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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기별 – 서론 (The 1888 Message – An introduction)

제 5 장  엘렌 화잇이 죤스와 와그너의 개념을 지지함

 

       이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개념은 와그너와 싸운 대총회장 버틀러 장로에게 환영 받지 못하였다 (버틀러 저 갈라디아서 안에 있는 율법 58페이지와 와그너저 길라디아서 안에 있는 복음 62페이지와 비교). 그것은 또한 와그너와 죤스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평의 편지들을 엘렌 화잇에게

쓴 우리 백성 중 다른 이들에게도 또한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그 여인은“논쟁이 되는 교리의 관점을 직면하는 방법”이라는 논제로 베틀크릭에서 아침 설교에 활기차게 대답하였다.

 

       “나에게 많은 편지들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만일 인간과 꼭 같은 성정을 가지셨다면 비슷한 유혹들을 받을 때에 타락하셨을 것이므로 인간과 꼭 같은 성정을 가졌을 리가 없다는 것을 확증하는 편지들이었다. 만약 그분이 인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의 성정의 참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분은 사람이 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받으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만약 시험에 양보하는 것이 그분에게 불가능 하였다면 그분은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하여 인간으로서 싸움을 싸우려 오셨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분의 시험과 승리는 인간이 모본되시는 분을 모방(복사)하여야 할 것과 사람은 틀림없이 신의 성품의 참여자가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

       사람은 악을 제지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데-그 능력은 이 세상이나 사망이나 지옥이 정복할 수 없는 능력이며,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승리 하신 것처럼 이길 수 있는 곳에 둘 능력이다(1890.1, 29 아침설교. 가려뽑은 기별 제 1 권 [영문] 408, 409).

 

       1890년대 전반을 통하여 엘렌 화잇은 1888년의 기별의 이 주요개념에 대한 자기의 솔직한 지지를 명백하게 하였다. 그 기별에 대한 그 여인의 많은 찬성들 중에는 그 중심 요점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보류해 두고 있다는 가장 사소한 기미도 없다. 1894년 2월에 그 여인은 작은 소책자

하나를 출판하였는데 그 제목은“그리스도는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심”이라고 붙여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지 않았으며 세상에 계실 때에 그분은 우리와 같지 않았다. 그 분은 거룩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실로 천사들의 성정을 취하시지 않고 자신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이

시험을 받으시므로 시험받는 자들을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죄인이 시련을 아시며, 죄인의 시험을 아신다. 그분은 우리의 본성을 자신 위에 취하셨다(3, 4페이지).

 

       그리고 만일 그 여인이(성경을 인용하여)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면 좀더 나아가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여인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의미함에 틀림없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그의 가장 큰 시험들은 내부로부터 올 것이다. 이는 그가 본성적인 마음의 경향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죄를 대항하는 모든 투쟁은 인간의 마음에 그분의 지정하신 대리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것이다. 오! 만일 우리가 예수께서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우리가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해할 수만 있다면! (11페이지).

 

       1888년 이후의 기간 동안에 기록된 시대의 소망 49페이지(영문)에 엘렌 화잇은 세상 사람이 읽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확신을 표현하였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하여 그 개념을 그렇게 분명하고 힘 있게 표현한 곳은 그 여인의 이전 기록 중에는 아무 곳도 없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범하지 아니하던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무한한 치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인류가 사천 년간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유전법칙으로 생기는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서 볼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었다(시대의 소망 제 1 권 46, 47, 영문 49).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하기 전 죄 없는 본성을 “취하셨”는가? 그분은 “육신을 따라 다윗의 후손이 되셨다”(롬1: 3 영문). 그분은 흙으로 빚어지고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넣어 숨 쉬게 새로이 형성된 아담의 복사판으로 창조되지 않으셨다. 그 분은 “유전법칙으로 생기는 결과를“받는“아담의 모든 자녀와 같으셨다.”그 영광스런 모순(패러독스)이 항상 순결하고 명료하게 보존되지 않으면 안된다.

 

       인성의 의복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이 구원하시기를 소원하셨던 자들의 수준으로 내려 오셨다. 그분 안에는 간교함이 없으셨고, 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그분은 항상 순결하고, 더렵혀지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죄있는 본성(성정, sinful nature)을 취하셨다(리뷰 앤드 헤릴드 1896, 12, 15).

 

       1888년 이후 엘렌 화잇의 기록 중에 그 강조는 압도적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타락된 우리 본성의 욕구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단은 이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시험을 가져온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수가 각 사람에게 와서 인간이 선천적인 약점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거짓말로 유혹할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하여 주신 것이다. … 예수께서는 사단의 궤변에 응하실 아무것도 가지시지 아니하셨다. 그는 죄를 용납치 아니하셨다. 그는 생각까지라도 시험에 굴복하시지 아니하셨다. 우리도 그리할 수 있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제 1권 l50, l51, 152).

       사람이 그릇된 행동을 하도록 강력하게 영향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그것을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저항하면 시험이 저지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통과하신 시련이었다.

(Youth Instructor 1899, 7, 20).

 

       이 투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어떤 인간일지라도 전혀 알 수 없는 괴로운 짐을 지게 되었다. ···주님께서 당하신 시험은 진짜 시험들이었지 시험받는 척 한 것이 아니었다. —인성을 쓰신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인간을 공격하는 모든 유혹을 곧 격렬하고 겉으로 보기에 압도적인 시험과 씨름 하였는데, 그 시험들이란 식욕의 방종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는 곳에 외람되게 모험을 감행하는 것과, 이 세상 신에 대한 경배와 이생의 현혹적인 쾌락을 위하여 영원한 축복을 희생시키는 것이었다(편지 116, 1899, 가려뽑은 기별 제 1권 〔영문〕94, 95).

 

       오류는 항상 분리적이며, 진리는 항상 연합시키는 것이다. 죤스와 와그너는 그리스도의 의를 제시함에 있어서 서로 완전히 일치하였다. 기질상으로 “정원의 과실과 사막의 사과처럼 같지 않은” [A.W.스팔딩 저 만군의 대장(Captain of the host)590페이지] 두 사람이, 이러한 연구를 하는 그 누구라도 기다리고 있는 숨은 신학적 함정의 미로를 통과하여 치명적인(아주 중대한)그러한 연합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다. 그들은 연합을 믿었으며 그들은 교회를 향하여 연합되기를 호소하였고 그들은 자기들의 기별이 교회를 대면하는 혹평적인 논점이 되었을 때에 감탄할 정도로 연합을 입증하였다.

       그들은 신학적 후계자들을 분리시킨다거나 의미론적인 관점들을 안정시킨다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기들의 세대에 하나님의 사업을 마치자는 부담을 진 기별자들이요, 개혁자들이며, 전도자들 이었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되시므로 그분은 시험을 받으셨을 때에 우리가 시험 받는 때에 느끼는 것과 똑같이 느끼셨으며, 그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을 끝까지 도우실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의 육신으로 그리고 친히 육신으로 계시던 때에, 그분은 우리처럼 연약 하였으며 스스로는‘아무것도 할 수 없”으셨다(요5 : 30). 그러므로 그때에 그분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사53 : 4). 또한 우리가 느끼듯이 느끼시면서 우리처럼 시험을 당하셨다. 당신의 신성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그 믿음이 그에게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정복하셨다. 그리고 그 정복하신 그것을, 그분은 우리의 육신으로 우리에게 가져다 주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불리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그분과 만 함께 하실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도 함께 하신다 [헌신한 길, (111e Consecrated Way) 26페이지].

 

       죤스가 그리스도의 본성(본질)과 그분의 의에 관하여 자기의 확신을 둔 근거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요5 : 30)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장 정밀한 검사를 받을만한데, 그 이유는 그 말씀들이 자주 등한시 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판단한다. 그러나 나의 판단은 옳다. 왜냐하면 나는 내자신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죤스의 이해가 맞았는가?

       예수님의 이 말씀 가운데에는 1888년 기별의 건장한 상수리 나무에 열린 진리의 상수리가 있다. 여기에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라는 말을 의미있게 하며 타락한 인류의 필요에 적절하게 하는, 그분의 육신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투쟁을 공개 하신다. 이것이 위에 기록한

와그너의 문구, “그분의 전 생애는 투쟁이었다”는 말의 근거이었다(그리스도와 그의 의 28, 29페이지).

 

       예수님께서는 죄없는 아담이 결코 할 필요가 없던 것을 항상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당신의 아버지 뜻에 끊임없이 잠재적으로 반대하는 내적 의지(“나의 뜻”)를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이 투쟁은 그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 : 39)라고 고민 중에 기도하시던 겟세마네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한 내적 투쟁은“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외침들”을 아는 분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빛 가운데서 보여진 그리스도의 승리는 신성하게 유전받고 쉽게 자연적, 수동적인 실체의 명상적인 개념이라기 보다 차라리 몸부림과 투쟁의 열매인 영광스런 원동력을 일으키는 의(righteousness)로써 죤스와 와그너에게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의에 대한 죤스의 발

표중 죄고 정점들을 포착하자.

 

       만일 그분이 당신께서 구원하러 오신 자들과 꼭같은 육신으로 구성되지 않았다면, 전연 육신 되신 그분의 존재의 용도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분이 구원하러 오신 이 넓은 세계에 단 한분의 육신이 모든 인류가 가진 그저 불쌍하고, 죄가 있고, 잃어버린 인간의 육신이 되신고로, 만일 그분이 되신것이 육신이 아니라면 그분은 결코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세상으로 참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분이 실제적으로 이 세상에 있는 인성과 다른 인성으로 오셨다면, 그분이 비록 세상에 계셨을 지라도, 아직도 인간을 접촉하여 인간을 돕는 실제적인 어떤 목적을 위하여는 그분이, 결코 오시지 않은 것처럼, 인간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런 경우 그분의 인성으로는 그분이 사람과 멀기 때문이며, 전혀 이 세상에 결코 오시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다른 세상에 속한 것이나 꼭같기 때문입니다(The Consecrated Way 35페이지).

       그리스도와 마리아와 우리의 인성에 대한 로마의 믿음은 하나님이 너무나 순결하시고 너무나 거룩하셔서, 우리 죄있는 인(간)성에 속한 우리와 함께 하신다거나 또는 우리 안에 거하시지 못하는데,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죄가 있으므로 순결과 거룩하심에 거하시는 그분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서, 우리의 처지 그대로의 우리에게 오시지 못한다는 타고 난 마음에서 난 생각의 산물입니다.

       참된 믿음-예수의 믿음-은 우리가 죄 가운데 있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분께서 우리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있는 처지로 오셨다는 것과 그분은 무한히 순결하고 거룩하시며, 우리는 죄가 있고 타락되었고, 잃어 버린바 되었는데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즐겨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 속에 거하시기를 즐겨 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는 우리가 반드시 전혀 순결하고 거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믿음은 우리가 전혀 거룩하고 순결하게 되기 위하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속에 거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상동 39).

 

       죤스는 그리스도의 육신을 언급하는 것으로써 롬8: 3절에 있는 “육신에”라는 바울의 문구에서 대단한 의미를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당신의 육신안에 있는 죄를 정죄 하셨으며, 이리하여 모든 육체안에 있는 죄를 정죄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로 죤스는 같지

않음(unlikeness)을 내포하는 피상적인 외모라기 보다 더 많은 뜻으로써 “모양(같음, likeness)” 이라는 단어를 본다.

 

       그분께서 유전법칙에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만이 죄를 충분히 그리고 참으로 죄가 존재하는 참된 한도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 안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배후에 여러 세대를 내려 오면서 유전된 죄 짓기 쉬운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직 죄의 행동으로 최고 정점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기회가 주어지면 실제적인 범죄에 항상 불을 활활 태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유전된 죄 짓기 쉬운 경향 ·· 우리 속에 죄로 향하는 이 유전적인 경향이 명중하여 정복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분의 존재가 육신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로 기울여지기 쉬운 경향이 그분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분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죄를 위하여(인하여)그 육신안에(있는 혹은 육신으로, |N THE FLESH) 죄를 정죄하사”라고 기록된대로 그분은 그가 취하신 육신으로 죄를 만나시고 죄를 승리하셨습니다(상동 40, 41).

       우리를 죄 짓는 데서 보호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의가 육신에 있는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고(imparted), 우리의 육신은 죄로 기울어지기 쉬운 그 경향과 함께 그분에게 주어졌습니다(Imparted) (상동 42)

       이리하여 유전과 수여(imputation)로 그분은 “세상 죄”를 질머지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이 짐을 지신 그분이 이러한 말할 수 없이 불리한 입장에 있으시면서 도대체 아무 불리한 그림자도(그늘) 없이 처음부부가 실패한 그 입장을 성공적으로 통과 하였습니다. ·–

       육신 안에(있는 혹은 육신으로)죄를 정죄 하심으로, 그분의 육신으로 원수된 것(적개심)을 폐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은 유전 법칙의 권세에서 구원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모든 영혼에게 의로 당신의 신의 성품과 능력을 주시어 그 율법위로 들어 올리시며, 그 율법위에(있도록) 유지하시며, 율법위에 보존 하실 수 있으십니다(상동 43).

 

       이제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제시하라고 명하신 그 기별이다”라는 엘렌 화잇의 판단을 기초한 강력한 복음 전도적인 호소가 따른다.

 

       하나님께서 그 아드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심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죄 있고 타락한 우리 성질 그대로의 우리 본성을 취하심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그러한 성정으로 계신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분 속에서 항상 거하심으로-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실증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그

모든 죄에서 구원하시어 하나님의 의의 길로 인도 하시기 위하여 그와 함께 그리고 그 속에 즐겨 거하시지 않으시려 하실 만큼, 너무나도 죄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나, 또는 너무나도 잃어버린 바 된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영혼도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보증하셨습니다.

       그의 이름은 확실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이십니다.(상동 44).

 

       이 기별이 전적으로 성경에 기초된 것이 풍부하게도 분명하다. 요한과 마태복음에 예수님 자신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시험(유혹)에 대한 그분 자신의 내적 투쟁의 특성을 우리에게 나타냅니다. (요5: 30, 6: 38, 마26: 39).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항상 부인하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뜻을 당신 자신이 취하셨다. 그리고 그 투쟁이 겟세마네에서 너무 심하여 피방울의 땀을 흘리셨다. 바울은 그분이 자신을 부인하신 것을 첨부한다(롬15 : 3).

       이것은 그분이 어떻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냄을 받아”죄를 인하여 육신 안에 있는 죄가 정죄 되었는지 설명한다(롬 8:3). 바울은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율법 아내 나게”하시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는지 설명한다(갈4 : 3-5).

       그리스도는 죄 문제를 죄가 존재하였던 곳에서 해결 하도록 보내심을 받았는데, 이 죄의 권세들이 침범하였던 그 영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분은 적진을 습격함으로 정복하셨다. 그분은 악의 권세들에 의하여 기습을 받았던 타락한 인간성을 취하셨으므로 원수의 점령지에서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승리를 얻으셨다. “율법 아래” 있게 된다는 것은 유대 의식법의 물질적인 낱말들 아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뜻이라면 그분이 “구속”하려고 오셨던 자들은 오직 실제적인 유대인들만 이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아래”는 분명하게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세상의 요소들”(초등학문)의 같은 범위를 뜻한다. 그분은 의지와의 투쟁을 하셨으며, 우리가 실패한 그곳에서 승리하셨다.

       그분은 “그의 육신의 죽음으로” 우리를 화목케 하셨고, “정사와 권세를 해체시키고, 당신 안에서 그것들을 이기는 저들의 공적인 모본을 세우셨다”(골1: 22, 2: 15 RSV).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어휘들을 쌓아 올린다. 다만, 지배권을 장악한 원수의 최상의 괴변만이 거의 2000년 역사를 내려오면서 이러한 영감된 개념들을 흐리게 할 수 있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시고 …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 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 : 11-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 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히4: 15, 16).

 

       어떤 이들은 엘렌 화잇이 출판되지 않은 한 편지를 읽었는데, 거기에는, 우리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의 그리스도의 의의 기별에 관하여, 그 여인의 다른 모든 기록들 속에 여러권으로 강조한 그 모든 강조와 상치되는 듯한 은밀한 뜻이 있다. 그 여인은 뉴질랜드에 있는 한 알려지지 않은 전도자에게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가르치는 방법에 “지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었다.

 

       “백성들 앞에 그분을 죄의 성향(propensities)을 가진 사람으로 제시하지 마시오 … 한 순간도 그분 안에는 악한 성향이 없으셨습니다. ·–

       오해받기 쉬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모든 질문을 피하시오. 진리는 외람된 괴도에 가까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취급함에 있어서, 그대의 말들이 사실 그것들이 내포하는 의미 이상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게 하여 신성과 결합된 그분의 인성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잃거나, 흐리게 하지 않도록 그대는 모든 주장을 신경을 써서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

       어떤 방법으로나, 결코 그리스도 위에 타락의 오점이 얹혀 있다거나 타락으로 기울여 졌다거나 그분이 어떤 모양으로 부패에 양보하였다는 것을 인간의 마음에 최소한의 인상도 끼치지 마시오……

       하나의 경우에도 그의(사단의) 수많은 시험들에 반응이 없었습니다. 한번도 그리스도는 사단의 지역에 발자국을 내디디므로 그에게 아무 유리함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그분 안에서 자기의 진로를 격려할 아무것도 발견한 것이 없었습니다(편지 8, 1895, 본교성경 주석 제 5권1128, 1129).

 

       몇가지 중요한 요인들이 이 증언을 이해하도록 우리의 이해력을 인도한다.

1. 부주의하고 부정확하며 되는 대로의 용어에 대한 주의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이것은 영감된 말씀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정확성을 요구하는 중요한 제목이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죄있는 본성을“가지셨다(had)”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가지셨다는 것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뜻 “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한 말은 이러하다. “그분은 시험 받는 자들을 어떻게 도와주실지 아시기 위하여 당신의 죄없는 본성위에 우리의 죄있는 본성을 취하셨다”(엘렌 지. 화잇, 의료봉사 [영문]181)

 

2. 그 편지는 정확하게 그 문맥에서 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글자를 그 문맥에서 떼내어 비틀어(곡해하여)놓고, 그것으로 죤스와 와그너가 가르친 1888년 기별을 정죄할 것으로 삼을 이유가 도무지 없다. 사실 그 저자는(그 편지를 쓰신 분)W. L. H. 베이커에게 그가 만일 죤스와 와그너의 모본을 따라 정확하고 예리하게 정의된 그들의 표현에 충실할 것 같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여인은, 약 7년이나 먼저 와그너가 사용한 문장과 용어에 거의 일치한 문장과 용어를 사용 하였다는 것에 있어서는 확실하다. 와그너의 문구와 엘렌 화잇의 문구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자 -둘이 다 같이 그리스도께서 시험을 만나 육신으로 싸우시고 완전히 승리하신 것을 묘사한다.

 

와그너. 1889, 1, 21 (영문시조):

       그분의 인성은 다만 그분의 신성을 가리웠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육신의 죄스러운 정욕을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전 생애는 투쟁이었습니다. 모든 의의 원수에 의하여 동요된 육신은 죄를 향하여 기울어지려 하였겠지마는, 그러나 그분의 신성(divine nature)은 결코 한 순간도 악한 욕망을 품지 않으셨으며 그분의 신성한 능력(divine power)은 한 순간도 동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영광의 조정을 떠나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흠 없이 아버지의 보좌로 돌아 가셨습니다.

 

엘렌 화잇, 편지 8, 189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셨습니다. 그분은 친히 인성을 취하셨으므로 인간성이 시험 받는 것처럼 모든 점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죄를 지으실 수도 있으셨으며, 그분은 타락하실 수도 있으셨으나, 한 순간도 그 안에는 악한 성향이 없으셨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결코, 그리스도에게 타락의 오점이 얹혀 있다거나, 타락으로 기울어 졌다거나, 그분이 어떤 모양으로 부패에 양보하였다는… 최소한의 인상도 끼치지 마시오 … 하나의 경우라도(사단의)많은 시험에 —반응이 없었습니다. 한번도 그리스도는 사단의 지역에 발자국을 내디디지 않았습니다.

 

3. 엘렌 화잇이 와그너와 죤스에게 빗대고 아니면 빈정되는 책망으로 베이커에게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었다는 생각은 엘렌 화잇의 공개적이며 정직한 성품을 받아들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 여인이 그들의 가르침을 전혀 교정하기를 원하였다면 자신이 직접 그들에게 어떻게 말할지 잘 알았다. 그 여인은 현존하는 기록된 통신문 가운데 한번도 그렇게 한적이 없었다.

4. 그 여인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이 편지를 출판하기 위하여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1950년대 까지는 빛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만일 그 여인이 느끼기로 죤스와 와그너의 가르침이 세계 교회를 잘못 인도한다고 생각하였다면, 이것이 엘렌 화잇의 특성이기에는 거의 어렵다.

5. 푸레스캇트는 베이커에게 보내는 이 편지가 기록되기 조금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 방문하고 있었으며 10월에 엘렌 화잇이 참석한 알마데일 천막집회에서 명백한 설교들을 하였다.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한 그의 이해는 죤스와 와그너의 이해와 실제적으로 일치하였다. 그 여인은 푸레스캇트의 알마데일(Armadale)설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설교마다 그리스도가 전파되었다.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그분의 임재와 역사에 관한 그 위대하고 신비스러운 진리들이 분명하고 명백하게 되었으며 … 영광스럽고 확신시키는 빛이 …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각성을 보내었다. 엄숙하게 백성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오늘 저녁에 진리를 들었다.”고 하였다.

       저녁에 푸레스캇트 교수는 금과 같이 진귀한 가장 가치 있는 교훈을 제시하였다. ···진리는 오류에서 분리 되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귀한 보석 같이 빛나게 되었다. ·

       주님께서는 진리를 전파하는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능력으로 역사하시고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백성을 위한 특별한 기별을 푸레스캇트 형제에게 주셨다. 진리가 성령의 나타나심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6, 1, 7).

 

 

6. 죤스와 와그너는 백성들 앞에 죄의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스도를 결코 제시하지 않았다. 옥스포-드 영어사전은 성향이라는 “프러펜시티(propensity)”의 어원을 라틴어 프레펜데러 (prependere)“걸다 앞으로나 혹은 아래로 매달리다.”에 근원된 것을 인정한다. 우리는 같은 근원에서 펜둘럼(pendulum), 시계추라는 단어를 얻는다. 성향이라는 낱말 프러펜시티는 “중력에 반응한다.” 저항하는 대신“확실히 아래로 걸려 있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죄에 참여함이 확실하다는 뜻을 암시하며, 엘렌 화잇은 그 단어를 가장 섬세한 영어의 언외의 뜻(connotation)으로 사용하였다.

7. 그리스도의 죄없는 본성에 우리의 죄있는 본성을 취하셨다(take upon, 쓰셨다)는 것과 “죄의 성향”과 같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비록 우리가 죄인으로써, 타고난 불순종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 하여도(SDABC Vo1. 5, p. 1128), 그리하여 악한 성향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죄 있는 본성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하나의 죄의 성향을 존속 시킬 필요는 없다”(상동Vol.7,p.943). 엘렌 화잇은“악한성향(propensities)”을“경향 (tendencies)” 이나“타고난 경향(inclination)”과 동등시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은 “유전의 대법칙의 작용과 결과”로서 모든 사람이 지니는(have)것이며, “우리가 반드시 그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 유혹들과의 싸움을 당신 자신의 전쟁으로 삼으셨다.” 그 여인은 그리스도께서 “경향성(inclination)을 저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말하였다(SDABC Vol. 7 p. 930).

       비록 어떤 비 신학사전에는 인클리네이션(성벽, 성향 경향)과 프러펜시티(경향, 성벽, 성질, 성향)를 동등시 할지라도, 어원적인 근원은 다르며, 타고난 경향(인클리네이션)은 “가하여지는 강한 압력을 느끼는” 용량만을 뜻하는 것이며 반드시 거기에 “반응”을 내포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88년대 전반을 통하여 구원의 은혜로운 기별을 받아들이는데 약간 방해되는 질문과 긴장들이 있었다. 죤스는 그 질문들 중 하나를 고려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거룩하심이 죄에 대하여는 소멸하는 불이 되시는 그분을 만난다.···모든 것을 소멸하는 그 거룩하신 순결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죄와 죗된 모든 흔적을 취하여 갈 것이다.

       이리하여 당신의 참된 거룩하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죄있는 육신으로, 죄있는 사람들에게, 죗된 인간들이 있는 곳으로, 오실 수 있으셨고 그리고 오셨다. …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니는(가지는) 같은 격정들”(like passions)을 가지지 않으신다는 말을 “증언에서 발견하였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다(비교 교회증언 제2권 509).

       이제 그대가 만일 언급된 말에 엄밀하게 집착하고 언급된 것 이상으로 나가지도 말고, 언급되지 않은 것을 거기에 삽입시키지도 않을 것 같으면 이 연구들 중에 아무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것이 없을 것이다’(대총회 회보 312페이지 1895).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격정들”을 갖지 않으심에 대하여: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분은 우리와 같으시며 육신을 따라 우리와 함께 하신다.—그분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셨다. 너무 멀리 나가지 마시오. 그분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셨지 죄있는 마음의 모양이 되시지 않았다. 그 죄있는 마음을 그 속으로 끌어 넣지 말라.

그분의 육신은 우리의 육신이셨으나, 그분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셨다. — 만일 그분이 우리 마음을 가지셨다면(had taken) 어떻게 우리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권면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이미 그러하였다는 것이다(상동 327페이지).

 

           죤스가 그리스도께서 결코 “한 순간도” 죄에 양보하시거나, 참여에 동의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단순히 말하고 있었다는 것은, 편견 없는 그 누구의 마음에도 분명하다. 그는-목적이 있어서 였거나 선택하였거나-가장 섬세한 바울의 언외의 뜻으로 “마음”을 사용한다.

           우리는 1888년 기별의 그 단순한 매력을 그 최초의 아름다움으로 보기 위하여, 우리 시대에 우리가 건설한 혼란을 일으키는 투쟁을 넘어 저편을 보아야 한다. 미네아폴리스 총회 다음 부흥집회 후 어떤 저녁들은 엘렌 화잇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이 발표를 통하여 대학 청년들의 마음에 역사하고 있었다.

 

          

           집회가 대학에서 개최 되었는데 대단히 재미 있었다.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가 재미가 없다면 그것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 그들에게 전에는 탐탁지 않고 모순투성이로 보였던 그리스도인 생애가 이제는 그 참된 빛으로, 현저한 조화와 아름다움으로 나타났다. 그들에게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던 그분이 “만 사람에게 뛰어나”며, “그 전체가 사랑스러우”신 분이 되었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89, 2, 12).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자기의 발표를 마치면서, 와그너는 마음에 이르는 이와 같은 강력한 호소를 한다.

 

           그러나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나는 이것에서 나를 위한 아무 위안도 찾아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내게 한 모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본을 따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능력이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지상에 계셨을 때에라도 하나님 이셨으며 나는 일개 사람일 뿐이다.” 그렇다. 그대는 원하기만 하면 그분이 가지셨던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있다. 그분은 연약함에 쌓여 있었으나 “죄를 범치 아니하”셨다. —

           그렇다면 피곤하고 연약하며 죄에 눌린 영혼들이여 용기를 가지라. 그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도록 하라. 그곳에서, 필요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틀림없이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필요는 필요한 바로 그때에 우리 구세주에 의하여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하다는 느낌에 감촉”되신다(그리스도와 그의 의[영문]29, 30페이지).

 

           확실히 오늘날 우리들도 “그리스도를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가까이 계신 구주로써 제시할 필요를” 느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