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신학의 기만 (Deceptions of The New Theology)
제13장 복음과 신신학
신 신학의 교리적 기둥들 가운데 하나는 성도들이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죄를 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오류를 이론화하기 위해서 신학적 이론을 교묘하게 구축해 놓은 이후부터, 인간이 이생에서 죄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예전에도 있었다. 18세기에 요한 웨슬리도 그것에 직면했던 일이 있었다. 당시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교리를 크게 반대했던 신학자는 쿤트 본 진젠도르프 (Count von Zinzendorf ) 라는 사람이었다. 그의 견해에 대해 웨슬리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성경상에 이 표현보다 더 장애가 되는 말은 아마 없을 것이다. 완전이란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말이다. 그것은 소리만 들어도 가증한 것이요 또 누구든지 그것을 이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설교하는 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방인과 세리보다도 더 나쁜 취급을 당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 저, 웨슬리의 사업, 6권, 1
쿤트 본 진젠도르프에 관해서 웨슬리는 또 이렇게 기록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류 중에 오류이며, 나는 그것을 진심으로 증오하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사상이라면 세상 어디든지 불과 칼을 들고 쫓아가 무찌를 것입니다” 라고.
그러나 나는 묻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그렇게 극렬합니까? 죄로부터의 구원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왜 그렇게 열성이 대단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묻습니다. 왜 당신들은 죄를 그렇게 좋아 하십니까? 도대체 죄가 그대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습니까? 도대체 죄가 이생에서나 내세에서 무슨 도움을 줍니까? 죄로부터의 구원을 소원하는 사람들에게 그토록 심하게 대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상동
바로 진젠도르프가 선포했던 개념이 수많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복음에 대한 개념을 크게 파손시킨 사상이다. 왜냐하면 재림교회 내의 신신학파가 주장하는 것이 그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우리는 루터교회의 신학이 말하는 복음관과 트렌트 공의회에서 로마 천주교의 주교들이 내놓은 복음관을 아울러 살펴 보았을 때, 당시 트렌트 공의회는 복음은 칭의와 성화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라고 선언했음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칭의와 성화를 함께 묶는 참된 복음을 천주교적이요 로마적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러한 주장은 전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라는 사실을 배웠다. 천주교회가 말하는 “성화”는 공로 (즉 성례와 예식)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화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친다. 신신학의 오류는 복음에 관한 다음의 진리를 공격한다:
1.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단순한 하나님의 법적조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신신학자들은 칭의(즉,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인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즐겨한다. 칭의에 주관적인 요소는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기별은 칭의를 얻으려면 의지의 전적인 굴복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한 인간의 굴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칭의를 얻지 못한다. 신신학은 바울의 글을 몇군데 오용한다. 예를들면:
일을 하지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로마서 4:5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죄 가운데 있는 경건치 아니한 자라도 의롭다고 칭해주신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은 개심한 사람의 마음 속에 죄를 버리고 의를 택하는 개혁이 있음을 부인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궁창에 빠진 술꾼과 구원받은 사람과의 차이는, 구원얻은 사람은 의롭다고 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적인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물론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말은 진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자신의 죗된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칭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선교사들이 이교도들을 개심시키지만 그들이 이교적 행습을 계속하는 한 그들을 개심한 사람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사도 유다는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경건치 않은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이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팍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유다서 15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 자신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회개시키러 왔노라. 누가복음 5:32
칭의는 변화를 요구한다.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로마서 2:13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7
거짓 일을 멀리하며 무죄한 자와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 나는 악인을 의롭다 하지 아니하겠노라. 출애굽기 23:7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언 28:13
솔로몬은 악을 의롭다고 하는 자를 저주했다.
악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 잠언 17:15
하나님은 자기의 죄를 버리지 않는 죄인을 의롭다 하실 수 없다. 중생의 대원칙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신 자들을 당신 자신께서 회복하심으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게 살게 하신다는 원칙을 세워 놓는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하나님의 칭의와 능력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누가복음 5:1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로마서 5:9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갈라디아서 5: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에베소서 2:8
하나님은 인간을 죄책감과 비천함 속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신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힘차게 외쳤던 E.J. 와그너 의사와 A.T. 존스 목사의 기별의 중심이었다.
2. 성화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봉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하시는 완전한 역사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신신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성화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인간의 불완전한 노력에 불과한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이다.
어느날 필자 콜린은 복음에 있어서 성화와 칭의를 함께 묶는 것은 영적 간음에 해당된다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 예배 도중에 그러한 참람된 설교에 대해서 항의를 하고자 하는 충동을 자제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어쩌면 그렇게 해야만 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예배가 끝난 후, 설교자를 붙들고 성화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서 심각한 문제가 교회 안에 빚어지고 있음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콜린은 칭의란 인간을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역사란 점에 대해서는 설교자와 동의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목사가 설교한 성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설교자는 성화를 단순히 하나님을 위한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인간의 불완전한 노력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콜린이 성화 역시 칭의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이루어 주시는 완전한 역사이며, 그것이 성서적인 입장이라고 설명해 주었더니 그는 “신학자들은 더 이상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하며 반박하였다. 그래서 다시 필자인 콜린이 “이제는 인간의 이론을 배제하고 성서적 진리로 복귀하여야 될 때가 되지 않았는가?”고 했더니, 놀랍게도 그의 마지막 말은 “오직 성경! 오직 성경!”이라는 말만을 구호처럼 외쳐댔다. 그러나 그 목사는 성서적 진리를 배척하고 인간의 오류를 붙잡고 있었다. 만일 그의 성화관이 성서적 이었다면 그 목사의 놀라운 구호는 진실되게 들리었을 것이다.
성화는 오직 믿음으로 부여받는 것이지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행함은 거룩한 생애의 필수불가결한 증거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을 믿는 재림 교인들은 각 시대의 충성된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믿어왔던대로, 성화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생애를 당신께 바친 사람들에게 주시는 거룩한 선물로 믿는다.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친히 말씀하실 때, 성화는 칭의처럼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라 하셨다.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사도행전 26:18
그뿐 아니라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동시에 성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노라. 히브리서 10:10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3:1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5:25-27
성경에서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보증이 너무도 풍부하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오해나 정면적인 도전과 부정이 도대체 어째서 생겨나는지를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다. 다음 성경절들을 참고해 보라.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섰는지라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천사들에게 명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스가랴 3:3,4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뻐하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2:12-14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브리서 9:14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이로써 보배롭고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베드로후서 1:4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12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6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라. 데살로니가후서 2:13
성화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너무도 풍부하다.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 생애를 맡아서 은혜의 역사를 우리 속에 이루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15:5
두번 다시 말할 필요 없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거룩함으로 회복하는 일은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서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히브리서 13:21
이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성화의 기별이다. 복음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인간 회복을 성취하여서 우주 세계의 거룩한 천사들과 타락을 맛보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는 준비를 이루도록 역사하는 능력을 말한다.
3. 복음은 칭의와 성화를 포함한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개념이 16세기 종교 개혁을 주도한 지도자들의 지배적인 신학이였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롭게 된다는 것, 즉 칭의를 받는다는 것이 성서적이기는 하지만 칭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가설에 불과하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신자들은 요한 웨슬러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왜냐하면 웨슬러는 개혁자들의 복음관을 단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의롭게 하시는 능력이라는 경지를 넘어서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이라는 원칙을 포함시킴으로서 확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의 믿음에 근거한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천주 교회의 성화 이론은 신조주의와 인간의 노력 위에 세워진 것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경은 너무나 자주 칭의와 성화를 복음의 테두리 안에서 연결해 주고 있다. 아래에 그 중 몇가지 예를 보겠다.
그 눈을 뜨게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칭의)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성화)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라. 사도행전 26: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칭의)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성화)하실 것이요. 요한일서 1:9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칭의)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성화) 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성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8:1-4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칭의)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성화)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되라. 요한계시록 23:1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 (칭의)과 성령 (성화) 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5
주의 기도문 가운데에서도 칭의와 성화는 하나로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칭의)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성화). 마태복음 6:12, 13
성화의 원칙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 임을 충분히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이 전적으로 인간 속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깨닫게 된다. 그 때에 사람들은 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마태복음 5:16).
화잇 여사가 제시한 복음의 본질은 놀랍게도 정확하다.
만일 그대가 자신을 그분께 바치고 그분을 자신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그 때의 그대의 생애가 그때까지 아무리 죄로 가득했다고 할지라도, 그대를 의롭다고 간주해 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대의 성품을 대신하고 그대는 하나님 앞에 죄 지은 일이 없는 사람처럼 가납된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는 그대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신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가 그대의 마음 속에 거하시는 것이다. 정로의 계단, 영문 62
의롭게하고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영감받은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얼마나 풍요하고, 얼마나 완전하고, 얼마나 만족스러운 것인가! 복음은 인간의 교만이나 공로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허다한 투쟁을 경험하게 하고 또 거기서 승리하게 할 것이다. 거기에는 사단을 대적하는 만만챦은 전쟁이 있을 것이다. 또한 강력한 투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발진(發進)시켜 주시는 힘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바울은 이 복음을 일컬어 능력있는 복음이라고 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로마서 1:16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는 모든 일에 충만한 능력을 주신다. 그는 비단 우리를 죄의 저주로부터 구하시는 능력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죄와 그 죄의 가책으로부터 격리시켜 보존하시는 능력까지 공급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