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학의 기만 (Deceptions of The New Theology)
제4장 율법주의, 재림교회를 향한 질책
신 신학이 분명 천주교회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는 오히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기별이 로마 교황의 가르침과 유사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언급되었다. 복음을 다룰 때에 칭의와 성화를 함께 포함시키는 것은 개신교의 개혁을 부인하고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안에 천주교회의 원칙을 세우는 것이라고 확신있게 주장되어 왔다.
개혁 개신교도들은 근본적으로 칭의만의 복음 위에 세워진데 반해서 천주교회는 복음이 칭의와 성화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고 가르쳐 온 것이 사실이다. 재림교회의 기별에 대한 이러한 비난들은 트랜트 종교회의 결의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1545-1563년에 걸쳐 열렸던 트랜트 종교회의는 개신교회의 개혁을 반대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소집되었다. 18년이 넘는 장기간의 회의에서 주교들은 많은 논제들을 토의했지만, 복음이 칭의만으로 이루어졌느냐 하는 문제보다 더 활발히 논의된 문제는 없었다. 마침내 투표에 의해 그들은 복음이 칭의와 성화로 구성된다는 견해를 채택하기로 가결하였다. 수많은 열열한 신신학의 지지자들은, 정통적인 재림교회의 이념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개신교회의 전통보다는 오히려 천주교의 전통에 속해 있다는 확실한 증거로서 이 사실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복음은 칭의와 성화로 구성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천주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몰아간다. 성경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식의 증명은 신신학의 주장을 지지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트랜트 종교회의에 참석했던 천주교회 주교들의 결정 사항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들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성화의 개념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성화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천주교의 주교들은 일곱 가지 성결한 예식, 즉 미사, 신타그 혼인, 세례, 고행, 견진, 종부 등의 의식을 성화라고 생각했다. 이 주교들이 결정한 성사 예식에 기초한 성화는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정죄하신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였다. 이것은 행함이 구원한다는 믿음이었다. 이것에 대한 화잇 부인의 언급을 보자.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판에 박힌 의식 존중 주의에 고착되어 있었다. 그들이 율법적인 종교에 만족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에게 하늘의 산 진리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사도행적, 17
율법적인 종교가 이 시대에 바른 신앙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 냉담한 율법적 종교가 영혼을 결코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없다. 그것은 사랑도 그리스도도 없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배를 위한 엄숙한 모임, 끊임 없는 종교의식, 외형적인 겸손, 부과된 희생- 이러한 모든 것은 행함으로 자신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1권, 338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구원에 대한 이같은 율법적인 개념을 강력히 부인한다.
우리는 우리가 빠진 죄의 구렁텅이에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피해 나올 수는 없다. 우리의 마음은 악한데 우리가 그것을 고칠 수 없다… 교육과 수양과 의지력의 연단과 인간의 노력은 상당한 역할을 하고, 이것들이 혹 외모의 단정은 만들어 낼 수 있다 할지라도 마음을 고칠 수는 없으며, 생애의 동기를 깨끗하게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죄에서 정결하여 지려면 먼저 마음 속에서 동작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나니 곧 위로부터 새 생명을 받아야 한다. 이 능력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오직 그의 은혜만이 죽은 심령의 기능에 생기를 주어서 그것을 하나님께로 즉 거룩한데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정로의 계단, 18 (영문)
위의 말씀과 또 다른 여러 말씀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이해하는 성화는 율법주의나 인간의 노력의 공로를 한치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재림교회는 칭의와 성화는 복음 안에서 분리될 수 없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성경의 가장 분명한 증언을 한결 같이 지지한다. 그러므로 재림교회는 유대인의 의식 주의와 천주교의 성사주의를 부인한다. 칭의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진정한 성화 역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 가게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우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18
칭의와 성화는 믿음으로 말미암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로서 이루어진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5:25-27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12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0
신신학을 깊이 연구해 보면 신신학의 추종자들이 말하는 성화가 오히려 율법주의적 개념에 바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성화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성서적 개념과는 달리 신신학은 그리스도의 의롭게 하시는 은혜에 응답하는 인간의 최선의 노력에 의한 행함에 기초를 둔 성화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들이 성화의 개념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의롭게하고 거룩하게 하는 복음의 두가지 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믿음에다 행함을 더한 복음을 믿는 것처럼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신실한 재림교인들은 율법주의자 혹은 완전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복음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급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요약하면 신신학을 믿는 어떤 사람들은 칭의는 믿음으로, 성화는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과 그후 천주교회에 만연해 있던 사상이다. 이것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를 포함한 많은 개신교도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야말로 사단의 교묘한 함정인 것이다.
그런데 신신학은 성화가 복음의 일부라는 것을 배격함으로 또 다른 잘못을 범하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의 지지자들 때문에 성화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가능해 진다라는 천주교의 견해가 용납되게 된다. 그들은 깊은 확신을 가지고 성화가 복음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성화에 대한 비성서적인 천주교회 식의 견해를 버리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한 거룩한 생애로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들여야 한다.
끝으로,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성화라는 성경의 진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엘렌 화잇의 전 생애의 봉사 기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어 온 증언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전파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신 세 천사의 기별의 영광스러운 복음이다.
중요한 것은 수 많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실제에 있어서 율법주의에 얽매여 살아왔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화잇 부인은 율법과 복음이 일관성 있게 자주 설교되지 않는다고 정확하게 증언했다. 우리는 설교에서 율법만을 너무 강조해 왔기 때문에 승리의 생애를 위한 능력을 공급할 수 있는오직 한분 예수님을 우리의 시야에서 거의 잃어버리고 말았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94, 가려 뽑은 기별, 3권, 172) 화잇 부인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동일한 비중으로 가르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가려 뽑은 기별, 3권, 184).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은 큰 소리로 외치고 예수의 믿음은 귓속말로 속삭여 온 것과 같다.
재림교회 초기의 열열한 목사님들이, 율법이 당시의 주류 개신교회들 사이에서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의 성격을 선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의 믿음이 동일하게 함께 강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는 예수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
분명히 율법주의는 1888년 이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며 남은 교회에 있어서 계속적인 위협이 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에게 완전히 굴복할 때만 이 치명적인 과오를 피할 수 있다. 율법주의자의 문제점은 그가 법을 결코 지킬 수 없다는데에 있다. 왜냐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오직 한 능력을 나누어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자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날마다 구원 받기 위해서 반드시 법을 지켜야한다는 인식과 욕구에 부딪친다. 그러나 정직하게 자신을 살펴 볼 때에 계속적인 실패만을 깨닫게 된다. 이런 것들이 좌절, 신경과민, 무력감, 절망 등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백성들 앞에 그리스도의 능력과 다함이 없는 그분의 사랑을 제시해야만 한다.
재림교회 안에 들어온 신신학이 율법주의적인 영적 암을 교정해 보려고 시도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제시된 해결책은 율법주의 그 자체처럼 영원히 멸망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다른점이 있는데, 그것은 신신학이 주장하는 관계주의 기독론 (가치가 있는 것은 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행위가 아니고 내가 가지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라는 주장)을 깨달은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서는 매우 강조하지만 순종케하는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칭의 만의 복음을 강조함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이 갖는 어쩔 수 없는 좌절감 조차 전혀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황홀경 속에 살고 있다. 이러한 환상 때문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율법주의자들 보다 오히려 더 깊은 기만적인 위험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주의의 황폐함이나 신신학의 무능력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음에는 그리스도의 용서와 인간을 창조주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영적인 회복이 포함되어 있다. 나눌 수 없는 샴의 쌍둥이 형제처럼 율법과 복음,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 진리와 사랑, 칭의와 성화는 복음 속에 함께 묶여져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늦은비 성령의 퍼부어짐과 큰 소리의 외침과 신실한 자녀들을 하늘로 데려가기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이루어지게 할 수 있었던 1888년의 기별이었다. 이 기별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의 생애에 영원한 의를 가져올 수 있는 바로 그 기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