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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기별 – 서론 (The 1888 Message – An introduction)

제 3 장 기별의 중심 – 그리스도

 

       죤스와 와그너는 신성이신 분으로써 그리스도를 높이는 중에 연합하여 강조하였다. 그들의 성숙한 발표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선재하시며 동등하시다는 것보다 못하다는 어떤 주저감으로 손상을 받지 않았다. 와그너는 반가운 소식이라는 그의 저서, 141페이지에 그리스도를 어떻게 높이는지 주의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세상에 들어 오기 전에 중보자이셨으며 우주에서 아무 죄가 없을 때와 속죄[죄 용서]의 필요성이 없을 때에도 중보자 이실 것이다.···그분은 아버지의 존재의 바로 그 형상이시다. ···그분은 사람의 타락할 그 당시에 처음으로 중보자가 되시지 않았으며, 영원부터 그러하셨다(중보자이셨다). 아무도, 단순히 아무 사람도, 오히려 아무 피조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을 자가 없다.

 

       죤스도 우리 구제주의 충만한 신성을 꼭 같이 선포하는 일에 와그너와 연합하였다.

 

       히브리서 1장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나신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나님의 본질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아주 완전히 하나님의 본성 중에 본성이시므로 하나님의 본체(실체)의 바로 그 형상이시다.

      이것이 구주이신 그리스도 이시며, 하나님의 영의 영이시요, 본체(실체)의 본체(실체)이시다.

       그리고 이것을 히브리서 1장에서 아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 이유는 히브리서 제2장에서 사람으로 나타나신 그분의 본질이 무엇임을 알기 위함이다 [헌신한 길(The consecrated way) 16페이지].

 

       1888년의 기별의 바로 그 핵심은 신약적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명확한 부흥이었다. 그러나 기별자들은 여러 세기 말썽 많은 논쟁의 부스러기를 치워버리는데 성공하였다. 성소 정결의 빛으로 본 계시록 14장 세천사의 기별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거의 사도적 순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시야를 회복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위하여 한 백성을 준비시키고자 하였다. 예를 들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람의 생애의 얼마만큼이 의로워야 하는가? -온통, 매 순간마다; 그 이유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기 때문이다. —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행동도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만은 의로워 질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사람이나 사람의 어떤 행동이 의로워 질 수 있다. 율법은 사람을 그의 행함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율법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크므로 사람의 아무 행위도 그 높이에 오를 수 없다. 그런고로 의롭다 하심을 오게 할 중보자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들은 손상되어 있다. —

       그리스도 안에 율법의 완전한 의가 있으며, 믿음을 통하여 당신의 의의 선물을 주시기 위한 은혜가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선지자들 자신이 증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한 의롭다

하심을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

       사람이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한가지뿐인데 그것은 의롭다 하심이며, 의롭다 하심은 하나의 사실이지 이론이 아니다. 이것이 복음이다.—의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만 얻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전파될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 향하여야 한다. ·–

       우리는 과거의 불완전한 행실을 완전하게 하기 위함과 꼭 마찬가지로 현재의 불완전한 행실을 의롭게 할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와그너 대총회 회보 1891, 75페이지).

       [우리는]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의아해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롭다 하심은 겉으로 율법을 수반한다. ···그것은 마음속에 율법을 세운다. 의롭다 하심은 그리스도안에 육신으로 탄생한 율법이며, 사람 안에 주입한 율법이다. 그러므로 그것이(율법) 사람 속에 육신탄생(성육신)한다. ·–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의를 주시고 죄를 치우신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의를 남겨 두신다.그리고 사람 속에 철저한(혁명적) 변화를 일으킨다 (상동 85페이지).

 

       우리가 이후 어느 장에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와그너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율법과 관계는 결코 로마 카톨릭 트렌트 회의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위조품의 오류를 반향하지 않는다. 1888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관점은 한 백성을 준비시켜 그들에 대하여 주님께서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계14: 12).

       두 기별자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매혹되었다. 와그너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계속하여 지성적으로 그분(의 존재) 그대로 생각”하기를 촉구하였다(그리스도와 그의 의 5페이지). 그분을 “그분 그대로” 본다는 것은 우리의 대리인과 보장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모본과 모형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충분하고도 균형진 관점을 요구한다. 또한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모본으로써의 “보지(see)”않는다면, 즉 그분이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드시고 우리가 그분을 효과 있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거룩한 대리인으로 그분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모든 지극하신 사랑스러우심과 능력으로 ‘높이 들리셔서, 이리하여 그분의 거룩하신 매력이 모든 사람을 그분께 이끌리게 해야 한다(상동 6).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와 입법자로서 신성(Divinity)의 모든 속성을 소유하시며, 모든 점에서 아버지와 동등하신 신성(Godhead)의 일부분 이시라는 그 사실은 거기에 속죄가 있다는 유일한 힘(force)이 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신성(Divine)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다만 인간 희생제물만 갖는 셈이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주실 의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상동 43, 44).

       충만하고 거저 주시는 용서에 대한 죄인의 보장은, 자기가 반역하고 무시하였던 분이신, 입법자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분이시라는 그 사실에 놓여 있다’(상동 45).

 

       죤스와 와그너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리자가 되심과, 또한 그 분은 당신의 의를 믿는 죄인들에게 주신다는 개념 위에 명백하고 성실하게 그들의 기별의 기초를 놓았다. 이것은 16세기 개혁자들이 놓은 기초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심은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역사 위에 전적으로

기초 되었지, 한 점이나 조금이라도, 결코 우리의 행위에 기초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죄 있는 인간이 최선의 노력을 들인다 해도 의를 산출하여 내는 데는 최소한의 노력도 들지 않는 고로, 의가 그에게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종의 선물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의가 선물이기 때문에 즉 의의 보상인 영원한 생명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죄가 용서 받도록 세우셨으며, 이 용서는 단순히 그들의 죄 없이 함을 위하여(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의의 선언으로 구성된다.

       ‘긍휼이 풍성하”(엡2: 4) 시고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의를 자기 죄를 위한 대속 자로써 예수를 믿는 죄인에게, 입히신다. 확실히 이것은 죄인을 위한 유익한 교환이며, 하나님에게도 아무

손해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거룩함에 있어서 무한하시므로 그 공급도 결코 쇠하여 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 당신의(하나님의) 의를 입혀주신다. 그의 의를 덮어 주시므로 더 이상 그의 죄가 나타나지 않는다. ·

       율법으로부터 의를 얻기 위하여 쓸데없이 몸부림치다가 피곤해진 죄인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펴신 팔로 향해 달려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숨으면서 죄인은 그분의 의로 덮히운다. 그러니 이제 보라!

그는 자기가 쓸데없이 노력해 왔던 것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었다. 그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소유한다. 의의 근원으로부터 얻었기 때문에 그것은 진짜 의이다. ·–

       그 거래에 있어서는 흠잡을 아무 근거가 없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동시에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 안에는 신생의 모든 충만이 거하신다. 그러므로 그분은 모든 속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eg1lal) 하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잃어버린 인간을 다시 사서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은 무한하다. 인간의 반역은 아버지에게와 마찬가지로 아들에게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두 분이 하나이기 때문이다”(상동 60-63페이지).

 

       그러나 16세기 개혁자들이 결코 이루지 못한 것을 죤스와 와그너가 계속 이루어 놓았다. 그들은 이 기초 위에 오래 전에 시작한 개혁의 완성을 향하여 독특하고 분명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 진리의 웅대한 건물을 축조하였다. 그들은 성소 정결에 대한 독특한 재림신도의 진리와 병행하며, 또 모순이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계속하여 발전시켰다. 온 세상을 영광으로 환하게 할 “그리스도의 의의 기별”은 우리 대 제사장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속죄 사업을 마치시고 있는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서 베풀어진다.

       이것은 이전에 일찍이 보았던 것보다 인간 육신으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분명한 전망을 요구한다. 우리는 셋째 천사의 기별의 큰 외침은 소리보다 더 많은 빛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영감 받은 펜에 의하여 듣는다.

 

       이 세상을 덮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오해의 어두움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다.–·신랑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백성들에게 ‘너희 하나님을 보라’고 외쳐야 한다. 세상에 비칠

마지막 자비의 빛 세상에 전파 되어야 할 마지막 긍휼의 기별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들어내는 것이다(엘렌 지. 화잇 실물교훈 346, COL 415).

 

       우리는 어떻게 1888년 기별 자체가 늦은 비로 임하는 성령의 참된 부으심에 요구되는 그 내역을 성취 하였는지 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엘렌 지. 화잇 자신이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에 어떻게 관계 되는지 간단히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1888년 총회가 있은 다음 몇 주 혹은 몇 달간 특히 와그너를 진리에서 변절되고 있다고 나타내므로 그들의 기별에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두가지 중요한 요인들을 주목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1. 비록 저명 하지마는 영감 받지 않은 신학자들을 좋게 생각하여 단순히 그들에게서 인용함으로 어떤 기별을 유효하게 하려는 것은 위험할지라도, 충분한 자격을 갖춘 신학자들은 와그너가 1888년 총회 다음에 가르친 관점을 지지한다는 것은 여전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같은 관점을 좋게 생각하므로 이후 우리 연구에 기초가 될 것이다. 와그너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사람 안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하였을 때에 믿는 죄인이 “율법에 순종하게 만들어 진다”는 것을 그는 의미하였다.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로마 카톨릭적인 관점이 아니다.

2.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에 대한 엘렌 화잇의 열성적인 승인(보증)은 1888년 총회 이후 여러 해 동안 계속 되었다. 1889년에 그 여인은 “이 사람들이 제시하고 있는 이 빛”을 지지하였으며(원고5, 1889), “이 시대의 백성에게 주님께서 보내신 바로 그 기별”이 그들의 “강론”에서 제시되고 있다고 말하였다(리뷰 앤드 헤랄드 1889, 3, 5). “현대기별-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칭의)는 거룩한 신임장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그 열매가 거룩하기 때문이다”(상동 1889, 9, 3). 1890년에

그 여인은 “하나님께서 사용하고 계시는 …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로 말미암아 처사하셨던 지난 2년 동안에 주어진 증거들”에 대하여 말하였다(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TM 466). 1892년에 그 여인은

계속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도구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있으시다. A. T. 죤스와 E. J. 와그너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기별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내신 하나님의 기별이다”(편지 0-19, 1892). 1893년에 그 여인은 “하나님의 빛과 자유와 성령부으심이 “죤스의”일에 동반하였음”을 기뻐하였다(편지 1893, 1, 9). 1895년 그 여인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별을 그들에게 주셨는지”에 대하여 자주 말하였으며 “그들의 주님의 말씀을 지니고 이 사람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세상에 예표(sign)로써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표자가 된 [기별자들이었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TM 96, 97).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지하여 오셨다. ···그리고 그 분은 그들에게 진귀한 빛을 주셨으므로, 그들의 기별은 하나님의 백성을 먹여주고 있다”(편지 51a, 1895). 1896년쯤 뒤늦게 그 여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후하게 주시고 있는 빛과 증거를 거절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거절한다”고 말하였다(편지 1896, 5, 31). 여러 해를 걸쳐 퍼져나간 이러한 지지들은 무려 200의 숫자를 넘는다!

       이 기간 동안 와그너 편에서 배도 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엘렌 화잇이 천진난만하여 오해되었다거나 아니면 자기의 의무에 무책임하였다고(직무 태만이라고) 가정하여 그 여인의 신용을 떨어 뜨리는 것일 뿐이다.

       다음 장은 죤스와 와그너가 가르친 하나의 가장 필수적인 개념을 검토한다. 문서상 증거는 와그너가 비록 강력한 반대를 직면 하였을지라도, 미네아폴리스 총회 전후로 이 관점을 지지하였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존재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독특한 이해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엘렌 화잇의 보증을 수반한 와그너와 죤스가 제시한 기별 전체의 부분을 구성하는 고로 1888년 총회에서 와그너가 발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는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