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학의 기만 (Deceptions of The New Theology)
제9장 성소 기별과 신신학, 제2부
신 신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성소 기별에 대해서 믿고 있는 바를 더욱 깊이 연구해 보면 신신학의 성경적 기초가 비참할 정도로 부족한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신신학의 옹호자들은 다음과 같은 귀중한 기별들을 부인한다.
1. 하늘 성소의 실존
시간이 지나갈수록 신신학과 결탁한 자들에 의한 성소 기별의 배척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콜린은 신신학자들이 성소 기별을 부인했던 그 첫번째 사건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 해는 1962년 이었는데, 그가 포드 박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성소 기별에 대한 교리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콜린이 하늘 성소의 실존을 믿노라고 말했을 때, 포드 박사는 놀라는 기색으로 말하기를 “하늘 성소를 문자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물었고, 콜린은 “분명히 그대로 믿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확실한 대답에 대해 그는 돌연히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그분의 성소 봉사 사업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성소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 때 이후로 오늘날까지 그와 같은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콜린은 포드 박사의 진리로부터 이탈된 사소하게 보이는 사상이 실질적으로 성소 기별에 대한 그의 견해에 전면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때 포드 박사는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봉사와 1844년 사건과 관련된 진리에 대한 자신의 신조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포드 박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콜린은 한 가지의 비 진리가 모든 진리를 거절하도록 인도하는 과정의 시발점이 된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이라도 거절하는 것은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 논박할 여지도 없이, 성경은 하늘에 참 성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상자 안에 넣을 수 있소?”하고 질문하는 이들도 있다. 이와 같은 질문이 내포하는 의미는 하나님을 작은 성소나 사원 같은데 가두어 놓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우리는 가장 거대한 성소라고 할지라도 그분을 제한시킬 수 없음을 인정한다. 하늘 성소와 지상 성소와의 차이점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하늘 성소는 지상 성소와 동일한 재료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물론 지상 성막을 구성하고 있던 동물의 표피는 하늘 원본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우리가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하늘 성소는 지상 성소에 비해 엄청나게 크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십억의 천사가 거기서 봉사할 수 있도록 참으로 방대한 것이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배푸는데 책들이 펴놓였더라. 다니엘 7:10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요한계시록 5:11
지상 성소가 하늘 성소의 모형임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출애굽기 25:9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 마다 예물과 제사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들린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8:2,3,5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요한 계시록 11:19
이런 성경절들을 볼 때 하늘에 실존하는 성소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의 진리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될 때, 우리는 사단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때 당시에는 콜린 역시 예상하지 못하였었지만, 포드 박사의 하늘 성소의 실존에 대한 부정이 오늘에 와서 하늘 성소 봉사 전체를 부정하도록 이끄는 밑바탕이 되었다. 포드 박사는 히브리서의 어떤 절이 그의 주장을 뒷바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내시고. 히브리서 9:24
그러나 이 성경절이 결코 하늘 성소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 앞 절인 히브리서 9:23은 성소의 실존함을 더욱 확실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브리서 9:23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있던 사람이 지은 성소에 들어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사업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 성소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다.
2. 히브리서 9장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소 개념을 지지함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셨을 때, 즉시 지성소로 들어가셨다는 증거는 없다. 신신학의 중요한 오류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자 마자 즉시 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셨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거의 전적으로 사도 바울이 서술한 히브리서 9장 12절 한 절에 의거한 주장이다.
킹스 제임스 성경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느니라. 히브리서 9:12
그러나 New International Version 이나 New King James Version 과 같은 현대 번역 성경은 성소를 지성소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그러다면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성소”라는 단어는 원어인 헬라어로 부터 정확하게 번역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대답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이 문제에 대한 열쇠는 헬라어 단어 ta hagia 의 뜻과 그 단어의 문법적 변화를 바로 이해하는데에 있다. 헬라어를 공부하는 성경 학도들에게 있어서 이 단어보다 더 어려움을 주는 단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첫번째 우리가 규명해야 할 문제는 이 단어가 복수인가 단수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 헬라어의 철자법에는 복수와 단수의 형태가 같기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다. 사실상 그 후기의 성경 복사자들은 단수와 복수를 구분하기 위하여 강조점 하나를 더 표기했는데, 바울이 사용한 ta hagia라는 단어는 복수로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 한가지가 절대적인 증명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이 단어는 복수로도 번역이 되고 단수로도 번역이 되었는데 단수로 번역이 되면 성소 (holy place) 라는 뜻이 되고 복수로 번역이 되면 성소들 (holy places) 이 되니 성소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킹 제임스 번역을 비롯한 많은 성경에서 이 단어가 성역, 성소, 또는 지성소 등으로 번역되고 있으며 또 이와 유사한 뜻의 다른 말로도 많이 번역되어 있는데, 히브리서 9장 12절에 쓰인 ta hagia는 반드시 “지성소”로 번역이 되어야 할 논리적이고 문맥에 맞는 타당한 근거가 없다. 같은 책 다른 절에서 바울은 명백하게 지성소에 관해 쓴 것이 있는데, 거기서 바울은 지성소를 지칭하는 단어를 ta hagia를 쓰지 않고 hagia hagion (가장 거룩한 중에 거룩함 – The Holy of the Holiest) 이라는 단어를 썼다.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히브리서 9:3.
바울이 지성소를 특별히 지적할 경우에는 hagia hagion이라는 복합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런고로 바울이 성소를 다시 언급하였다면 다시 hagia hag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을 것인데 다시 사용한 일이 없다. 히브리서에 사용된 ta hagia의 정확한 번역은 성전 (Sanctuary) 나 혹은 성소 (holy place) 가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번역판에는 한결 같이 성전으로 번역했는데 대표적으로 New English Version과 The Jerusalem Bible을 꼽을 수 있다. 만약 신신학의 지지자들이 주장하는대로 그리스도께서 A.D. 31년에 지성소 봉사를 시작하셨다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1844년의 중대성은 하나의 우화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히브리서 9장 12절이 올바로 번역된다면 그들의 주장을 전진시킬 수 있는 어떠한 근거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성경절은 그리스도의 지성소 봉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하늘 대제사장의 전체적인 성소 봉사를 지상의 대제사장의 봉사와 비교하여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3. 하늘 성소는 인간의 죄로 인해 더럽혀짐.
어떤 신신학자들은 재림교회에서 지금까지 계속해서 가르쳐 오고 있는 문제, 즉 사람의 죄로 인해서 하늘의 성소가 더럽혀졌다는 주장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이 논쟁에서 완전한 하늘이 어떻게 인간의 죄로 인해 더럽혀질 수 있겠는냐는 도전이 제기되고 있다. 이 질문은 다니엘서 8장 14절이 가르쳐 주고 있는 조사심판과 하늘 성소를 정결하게 하심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다. 이런 질문은 자신의 성경 연구가 깊고 진지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졸열한 질문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오래 전에 이미 이 지구 상에 죄가 있었고, 그보다 이 지구가 창조도 되기 전, 이미 하늘이 죄로 인해 오염되어 있었다. 루스벨이 하나님께 반역하였을 때, 그와 함께 삼분의 일의 천사들이 그들의 죄로 하늘을 더럽혔기 때문에 하늘에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하였다.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온 우주가 죄로 인해 오염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주의 조화를 되찾을 수 있는 구속의 계획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하늘 성소를 가리키며, 바울은 사람의 죄의 결과로 하늘 성소가 더럽혀졌음을 확인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히브리서 9:23
참으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서 이해하고 있는 능력있는 하늘 성소 정결의 기별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다.
4. 다니엘 8장 14절은 레위기 16장 30절과 적절히 연결됨.
신신학자들은 오랫동안 다니엘 8:14과 레위기 16:30과의 상관 관계에 대하여 도전해 왔다. 그들은 말씀을 피상적으로 공부하는 성경 학도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이 가르치던 재림 교회의 기별은 신학적으로 조금 무식한 쪽에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천명하기를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다니엘 8:14에 있는 “정결하게 함을”은 히브리 원어에서는 nisdag 라는 단어를 썼고, 레위기 16:30의 “정결케 하리니”는 히브리 원어의 taher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몰랐었다고 말한다. 분명히 이 두 단어는 문자적으로 전혀 다른 말이다. 더 나아가 현대 번역자들은 일반적으로 nisdag을 “회복된, 의롭게 된, 혹은 재헌신 된” 등으로 번역하고 있음을 설명하면서, 그러므로 다니엘 8:14과 레위기 16:30의 연관성은 증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정확한 연구에서 얻은 빛 앞에서는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레위기서가 기록된 후 다니엘서가 기록되기까지는 800년 내지 900년의 기간이 흘렀음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하나는 시내 광야에서 기록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바벨론에서 기록되었다. nisdag이라는 단어의 현대적 해석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은 없다. 어떤 다른 성경 번역에는 “깨끗하게 됨이나 정결하게 됨”이란 말이 아닌 다른 말로 번역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인역 성경을 번역한 랍비들이 그 단어를 “정결하게 하다”라는 의미로 번역했다는 사실은 중요한 고찰이며, 그들 역시 nisdag의 의미를 “정결하게 하다”는 뜻으로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히브리 원어에 대한 랍비들의 학식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몇몇 신신학의 지지자들은 70인역 성경의 번역자들은 B.C. 2 세기경 안디오구스 에피파네스 (Antiochus Ephiphanes) 에 의한 유대인 성전 유린 사건의 영향으로 그렇게 번역하였다고 주장함으로 그들의 견해를 고수하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이것은 그들의 거짓된 입장을 고수하기 위해 편리하게 만들어 낸 억측에 불과한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2세기경의 히브리 학자들은 nisdag과 “정결하게 함”이라는 말을 동일시 하였다.
히브리의 시를 이해하면 다니엘 8:14에 씌인 nisdag을 이해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nisdag은 성경의 다른 곳에는 사용된 일이 없으며, 구약 성경에서 여러번 사용된 sadag 에서 파생된 말로 생각된다. 놀랍게도 taher이라는 단어가 시적 대구법 (parallelism) (對句法)으로 sadag 과 함께 사용된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씌어진 시는 그 구성에 있어서 같은 의미의 말을 다른 단어를 사용해서 반복해서 표현한다. 이런 형태의 대구법의 형식은 히브리 시의 중심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아래에서 그 예를 보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시편 32:5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8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시편 34:1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 이름을 높이세. 시편 43:4
이제 taher 이나 sadag 이 사용된 구절들을 살펴보자.
인생이 어찌 하나님 보다 의롭겠느냐 (sadag).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이 보다 성결하겠느냐 (taher). 욥기 4:17
그러므로 의인 (sadag) 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 손이 깨끗한 (taher)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욥기 17: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taher)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착실하여 다 의로우니 (sadag). 시편 19:9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 (sadag) 과 악인이며 선하고 깨끗한 (taher) 자와 깨끗지 않은 자며. 전도서 9:2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다니엘이 사용한 nisdag 이라는 단어와 모세가 사용한 taher 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놀라게 할만한 것이 못된다.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이 비록 신학적으로는 무식한 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성경적으로는 결코 무식하지 않았다. 성경에 대한 깊은 연구 결과는 이 땅에서의 모형적 봉사에서 대속죄일의 정결케 하는 일과 다니엘에 의해서 밝혀진 원형적 봉사, 즉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를 정결하게 하시는 일은 서로 깊은 연관이 있음을 확실하게 지지해 준다.
5. 1844년은 성경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대임.
신신학 주의자들은 2,300 주야의 예언의 타당성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제기하고 있다. 그들은 예언 상의 하루는 실제 계산에 있어서 일년이라는 원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이 세상에 출현하기 오래 전에 예언을 이해하기 위한 원칙으로서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취급하지 않겠다. 그 다음으로 그들은 2,300 주야 예언의 기산점인 B.C. 457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그러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볼 때, 고래스, 다리오, 아닥사스다 왕이 차례로 내린 조서 외에는 예루살렘 성의 중건에 대한 다른 조서가 없다. 선지자 에스라는 이 왕들의 조서를 하나의 조서로 취급하고 있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성전 건축할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와 고래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쫓아 전을 건축하며 필역하되. 에스라 6:14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가 B.C. 457년에 있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아닥사스다왕이 즉위한 후 7년째 되는 해였고, 그것은 역사적으로 확립된 연대이다. 2,300 주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은 1844년이 틀림이 없다.
6. 다니엘 8:14절의 2,300 주야는 2,300번의 희생 제사가 아님.
그들은 또 다른 커다란 논쟁거리를 찾아 내었다. 그들은 다니엘 8:14절를 2,300 “일(日)”로 번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히브리어에는 문자 그대로 “2,300 아침과 저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진리의 반대자들은 2,300 주야가 유대인 성소에서 매일 아침 저녁 두번 드리던 제사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2,300 아침과 저녁이라는 표현은 2,300날이 아니고 2,300의 절반인 1,150일을 말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끄집어 내었다. 사실 어떤 번역판에는 이것을 1,150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한 것이다. 성경상에서 날 (혹은 일)이라는 것은 “아침과 저녁”을 가르키고 있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세기 1:5
이제 내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여 구별하여 드리고 주 앞에서 향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진설하며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에 조석 (아침 저녁) 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니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니이다. 역대하 2:4
또 자기 재산 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번제 곳 조석 (아침 저녁)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에 쓰게하고. 역대하 31:3
여호와의 성막 앞에 모시게 하여 항상 조석으로 번제단 위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하여 이스라엘에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게 하였고. 역대상 16:40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에스라 3:3
이와 같이 다니엘 8:14절의 “2,300 주야”는 2,300일로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적절한 것이다. 최근 재림교회의 한 목사가 이태리에서 성경을 현대어로 번역하는 성경 학자들을 설득하는데 있어서 이 사실을 잘 설명해주므로 성공한 실례도 있다.
7.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분의 하늘 성소에서의 봉사는 우리의 소망의 중심이 됨.
재림교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성소 기별을 그리스도 자신 보다 더 높이고 있다고 논박한다. 어떤 이들은 성소 기별은 구속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치를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시비는 모두 성경적이 아니다. 성소 기별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분께서는 하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의 옹호자시요 중보자시며 재판장이시다.
성소 기별이 올바르게 이해되고 가르쳐졌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과 그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구원이 더욱 훌륭하게 높혀졌을 것이고 더욱 밝게 조명되었을 것이다. 성소 기별은 십자가에 맞추어진 촛점을 결코 흐리게 하지 않는다. 희생, 그것이 바로 성소 기별의 중심인 것이다. 우리를 위한 희생이 되시고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위대한 연합을 이루셨다.
아마 재림교회가 결정적이고 중대한 기별을 전파하기 위한 사명감 때문에 본의 아니게 그 기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별과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과 함께 조화 있게 제시하지 못하였음이 사실일지 모른다. 우리의 축복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없이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이 마지막 세대를 위한 기별을 전파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이 영광스러운 개념이 바로 성소 기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심이 되는 사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