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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텔레비젼 함정

저자: 죠 크루스 목사 – 미국의 대표적인 자영선교기관 중의 하나인 Amazing Facts 기관의 설립자이며, 전도 목사로서 봉사함.
               

           아무 죄도 없어 보이는 텔레비젼이 집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 바 있다. 때때로 진리나 순결 등에 있어서 성경에 맞는 프로그램들이 있기 때문에 가족들을 위한 교육적인 도구로서 텔레비젼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어려운 일이다. 시청해도 좋은 훌륭한 질의 프로그램에 관해서 대개 엄숙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 정직하고 진실하게 다음의 질문에 대해 답해보기로 하자. 텔레비젼을 시청하는 이러한 제약규정들이 얼마나 지속되는지? 그 제약규정들은 봐도 좋고 안봐도 좋을 듯한 프로그램들의 성격에 의해 엄격한 단속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어디다 선을 그어야 할는지, 한 시간짜리의 도큐멘터리에 포함된 몇몇 신성모독적인 말들이 그 프로그램의 질을 떨어뜨리게 될는지, 또 다른 종류의 당혹케하는 문제들을 결정짓기에는 너무 피곤한 일이 되어버린다. 제약의 문은 점점 더 넓어지고, 분별하는 감각은 저질의 그림들과 장면들이 몰려들어 오는 것을 허용하게 된다. 인기있는 방송뉴스 기자에 의해 사용된 무의미한 말들로 인해 말을 아무렇게나 사용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쉽게 들게 된다. 많은 상업광고들도 그리스도인의 도덕 표준을 낮추는 암시들을 그 속에 짜넣는다.

           가장 주의를 깊이 기울여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시청하는 것이 영적인 감각을 무디게 하지 않을지는 더욱 더 의문시 되어가고 있다. 상스러운 말들의 분별없는 사용이 아주 정선된 교육 프로그램들 안에 기어들어 오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늘 그러한 언어들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그러한 언어들을 배워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종종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의 야비한 말을 듣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가 피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우리 자신들을 그러한 사회에 노출시켜야 할까?

           우리들이 길거리를 걸어갈 때에 피할 수 없는 악한 장면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 심각한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방 바로 안으로 유혹의 원천을 고의적으로 불러들여 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모두 채우려고 하는 유혹들은 얼마든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보는 데에도 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에덴 동산에 있는 하와 할머니 뒤에 와서 그녀에게 금지된 나무 앞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저 보고만 있어”라고. 그러나 하와가 그렇게 본 것이 6천년의 비극적인 세월동안 수십억의 인류에게 슬픔과 죽음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어떤 날 오후 잠이 깬 다윗 왕은 아주 우연히 아름다운 이웃집 아내가 지중해 지방의 지붕 정원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만일 누군가가 다윗에게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면 “그저 보고 있을 따름이니라”는 대답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쳐다봄이 그로 간음과 살인을 하도록 이끌었고, 한 민족이 하나님을 잊게하는 슬픈 죄들을 짓도록 만들었다. 밧세바와의 불륜의 관계는 다윗의 가족들에게 너무나 현저한 비극을 가져왔는데, 그의 자녀 중 넷이 비극과 반역으로 그 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아무 생각없이 그저 본 것으로 인한 쓰라린 결과를 그는 후일 얼마나 아프게 후회했을까!

           정신적 사고방식의 지울 수 없는 영향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바라봄으로 변화된다. 생각은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형성된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언 23:7). 바로 그러한 이유가 텔레비젼이 그리스도인 생애를 파괴할 수 있다는 가장 두려운 이유들 중 하나라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켜 준다. 그것은 정신적으로 죄에 참여하는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27,28).

           사람들은 상상적인 장면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부디 유의하기 바란다. 그 참여한다는 것은 너무나 생생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마음에 무슨 생각이 깃들도록 허용한 것은 우리가 마치 실제적으로 그것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취급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두뇌는 인체를 위한 결정 센터이기 때문에 실행된 모든 행동은 그것이 실행으로 옮겨지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광대한 신경 소통조직을 통해서 두뇌는 손과 발과 다른 신체적 기관들을 작동시키기 위해서 기별을 보낸다. 그리하여 두뇌는 가장 강한 유혹이 전달되는 센터가 되는 것이다. 일단 정신적인 어떤 장면이 두뇌에 품어지게 되면 그것이 상당히 망상적이고 의지를 쇠약하게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상상력이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돌아 설 수 있도록 자신의 행동 양상을 바꾸는 사람은 불과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이기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사단이 마음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악한 생각이나 상상력이 들어오는 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일단 악한 생각이 품어졌거나 고려되기 시작하면 비록 생각하는 것만으로서도 마음과 육체의 놀랄 정도로 친밀한 관계가 육체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키게 되어 있다. 두뇌의 빠른 전류 속도는 품어진 행동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기도록 전 인체를 깨우는 기별을 보낸다. 이제 마음과 육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행동을 실행에 옮기도록 함께 연합하여 압력을 가하게 된다.

           자. 그럼 그 사람이 마음에 자극된 생각인 육체적인 방종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해 보자. 정욕적인 어떤 태도가 마음에 생겼지만 그 죄를 실행에 옮길 상대자가 없거나, 혹은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면 그 사람은 마음의 충동을 실행에 옮기려는 그 생각을 저항하려는 지독한 노력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생각이 가지고 있는 그런 놀라운 능력은 그것이 비록 생각으로 범한 죄일지라도 육체적으로 범한 죄처럼 아주 심각하게 취급하신다.

 

           자, 이제 이 원칙을 텔레비젼을 보는 문제에 적용시켜 보자. 다른 어디서 우리가 그토록 생생한 대리행동(정신적인 범죄)의 과시를 목격하겠는가! 비록 시청자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단지 꾸며낸 장면이라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마치 자신이 실제로 그 경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처럼 그 장면에 정서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놀람으로 가슴이 쿵쾅 뛰고,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고, 시청자는 정신적으로 자신이 그 장면 속에 참여하는 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필사적으로 살아나려고 싸우거나 총을 쏘는 상황에서 난치의 질환인 종양으로 고생하거나 아주 난잡한 침상의 장면이 자아내는 흥분이거나간에 시청자는 그 장면들에 사로잡혀 그 배우가 하는 모험을 대리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종류의 상상적인 죄도 실제적으로 범하는 죄처럼 나쁘고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단이 텔레비젼이라고 하는 매체률 사용하여 벌이는 기막힌 전략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생각하는 것조차 가슴을 떨리게 하는 일이다. 여기 마귀가 사람에게 짓도록 하고 싶어하는 가장된 죄가 있다. 예로, 간음하는 한 장면을 사람들에게 보게 한다. 그는 감정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하나의 죄의 장면을 통하여 백만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간음이라고 하는 진짜 죄를 범하도록 하는데,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그 장면에 나오는 사람으로 동일시 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그 장면이 믿도록 만들기 위한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몸이 그에 대해 반응할 정도로 아주 생생한 실제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정욕과 두려움의 정서가 그들을 완전히 사로잡았으므로 비록 그들이 육체적으로는 그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과 뜻은 마치 그들이 그 죄를 범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아주 엄숙한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마치 그들이 개인적으로 그러한 죄를 범한 것으로 취급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도둑과 살인자와 간음자로 만들어 버리기 위한 얼마나 교묘하고도 흉악한 방법인가! 단지 사단은 가장 호소력 있고, 진짜와 같은 정서적 극물을 만들도록 영화제작자들과 배우들만 감동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영화를 보면 사람의 내적인 본성이 그들의 마음을 온통 차지하고,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의 정서적인 노예들이 되어버린다. 언젠가 그들은 슬쩍 물건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되는 경험을 하고, 그 다음에는 살인자, 또 그 다음에는 간음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스크린에 나오는 배우에게는 그러한 장면이 아주 터무니없는 가짜의 장면이지만 시청자들에게는 최소한 순간적으로라도 하나님과 사회가 금하는 온갖 흥분을 자아내는 일들을 그로 인한 결과를 직면함 없이 하게 되는 기회가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결과들을 직면해야만 하는가? 아마 물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대리행위(대리범죄)를 한 도덕적 책임을 매 사람은 심판날에 직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죄들을 고백하거나 버리지 않은 사람들은 마음과 의지의 성스러운 능력을 더럽게 팔아버린 책임을 추궁당할 날이 올 때에 얼마나 두려울 것인가!

           대신 죄를 범하게 되는 이와 같은 사실은 왜 성경이 그렇게도 강력하게 오감에 대한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거리를 안전하게 지키도록 노력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에 대한 설명을 하신 후에 바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이셨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태복음 5:29).

           이 성경절은 자주 잘못 해석되어 오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눈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눈 하나를 잃은 사람도 나머지 한 눈으로 계속 악하고 더러운 일을 할 수 있다. 그분께서는 그 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다. 만일 눈이 그 사람의 마음에 죄를 짓도록 이끄는 어떤 것을 보고 있다면 그 장면을 보지 않고 피하기 위해 무언가 결단력 있는 행동이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셨던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영적인 양심에 위반되거나 범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어떤 것을 보는 일을 그만 두라”는 말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죄를 짓도록 하며,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게 되는 원인이 된다.

           나쁜 그림들을 “그저 보는 것”의 위험에 대한 얼마나 극적인 본보기인가? 오늘날의 상황에 맞추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옮겨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집에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텔레비젼을 가지고 있다면 그 텔레비젼의 영향으로 인해 죄를 짓느니 보다는 그것을 쓰레기 장에 갖다 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텔레비젼 없이 한쪽 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텔레비젼에 의해서 자극된 더럽고 죗된 생각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을 잃는 것보다는 낫다.

           “(눈을) 빼어 버리라” 는 예수님의 명령은 그 눈이 보고 있는 것에서부터 그 눈을 돌려 버리라는 명령이다. 그에 대한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을 갖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직 순결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립보서 4:8). 순결하고 정직하며 덕있는 사람이 되는 비결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윗은,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시편 1Ol: 3)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인 요인들에다가 텔레비젼의 폭행장면이 마음과 도덕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충격적인 통계자료들로 여러 페이지들을 메꿀 수도 있으며, 텔레비젼이 범죄를 하도록 자극한다는 것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보고도 덧붙일 수가 있다. 그러한 것들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며 자주 반복되는 실례들이다. 텔레비젼에 나오는 이야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취급된 범죄들이 얼마만큼 노상강도나 도둑들이나 강간범들에 의해 자행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폭력과 인간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만족해하는 경향이 증가되어 가고 있다. 끊임없이 노출되는 텔레비젼에서의 잔인함과 몰인정의 장면들은 우리 동료 인간들에 대한 놀랄 정도의 무관심을 조성해오고 있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관여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대개 사람들은 공격을 받은 희생자 곁을 본체 만체하며 지나가 버린다. 지진이나 홍수,기근같은 천연적인 재해에 대한 공중의 반응은 거의 “늘 있는 일인 걸” 식이다. 저녁 6시에 방영되는 뉴우스에 남미나 터키에서 죽어가는 수천명의 사람들에 대한 장면이 그 전날 보았던 영화장면보다도 인상에 덜 남는다. 인상을 깊게하기 위해 상업적으로 제작된 발랄하고도 해괴한 장면들이 고통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실화보다도 더 큰 반응을 얻는다. 세미한 동정심의 감각들은 끊임없이 퍼부어대는 헐리웃의 “공포와 전율” 전문가들에 의해 거의 파괴되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