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학의 기만 (Deceptions of The New Theology)
제6장 인간의 본성과 신신학
신 신학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그릇된 견해 위에 세워져 있다. 참으로 이것은 우리가 신신학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중요한 논증의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이 문제에 대한 일곱 가지의 핵심 주제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검토해 보자.
1. 인간은 원죄 (original sin) 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원죄의 개념은 어거스틴의 기독교 사상 가운데 새겨져 있던 것이다. 그는 이교 사상으로부터 이것을 받아들였는데, 이 사상의 골자는 인간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태어날 때부터, 심지어는 수태되었을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되어버린 상황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인간 스스로 혹은 하나님 자신까지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그릇된 주장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해 주시고, 또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예정해 두셨다는 가설을 믿게 되었다. 어떤 기독교 신자들은 다윗이 드린 회개의 기도를 들어 이 견해를 뒷바침하려고 한다. 이렇게 주장하기 위하여 대개 현대역 성경을 인용하는데 그 번역된 구절 속에는 번역자들의 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원죄에 관한 편견이 나타나 있다. 흠정역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
그러나 새 국제역 (NIV) 은 똑 같은 구절을 의역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원죄에 대한 편견을 들어내고 있다.
진실로 나는 태어날 때 부터 죄인이었으며 나의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였을 때부터 죄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51:5 (NIV 역자 번역)
히브리 원전에는 어떤 원죄나 범죄에 대한 언급이 이 구절에서 나타나 있지 않다. 이어지는 구절을 살펴보면 다윗은 밧세바로 더불어 지은 죄로부터 완전히 정결함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심의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편 51:6,7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이 구절들은 다윗이 원죄나, 사람이 죄짓기를 중단할 수 없다고 믿었다는 사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반면에,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이 죗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가려고 하는 본질적인 경향이 있음을 지적해 준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은 자연스럽게 죄를 범하게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어 버린다. 인간은 어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다고 성경은 강조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출애굽기 32:3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를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20
이런 성경 구절들은 원죄라고 하는 그릇된 교리를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조상들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들을 죄인으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만일 원죄의 사상이 성경적이라 한다면 하나님께서 침례 요한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누가복음 1:15
우리는 우리가 짓는 죄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12
2. 하나님께서 개인의 영생에 관해 예정해 놓지 않으심
단지 소수의 재림교인 만이 예정설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죄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논리적으로 결국 예정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 종교 개혁자인 루터나 칼빈도 그러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 자신이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 24:1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3:37
예수께서 갈바리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모든 사람을 그에게로 이끄셨지만, 각 개인은 이미 손에 쥐어진 구원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인간의 구원은 조건적임
수 많은 재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히 구원받게 된다는 사단의 이론이 신신학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복음주의 개신교도들이 전하고 있는 것보다 상당히 미묘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이기든지 이기지 못하든지를 불문하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이미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설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의 전제 조건은 순종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거듭하여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38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행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4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6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12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야고보서 2:5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시편 103:17,18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7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태복음 19:16,17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4.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완전은 예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신신학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부인한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완전한 성품을 개발하는 특권에 대해서 지지하고 있다. 신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완전 (perfection) 과 완전주의 (perfectionism) 를 혼동하고 있다. 완전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공로를 쌓을 수 있다는 사단의 그릇된 이론이다. 그렇지만 성경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그러므로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8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16
또한 완전주의라는 개념 속에는 인간이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최고의 상태, 즉 절대 완전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완전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그러한 경지에 한번 들어가면 다시 떨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배척되어야 한다. 이와 반면에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는 말씀으로 가득차 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1:8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한일서 5:1-5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일서 2:3-6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48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시편 119:2,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스바냐 3:13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한일서 3:9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이므로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에베소서 4:11-13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2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의해서 완전함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언제나 전쟁과 행군과 투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들의 생애 가운데서 모든 죄악을 제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 뿐이시다. 그러나 완전함이란 성숙함과는 다른 개념이다. 개심한 신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그 성숙함에 있어서 점점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5. 성도들에게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케 하는 능력이 공급됨.
진실된 제칠일 안실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받아들이는 참된 성경적인 진리는 성도들이 죄를 지금 이 순간에 이길 수 있고, 또 이길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신신학은 성도들이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유다서 24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에베소서 2:4-6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고린도전서 15:3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2-24
마지막 세대는 완전함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능력주시기로 이미 약속하셨음으로 그들은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게 될 것이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요한계시록 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19:8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 (貞節) 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요한계시록 14:4,5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에베소서 5:27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요한계시록 22:11
여기에 보인 성경절들은 죄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신신학의 패배주의 이론을 꼼작 못하게 막아버린다. 신신학의 이러한 오류를 받아들이면, 그 결과로 인해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가정(假定) 중 한가지의 추측에 도달하게 된다.
A)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하늘로 데려가심으로서 하늘 나라를 다시 오염되게 하실 것이다.
B) 하나님께서는 죄인들 중에서 하늘로 데려갈 수 있는 성도들을 당신 자신이 임의대로 만드실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한결같이 이러한 추측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6. 거듭남은 회개할 때에 이루어진다.
성경상의 진리는 거듭남과 회개가 함께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회개란 거듭남의 경험이다. 교단에서 출판된 포드 박사(신신학의 대표적인 인물 – 역자주)의 저서 “길을 향한 해답” (1977년 출판) 이라는 책은 “회개는 사람에게 성령과 새로운 품성의 씨를 가져다준다” 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회개를 씨를 뿌리는 것, 혹은 진리의 파종으로 설명하고, 거듭남은 회개한 후에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의 길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서적인 가르침에서 근본적으로 이탈된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회개한 후부터 거듭날 때까지, 우리는 예수님과 구원의 관계에 있지 못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2:2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5:18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로마서 6:6,7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었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2, 23
회개를 거듭남의 경험과 분리하는 것은 논리적도 아니요 성서적도 아닌 잘못된 가르침이다.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음.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음을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이들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일종의 좀비이즘 (Zombi-ism: 죽은 사람 안에 초자연적인 생명력이 들어가 의지도 사고도 없는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고 믿는 사교의 일종 – 역자 주) 이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고나 의지가 없어지고 또한 선택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논리는 많은 다른 주장들처럼 어떤 면에 있어서는 사실이다. 확실히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가운데 계시면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행하게 된다. 그러나 사단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은 엄청나게 대조적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사단에게 굴복하게 되면 사단은 우리를 자기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시체가 될 것이요, 만일 예수께 우리 자신을 굴복하면 그분은 우리를 자유케 해 주신다. 그분은 결코 우리의 결정권을 박탈하시지 않는다. 결코 우리의 의지를 거스리는 충성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사단의 군대와 연합하기로 결심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슬퍼하시면서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허락하신다.
이 문제에 관하여는 예수님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된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은 “포도 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습니까? 가지가 포도 나무에 붙어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겠지만 그것은 두가지가 다 사실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이 진리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확실히 되고 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요한일서 4:13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4:15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요한일서 3:24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고린도후서 13:5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20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골로새서 1:27
죗되고 타락한 인간이 속절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 우리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재생시켜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생애를 그리스도가 주관하시도록 완전히, 모든 것을 바침으로서 이 세상에 사랑과 순결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한 무리의 백성을 소유하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결코 복종할 수 없다는 사단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할 것이다. 죄인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은 온 우주가 경탄하도록 나타내어질 것이다.
신신학에 생소한 사람들은 그것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사리 가려내기 어려울 것이다. 신신학의 신봉자들 중에도 죄에 대한 승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이상하고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계속해서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서의 완전한 승리를 제시하고 지지한다.
신신학자들은 자주 연합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성화시키는 진리 위에 촛점을 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불화를 방지한다는 가면 아래에서 분열이 강조되어서는 안된다는 교리만을 열심으로 외친다. 신신학자들의 이러한 외침은 모든 독특한 진리들을 논쟁거리로 만들어 버리기 원하는 사단의 사업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연합에 대한 호소는 이미 하나님의 교회에서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는 분열을 더욱 가속시킬 뿐이다.
때때로 신신학에 심취한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품의 완전을 이루도록 능력을 주신다는 가르침에 대해서 괴상한 질문으로 도전해 온다. 그런 자들은 자주 날카로운 갈고리가 들어있는 질문들을 하는데, 그것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당신은 완전합니까?” 라든가 “완전한 사람을 본 일이 있습니까?” 라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람이 완전하게 되었는지를 판단하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자기가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완전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 또한 완전함이 자주 율법주의로 지칭되나 이것은 잘못된 비난이다. 이 완전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한 당신의 백성들에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그분의 약속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완전함의 성서적 개념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지는 육체의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죽어야 할 몸이 죽지 아니할 것으로, 썩어야 할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옷 입기 전까지, 우리는 항상 타락한 육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품성의 완전과는 별개의 것이다. 화잇 여사는 인디아나 주에서 일어났던 거룩한 육체 운동에 대해서 경고하시면서 그 구분을 명확하게 해 놓았다.
모든 사람은 지금 거룩한 마음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생에서 거룩한 육체를 소유한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완전한 육신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의 영혼의 완전은 지닐 수 있다. 가려뽑은 기별, 2권, 3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성품을 증거할 한 백성을 소유하실 것이다. 성령의 능력을 위임 받아서, 온 세상의 거민들에게 마지막 초청의 기별을 크게 외치며 나아갈 한 백성을 가지실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특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