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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신학의 기만 (Deceptions of The New Theology)

제7장 죄의 문제와 신신학

 

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죄에 대한 성서적 개념을 이해하여야 한다. 다음의 주제들은 신신학자들에 의해서 가장 반대받고 있는 중요한 진리들이다.
1. 죄는 의도적으로 혹은 소홀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신신학의 추종자들은 사람이 어떠한 형태로든지 하나님의 무한하신 뜻으로부터 떠나가는 것, 또는 인간의 취약성이나 연약함 자체를 죄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 중의 어떤 이들은 증언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하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그릇된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말씀을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완전함에서 모자라는 것은 모두 죄라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천사나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을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은 누구도 죄없이 완전하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하실 뿐이다. 어떤 사람이 죄에 대해서 이렇게 믿고 있다면, 그는 죄를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한번은 콜린 스탠디쉬가 신신학을 열열히 신봉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혹시 아내의 편지를 부치는 것을 잊은적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그와 같은 망각이 곧 죄라고 주장하였다. 또 다른 한 신신학의 지도자는 다리를 꼬는 것이 죄하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정상적인 혈액의 순환을 방해하여 건강법칙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일 이런 식의 이론이 옳다면, 무릎을 끓는 것도 우리 몸의 혈액 순환을 방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세로 기도하는 사람들도 정죄를 받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사소하고 유치한 논쟁으로 생각하겠지만, 신신학에 물든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기본적인 개념이다. 한번 신신학에 젖어든 자들은 무엇이든 한계가 있는 것은 죄라고 믿게 되며, 어떤 사람도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결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적인 안전감을 갖도록 유도한다. 어쩔 수 없는 한계성에 의해서 죄를 계속 짓고 있으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다른 좀더 심각한 죄를 계속 짓는다고 해서 구원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다. 주의 종은 죄에 대해서 한가지 정의 밖에는 내리지 않았다.
죄를 짓는자 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곧 불법이라. 요한일서 3:4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태어나는 죗된 육체의 한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 (로마서 12:12). 영감의 글은 모든 죄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음을 선언하였다.
누구라도, 나는 나의 성품의 결점을 치료할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 만일 그대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였다면, 그대는 결단코 영생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실물 교훈, 331 (영문)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봉사가 죄에 대한 승리의 모본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바 되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로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베드로전서 2:21,22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본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따라야할 기준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생애에서 죄를 이길 수 있게 하는 능력이 그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알지 못하고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 신신학은 하나님께서는 모르고 지은 죄에 대해서도 사람에게 그 책임을 지우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릇된 행위가 죄로 규정되려면 그 일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있어야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께서는 무지한 자들도 사랑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브리서 5:2
그렇지만 이것이 무관심하고 소홀히 여긴 결과로 무지하게 된 자들을 포함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소홀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께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브리서 2:3
하나님의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닐 경우에, 그런 자들은 그들이 받은 빛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따라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로 나타내느니라. 로바서 2:14,15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우상 숭배하던 사람들까지도 구원을 받아서 하늘 나라에 있게 될 것이다. 이 구원받은 이방인들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성령의 인도하심과 배우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응답한 자들이다.
비록 이방인들 가운데서 일지라도 친절한 정신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으며 생명의 말씀을 듣기 전에라도 저들은 선교인들을 도와 주었으며 저희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섬긴 자들이 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일지라도 오히려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했으나 자연을 통하여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하였다. 저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저들의 마음을 감화시킨 증거이며, 저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다. 시대의 소망, 638 (영문)
순진한 무지함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는 말씀이 성경의 여러 곳에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서 4:17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출애굽기 17:30
바리새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복음 사업에 있어서, 비록 지도자들일지라도 본의아닌 무지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지않음을 지적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의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복음 9:41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15:22
죄와 불법은 사면과 용서를 부르짓는 죄책감을 동반하게 된다.
이는 죄를 범하였고 죄가 있는 자니. 레위기 6:4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야고보서 2:10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아니하리라. 출애굽기 20:7
죄의 문제는 우리에게 최종 결정권이 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고린도전서 15:34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로마서 6:16
만일 인간의 무한한 연약함과 연약한 모든 것이 죄라고 규정한다면, 위의 성경절이 인간에게 하는 요구는 정당하지 못하며 불공평한 것이 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요한복음 8:11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요한복음 5:14
신신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죄에 대한 고등 개념 (High concept) 즉, 죄를 인간의 한계성이나 연약함 그 자체로 정의하는 것은 죄에 대한 핑계를 찾도록 이끌며, 신자들로 하여금 죄를 가지고도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이론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반면에 그들이 말하는 죄에 대한 하등 개념 (Low concept), 즉 죄를 불순종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 속에 그분의 성품을 이루실 수 있는 확실한 바탕을 마련해 준다.
3. 죄는 지금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신신학의 대표적인 등록 상표 중의 하나는 모든 사람은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죄를 지을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신신학의 추종자들은,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승리와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외치면서 의로운 행위가 성장할 것을 격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일지라도 현 생애에서 순간 순간 마다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진리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
호주의 신학자인 로버트 브린스미드 (Robert Brinsmead) 가 1960년대에 저지른 가장 큰 과오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치는 역사에 의해서만 죄가 근절되는 것으로 주장한 것이다. 이 견해는 하나님께서 인을 치실 때까지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가 잘못 생각했던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아서 죄를 이기는 것과 속죄사업의 마지막 국면에서 죄를 씻어서 없이 하는 죄의 도말을 동일시 (혼동) 하였던 것이다. 이 오류는 그가 받아들인 원죄론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그 후 브린스미드는 재림시까지 죄에 대한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복음주의적 오류를 받아들임으로서 죄에서 완전히 이길 수 있는 시간을 역사의 맨 끝으로 지연시켰다.
호주의 그레이털 시드니 대회가 주최했던 한 회의를 상기해 보자. 그 회의에서 두 목사님이 브린스미드가 1960년대에 가졌던 오류적인 견해(즉, 하나님의 특별하신 인을 받아야만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견해 – 역자주)를 지적한 일이 있었다. 한 목사는 “브린스미드의 견해는틀렸읍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결코 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오류의 수정을 위해 또 다른 오류를 도입했다. 다른 한 목사님은 “브린스미드의 견해는 틀렸읍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죄를 이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지금 우리는 죄를 멀리 할 수 있읍니다.”라고 올바르게 설명하였다. 그 회의에서 있었던 상반된 두 견해가 그 이후 70년대에 이르러 진리와 오류를 구분하는 전체적인 바탕이 될 줄로 깨달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들의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이 요구와 함께 승리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신다. 그러면 여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성서적 언급을 찾아보자.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통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베드로전서 1:22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로마서 6:6,7
그의 안에서 건물 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에베소서 3:21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지게하려 하심이니라. 로바서 8: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린도전서 15:56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자. 유다서 24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 2:12-14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치 아니 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3:6
하나님께로써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5:18
4.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리시킨다.
신신학자들은 우리가 가끔 죄를 짓는다고 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가 분리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간적인 사고 방식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줄을 당겼다 늦추었다 하는 식의 고무줄 놀이를 하시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의 자녀들이 순종하지 않는다고 자녀들과의 인연을 끊어 버리겠는가?” 라고 말하면서,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끔 짓는 죄 때문에 관계를 끊어버릴 수 있겠는가?” 라고 호소력있는 주장을 한다. 물론 다음의 성경절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여호수아 1:15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신명기 31:6,8
신신학의 신봉자들은, 마치 역사적인 재림 신앙을 믿는 사람들은 단 한 가지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으로부터 떠나신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은근히 표현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떠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것은 진리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였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2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신학의 신봉자들은 단 하나의 죄가 아담과 해와를, 또한 그들을 통해 전 인류가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분리된 사실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깊이 숙고해 보지 않는다. 또 그들은 단 한가지의 죄로 인해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특권을 상실했던 사실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 보기를 원하지 않는듯 하다. 다윗이 살인과 간통 죄를 범하고도 하나님과의 구원받은 관계를 소유할 수 있었다는 착각이 신신학을 열열히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다윗 자신은 신신학자들처럼 믿지 않았었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다윗은 그가 범죄했던 시점에서 구원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편 51:12
바울은 우리가 육에 속하든지 아니면 영에 속하여 있다고 설명하면서, 모든 사람은 둘 중의 한 영역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만일 우리가 육에 속해 있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영에 속해 있으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니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5-8
이 문제는 탕자의 비유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그 아들은 분명히 아버지의 은혜를 저버렸고, 그의 방탕한 생활이 아버지의 명예를 손상시켰다. 그렇지만 떠나간 것은 아들이었지 아버지가 아니었다.
잠시 동안의 황홀한 즐거움이 지난후 비참한 죄의 결과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아들은 비로소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의 발길은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되어있는가! 그는 어떻게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부드럽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아버지 앞에서 해야 할 말을 연습하면서 뛰어왔을 것이다. “아버지여,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이 비유 속에 나타난 탕자의 아버지는 우리의 사랑하는 하늘 아버지에 대해서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는가! 그의 아들을 알아보는 그 순간, 활기찬 젊은이도 아니고 중년이 다지난 노인이 어울리지 않게 종종걸음으로 아들에게로 달려나가 두팔을 활짝 열고 얼싸 안았다. 이제 아들은 열심히 연습해 둔 용서를 간구하는 말을 여쭈었으나 그런 말에는 아랑곳없이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누더기 같이 더러운 옷을 벗기고 잘 씻긴 후에 종의 의복이 아닌 아들의 의복을 입혀 주었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일지라도 우리가 희망없이 버려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사랑의 구주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1
슬프게도 신신학자들은 죄짓고 회개하고 또 짓고 또 회개한다는 관념 때문에, 매일 매순간 마다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개념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과 고무줄 놀이의 관계를 가지도록 이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그러한 관계를 소유하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날마다의 생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신다는 확신과 함께 우리는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놀라운 약속을 가지고 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