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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기별 – 서론 (The 1888 Message – An introduction)

제 4 장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 받으심

 

       1888년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기별을 독특하고도 효과적이 되게 하였던 기본 개념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그 시기의 기별과 역사에 관한 엘렌 지 화잇의 병행하는 주석(설명)에 아주 가까이 갈 것이다.

       1889년초 싸우스 랜캐스터(South Lancaster)에서 개최되었던 부흥집회를 묘사하는 중에 그 여인은 우리를 지시하여 죤스와 와그너 기별의 핵심으로 향하게 하였다.

 

       학생과 교사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크게 나누어 받았다. 하나님의 성령의 깊은 감동은 거의 각인의 마음마다 느껴졌다. 일반의 증언이 그 집회에 참석 하였던 사람들에 의하여 주어졌는데 그들은 전에 알았던 어떤 것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그렇게 철저하면서도 모든 부당한 흥분에서 아주 벗어난 상태를 유지하면서 진행되어 가는 역사(work)를 전에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권장도 초청도 없었다. 사람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지도 않았으나 그리스도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려 오신 것을 엄숙하게 실감(이해) 하였다.···우리는 바로 하늘 분위기를 호흡하는 듯 하였다.···타락한 남녀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변화되어 자기들의 영혼에다 그분의 형상으로 판 박아 놓는 것을 보는 것은 우주에 향하여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그들은 마음이 타락되고 비열하게 된 자신들을 보았다.···이것이 마음의 자만심을 정복하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9, 3, 5).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죤스와 와그너의 개념, 영원히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처지로 사람을 구조하시려고 오심, 그분의 죄 없는 본성 위에 우리의 죄 있는 본성을 취하심, 그분의 영혼 안에 우리의 모든 시험을 경험하시면서도 우리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심,-이것이 그들 기별의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이었는데 그것은 활력 있고(역동적이고) 영광스러운, “십자가에 죽기”(빌2: 8)까지 평생을 두고 투쟁하신, 결과이었다.

 

       안식일 오후 많은 마음들이 감동을 받았으며, 많은 영혼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떡으로 먹이웠다. 주님께서 아주‘가까이 오셔서 당신의 은혜와 사랑을 크게 필요로 하는 그들을 각성시켜 주셨다. 우리는 멀리 계신 구세주가 아니라 가까이 계신 구세주로써 그리스도를 제시할 필요를 느꼈다(상동).

 

       1888년 기별의 핵심을 이해하는 열쇠는 “멀리 계시지 아니하고 가까이 계신 구세주”라는 그 문구에 놓여 있다.-“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가까이 계신” 분으로,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하나님과 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마 1 : 23) 하시는 분으로써 대학에 있는 청년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그분은 1888년 기별로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신다. 1888년의 좌절시킨 역사는 그리스도와 사단간의 대쟁투를 실증하였다. 그리스도를 그분의 충만하심으로 나타낼지어다. 그러면 사단은 반대하기 위하여 일어나게 될 것이다.

O 그리스도께서 외부로 오는 시험은 물론 내부로부터 오는 시험도 참으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는가?

O 아니면 그분은 우리와 아주 달라서 우리의 내적인 시험을 느끼실 수 없으셨는가?

O 그분도 우리가 느끼는 대로 느끼셨는가?

O 그분은 참으로 진짜 사람이었는가?

O 그가 시험을 받으셨으되 다만 죄 없는 아담이 시험 받는 것처럼 받으셨는가? 아니면 우리가 시험을 받는것처럼 그도 시험을 받으셨는가?

 

       우리는 엘렌 화잇이 1889년 초의 집회에 대하여 말씀하였던 것에서 최초의 단서를 얻는데, 그리스도께서 아주 가까이 계신 분으로써 그 기별 속에 나타나셨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은 말하기를 그분을 그렇게 제시할“필요성을 우리가 느꼈다”고 하였다. –엘렌 화잇은 그들이 발표하는 중에 진심으로 죤스와 와그너와 함께 연결 되었다.

       이것이 이“부흥의 역사(work)”가 일어나는 동안 그 여인의 영혼을 대단히 감동케 하였던 것이었다. “학생들과 교사들이 다같이” “그리스도를 보았다” 이것이 진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마음의 자만심”을 정복하였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의 영광을 먼지 가운데 내려놓는 하나님의 역사이며, 사람이 자신을 위하여 자기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을 사람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The Faith I Live by 111, from Special Testimonies series A, No. 9, p. 62).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라는 죤스와 와그너가 전한 그리스도의 의의 기별의 단순하고도 단도직입적인 하나의 보기를 살펴보자. 와그너는 1888년 총회 이전과 이후에 자기가 가르쳐 온 것을 설명하고 있다.

 

       두 개의 질문들이 내게 전해 왔는데, 이제 그것들을 잃으려 합니다 :“죄 있는 육신으로 태어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난 바가 거룩한 것(thing)이었는가? 그리고 그 육체가 우리가 가지는 동일하고 싸움하는 악한 경향을 가졌는가?’ ·. .

       이제 나는 성경에서 읽는 것 밖에 이 문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성경에서 읽은 것은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여 그것이 나에게 영원한 소망을 줍니다. [음성들 : 아멘 ! ] 나는 실망과 좌절과 불신의 시간이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지나간 것임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누구나 늘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내가 열렬하게 양심적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노력한 후에 내 생애 중에 여러 해 동안 나를 실망케 한것-즉 나로 하여금 내 영혼안에서 포기하게 하여 “쓸데없어,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는데”라고 말하게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나 자신의 약점에 대한 지식과, 나의 직감적으로, 선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과 성경에서 우리가 읽는 옛날의 성인들은 나완 다르게 구성된 사람들 이어서 그들은 바른 것을 행할 수 있었겠지 하는 생각 이었습니다. 내가 섭섭한 많은 경험으로 발견한 것은 나는 악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 위하여 오셨고, 오직 그분 안에만 소망이 있는 구세주라고 아버지께서 발표 하셨는데-만일 그분의 지상 생애가 하나의 속임수(야바위) 이었다면, 그렇다면 어디에 소망이 있습니까? [음성: 소망은 사라지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말하기를,

       “이 질문은 그분의 생애가 일종의 속임수 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정반대임을 전제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완전히 거룩하시고, 너무도 거룩하시므로 심지어 그분은 싸워야 할 아무 악도 없으셨으니까요.”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분은 “모든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고 나는 읽습니다. 나는 그분께서 밤이 맞도록(밤새도록) 기도하시는 것을 읽습니다. 나는 그분의 얼굴에서

땅방울이 피방을 같이 떨어지는 그러한 고민에 빠져 기도하시는 것에 대하여 읽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모두 다 믿도록 하려는 것이었고 만일 그것이 단순히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리고 만일 그분이 진짜 시험을 받은 것이 아니요 단순히 그것은 기도의 몸짓을 통과하는 것일 뿐이었다면,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는 이전보다 더 못한 상태로 남아있게 됩니다.

       그러나 오, 만일 한분이 계시다면, -그러나, 나는 의심에 대한 어떤 생각이라도 포함된 이 “만일”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통과하도록 일찍이 부르심을 받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저항하신 한 분이 계신고로 라고 나는 말하겠습니다. [음성들: 아멘!]

       그런데, 그분은 일찍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닥쳐왔던 시험보다 더 강한 시험들을 당하셨으며, 모든 점에서 나와 같이 구성되신 분이시나, 내가 처한 환경보다 심지어 더 못한 환경에 처하셨으며, 마귀가 인간의 육신을 통하여 행사할 수 있는 그 모든 능력을 만나셨으나, 그러나 죄를 알지 못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극히 큰 기쁨으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음성들: 아멘!]

       그분이 약1900년 전에 이루신 것은 지금도 여전히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그분이 당신을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십니다(대총회 회보 1901년, 403, 404페이지).

 

       우리가 더 진전하여 나아가기 전에, 와그너가 참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을 포착하도록 하자.

1.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그분은 기도하시지 않으면 안되셨기에     기도하셨다. 그분은 죄를 알지 못하시는 점을 제외 하시고는 “모든 점에서 나와 같이 구성되셨다.” 그분은 마귀가 인간 육신을 통하여 (내적 및 외적 시험을 통하여) 행사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만나셨다.

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모르셨으며” 당신의 육신과 생애로 완전한 의를 입증하셨다.

3. 그분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죄지음에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정하게 되기 위하여는 와그너의 말을 끝까지 들을 필요가 있다. 그는 육신을 쓰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관점을 토의 하면서 계속한다:

 

       죄 있는 육신으로 태어난 처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사물(holy thing) 이십니까? 여러분은 로마 천주교회의 결백한 임신(무구회태설)의 교리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이들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탄생하셨다는 뜻일 것이라고 짐작 하신 분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천주교의 교리가 전혀 아닙니다. 무구회태설의 교리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죄없는 탄생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구요? -표면상으로 예수님을 크게 보이게 하기 위함이지요. 인간의 구주 예수님과

그분이 구원하시러 오신 그 사람들 사이에 넓은 간격을(구렁을) 두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통과할 수 없도록 하려는 참으로 마귀의 역사입니다(상동 404).

 

       이 넓은 협곡(간격)은 엘렌 화잇이 1889년 3월에 그 여인의 위의 문구에 대하여 말하였던 “우리가” 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바로 그 오류이었다. 와그너는 1888년 기별에 반대한 것에 대하여 1901년 그의 깨달음을 나타낸다! 그는 계속한다.

 

       우리가 로마교회 밖에 있든지 그렇지 않든지 우리 각자는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도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기는 오늘 저녁 이곳에 있는 각 영혼마다, 진리와 의의 길을 알기를

간절히 바라는 줄 압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모르고 법왕의 교리에 매어 달리고 있는 사람과 그것들로부터 자유케 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육체가 우리의 육체와 같지 않는다는 개념(왜냐하면 우리 육체가 죄스러움을 알기 때문에) 이 필연적으로 처녀 마리아의 무죄한 출생에 대한 개념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 안에는 아무 죄가 없으셨으나 하나님의 비밀이-그 흠없는 순결로 계시던 생명의 출현이 죄 있는 육신으로 나타나심-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요. ···[회중 : 아멘 ! ] 오, 그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

       잠시동안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와 아주 분리 되셨으므로, 즉 우리와 아주 달라서 그분은 당신의 육신 안에 싸워야 할 아무것도 없으셨다는 개념과 더불어 시작한다고 가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물론 여러분은 로마 천주교의

무구회태설의 교리가 필연적으로 어떠한 결과를 따르게 할지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왜 여기서 중단 할까요? 마리아가 죄 없이 출생하였다면, 물론 마리아의 어머니 역시 죄 없는 육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기서 중지 할 수 없습니다. 그 어머니(마리아의 할머니)에게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 마침내 여러분은 아담까지 이릅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거기에는 결코 타락이 없었습니다. 아담은 결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보시는 대로 이와 같이 그것을 추적하므로 우리는 로마 천주교와 강신술과의 필수적인 같은 정체임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육신으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죄에 동의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육체로 하나님의 뜻을 입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어느 인간, 어떤 죄 있는 육신 안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

 

       모든 몸, 당신의 몸과, 나의 몸은 하나님에게서 준비하신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그 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도록 하신 것입니다(상동404, 405페이지).

 

       와그너가 제시하고 있는 단순한 개념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당신의 육체로 승리 하심으로 이룩하신 그것을 그분은, 당신을 참으로 믿는 모든 사람의 육체 가운데서 성취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결론을 주의하라.

 

       하나님께서 땅끝까지 구원하시고자 죄 있는 육신으로(육신 안에서) 완전한 생애를 살도록 하시는 당신의 능력을 세상에 증거하여 오셨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무능을 제거 하시고 살기에 더 좋은 환경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이는 죄 있는 사람 속에서 이루어 지지 않으면 안 되는데, 단순히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분의 수 많은 제자들 가운데서 재현되고 증가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단순히 몇몇 발탁되는 경우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전체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생애가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을 구원 하든지 아니면 정죄 되든지 할 최후를 장식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

       이제 우리가 이것을 포착하였다면, 우리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 안에서(육신으로) 건전한 생활을 하며, 연약한 점을 자랑할 것입니다.···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죄 있는 육신 안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는, 즉 이 죄스러운 육신을 발아래 두고 그분의 의지(뜻)에 협력하게 하시는-이것보다 결코 더 고상한 기쁨을 알길이 없는 즐거움으로 완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패배에서 승리를 가져 오십니다. 우리를 깊은 구덩이에서 들어 올리시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 처소에 앉히십니다. 그분은 죄 가운데서 태어난 아이를 취하시어, 아마도 심지어 정욕의 소산일 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백성의 방백들(왕자들)과 함께 앉히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조상들을 우리에게 숨기시지 않으신 그것으로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

 

       우리는 악한 경향과 죄스러운 천성을 유전 받았다는 사실을 통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유전된 악들을 끊어 버릴 수 없고, 이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거의 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육신을 따라 다윗의 씨(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죄 있는 사람들을 당신의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 .

       이리하여 우리들은 우리 유전이 천성적으로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으로 육체를 장악할 능력이 있으시므로 그분(성령)은 이 모든 것을 역전시키실 수 있으시며,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자들을 삼으실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음 안에 있는 영광스러운 가능성 중에 어떤 점들을 볼 수 있게 하시사, 심지어 나의 죄 있는 육신,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신 안에서라도 그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면서 ‘나는 주의 뜻을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말할 수 있어,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영원히 찬송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상동 406-408).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1888년 총회 직전과 직후에 와그너가 발표한 것들과 동일하다. 기본적인 개념은 분명히 남아 있으며 왜곡되지 않았다. 그가 1887년 2월 10일에 지. 아이. 버틀러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한 것을 주의하여 보라, 그런데 그것은 1888년 말경에 출판되었다.

 

       로마서 8 : 3절을 읽어 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말씀이 되셨던 그 육신 본성을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다음에 그는 빌 2 : 5-7, 히 2 : 9 인용한다] ·. .

       이 성경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본성을 자신이 취하신 것과 그 결과 그분은 죽음의 대상이 되신 것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죽음을 위한 목적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지상 생애의 시작으로부터 그분은

당신께서 구원하려고 죽으셨던 그 사람들의 상태와 같은 상태이셨습니다.

       이제 읽습니다.

       로마서 1 : 3 하나님의 복음,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는 육신을 따라 다윗의 씨로 되었(was made)”습니다. “육신을 따라”다윗의 본성이 무엇이었습니까? 죄스러움, 그것이 아니었습니까? 다윗은

말합니다. ‘내가 죄악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 하였나이다”(시 51:5). 무서운 반감의 놀라움으로 시작하지 마십시요 ; 나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이었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 아닙니다[히 2 : 16, 17

절을 인용함].

       그분의 존재는 모든 점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즉 그의 존재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신 것이나 꼭같으며,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빌 2 : 7). 성경에서 가장 격려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육신을 따라 그분의 조상들이 죄인이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선조들의 생애를 읽고 우리가 가지는 약점들과 정욕들을 그들도 모두 가졌던 것을 볼 때, 우리는 아무도 자기의 죄있는 행동들을 유전에 근거하여 변명할 권리가 없음을 발견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점에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지 않았다면, 그분의 죄없는 생애를 감탄하면서 바라볼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것은 희망없는, 실망을 일으키는 감탄이 될 것입니다.···[고후5: 2 인용].

       이제 예수님께서는 언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습니까? 그것은 그분이 육신이 되셔서, 죄 있는 육신에게 흔히 일어나는 시험들과 약점들로 고통을 당하기 시작하였을 때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분은‘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게 되는 인간의 경험의 모든 국면을 통과 하셨으나 “죄는 없으셨습니다” (히 4 : 15)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요 비탄을 아는 자라”, “그는 실로 우리의 비탄을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사53 : (3), 4(영문 참고)]. 그리고 이 성경은 십자가 이전 오래 전에 성취되었다고 마태가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율법아래 나심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태어나시고, 친히 아브라함의 본성을 취하신 필연적인 결과이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분은 죽음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어린 시절 시초부터 십자가가 그분 앞에 항상 있었습니다.

       당신은 말합니다 : “그분은 십자가 상에서 그분의 크신 희생으로 자신 위에 세상의 죄들을 질머지셨다고 우리 [대총회와 리뷰 앤드 헤랄드 지도자들]은 받아들이나, 그러나 그분은 죄의 정죄 아래 나시지 않았다. 그분에 대하여는 순결하고 그 생애 가운데 하나의 죄도 결코 범하지 않으셨다. 그가 율법의 정죄 아래 나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모든 타당한 신학의 놀라운 곡해일 것이다”(버틀러 저 갈라디아서의 율법 58 참고).

       그것이 신학에 대한 일종의 곡해일지는 모르나 성경과는 정확하게 조화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 요점입니다. ·· 당신은 예수님께서 그 생애중에 결코 죄를 범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 아래 나셨다는 개념에 충격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분께서 십자가 상에서 율법의 정죄아래 있으셨음을 받아들입니다. 무엇이라구요! 그분이 그렇다면 죄를 범하셨습니까? 결코 아니지요. 좋습니다. 그러면 만일, 예수님께서 그 생애 중에 한 때는, 무죄하신데도, 율법의 정죄 아래 있을 수 있으시다면, 왜 다른 한 때는 그분이 율법의 정죄 아래 있을 수 없는지, 그리고 여전히 무죄하신지 저는 그 이유를 모릅니다.·–

       나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그것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는지 단순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다만 그분이 그렇게 되셔야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으셨다는 성경 말씀을 단순히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지식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죄가 되신 이래 나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와그너 저 갈라디아서에 있는 복음 60-62, 1888].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이 차라리 과장된 문장을 아주 재미있게 만든 것은 와그너가 그것을 사실 1888년에 출판하였다는 것과, 그때는 겨우 일년 이상 그의 마음 가운데서 그 문제가 성숙하도록 허용된 이후 이었다는 것이다.

 

       와그너의 부인과 회견에서 후룸(Froom)은 우리에게 그여인이 1888년 총회에서 그것들을 속기로 기록하여 자기 남편의 서재에 두었다고 알려준다. 그 다음 와그너는 시조에 낼 기사를 위하여 이 기록한 것들을 편집하였고 후에 그가 그리스도와 그의 의와 기타 다른 책들 안에 그것들을 출판 하였다(후룸저, 운명의 운동200, 201 비교). 와그너는 1889년 1월 21일자 시조에 (그 구절들이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의 26-30페이지에 약간 손질하여 나타난다) 자기가 베낀 기록들로부터, 그가 다음과 같이 기록하기 전에는 1888년 총회 이후 아마도 그의 가방을 열 시간이 없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당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모양을 친히 취하셨다면, 죽음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죄이기 때문에 그분이 되셨던 모양은 틀림없이 죄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 제시하기 위하여라도 약간만 생각하면 충분할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자신에게 언져 놓지 않으셨더라면 죽음은 ···그리스도를 지배할 아무 능력도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취하셨으되 죄없는 존재로가 아니요 죄있는 사람으로, 즉 그분이 취하신(꾸미신) 육체는 타락한 인간성이 주체인 모든 연약성과 죄의 경향성을 가진 육신을 취하신 사실은 이 기사가 기초된 바로 그 말로 보여진다. 그분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로 되셨다.

       비록 그의 모친은 기대대로 순결하고 경건한 여인이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틀림없이 인류가 육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아주 대단히 타락하기 전에 그분이 탄생하셨더라면 있었을 육신의 연약성보다 더욱 연약함에 지배되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히 2: 16-18, 고후 5: 21 인용].

       이것은 그분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되셨다는 그 문구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하나님이 그분을 죄로 삼으셨다. —무죄자가 죄인으로 간주될 뿐만 아니라, 사실 죄 있는 본성을 취하셨다. —[갈 4: 4, 5인용]

 

       예수께서 아버지께 밤새도록 기도 하셨다. 만일 그분께서 육신의 유전된 연약성을 통하여 원수에 의해 압박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왜 그렇게 해야 하였을까? 그분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 그것은 그분이 “죄를 알지 못하셨”기에, 일찍이 불순종하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육신으로 고난당하신 것[육신의 고난]으로, 사람들이 순종하기 위한 저희의 노력에 대항하여 오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그분이 배우시기 위함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기사를 여기까지 읽는 동안 우리가, 죄 있는 사람의 수준까지 그분을 끌어 내리므로 예수님의 성품을 저하시키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분께서 가장 불행한 역경에서도 유지하셨던 흠없는 순결에까지 사람들을 높이려고, 죄 있는 사람의 수준까지 자원하여 친히 내려 오신 복스러운 우리 구세주의 “거룩하신 능력”을 단순히 높일 따름이다. ···그의 인성은 육신의 죄스러운 정욕들을 능히 성공적으로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그분의 신성을 가리었을 뿐이다. 그분의 전 생애는 몸부림 [투쟁] 이었다. 의의 모든 원수로 말미암아 동요된 그 육신은 죄로 기울어질 것이나 그러나 그분의 신의 본성은 결코 한 순간도 악한 욕망을 품거나 또는 그의 신성의 능력은 한 순간도 동요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것을 육체로 당하시면서 그분은 영광의 궁정을

떠나시던 때와 꼭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보좌로 돌아가셨다. ·–

       그렇다면 피곤하고 연약한 죄에 눌린 영혼들아 용기를 가지라. 그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오도록 하라. 그곳에서 그들은 확실히 필요할 때에 도울 은혜를 발견하리니 이는 그 필요가 바로 필요할

때에 우리 구세주에 의하여 느껴지기 때문이다.

 

       관찰력 있는 독자는 와그너가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본성을 “가지셨다”(had)고 하지 않은 것을 주목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있는 본성, 그 안에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시험받게 되는 그 모든 수용력을 가진 본성, 우리의 유전의 모든 결과들과 함께 우리들과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took) 고 말한다. 그러나 한 순간도 예수님은 양보하지 않으셨다.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충분히 지지 하였는가? 1888년 총회에서 그 여인이 말하기를 “나는 그 박사[와그너]가 우리 앞에 표명한 율법과 관계되는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발표에서 진리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제시된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경험의 모든 연한 동안 나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그 빛과 완전히 조화되고 있다”고 하였다(원고 15, 1888).

       율법과 관계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결코 그 분의 성육신 이전에 거룩함이 아니고 “육신의 모양으로” 성육신하셔서 이루신 그분의 성품과 희생이다. 우리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와그너는, 자기는 그리스도께서“아브라함의 본성을 자신이 취하신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나신” 필연적인 결과〔로써] ···율법아래 나셨음을 믿는다고 버틀러 장노에게 분명하게 하였다. “우리의 죄있는 본성”을 취하시고 그럴지라도 죄없는 성품을 완전히 개발시키신 그리스도에 대한 이 엄청난 개념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엘렌 화잇이 “율법과 관련한 그리스도의”에 대한 와그너의 개념을 “진리의 아름다움”으로 지지하기에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와그너 형제가 미네아폴리스 총회에서 이 개념들을 끌어내었을 때에 그것은 나와 내 남편 사이에 대화를 제외하고는 그 주제에 대하여 내가 들었던 어느 인간의 입술에서 나온(것중에) 최초의 분명한 가르침이었다. 나는 혼자서 말하기를 내가 그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계시로 제시하여 주셨기 때문이요, 그들(반대하는 형제들)은 나처럼 그것을 제시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이 그것을 제시 하였을 때에 나의 심장의 모든 섬유질마다 아멘이라고 말하였다(원고 5, 1889).

 

       만일 와그너가 단순히 루터나 칼빈의 개념을 재 강조하고 있었다면 엘렌 화잇이 어떻게 이와같은 말을 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