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노출된 이중표준
저자: 죠 크루스 목사 – 미국의 대표적인 자영선교기관 중의 하나인 Amazing Facts 기관의 설립자이며, 전도 목사로서 봉사함.
남자와 여자가 같이 수영을 하는 혼합수영의 시끄러운 문제를 다루기 전에는 정숙한 복장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다고 할 수 없다. 혼합수영에서의 수영복과 비교해 볼 때 미니스커트는 거의 정숙한 복장에 속한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재림교회 복장에 대한 표준에 있어서의 맹점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이상한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우리 청년들을 상대로 할 때 이 현란한 모순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진 적도 글을 통하여 쓰여진 적도 없다. 우리는 미니스커트에 대해 단지 몇몇 규정의 스리슬쩍 넘어가는 식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반면에 혼합수영에 대해서는 아무런 공식적인 의견이나 규정도 택해오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대부분의 사역자들과 교인들이 취하는 비공식적인 견해는 우리가 한 교회로서 채택하고 있는 전통적인 원칙과 어떤 상반된 상호관계를 갖고 있는 듯하다.
비록 수영이 가장 훌륭한 종류의 여가활동 중 하나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수영복은 가장 짧아빠진 미니스커트보다 더욱 더 많은 살을 드러낸다. 사실, 너무나도 조금만 가린다. 만일 우리가 정숙한 복장의 원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미니스커트는 정숙하지 못한 복장이라고 정죄한다면, 문제가 아무리 모호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단 한치라도 수영복을 그리스도인이 입어도 될만한 복장으로 봐줄 수 있겠는가? 아무도 이 점에 관하여 눈이 멀 필요가 없음은 확실하다. 우리 젊은이들은 눈이 멀지 않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정숙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그들이 더 이상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그 이유들 중 하나이다. 그들은 이중표준이 행사되고 있음을 안다.
우리 교회 중고등학교에서 학교규칙 중 정숙한 복장에 대한 지침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 다음에 거기에는 치마의 길이, 가슴이 어느정도 나와야 되는지, 등을 내보이는 문제, 소매없는 복장에 대해 많이 혹은 적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우리 교회의 모든 학교들은 해마다 학생들과 교사들이 어느 물가로 가서 거리의 창녀가 입는 것보다 더 많이 노출된 옷을 입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만일 그 학생들과 교사들이 어느 작은 도시의 큰 길을 수영복 차림으로 걸으며, 어떤 상가로 들어가려 한다면 거절당할 것은 뻔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동네에서조차 스캔들에 오를 것이며 난잡한 복장으로 인하여 체포당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먼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이러한 종류의 복장을 혼합수영을 하는 장소에서 입어도 좋다는 견해를 받아들여 오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어떤 지역에서는 정숙하지 못하다고 부르는 것을 교인들이 다른 장소에서 정숙하다고 부르고 있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다. 그것이 이치에 맞는 말인가? 장소는 별로 상관이 없다. 그것은 원칙이다. 몸을 노출하는데 대한 원칙은 거리나 해변, 혹은 시장 모든 곳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이 살금살금 기어들어온 타협이 우리를 우리 주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과 같이 낮은 표준으로 끌고 내려왔는지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실례를 보기 원한다연 7월과 8월에 가장 인기있는 공공 해수욕장의 인구조사를 시도해 보라. 수천명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이 저속한 무리들과 함께 섞여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재림교인들을 그런곳에 잘 드나드는, 반만 가린 무신론자들, 기생들, 도둑들과 구분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모든 육체들이 다 똑같아 보인다.
바닷가에서는 우리의 옷을 벗어버려도 정숙하단 말인가? 우리는 정숙함에 대한 원칙이 단지 어떤 특별한 때와 장소에만 적용된다고 하는 것을 믿는가? 여자의 나체에 대한 남성의 반응들이 해수욕장이나 수영장에서는 어떻게 다르게 반응한다는 말인가?
나는 많은 우리 교인들이 자신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해왔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수영장이나 해수욕장에 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그런 질문을 하는 것 같지 않기에 거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는 듯 하다. 그런 경우에 있어서 일반적인 느낌은 대개 이런 식으로 결론을 보는 듯 하다. 그들은 아주 훌륭한 운동과 시간을 즐기고 있다는 식 말이다. 다른 이들은 이런 식으로 합리화 시켜 버린다. 모두가 벗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의 머리 속으로 그리 큰 더러운 생각을 들여다 놓지 않고 있다고. 또한 그들은 서로가 반 나체인 상태를 보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고. 이런 식의 말들은 근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이 아니다. 만일 그 말들이 사실이었다면 우리는 나체주의자들이 사는 동네에 함께 들어가 살았을 것이다.
혼합수영에 대한 나의 반감은 내가 혼합수영이 가져온 서글픈 결과를 목격했을 때 더욱 증가했다. 내가 플로리다 주에서 수련 전도사로 일하고 있을 때 해수욕장이 있는 곳에서 내게 맡겨진 일은 수영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나는 수영복을 입은 소년 소녀들이 난잡하게 어울려 놀 때에 그 제어하는 힘이 얼마나 무력해지는 지를 보고 깜짝놀랐다. 물 안과 물 밖에서 놀 때에 자유롭게 엉키고 뒤섞이는 행동들이 나타났다. 그날 내가 본 한 장면은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일 것이다. 그 장면은 내게 큰 충격을 주는 것이어서 나로 하여금 혼합수영을 절대적으로 반대하는 위치에 서도록 만들었다. 보호자로 나선 여성들 중 한 여성이 함께 그 수영을 관장하고 있는 한 남성보호자의 어깨 위에 올라 탄 것이었다. 그녀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 가운데 하나였으며, 그 남자는 집사였다. 안식일 아침에 보여주는 그녀의 정숙은 늘 본 받을 만한 것이었다. 만일 바람이 살짝 불어 그녀의 무릎이 조금이라도 보이게 되면 그녀는 늘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바닥만한 수영복을 입고 자기 남편도 아닌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타 깔깔거리면서 해변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부도덕스런 행동인지에 대한 아무런 감각도 갖고 있지 않은 듯이 보였다.
바로 그 때 나는 만일 이런 것이 혼합수영의 결과라면 혼합수영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나의 위치를 바꾸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그 때 이후 삼십년 동안 혼합수영의 나쁜 영향력에 대한 나의 느낌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몇달전 나는 어떤 야영장에서 정숙한 복장의 원칙들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었다. 두 시간동안이나 큰 강당에서 거행된 그 집회 후에 다섯명의 젊은 청년들이 나와 이야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대학생들 같아 보이는 세 명의 여청년들과 두 명의 남자 청년들이 내가 방금 말했던 것으로 인해 아주 기분이 상해 있었다. 다른 학생들을 대표해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아름다운 여학생은 특히 더 열이 나 있었다. 그녀는, “목사님! 혼합수영을 어떻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우리는 이번 여름내내 오우션 씨티(Ocean City) 해수욕장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일을 했읍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수영복을 입고 다니면서 해변에서 다른 청년들에게 성경공부를 시켰읍니다. 여기 있는 톰(Tom)이 우리가 바로 거기서 만난 청년인데, 그는 다음 안식일에 침례를 받을 거예요. 우리가 해수욕장에서 톰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었는데, 어떻게 목사님은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하고 말했다.
나는 침례받게 될 그 청년과 그 청년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그들로 인해 기쁘다는 표현을 한 후 톰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톰, 그대가 수영복을 입은 이 아가씨들을 만날 때에 이들이 입은 복장 때문에 그대의 마음 속으로 악하거나 깨끗하지 않은 나쁜 생각들이 생긴 적은 없었는지?”라고 묻자 톰은 잠시 머리를 툭 떨어뜨리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물론 그런 나쁜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갑자기 그 아가씨들 모두는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읍니다. “왜 그때 우리에게 그 말을 하지 않았어요?”라며 그들 중 한 명이 물었읍니다. 그들은 그 청년들이 해수욕장에서 그들에게 그들이 입은 복장이 너무 난잡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진짜로 놀라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그날 이후로 좀 더 현명한 여청년들이 되어서 떠나갔지만 여러분들은 그들이 그들의 혼합수영하는 관습을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나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들의 복장이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배운 후일지라도 그들의 복장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유행의 여신은 아주 지독한 독재군주이다. 특히 복장이 자신의 본성을 만족시켜 줄 때 자신들의 방종한 습관을 버릴만큼 충분히 자신을 구분하여 바치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이다.
해롤드 쉬라이욕 박사는 데이트를 하고 있는 젊은 쌍에게 다음과 같은 권면을 준다:
“혼합수영을 피하시오. 수영 그 자체는 아주 훌륭한 운동에 속합니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가 함께 수영을 할 때 정상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특히 반대의 성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 특성에 그 생각이 이끌리며, 혼합수영을 할 때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요소가 도입된다. 혼합수영이 미치는 영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성하다고 고려되는 부분들을 아주 평범한 것들로 하락시킨다. 혼합수영은 예절이나 정숙에 대한 개인의 표준을 낮추며, 육체적으로 치근덕거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보이게하는 경향이 있다.”
1971년 3월호 목회지(The Ministry)에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이 실린 적이 있다. 그 편지는 “생명과 건강(Life and Health)”지의 편집자인 단 호울리 (Don Hawley)목사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었다.
“1970년 1월호 목회지에는 우리 교회 목사님 중 한 분이 정숙에 관한 문제를 다뤘는데, 그 목사님은 미니스커트에 대한 우리의 비난은 혼합수영에 대한 우리들의 완전히 부족한 인식과 비교해 볼 때 상호 일치를 보이지 않는 듯 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편집인들과 같은 의견을 가진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한 견해를 말하도록 하였을 때 거기에는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혼합수영을 해도 좋다는 의견이 교회에 의해서 광범위하게 받아 들여지고 있으며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에 대한 상황을 그저 무시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길인 것처럼 보이는 때에 혼합수영을 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우리가 직관적으로 아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그 문제에 대해서 무시하고 드는 것은 ‘눈 속에다 머리를 쳐박는’ 처사가 아닐까? 어떤 난잡한 행동들이 아무리 광범위하게 받아들여 질지라도 우리는 심판날에 개인적으로 그에 대해 답변해야만 한다.
아마 개중엔 혼합수영이 나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그들은 그러한 확신을 표현하는 것은 정책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느낀다. 한번은 내가 한 대회장이 어떤 목사를 이런 말로 모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혼합수영을 나쁘다고 믿는 극단주의 자라니까요’ 라는.
우리는 짧은 치마,등이 없는 옷 , 가슴이 훤히 다 들여다 보이는 옷, 미니스커트와 같은 옷을 입는 사람들을 ‘반 나체’라는 말로 비난한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3/4(사분의 삼)이 벌거벗은 상태인 수영복으로 갈아 입으면 괜찮다고 말한다. 혼합수영과 같은 난잡한 행위를 우리가 하기 원할 때에 정숙에 대한 법은 일시적으로 폐지 될 수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이야기는 웬 말인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수영복을 입은 사람이 공공 해수욕장을 떠나 상점이 있는 곳으로 걸으면 ‘풍기문란’이란 명목의 죄로 체포될 위험이 있었다. 세상이 풍기문란이라고 부르는 것을 교회가 괜찮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어떤 대회에서 야영회 기간 동안 다음과 같은 규제를 시행했다. ‘수영자들은 수영장을 오고 가고 할 때 꼭 가운을 입든지 정숙하고도 단정한 복장을 하고 다닐 것, 거리에서 입는 옷이나 가운을 꼭 착용할 것’, 잠시 이 규제에 대해 생각해 보라. 그 규제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는 한번 사람이 수영장에 들어가면 수영복만 입거나 단정치 못한 옷차림을 해도 다 괜찮다는 의미가 아닌가.
어떤 이들은 엘렌 지 화잇이 혼합수영에 대한 주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화잇부인 저서 출판위원회에 의하면 그러한 문제를 다룬 권면은 기록에 없다고 한다. 명백한 것은 비키니나 손바닥만한 수영복을 입는 것은 1800년대 중반인 빅토리아 왕조 당시에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 문제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해 화잇부인 저서 출판위원회에 편지했을 때 거기서 내게 한 편지의 사본을 보냈는데, 그것은 나와 유사한 질문을 했던 사람에게 보내졌던 편지의 사본이었다. 그 위원회의 서기는 그 편지를 1953년 12월 8일에 기록했다.
“얼마전 선생님이 했던 혼합수영에 관한 질문은 현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가장 다루기 힘든 문제임이 분명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엘렌 지 화잇의 기록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결론은 어느 누구의 특별한 훈계에서보다도 성경과 예언의 신에 기록된 원칙들에 기초하여 지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정규적으로 해야만 하는 결정들에 관한 다른 많은 문제들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결론지어야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선생님은 그 문제에 대한 저의 의견을 물으셨기에 원칙에 대한 몇몇 진술들과 함께 그 문제에 대한 결론을 짓기로 하겠읍니다.
제가 수년동안 가르치는 동안에 수많은 청년들과 사귈 수 있는 경험을 가졌는데, 선생님께서 경험하신 것과 똑같은 경험을 저도 하게 되었읍니다. 어떤 활동들에 대한 표준들을 세우기가 곤란할 동안에 어떤 활동을 하도록 허용했다가 그 활동이 옳은 것이 아니어서 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보다 그 선이 분명치 않을 때에는 아예 그 활동을 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이 더욱 쉽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우리 대학들의 수영장은 아직도 남녀가 따로 수영하도록 수영장 수칙을 운영하고 있으며, 그러한 의견이 우리 대총회 청소년부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 견해입니다. 저도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건전하다고 하는 것을 믿습니다.
아마 선생님께서는 최근에 가졌던 가을 회기 (Autumn Counsel ) 바로 전에 있었던 대총회 청소년부 권고부에서 우리가 혼합수영하는 것을 장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전의 입장을 다시 고수하기로 다짐했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행에 대한 문제는 어떤 특정한 상황에 대한 적용이기보다는 교회, 청소년회, 학교, 그리고 야영회에서의 복장 착용에 대한 것을 중점적으로 논의하였습니다. 회의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그 상황의 근거에 대하여 우리가 보아왔던 관점에 완전히 동의한다는 강한 표명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보아왔던 관점은 그 문제에 관하여 강력한 규제가 실시되지 않을 때 아주 불행한 결과들이 초래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청년들이 자신들이 수영장에서 보는 여러가지 광경들로 인하여 충격을 받지 않고 있다는 말을 언급하셨는데, 그 말은 많은 청년들에게 있어 사실이라고 저도 믿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큰 의문 중 하나는 교회 지도자들로서 우리는 청년들이 충격을 받지 않게되는 성향을 길러줄 뿐인 이를 지지해야 하는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번복되는 노출이 그들의 양심을 마비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한 영향을 계속 미칠 어떠한 것이라도 최선을 다하여 피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 아니겠읍니까? 오늘날은 과거보다 혼합수영을 하는 것에 대한 이유들이 많아지고 있고, 증가된 교제의 자유와 자신들의 자유를 향유한다고 하는 젊은이들의 생각을 제어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단정치 못한 복장을 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는 것이 그들과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견해는 제가 알기에 완전히 질못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간에 정숙한 복장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의 양심이 강퍅해졌을 지라도 그것이 기본적인 원칙들을 변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어떤 천재적인 사람을 통하여 수영복은 ‘단정한 복장’이라고 하는 현대판 성서적용을 창안해야 하는 일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인정하기를 거절하는 동안 거의 나체상태에 가까운 옷차림의 남녀노소들은 서로 함께 어울려 있음으로 서로 유혹받게 되는 위치를 서로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여자 수영복에 대한 광고가 남성의 주의를 여성의 몸매에 환기시키도록 고안된 것이라는 사실을 한번 슬쩍 보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어떤 모임들을 장려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노력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하여 다루는 것을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젊은이들, 특히 십대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제 인상에 깊게 남게 된 사실은 모든 젊은 세대는 어른들을 아주 고리타분한 구식의 사람들로 여겨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부모들과 지도자들인 우리들에게 우리 청년들을 그렇게 가르치도록 맡기셨읍니다. 비록 지금은 그들이 완전히 우리와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우리가 한 일의 지혜를 인식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저는 많은 젊은이들이 제가 반대하는 것 때문에 코웃음 쳤지만 후에 제가 했던 반대를 고맙게 생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수영을 가자고 하면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이 교회의 다른 사교적 행사는 지지하지 않는다는 언급을 하셨는데, 만일 선생님이 교회가 수영을 가는 일을 주최한다고 하면 대부분의 그런 청년들은 아직도 수영 이외의 다른 행사는 지지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 하는 다른 행사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데, 그것은 선생님께서 그 수영문제에 대한그들의 요청을 들어 주는데에만 그들의 관심이 있었던 때문입니다.
제가 한 모든 이야기가 마치 제가 청년들이 이야기하는 고리타분한 ‘비현실주의자’중 한사람의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저는 선생님께 확신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제가 여러해 동안 청년들과 매일 같이 살아온 사람으로서 우리가 그들중 몇몇의 현명치 못한 요구를 들어 줄 때 일어난 결과들을 너무도 잘 목격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의 젊은이들이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모든 자극제들을 그들 앞에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읍니다. 혼합수영은 그러한 종류의 자극제가 아닙니다.
수영은 가장 훌륭한 운동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수영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적절한 상황 가운데서 적당하게 즐기기에 훌륭한 육체적 운동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만일 소원했던 건강의 유익을 얻기 원한다면 적절한 장소에서 남자와 여자가 따로 수영하도록 관장할 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만큼 수영을 즐길 기회가 없는 것을 참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여가를 즐길만한 적합한 장소를 찾기가 참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은 장래의 유익을 위하여 현재의 쾌락을 즐기는 일을 거절하는 적절한 태도를 배워야만 합니다.
저는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문제로 인하여 선생님께 동정심을 느낍니다. 그 일은 우리 학교들에서 일년에 한 번 있는 일입니다만 저는 12년 동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써오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가족들이 결정해야 할 어떤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헌신한 부모들이 한가족으로서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수영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들은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수영과 같은 오락을 장려하는 문제는 아주 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