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 기별 – 서론 (The 1888 Message – An introduction)
제 10 장 성소 정결과 1888년 기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관련하여 성소 정결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하여 이상하게도 등한시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성소 정결이 죄다 무엇에 대한 것인지 좀처럼 명석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마지막 날의 시련을 견디기 위하여 아주 중요한 이 진리를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소 문제와 조사심판 문제를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크신 대제사장의 지위와 그 하시는 일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은 이 시대에 필요한 믿음을 활용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채우시려고 계획하시는 그 자리를 채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
하늘에 있는 성소야 말로 사람을 위하시는〔믿음으로 의롭다하심] 그리스도의 사업의 바로 그 중심이다. 그것은 세상에 사는 모든 영혼들과 관계된다. 그것이 구속의 경륜을 열어 보여주며, 우리를 시간의 바로 그 종국까지 데려가면서, 의와 죄 사이에 싸움에서(의의 편이) 승리를 거두는 논점(혹은 출구를)을 드러낸다(GC 488.각 시대의 대
쟁투 하권 285, 286).
나아가 이 위대한 성소 진리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의 기별의 기초가 된다. 복음전도(Evangelism)에서 발견되는 몇몇 인상적인 말씀이 이것을 분명하게 하는데 도와줄 것이다.
하늘 성소 봉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우리 믿음의 기초가 된다 (Ev22l, 복음전도 220 참고).
성소에 대한 주제가 1844년의 실망의 신비를 여는 열쇠이었다. 그것은 서로 연결되고 조화되는 진리의 완전한 체계를 열어 보여 주었으며, 하나님의 손이 그 장대한 재림운동을 지도하셨던 것을 보여주고 당신의 백성의 위치와 그 사업을 밝혀 주었던 것으로써 현재의 의무를 드러내 주었다(상동 222).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하늘 성소에 그들의 눈을 고정시켜야 하는데 그곳은 심판의 일을 하시는 우리 대제사장의 최후봉사가 진행되는 곳이며-그가 당신의 백성을 중보하시고 계시는 곳이다(상동 223).
만일 우리가 사단의 일하는 방법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우리는 사단이 이 독특한 성소 정결의 진리를 대항하여 자기의 가장 교활하면서도 속이는(분순물을 섞는) 반대를 지도할 것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장차 각종 기만이 일어날 것인데, 우리는 우리 발이 서야 할 견고한 토대를 원한다. ···원수는 거짓 이론을 가져올 것인데 성소가 없다는 교리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믿음에서 떠나게 될 특징 중에 하나이다. ……
사단의 대리자들의 기만적 세력들이 충분히 계발될 때는 가깝다. 한편에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다른 한편에는 강력한 강신술적 궤변으로 꾀고, 기만하고,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점유하셔야 할 그곳에서 그분을 쫓아내기 위하여 그의 능력을 계속 발휘하고 있는 사단이 있다.
사단은 우리 구원을 하나님의 놀라운 묘사들과 그리스도의 봉사를 육감적인 마음에 맞는 어떤 것으로 낮추면서 성소에 관하여 기발한 상상을 끌어 들이기 위하여 계속 애를 쓰고 있다. 그는 신자들의 마음에서 주재(主宰)하는 능력을 몰아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속죄의 진리들을 무효케 하기 위하여 고안한 환상적인 이론으로 대신 채운다. 그리하여 우리가 셋째 천사의 기별이 처음 주어진 이래 거룩하게 유지해온 교리들에 대한 우리의 신임을 파괴한다. 이리하여 그는(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구별된 백성이 되게 하는 바로 그 기별 즉 우리 사업에 특성과 능력을 주어왔던 그 기별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우리에게 빼앗고자 한다(상동 224 225).
1888년 기별은 우리 크신 대제사장의 끝마치는 이 봉사에 있어서 백성의 관심을 새롭게 하였으며 신자들의 마음가운데 그 주재(통할)하는 능력을 회복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 기별은 대규모로 거절당하였든지 아니면 적어도 섭섭할 정도로 등한시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과 그 결과는 그 기별 자체 안에 있는 성소 진리의 위치를 간과하도록 인도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엘렌 화잇은 이 중요성을 포착하였다. 1844년 운동 중에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대하던 그 감동을 개인적으로 경험하였던고로, 그 여인은 처음 사랑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 여인은 기다리는 마음에 “보라 신랑이로다” 포고된 1888년 기별 속에서 좋은 소식을 거의 직관적으로 인식 하였다. 그 여인은 그 당시 별로 들을 귀들이 없었던 그 즐거운 하나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그 새로운 발전은 성소 정결에 대한 재림신도의 진리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더욱 완전한 계시와 결합시키는 것 이었다. 그것은 분리하여 흐르던 두 강의 합류점과도 같았으나, 이제는 합류하여 어떤 조수를 일으켜 배를 항구로 가는 노상으로 나를 수 있었다. 그 여인은 그 기별 속에서 주님의 오심을 위하여 한 백성을 준비시키려고 준비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스러운 매개(수단 방법)를 보았다. 그 여인은 분기되었다. 그 여인은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지금 문이 닫힌 첫째 칸에서 그분의 일과 분명히 차이가 나는 그분의 마치시는 속죄 사업에 그분과의 연합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 하였다(초기 문집 56-58, 266-268).
1888년 총회 조금 후에 기록된 일련의 기사 중에 그 여인은 매 주일마다 자신의 반복과 강조를 통하여 자기가 얼마나 깊이 감동을 받았는지를 드러낸다.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은 성소 진리의 실제와 관계가 있다. 매주마다 점점 강세되는 것을 주의하라.
우리는 속죄일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백성의 죄들을 깨끗이 하는 성소 정결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업과 조화되게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혼인 예복을 입은 것으로 발견되기를 소망하는 아무 사람도 직무 수행 중에 계신 우리 주님을 항거하지 않도록 하라. 그분의 인격 그대로 세상에 있는 그의 제자들도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사람들 앞에, 우리가 믿음으로 보는 하늘 성소에서 우리 크신 대제사장이 성취하고 있는 그 일을 명백히 드러내지 않으면 안된다. (리뷰 앤드 헤랄드1890, 1, 21).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계시며 그분은 거기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속죄 하신다. —그분은 그 백성의 죄로부터 하늘 성소를 정결케 하시는 중이다. 우리의 일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일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분과 함께 일해야 하며 그분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그 큰 날을 위하여 한 백성이 예비 되어야 한다(상동 1890,1, 28).
그리스도의 중보사업, 구속의 장대하고. 거룩한 신비가, 지구 표면에서 다른 모든 백성보다 앞선 빛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그 백성에 의하여 연구되지도 않고 또한 이해되지도 않는다(상동 1890, 2, 4).
그리스도께서 백성의 죄들로부터 하늘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상에서 그분과 조화되게 도덕적인 더럽힘으로부터 영혼의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상동 1890, 2,11).
백성은 예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속죄하시기 위하여 들어가신 성소[지성소]로 들어 가지 않았다. 우리는 이 시대를 위한 진리를 이해하기 위하여 성령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 영적인 한발이 있다(상동1890 2, 25).
하나님의 보좌에서 빛이 번쩍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을 위함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날에 서도록 준비되게 하기 위함이다(상동 1890, 3, 4).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우리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면서 나아가는 기별 속에서 그분의 음성을 보다 더 분명히 듣고 있다.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하나의 작은 가냘픈 빛을 받기 시작하였을 뿐이다(상동 1890, 3, 11).
그대는 지난 일년 반 동안 주님께서 그대로 하여금 그대의 성품 안에 이끌어 들여 그대의 경험 속에 짜넣기를 원하시는 하늘에서 온 빛을 받고 있다. ··.
만일 우리 형제들이 모두 하나님과 동역자들이 된다면 그들은 이 지난 이년 동안 그분이 우리에게 보내신 그 기별이 하늘에서 온 것임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
지난 2년 동안 그리스도의 의를 전파하면서 나가고 있던 그 증언을 폐한다고 가상하라, 그러면 그대는 백성을 위하여 특별한 빛을 분명히 나타내는 누구를 지적할 수 있는가? (상동 1890, 3, 18).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봉사의 실제적인 면에 주의를 고정시켰다. 이것은 그 큰 두강들, 즉 성소 진리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이 합류되는 곳이다. 죤스는 그 관계를 분명히 보았다. 그 기별이 거룩한 생활을 호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방법(방편,
수단)을 제공 하였다.
[모형적인 봉사에서] 이 성소의 정결은 그 해 동안, 제사장의 봉사로 성소에 옮겨진, “이스라엘 자손의 그 모든 범한 죄를 인하여” 더럽혀진 모든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을 성소에서 없애는 것이었다.
이 성소의 일과 성소를 위한 일을 마치는 것은 백성을 위한 일을 마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성소 정결은 백성에게까지 연장되며, 그것이 사실 성소 자체를 포함한 것처럼 백성을 포함 하였다. ·–
성소의 정결은 참 것의 그림자 이었다. 그러므로 참 성소의 정결은 주께서 베푸시고 사람이 세우지 않은 성소와 참 장막을, 예수 믿는 자들이 지은 모든 범죄 때문에 더럽혀진 모든 부정으로부터, 정결케 하는 것이다! 이 참 성소를 정결케 하는 때가 기묘한 숫자를 세시는 용의 말씀 가운데, 서기 1844년에 이르는 … “이천 삼백 주야까지”라고
선포 되었다. ·–
이 정결케 하는 것은 참된 성소 정결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완전케 하는 중에 허물이 마치고 죄를 끝내는 데서만이 이루어 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악인의 멸망으로 허물을 마치고 죄를 끝내고 일찍이 존재한 모든 죄의 오점으로부터 우주를 정결케 함으로 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는 것은 복음 사업을 마치는 것이다. 복음사업을 마치는 것은 첫째로 각 신자 안에 모든 죄의 흔적을 가져가고 영원한 의를 들여 오는 것, -그리스도께서 충만이 형성 되는 것-예수를 믿는 각 신자의 육체 안에 오직 하나님만이 나타나는 것이요, 다른 한편, 둘째로 복음 사업을 마친다는 것은 그때에 복음을 계속 받지 않았던
모든 사람은 그때에 단지 멸망일 뿐임을 의미한다(살후 1: 7-10). 왜냐하면 인생을 사는 일이 오로지 자신의 불행만을 더욱 쌓는 일이라면 계속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소가 정결케 되고, 거기서 복음 사업의 노정이 마쳐지기 위하여는 먼저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 안에서 마쳐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또한 지상 성소 봉사가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이 성소 봉사에 참여한 각 사람 안에서 성취되기 까지는 성소 자체 안에서는 허물이 마치고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소
자체는 예배 드리는 각자가 정결케 되기 까지는 정결케 될 수 없었다. 성소 자체는 백성의 고백과 제사장들의 중재로 말미암아 죄악과 허물과 죄들의 시내가 성소로 쏟아 부어지고 있는 한, 정결케 될 수 없었다. … 이 시내는 성소 자체가 정결케 될 수 있기 전에, 예배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애의 그 근원에서 멈춰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성소를 정결케 하는 바로 그 첫째 일은 사람들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
이것이 성소 안에서 참 제사장 직분의 바로 그 목적이다. —참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과 제사장 직분과 봉사는 죄를 영원히 옮기며 거기에 오는 자들을 온전케(perfect)하고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한다(죤스, 헌신한 길 113-119).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은 죄의 용서가 오직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속죄에 근거를 둔 사법적인 선언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정하였다. 그것은 객관적인 기초를 가진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용서라는 성경의 낱말이 죄를 실제적으로 “제거 하는것(taking away)”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리하여 1888년 총회의 때로부터 그들은 성소 안에서 매일, 즉 계속적인 봉사와 연례적인 봉사와 사이에, 죄의 용서와 죄를 말소하는(blot-ting out) 그 사이에 중요한 차이를 인정하였다. 미네아폴리스 총회가 있은 이후 얼마 있지 않아서 기록된 다음의 표현은 와그너의 관점들 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의 의의 옷을 입히신다면 그분은 죄의 옷을 비치하시지 않고 치워 버리신다. 그런데 이것은 죄의 용서가 단순히 형식 이상의 어떤 것이며, 단순히 하늘 기록책에 기입 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며, 죄가 삭제된 효과에 까지 이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죄의 용서는 실제며, 그것은 만질만한 어떤 것이며, 그 개인에게 중대한 치명적으로 영향을 주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죄에서 그를 깨끗하게 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죄에서 깨끗하게 되면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고 의롭게 되며, 확실히 그는 혁명적인(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는 참으로 다른 사람이다(그리스도와 그의 의66).
그리스도의 끝마치시는 대제사장 봉사의 정점으로써 죄를 말소하(지우)는 것은 예언의 신으로 강조하여 가르침을 받는다.
18세기 동안 이 봉사 사업은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서 계속하였다. 뉘우치는 죄인들을 위하여 탄원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는 저희들의 용서와 아버지의 받아 주심을 받았으나 아직 저희의 죄들은 기록책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모형적인 봉사에 있어서 그 해의 마지막에 속죄의 일이 있었던 것처럼 사람들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이 마쳐지기 전에 성소에서 죄를 옮기기 위한 속죄의 일(사업)이 있다.
[지상 성소가] 더럽혀진 … 것이 죄를 옮기므로 말미암아 지상의 모형적인 정결이 성취 되었던 것처럼, 하늘의 실제적인 정결도 거기에 기록된 죄들을 제거 하므로 혹은 말소해 버리므로 [지우므로]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성취되기 전에 누가 과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속죄의 은혜를 입을 권리가 있느냐는 것을 결정하기 위하여는 기록책들을 조사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GC 421, 422, 대쟁투 하권 188, 189 참조).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하시는 일이 그치게 될 때에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앞에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저들의 옷은 더러움이 없어야 하고 저들의 성품은 피를 뿌려 죄에서 정결케 되어야 한다. … 회개하는 신자들의 죄들이 성소에서 옮겨지고 있는 동안, 지상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는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한다. 이 일이 계시록 14장에 더욱 명백하게 제시 되었다 (GC 425, 대쟁투 하권 193, 194 참조)
이것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신앙의 중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 자신들이 그 실제적인 의미를 이해한다면 개신교회의 우리 친구들이 그것을 말라 빠지고 김빠진 혹은 무익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죤스와 와그너가 이해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와그너는 무엇보다도 먼저 죄 자체가 인간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죄의 기록이 하늘 책에서 지워질 수 있는 다른 길(방법)이 없다는 것을 올바로 분별하였다. 이것은 교리를 “내면(주관)화 하는것” 이 아니요, 각 시대의 대쟁투가 강조하는 그 방법대로 교리를 “경험화 하는것”이다. 엘렌 화잇에게서 나온 위의 말씀은 그의 확신들을 강화하였다는 것이 의심 없다. 1902년에 그는 리뷰 앤드 헤랄드지 에서 이 통찰을 확대하는 한 기사를 출판하였다. (문서들은 남아있어서 그가 이때에도 여전히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인들이 항상 믿었던 성소 진리를 가르쳤다는 것을 지시한다. 이장의 끝에 참고를 보라).
심지어 하나님은 손가락으로 기록하신 것을 포함하여 비록 우리의 모든 기록이 지워졌다 하여도, 그 죄는 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죄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죄의 기록이 바위에 새겨졌는데 그 바위를 가루로 갈아 버린다 할지라도-이것도 우리의 죄를 말소해 버리지(지우지) 못할 것이다.
죄를 말소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 즉 사람의 존재에서부터 죄를 지우는 것이다. (1901년에 작성한 다른 진술에서 보아도 그는 죄 있는 본성의 근절* 을 의미하지 않는다).
죄를 지우는 것은 우리의 본성(성질)들로부터 죄를 말소하여 더 이상 죄를 알지 않는(미래형) 것이다. “예배하는 자들이 일단 정결케 되면”[히1: 2 영문 참고]-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실제로 정결케 되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그 이유는 죄의 길이 그들에게서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죄악을 찾을지 모르나 죄가 발견 되지 않을 것이다. 죄가 그들로부터 영원히 가버린다. 죄는 그들의 새로운 본성에 낯설다. 그리고 비록 그들이 자기들이 어떤 죄들을 범한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지라도 그들은 죄 자체를 잊어 버렸다. -즉 그들은 더 이상 죄를 범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참 성소 안에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역사)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2, 9, 30).
* 와그너는 죄 있는 본성의 근절(완전론)을 의미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1901년 대총회에서 다음의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제 잘못된 개념을 갖지 마시오. 그대와 내가 여전히 좋아져서 우리가 주님을 떠나 독립하여 살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마시오 이 몸이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만일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들은 막중한 근심과 큰 죄에 빠질 것이다 여러분들이 썩을 것을 썩지 않을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주님께서 오시기 이전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실 때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음을 입을 것이다. 주님께서 오실 때에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음(불멸성)을 입을 것이요, 그때까지(그전에) 그런 경험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육체가 죄 없다는 개념을 가지며 그들의 모든 충동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생각을 가지면, 하나님의 영과 자기들의 죄 있는 육신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회보 146페이지).
엘렌 화잇이 이 개념에 동의 하였는가? 다음은 1890년대 그 동안에 기록 되었다.
“용서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넓은 뜻을 포함하고 있다. … 하나님의 용서는 다만 정죄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사법적인 행동일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고(forgiveness for sin) 죄에서 되찾아 내는 것(reclaiming from sin)이다. 그것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구속의 사랑(redemptive love)이 흘러 나오는것(유출 out flow)이다”
(MB 114. 산상보훈 164, 165 참조).
우리는 죤스와 와그너가 하늘 성소의 정결이 하나님의 백성을 마음의 정결과 대등하거나 그것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의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선구자들이 믿은 대로 하늘에 참 장막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였다. 그들의 믿음의 표현은 각 시대의 대쟁투의 표현 즉 “하늘에서 조사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회개하는 신자들의 죄들이 성소에서 옮겨지고 있는 동안, 지상에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는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한다”(GC425. 대쟁투하권 193, 194 참조,)는 그 표현과 충분히 일치한다. 다시 말하면 지상에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의 정결은 하늘에 그들의 대제사장의 사업과 병행하며 보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분과 조화되게 협력한다. 1900에 영국에서 출판한 와그너의
분명한 진술이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성소를 두시고 그리스도께서 거기에 제사장으로 계신 것은 성경을 읽는 아무 사람에 의하여도 의심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강림 직전이라고 성경에 설명된 사업인 성소의 정결은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완전히 정결케 하는 것과 그렇게 하므로 주님께서 오실 때에 승천을 위하여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과 동시 사건이다.
예수님의 생애[성품]가 당신을 따르는 자들 안에서 재현되어야 하는데 단지 하루만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고 영원한 기간 동안 재현 되어야 한다(영원한 언약 365-367페이지).
와그너는 이 독특한 재림 신자의 교리의 실천적(경험적, 응용적) 근거를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애쓰면서 비 재림교인들을 위하여 쓰고 있었다. 매일의 봉사로 죄의 용서와 연례적인 봉사로 죄를 말소 하는 것(지우는 것)과의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은 마치 이른 비로 내리는 비와 늦은 비로 내리는 비와의 사이에 본질적으로 물 자체에는 아무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죄의 용서와 죄의 말소는 두 가지 다 갈바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는다.
그러나 지상 성소의 모형적인 봉사는 용서가 죄 사함을 받은 죄인과 죄 짓는 생애로 되돌아간 사람에 의하여 상당히 거절 당할 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쳤다. 그리고 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놓여 있을 수 있으므로 더욱 큰 강도의 시험이나 시련이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실예는 짐승의 표이다. 그런고로 적어도 인침이 와야 하는데 거기서부터는 결코 되돌아서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죄의 말소와 동등하며 예수님의 강림을 위한 일종의 준비이다. 우리의 입장에서 본대로 그러한 인침이나 죄의 말소나 또는 심지어 그런 것을 알 수 있다고 일찍이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신자가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신을 더욱 더 죄스럽고 무가치 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께서는 당신의 직무를 이행하시는 자기를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고 계신다.
와그너는 영국에서 비 재림신자들에게 그 교리를 계속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자세한 세부 사항들로 들어갈 시간이나 공간이 없다. 그러나 다니엘9: 24-26을 에스라 7장과 비교하여 예언에 언급된 그 날들이 주전 457년에 시작하여 주후 1844년에 도달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면 틀림없이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어떤 이는 물을 것이다 주후 1844년과 그리스도의 피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그 피가 한번에 충분하며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데, 어떻게 어떤 특정한 때에 성소가 정결케 되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적으로 살아있는 성소 곧 교회를 정결케 하고 있지 않는가? 그 대답은 “마지막때”라는 그런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다. 죄는 끝이 있어야 하며 정결케 하는 일은 하루에 완성될 것이다. ···이제 마지막 세기에 중반이래 새로운 빛이 비치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의 진리는 전례없이 드러나며, “보라 너희 하나님이로다”라는 기별의 큰 외침이 포고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영국 현대 진리 324페이지, 1901, 5, 23).
때때로 어느 한 사람의 가르침이 자기 자신의 말로 보다도, 그에게서 듣고 받아들인 자들로 말미암아 보다 더 분명히 반영될 수 있다. 이 주제가 대략 이 같은 때에 W.W. 푸레스캇트에 의하여 어떻게 이해 되었는지 봅시다.
죄의 용서와 죄의 말소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죄의 용서를 위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죄의 말소를 위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풍성한 준비는 언제나 또한 오늘도 있다. 그러나 죄의 말소를 위한 준비는 우리 세대에 온다. 그리고 죄의 말소는 주의 강림을 위한 길을 준비할 것이며, 죄를 말소하는 것은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 우리 대제사장의 봉사이다. 그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이 변화의 사실을 인정 하든지 안 하든지 ·– 아니면 … 경험 하든지 안 하든지에 따라 그들의 봉사와 그들의 기별과, -그들의 경험에 차이를 일으킨다. 그것이 셋째 천사의 기별로 분명하게 세상에 내놓아야 할 것이며, 또한 물론 그것과 더불어 이 세대에 죄를 말소함으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이 때를 위한 복음의 봉사에 대한 가장 명료한 복음의 계시가 될 것이다 (대총회 회보 53, 54 페이지, 1903).
푸레스 캇트는 죤스에게서 이러한 독특한 개념을 배워, 1893년에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 다음 우리가 한 백성으로, 우리가 한 몸으로, 우리가 한 교회로써, 우리가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았다면 무엇을? ···성령 부으심을 그것은 개인에게도 그러합니다. 개인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받으면 그때에 그는 마음의 할례인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교회로써 전체의 백성이 믿음의 의를 받아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는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못하게 교회를 방해할까요? [회중 : “아무것도 없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처해 있는 처지 입니다. 무엇이 성령 부으심을 거두어 갑니까? … [음성 : “불신이지요”.](대총회 회보 383페이지 1893).
엘렌 화잇이 성소 정결의 중요성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분명히 지지하는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의 바로 시초에 그 여인은 아마도 그 세대보다도 오늘날 우리에게 더욱 감짝 놀라게 하는 어떤 말을 발하였다. 우리는 그 진술들의 심오한 중요성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 아직도 있다. 그 여인은 하늘 성소의 첫째 칸에서 두째 칸으로 1844년에 옮긴 그리스도의 봉사의 변경을 묘사하고 있다.
거기서 나는 대 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아버지 앞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예수님과 함께 일어선 자들[즉 믿음으로 그분을 따라 가는 자들]은 지성소에 계신 그분에게 믿음을 올려 보내면서 “나의 아버지여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시옵소서”하고 기도 하였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 숨결 안에는 빛과 능력과 그리고 풍성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있었다 (초기문집 57, EW 55).
만일 “그 큰 바벨론이 무너진” 것이 사실이라면 그 참된 사랑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근원은 지성소에서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봉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 믿음으로 그분을 따르기를 거절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공언한 사람들은 참된 성령의 결핍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이 좀더 계속해서 말한 것이다.
나는 보좌 앞에서 아직도 머리를 숙이고 있는 [즉 아직도 첫째 칸에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있는]그 무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신 것을 몰랐다. 그들은 보화를 쳐다보며 “나의 아버지여,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 하였다. 그때에 사단이 그들에게 거룩하지 못한 영향력을 불어 넣었는데 그 안에는 빛과 큰 능력은 있었지만 향기로운(sweet) 사랑과 기쁨과 평안은 없었다(EW 56. 초기문집 57, 58).
이 말들이 그것들이 말하는 것을 뜻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겁나는 사실이, 가장 영리하고도, 아직도 그의 수천 년의 경험을 쌓은 무시무시한 기만을 우리 세대의 공언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저지르고 있는, 단호하고도 영리한, 모든 진리의 원수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기만 당하는데 대하여
가능한 유일한 안전책(보장)은 성소 정결과 그리스도의 봉사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있다.
또 다시 초기문집 가운데 주님의 종은 그리스도의 참된 지성소 봉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즉 호명을 받으나 거짓된 가르침이 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그 특성과 그 범위를 묘사한다.
나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명목상 교회들이 이[세천사의] 기별들을 못박아 버린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을 알지 못하며 거기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중보로 유익을 얻지 못한다. 쓸데없는 희생 제물을 드렸던 유대인들처럼 그들은 예수께서 떠나시고 없는 곳에다 쓸데없는 기도를 드린다.
그러므로 기만을 기뻐하는 사단은 종교적인 특성을 가장하고 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이들의 마음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자기의 권능과 거짓 기사와 이적을 행함으로 그들을 자기의 올무안에 탄탄히 잡아 맨다. ···또 그는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고 나타나 거짓 개혁의 방편으로 땅 위에서 자기의 영향력을 편다. 교회들은 다른 영이 작용한 것도 모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놀랍게 역사하신다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해 한다. ·–
나는 하나님께서 명목상 재림 신도들[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으나 성소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과 타락한 교회들 가운데서 당신의 성실한 자녀들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았다. 재앙이 내리기 전에 사역자들과 백성들이 이러한 교회들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나와 기쁨으로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사단은 이것을 안다. 그러므로 셋째 천사의 기별이 크게 전파되기 전에 그는 이러한 종교 단체들 가운데 능력을 베풀어 진리를 거절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한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는 신실한 자들을 속여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그 교회들을 위하여 역사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도록 유인한다. 그러나 빛이 비추일 때, 모든 신실한 자들은 타락한 교회들을 떠나 남은 무리와 함께 자기들의 입장을 취할 것이다(초기문집 267, 268, EW 261).
다른 영이라고 말한 그 영이 누구인가? 그것은 분명히 위조의 영이며, 참 것과 교묘하게 닮아서 할 수만 있다면 정직한 자들을 속이기 위하여 고안된 가짜 영이다. 짐승의 표는 조잡하지 않을 것이며 분명한 기만일 것이다! 그것은 합성수지의(플래스틱으로 된) 즉 위조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포함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림을 위한 준비는 그분을 아주 친밀하게 알아서 기만당할 수 없을 만큼 그분을 배우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결혼의 친교와 결혼관계를 가능케 하는 사랑을 암시한다. 다음은 1890년대에 죤스가 지지한 사상들이었다. 그것들은 그가 그보다 훨씬 일찍이 지지한 확신을 나타낸다. 이것은 1888년 기별중에 하나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예수께서 오시면 자기 백성을 자기가 계신 곳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그때에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를 자기 앞에 세우실 것이며, 그의 모든 성도들에게서 당신 자신이 완전히 반사되는 것을 보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이와 같이 오시기 전에 그의 백성은 그런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가 오시기 전에 우리는 그런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여 예수의 완전한 형상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엡4: 7, 8, 11-13. 이러한 완전한 상태, 곧 예수의 완전한 형상이 각 신자 안에서 이렇게 나타나게 되는 상태-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의 달성은 성소정결에서 성취된다. ·–
죄를 말소시키는 것이 바로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애 가운데 모든 허물이 마치는 것이며, 우리의 성품 가운데서 모든 죄가 끝나게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아 우리 안에 영원히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전과 달리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 우리의 죄들이 말소되게 하고,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죄들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끝나게 하여야 한다 (헌신한 길 123-125).
엘렌 화잇이 출판해야 한다고 말한 1893년 총회에서 설교한 죤스의 설교들 속에 있는 이 사상을 보자(편지 230, 1908).
모든 시험(test)을 견딘 자들은 참된 증인의 증언을 주의할 것이며 늦은 비를 받을 것이요 그리하여 승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가 교회 증언 1권 187페이지 에서 먼저 읽었던 것을 늘려서 알기 쉽게 바꾸어 말한다.] 형제들이여, 늦은 비가 승천을 준비하기 위하여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을 위함이라는 생각을 할 때 많은 즐거움이 있지 않습니까? ···그분이 여러분과 나에게 오셔서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승천하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승천하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죄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 주시는 단 한가지 목적은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우리로 승천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대총회 회보 1893, 205페이지).
최근에 나는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shall be finished)라는 대신에 이루어져야 한다 (should be finished)는 그런 방법으로 기록된 것이 의도적이 아닌지 놀랐습니다. 그것이(하나님의 비밀) 오래 전에 이루어졌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안에 계시는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이십니다(상동 150페이지).
만일 여러분이 정신으로나, 마음으로나, 생각으로나, 소원으로나, 기호로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이 세상과 ···머리카락 넓이, 머리카락만큼 얇게라도 세상과 연결된다면 그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완전히 분리되도록, 이 세상의 이 악한 능력[짐승과 그 우상]을, 대항하여 세상을 경고할 이 부르심 안에 있어야 할 그 능력을, 여러분에게서 빼앗아갈 것입니다(상동 123페이지).
형제들이여, 그분은 죄에서 벗어난 자들에게 영광스러운 구원이 되십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지금 우리를 죄에서 정결케 하시도록 합시다. 그리하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우리가 소멸되지 않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모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이 원하는 것입니다(상동 115페이지).
형제들이여, 우리는 이 세상이 일찍이 보아 왔던 가장 장대한 때에 와 있습니다. 오, 우리는 이 가장 장대한 때에 사는 우리답게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즉시 무엇인가 하시려고 합니다. 오 그분께서 [무엇인가] 하시도록 우리가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치기를 바랍니다
(상동 111, 112페이지).
그것은 두려운 처지 입니다.“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하는 그 두려운 생각을 가지고 의지가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에 고정시킬 때에, 그것은 우리 중 아무 사람이 전에 꿈도 꾸어 보지 못한 그러한 헌신의 지점까지 바치게 하고 그러한 헌신의 자리까지 우리를 데려갑니다.·–
형제들이여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우리에게 온, 바로 그 생각을 감촉시키는, 그 두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중대하고 결정적인 일이 일어날 것인데 그것도 바로 빨리 일어나려고 합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지체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이 타협되고 그분의 보좌가 타협될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우리의 부주의와 무관심한 태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상동 73페이지).
그 가장 귀한 기별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한 보다 더 넓은 관심이었다.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는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 보다 더 적게 근심한다. 그는 그리스도와 사단 사이에 대 쟁투의 승리적인 종막을 위한 장대한 관심에 사로 잡히게 될 것이다.
와그너도 또한 같은 생각을 가졌다.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을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롬3: 4]. 하나님께서는 지금 불공평 하시고 무관심하시고, 심지어 잔인하시다고 사단에게 고소를 당하신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비난을 반향하여 왔다(메아리쳐 왔다).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선포할 것이다. 사람의 성품은 물론 하나님의 성품이 심문을 받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은 창조 이래로 이루어진 모든 행동이 모든 이들에 의하여 심판받으면서 각 방면으로 검토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만사가 그 온전한 빛 가운데서 드러나 보일 때에,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당신의 원수들에게 의하여서 까지라도 그 모든 못된 짓에서 무죄선고를 받으실 것이다 (영문시조 1896, 1, 9).
이것이 첫째 천사의 기별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참으로 당신의 백성의 성품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보좌의 무결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면 아무 동기 부여로도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여 이기심과 죄를 이기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동기 부여가 전능하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믿음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기별의 확인이다. 우리의 바로 그 명칭이 재림을 믿는 우리의 확신을 만일 그리스도께서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한 백성으로써 존
재할 이유가 없다. 그분의 오심이 확실할지라도, 수십 년 동안 아니면 심지어 수백 년까지 지체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존재할 아무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이 말씀하셨기에, 그분의 오심이 가깝다고 반복하여 말하여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명예가 아니라 그분의 명예가 위태롭다. 수치스러운 구세주를 누가 환영할 수 있겠는가?
그분의 백성이 그분의 오심을 촉진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는가? 하나님의 최상의 뜻이 시간을 재는 시계의 기계에 못으로 고정시킨 것같이 변경(취소)할 수 없이 그 정확한 시간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생각이 모두 너무나도 공통적이다. 우리가 하여야 하는 모든 것은 시합을 기다리며 지켜보는 것이며, 우리가 두 세상에서 대하여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동안 징조들에 관하여 방심하지 않는 눈으로 지켜보는 태도가 그 전부이다. 이 널리 편만한 재림에 관한 관점은 철저하게 자아 중심적이며, 계속적인 뜨뜻 미지근함 밖에 아무것도 산출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오심이 가깝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 하시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1888년 기별은 가슴 후련하게 다른 관점을 소개하였다. 그것은 1844년 밤중 소리에 참여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그리스도를 향한 그 깊은 심금을 울리는 사랑의 부흥 이었다 싸우쓰 랭캐스터(South Lancaster)학생들은 1888년 총회 다음에 있었던 집회들에서 그 정신을 나누어
받았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하늘의 기류에 휩쓸렸다. 심지어 실망 전 1844년의 증언들일지라도 능가되지 않는 살아 있는 증언들이 주어졌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0, 3, 4). 그와 같은 정신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곧 오시기를 원한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이 그분이 오시기를 원하자 마자 그분은 오실 것이다. 엘렌 화잇은 말한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막4: 29).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 안에 당신을 드러내시고자 바라마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성품이 그의 백성에게서 완전히 재현될 때에 그는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claim) 강림하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우리는 바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촉진시키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실물교훈 61. COL 69).
그대의 마음의 반응은 무엇인가? 그대는 사도와 함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