하며 그 뿔을 그것과 연하게 하고 단 사면과 전후 좌우면과 뿔을 정금으로 싸고 주위에 금테를 두를지며…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차씩 대대로 속죄할 지니라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출애굽기 3O:1-3, 7-10.
분향단은 한마디로 말하여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시는 중보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인간성을 상징하는 아카시아 나무에다가 정금을 씌워서 만든 분향단은 법궤나 떡상보다 그 높이가 더 높게 만들어졌다. 그것만 보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이해할 수가 있다. 주님의 중보의 기도는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도움을 주는 한 부분이 아니라, 없어서는 안되는 절대적인 부분이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분향단의 향이 성소 안에 자욱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의 쉐키나 광채로부터 보호해 주기 때문이다. 이 분향단에서 피어 오르고 있는 향을 화잇 부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완전하신 순종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순종의 무한한 자원이 있다. 하늘에는 주님의 공로, 그의 자아부정, 자기 희생이 당신의 백성들의 기도와 함께 향연으로 올려지기 위하여 간직되어 있다. 죄인들의 진지하고 겸손한 기도들이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갈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당신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의 공로를 섞으신다. 우리들의 기도들은 이 향으로 말미 암아 향기로와진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기로 서약하시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는 항상 아들의 간구를 들으신다.”하나님의 아들과 딸들, 2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완전하여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살아 있는 성도들과 부활한 성도들이 이구 동성으로 강림하시는 하나님의 광채 앞에 서서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외칠 것이라고 각시대의 대쟁투 641페이지는 말하고 있다. 성도들의 기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 즉 주님의 은혜의 향이 섞이지 않으면 아버지께 상달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한가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인이 흠 없는 희생 양을 가지고 뜰에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후에, 성소 안에 들어온 경험이 있어야 제사장이 그들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려 속죄를 얻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개심의 경험과 죄를 씻고 버리는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가 아무리 많은 진리를 이해하고 동의했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열심히 안식일을 지키며 교회에 출석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의로 옷 입혀지거나 중보의 기도를 받은 역사가 없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성소 뜰의 경험을 통하여서 성소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드리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의 죄가 진정으로 뉘우쳐지고 포기되어 양에게로 전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그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서 중보하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지마는 실상 주님의 이름으로 중보의 은혜를 받고 있는 자들의 숫자는 실제로 아주 적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고백한 죄들이 실상은 한번도 하늘 성소에 올라가서 대제사장의 중보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은 적이 전혀 없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가 하늘 성소로 옮겨져서 죄사함을 받았을 것이라는 어렴풋한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실상에 있어서는 그들의 죄가 한번도 성소로 옮겨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두려운 일이지만, 그렇다. 그러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끝날에 “주여 나를 모르십니까?”라는 처절한 절규의 호소 앞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 하실 것이라고 마태복음 7장과 25장이 기록하고 있지 않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I
누구든지 다 성소의 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유일한 구원의 청사진인 성소 제도의 가르침대로 구원의 경험을 따라가는 자들에게만 중보의 향이 그들의 죄를 가리워 줄 것이다. 중보자의 기도의 향은 은혜의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까지만 죄인의 죄를 가리워주게 되어 있었다. 우리는 은혜의 부분을 강조함과 동시에 심판의 부분도 아울러 중요시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입 맞추는” 것이 아니겠는가(시 85:10). 성도들이 완전한 성품을 향하여 성소의 길을 여행하고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의 향이 그들을 가리워 주는 것이다. 대속죄일이 마치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여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서게 되는 것이다.
죄인이 지성소의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기 위하여 나아가는 동안,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의 향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수께서 사셨던 것처럼 완전한 생애를 산 것으로 간주하여 주신다. 분향단의 향은 특수한 재료를 가지고 만들게 되어 있었고, 아무나 그 향의 재료로 흉내내어 만들 수 없도록 되어 있었는데 (출애굽기 30:34-38), 이유는 성소의 향은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죄 없는 생애, 즉 그의 거룩한 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아무도 예수와 같이 깨끗하다고 말할 자가 아무도 없으며, 그것은 참람된 일이 되는 것이다. 또한 아침 저녁으로 향을 피우는 분향단의 네 뿔에는 속죄 제물의 피를 바르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주님의 용서의 은혜가 세상 어디든지에서 회개하는 자녀들에게 힘있게 나아간다는 상징이리라. 성소의 분향단의 불은 아무 불이나 가져다가 사용할 수가 없도록 지시되어 있었다. 반드시 거룩한 불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거룩한 불이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에서부터 가져온 불이라는 뜻으로서, 제일 처음 그들이 성소 봉사를 시작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셨던 그 불을 꺼뜨리지 않고 계속 사용하게 되어 있었으며, 그 같은 거룩한 불을 가져다가 분향단에서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부터 나온 거룩한 불인, 인류를 위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우리를 위한 갈바리의 속죄의 희생이나 중보의 기도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슴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거룩한 불, 그 거룩하고 뜨거운 사랑을 우리가 어찌 다 감사할 수 있으랴!
번제단에서 드려진 속죄제로 인하여 죄인이 용서를 받고 구속함을 얻을 수 있는 준비가 마련되었으나 막상 제사장이 그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와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리고 그 고백한 죄들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향단 앞에서 드리기까지는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레위기 4:26, 35; 5:10, 16; 6:7 참조).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 우리의 구속을 위한 준비가 마련된 것이지, 거기에서 우리의 구속이 완성된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사 중보하시는 기도가 없이는 십자가의 희생이 효험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 성소에서 사람을 위하여 진행되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은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십자가 상에서의 그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요긴하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여 하늘에서 완성하실 일은 그분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각시대의 대쟁투 489. 지상성소에서는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수시로 제사장들을 교대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 성소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자기의 피로 하늘 성소로 들어가신 대제사장으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항상 살아계신 중보자이시다. 지난 장에서 강조했듯이 성소 안의 세가지 기구들은 우리의 성화의 생애의 유일한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곧 하늘을 향하여 여행하는 나그네의 길을 비추어 주는 진리의 빛과, 여행하는 나그네에게 힘과 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생명의 떡인 하나님의 말씀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공급받기 위한 기도의 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문을 닫고 하늘을 향하여 문을 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힘을 얻으며,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서, 거룩하게 사는 비결을 배우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타락한 세상에 살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거룩한 하나님과 300년 동안 동행했던 에녹의 성화의 비결이었다.
화잇 선지자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업과 우리의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영감적인 말씀을 기록하셨다. 지금까지 공부한 성소의 중보 사업에 대하여 마치 쉽게 요약이라도 한 것 같은 귀한 말씀을 주의 깊게 같이 읽어 보도록 하자.
“그대들이 갈바리의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갈 때에 그곳에서 비할데 없는 사랑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믿음을 가지고 희생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에 그대들 자신에 의하여 깨어진 바 된 율법으로 정죄를 받은 죄인임을 알게 된다. 바로 이것이 회개이다. 그대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갈 때에 사유하심을 얻게 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번제단에 서 계셔서 간단없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희생제물을 바치는 자로 상징되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만들지 않고 주님께서 만드신 참 성전에서 봉사하시는 분이시다. 유대인의 성막의 상징적인 그림자는 지금에 와서 아무런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다. 날마다 드리는 것과 해마다 드리는 상징적인 속죄는 이 이상 더 드릴 필요가 없으나 끊임없는 범죄로 말미암아 중재자를 통하여 속죄제물을 바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의식을 집행하고 계시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셨던 것처럼 당신의 흘리신 피를 바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모든 범죄와 모든 사소한 실수를 위해서 희생 제물을 바치고 계시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중재하고 계시는데,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처럼 태초로부터 흘리신 당신의 피를 바치는 우리들을 위하여 탄원하시지는 않으시나 우리들의 심령에 역사하셔서 우리들의 기도와 참회를 자아내며 찬송과 감사를 불러 일으키신다. 우리의 입술에서 흘러 나오는 감사의 표현은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속에 있는 거룩한 기억력을 울려내어 마음의 음악을 상기시킨 결과이다.
참된 신자가 드리는 종교적 의식, 기도, 찬송 및 죄의 자복은 분향처럼 하늘 성전으로 올라가기는 하나, 그것들이 인간의 타락한 통로를 통과함으로 피로 정결함을 입지 않는 한 더러워져서 결코 하나님께서 가치있게 여기시는 것이 되지 못한다. 흠없는 순결성으로 드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며 모든 것을 당신의 의로서 나타내시고 순결케 하시는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께 받으시는 바 되지 못한다. 이 지상 성막에서 피우는 모든 분향은 그리스도의 깨끗케 하시는 핏방울에 젖어야 한다. 하늘 아버지 앞에서 당신 자신의 공로를 담은 향로를 들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는 세상에 썩어질 것으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도 없다. 주님께서는 이 향로 안에 성도의 기도와 찬송과 자복을 모아 담으시며 이 가운데, 당신 자신의 흠없는 의를 담으신다. 그렇게 할 때에 그리스도의 화목제물의 공로로서 향기를 풍기며, 하나님 앞에 분향할 때에 전체적으로 완전히 받으시는 바 된다. 또한 그 때에 은혜로운 응답이 내리게 된다.
“아! 순종과 회개와 찬송과 감사로 드리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의의 달아오른 불앞에 놓여져야 한다는 것을 모든 영혼이 깨닫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이 의의 향기는 자비의 보좌를 둘러 싼 구름 처럼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343-344
여기에서 한가지 중요한 과정을 언급하고 지나가지 않을 수가 없다. 칭의의 경험을 통하여(성소 뜰의 경험) 성소안, 즉 성화의 경험으로 들어 간 그리스도인이(성화는 그리스도인이 칭의의 경험을 얻을 때 동시에 마음 속에서 시작되는 것임) 그 속에서 범죄하거나 실수 했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가 알다시피 성소 안에는 죄의 용서를 위한 희생제사가 없다. 그러면 그 범한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렇다. 성소 뜰로 다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다른 말로 바꾸어서, 희생양을 가지고 다시 성소로 와서 번제단 앞에서 죽이는 거듭남의 속죄제의 경험을 다시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물론 처음처럼 긴 기간이 걸리거나 오랜 자복이 필요치는 않겠으나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자기가 실수하여 범한 죄 때문에 고통당하시는 어린양 예수를 깊이 바라보는 경험을 다시 가져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 앞에 가지 않고는 어떠한 죄인도 진정으로 죄의 모습을 보고 슬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범한 그 죄에 대하여 뉘우치고 다시 거듭난 다음에 다시 빨리 성소 안으로 복귀되는 것이다. 기억하도록 하자. 죄는 항상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 여전히 예수의 의가 그를 덮어주고 있다는 가르침은 성소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영의 가르침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하여 실제적인 한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필자가 시카고에서 목회하고 있던 당시, 지금으로부터 약 8년전의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나와 내 아내는 라오디게아교인의 상태를 깨닫고 나서 고심하던 나머지 진심으로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 마음을 주 앞에 전적으로 굴복하는 귀한 경험을 주님께로부터 받았는데, 그러한 주께서 주시는 진정한 개심의 경험을 새롭게 한 후 얼마 지나서의 일이었다. 처음 몇달 동안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화의 발걸음에 기쁨이 충만하였었다. 실제로 적용시키자면 우리가 성소 뜰의 경험을 통하여 성소 안의 성화의 과정 속에 들어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던 중 한번은 내가 내 아내와 함께 어떤 교인의 가정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방문 도중 우리는 어떤 사소한 의견 차이를 일으키게 되었다. 방문을 잘 마친 다음에 차를 타고 오면서 우리는 그 사소한 의견 차이와 다시 되살아나는 자존심들을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은 까닭으로 서로 다투기 시작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약 25분간 우리는 서로를 양보하지 아니하고 부부 싸움을 한 것이다. 성소 안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다. 과거의 연약성이 다시 세력을 얻으려고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께 즉시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간구하여 승리하지 못하고, 피할 길로 가지 아니하여서 그만 실수하여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여야 할까? 나는 그때 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오는 동안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병국아! 네 아내에게 사과해라. 너는 오늘 나약한 네 아내를 잘못 다루었다. 네 아내에게 가장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에 실패했단다. 너는 네 자존심과 급한 성미를 하나님께 굴복하고 드리기로 약속했지 않니? 하나님과 네 아내 앞에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라.” 그것은 분명하고도 부인할 수 없는 뚜렷한 성령의 음성이었다. 그때 나는 얼핏 이런 생각을 하였다.
“아니 성령님,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내가 목사지 내 아내가 목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내 아내가 오늘 월권하는 말을 했지 내가 잘못한게 아니잖아요? 내가 지금 사과하면 내 아내의 버릇이 더 나빠지지 않겠습니까? 왜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하나요?” 그러자 나는 얼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즉시로 성령의 음성에 굴복하기로 하였다.
아내는 먼저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 옆에 놓여 있던 소파에 앉아서 나는 나지막하게 내 아내를 불렀다. “여보!” 아무 응답이 없었다. “여보!” “….” 얼마가 지나자 아내는 일어나 방을 나가려고 하다가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하더니 얼른 다가와 “여보! 왜 그래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 때에 내 아내를 끌어 안고 내 눈물을 아내의 뺨에 묻히면서 이렇게 우리는 기도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우리가 또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였고, 주님의 이름에 욕을 돌렸습니다. 마귀가 얼마나 주님과 선한 천사들을 야유했겠습니까? 주님 우리의 죄를 다시 사하시고 우리를 다시 성소 안으로 불러 주시옵소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 걷고 싶습니다. 거룩한 동행의 길을……”
그 이후로 우리는 훨씬 더 은혜스럽고 다정한 결혼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과 하나님과 늘 교통하는 기도를 게을리하지 않음으로 인한 능력을 통해서 말이다.
물론 성소에서 성화의 길을 걷다가 수십번 아니 수백번 실수나 범죄를 통하여 들락날락 성소 안과 밖을 넘나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한가지를 기억하도록 하자! 성소에서 들락날락거리는 회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양심 또한 그렇게 무뎌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되 감사함과 존절함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는 아직까지 죄와 함께 피 흘리기까지 싸우지 않고 있다. 그래서 아직 우리에게 늦은비가 없는 것이다. 늦은비는 죄를 다 이기게 해주고 성품을 완전케 해 주기 위하여 임하는 것이 아니고, 죄를 다 승리하고 성품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온전케 이룬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는가?
첫째칸을 지나서 둘째칸 지성소로 나아가기 전에, 대속죄일과 지성소의 경험, 그리고 14만4천 곧 마지막 세대에 대하여 공부하기 전에 한가지 사실을 주지하고 지나가기로 하자.
칭의와 성화의 과정 속에 있다가 한번쯤 범죄했다고 해서 칭의의 경험을 잊어버리는 것인가? 그렇다. 회개하지 아니하거나 죄를 그냥 품고있는 자는 그러한 상태에 있는 한 하나님과 구원에서 떠난 자이다.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니냐고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함께 하실 수가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서하시지만 그 대가는 갈바리란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죄를 그냥 잊어버리고 모른척 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는 회개하고 버리는 일로 다루어지던지 아니면 죄와 함께 그 죄인을 영원히 멸하여 버리던지 간에 죄는 영원히 다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죄인은 하늘에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조사심판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다윗이 범죄하였을 때에는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자가 아니었다. “나는 다윗이 순전하여 하나님의 권면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라고 부르셨음을 보았다. 다윗이 하나님을 떠나 범죄함으로서 그의 고결한 성품에 흠을 내었을 때 더 이상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있는 그를 의롭다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으므로 무시무시한 선고를 내리셨다.” 예언의 신, 1권,39 영문.
그러므로 다윗은 회개할 때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부르짖었다 (시편 51:10-12). 우리가 범죄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에서 떠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의 칭의에서 떠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속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에 지체해서는 안된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진실한 의도를 헤아리시어 회개에 이른 후에야 죽도록 은혜를 베푸시지마는, 그러나 죄인이 죄를 범하고 그러한 상태에서 회개하고 죄를 포기하기를 거부하면 그 영혼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것으로 생각지 말자. 하나님의 은혜는 오히려 값비싼 은혜이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내어 쫓지 않으신다는 잘못된 기만에 속지 않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과 능력도 아울러 허락하셨다. 우리를 모든 죄와 그 세력들로부터 구원하시고 성소 안으로 이끄시어 거룩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계시하시며 가르쳐 주시는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