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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벌거벗고 다니는 것은 정숙한 행위인가?

저자: 죠 크루스 목사 – 미국의 대표적인 자영선교기관 중의 하나인 Amazing Facts 기관의 설립자이며, 전도 목사로서 봉사함.
             

    옷 입는 문제에 관해 성서적인 표준에 기초하여 어떤 선을 긋는다는 것은 아마 어떤 분야보다도 가장 민감한 반응을 초래하는 분야가 되어왔을 것이다. 옷 입는 문제에 관해 엇갈린 견해들은 많은 목사들로 하여금 그 주제를 다루기 힘든 것으로 인식시켜 왔다. 그러면 무엇이 정숙한 행위이고 무엇이 정숙하지 못한 행위일까? 교회의 상태를 염려하는 다른 연사들은 의복에 대한 비판 그 자체는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나 취급하는 문제라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분개한 입방아 때문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입을 꼭 다물어 왔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적용을 너무나 지나치게 잘못 적용시켜서 어떤 외부적 행위에 대해 논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여해 주시는 의를 율법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이 주제에 관하여 적어도 몇 가지 점을 집고 넘어갈 가치가 있을까? 이 주제가 너무나 지나치게 강조되어 왔는가? 이 주제를 다룬 책이 우리 인쇄소를 통해 몇 권이나 출판되었는가? 어느 누구도 이 주제가 너무 지나치게 많이 다루어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서술한 전단이나 출판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아주 극소수의 책들만이 이 문제를 영적인 문제로 고려해 볼 만한 것으로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영적인 문제에 속하는가?
    교회증언 4권, 647에 나오는 다음 인용문을 들어보라. “유행은 지성을 훼손시키며, 우리 백성들의 영성을 좀먹는다. 유행을 따르는 일이 우리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안에 널리 퍼지고 있으며, 우리 백성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에 있어서 다른 모든 세력들을 능가하고 있다” (증언보감 1권. 606).
    만일 의복에 관한 이 문제가 일백 년 전에 이렇게 말해 질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행하는 유니섹스(Unisex: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입는 옷차림), 수영복, 상반신을 노출하고 다니는 복장에 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해 질 수 있었겠는가?
지금 현재는 미니스커트가 유행되지 않는 때이긴 하지만 단정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복장으로 인정될 필요가 있는 나체화의 요소는 언제나 만연되는 유행이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이 “단정” 이라고 하는 낱말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여기서 그것을 정확하게 정의하려고 애쓰지는 말자. 그러나 어떤 동료 그리스도인을 해치는 일은 그것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 우리 동료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는 어떤 종류의 복장을 하는 것도 잘못된 것으로 취급되어야만 마땅하다.
    자, 그럼 노출된 인체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이나 행동으로 죄를 범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정직한 사람들이 되자. 너무나 많은 이들이 이 버섯구름처럼 피어 오르는 나체에 대한 문제에 대해 아주 천진난만한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명백하게 말하여 남녀들이 이 악이 지니고 있는 진정한 성격을 이해해야 할 때이다.
앤 랜더즈(Ann Landers)는 신문에 싣는 그녀의 칼럼에 이 편지를 미니스커트 광에 대해 취급하면서 게재하였다:

    “친애하는 앤 랜더즈 여사: “여기 22세 된 더러운 친구가 기별을 띄웁니다. 저는 대학 4학년이며, 여기 띄우는 기별은 수많은 남자친구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견해입니다.
    “허벅지가 훤히 보이는 짤막한 미니스커트를 입고 의자나 소파에 앉아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는 듯 그 짧은 치마를 자꾸 끌어내리고 있는 햇병아리 같은 여자아이들의 모습처럼 지독하게 우스꽝스러운 광경은 없을 것입니다. 접시처럼 커진 눈으로 얼굴을 정육점의 병든 쇠고기처럼 붉히며, ‘내가 바로 앉았지?’ 혹은 ‘아무 것도 안 보이지? 하며 묻는 모습 말입니다.
    “만일 자기들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기를 원하면 왜 좀 더 긴 치마를 사지 않을까요? 적어도 한번 이상, 저는 제 눈을 휘둥그렇게 만드는 모습에 사로잡혀서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아왔습니다.
    “부디 그것 때문에 모욕당한 것처럼 느끼는 위대하신 햇병아리 여사들에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반나체로 나다니는 이유는 그들이 좀 불안해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요. 또 그들이 치마 끝이 올라가는 것을 허용하면서, ‘단정하게 보이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그러한 행위는 아예 버려야 한다고 말해 주십시오”.

    많은 여성들은 자기들이 입는 짧은 복장에 관한 비평을 모두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더러운 놈팽이들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남자들의 잘못일까? 몇 달 전 텍사스 주에서 전도회를 개최하고 있을 때 나는 한 전화를 받았다. 내가 매일 하는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을 듣고 있던 한 이발사가 내가 묵고 있는 여관에서 개인적인 면담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는 천주교 신자여서 공중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좀 부담스럽지만 몇 가지 신앙적인 권고가 자신에게 절실히 필요된다고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 신사로 개종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기가 구원받고 경건한 생활을 살아가기 원한다는 큰 소망을 말한 후, 자신의 문제를 내게 고백했다. 매일마다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들이 자신의 이발소로 찾아 든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순결하게 지켜 주시도록 기도하며 투쟁했다.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그는 내게 말했다. “내가 내 생각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지킬 수가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멸망시키려고 의도하시는 겁니까?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이발사는 아주 측은하게 보였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 남자와 소년들이 직면하는 똑 같은 문제로 인해 씨름하고 있었다. 그 문제는 “더러운 놈팽이 탓”이라는 말로 몰아 붙여서는 안된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육욕적인 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자는 육욕적인 천성에서 자신의 생각을 곧게 지키기 위해 더 많은 투쟁을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여성과는 완전히 다른 성적인 단장을 하셨다는 사상에 그 근원을 둔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남자를 만드실 때에 여성의 나체를 봄으로 매우 빨리 자극될 수 있는 아주 민감한 성적 본능을 소유한 존재로 만드셨다. 그와 반면에 여성은 그렇게 쉽게 자극되지 않는 성적인 본능을 가진 존재로 만들었다. 특별히 보는 것으로 인해서는 말이다. 여성은 보는 것보다는 만지는 것과 부드러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어졌다. 여성의 섬세한 성적 반응은 결혼관계에 포함된 육체적인 관심에 의해 더 잘 반응하도록 이끌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관계를 더욱 유쾌하고 행복한 것으로 해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남자에게 정서적인 성적 본능을 주셨다. 남편은 그 관계를 주도하도록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 아름다운 계획하에 남편과 아내 양편의 성적 본능은 합법적으로 자극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을 유의하라. 하나님께서는 남자의 성적 정서가 결혼의 침실 밖에서 자극되도록 결코 의도하지 않으셨다.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여성에게 정숙함에 대한 섬세한 감각을 주었으며, 그래서 여성은 자신의 몸을 자기 남편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노출하지 않도록 계획하셨다.
    그 계획은 완전한 것이었으나 한쪽 부분에서 무너져 왔다. 사단은 창조주께서 여성에게 부여하신 타고난 정숙성을 아주 모조리 파괴시키려고 애써왔다. 증가하는 범죄와 저주 아래 여성들은 도덕적인 굴레를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금지 당하지 않는 나체나 깜짝 놀랄 정도의 반나체 복장이 현대 유행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창조주의 원래의 계획과는 완전히 다른 곳곳의 나체의 장면을 보도록 시험당하고 있다.
    이러한 부패의 결과는 어떤 것들인가? 그 결과는 홍수 전의 사람들과 거의 맘먹을 정도의 도덕과 성 문란의 사회를 조성해 왔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 24:37). 마지막 때에 똑같이 재현되는 노아의 때의 상태는 어떠하였는가? 창세기 6:5은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오늘날 이 예언이 얼마나 완전하게 성취되어 왔는지를 오늘날의 유흥과 대중매체들의 유감스러운 상태를 통해서 보게 된다. 외설책이나 포르노는 합법적으로 고안되었으며, 텔레비젼 채널들은 은연 중에 혹은 노골적으로 외설적인 섹스물들로 가득차 있다. 광고계에서와 심지어는 일간 신문의 논설도 신성모독과 암시적인 이중적 의미의 표현들로 난무해 있다. 섹스에 대한 주제로 가득차 있는 듯이 보이는 현대인의 상상력은 종종 정상이 아니거나 부패되어 있다. 동성애는 그것을 추구하는 자들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들에 의해서 정상적인 행위로서 인정되고 있다.
    그러면 이토록 육체를 신봉하는 사람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가? 불행하게도 그것은 교회 문 밖에만 내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서서히 세상은 남은 교회 안에 그 무서운 둥우리를 틀었다. 점차적으로 교회(성소) 안에서까지 무릎과 허벅지가 보이는 것을 용납하게 되었다. 매주마다 혀를 차던 분개의 감각도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 이러한 나체에 의해서 아주 쉽게 영향을 받는 천성적인 성적 본능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 남성들은 어떤가? 그들은 악한 생각을 함으로 외부적인 자극들에 반응하여 정신적인 간음을 범하지는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의 생각으로라도 범죄하지 않으므로 승리를 얻을 수 있다. 어떤 사람도 굴복과 기도를 통하여 깨끗한 마음을 주시는 능력을 구할 수 있으나 복장의 양상은 그 승리를 위해서 더욱 어려운 투쟁을 하도록 만든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나쁜 생각을 하도록 이끌리기가 쉽다는 것을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27, 28).
    그러면 이러한 종류의 생각을 하도록 자극하는 복장을 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 그들도 똑같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다. 이 이유 때문에 그러한 복장의 결과에 대해 이해하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그러한 맹목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복장을 피할 것이다. 치마가 무릎 위로 몇 인치 올라갈 때 죄를 지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그 생애에 복음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그 유혹을 저항할 힘이 없다. 모든 미니스커트는 육욕적인 본능을 가장 저락시키는 생각들로 가득찬 방아쇠를 잡아당기도록 하는 휘발유와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이러한 종류의 유혹을 불러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번째 중요한 계명이 영락없이 범해진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어떻게 한 여성이 자기 이웃의 남편이 정신적인 간음을 범하도록 고안된 옷을 입고, 사랑의 법을 잘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녀가 그녀의 이웃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 남편의 부인과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짓도록 하는 어떤 일을 고의적으로 한다면 그녀가 그녀의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을 죄 짓도록 하는 행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인 문제는 직접적으로 관여돼 있다. 우리는 유혹에 대한 모든 문을 닫도록 권면받고 있다.

    “우리의 모본과 감화력은 개혁하는 모든 면에 있어서 능력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양심을 마비시키고 유혹을 격려하는 모든 행위에서부터 절제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단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어떤 사람의 마음에라도 접근하게 되는 문들을 결코 열지 말아야만 한다” (교회증언 5권, 360).

    나체에 대한 여성의 반응이 남성의 그것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주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적인 문제를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너무나 자주 그들이 갖는 태도는 남자는 당연히 자신의 자제력을 더욱 활용해야 하고, 정신적인 상상력을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당신 자신이 남성의 본능 속에 두신 중요한 차이를 이해하는데 완전히 실패한다. 그 본능은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나 결정에 의해서 바뀌어질 수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헌신에 의해서 조절 될 수 있으나 그리스도인 여성들은 영혼을 유혹하는 모든 문들을 닫는 데 협력해야만 한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방어받는 데 있으며, 우리 자신의 영적 시야를 다른 곳에 둠으로 악을 선으로, 선을 악으로 부르지 않는 데 있다. 아무런 머뭇거림이나 논쟁 없이 우리는 우리 영혼의 통로를 악에 대해서 닫고 지켜야만 한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승리자들이 되는 것은 오직 끈질기고 오랜 노력과 혹독한 훈련, 그리고 단호한 투쟁을 통하여서 되는 것이다” (교회증언 3권, 324).

    만일 우리가 과거에 써왔던 사단의 특유한 몇몇 책략들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수행하고 있는 사단의 전술들을 아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우리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들이 우리를 위한 교훈과 경계로써 기록되었다는 것을 읽는다. 기록은 그들이 애굽을 떠난 것과, 광야를 통과하여 가는 여정과. 약속된 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말한다. 거기에는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과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과의 사이의 직접적인 대조가 나온다.
    우리는 사단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하여 이기든지 지든지 필사적인 최후의 공격을 펴서 바알브올에서 불법을 일삼도록 함으로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던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부도덕적인 이방 여인들인 모압 여인들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시원한 바람처럼 몰려들어와 수천 명의 이스라엘 남자들을 죄악 가운데 빠뜨렸다. 하나님께서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셨다. “이는 그들이 궤계로 너희를 박해하되……브올의 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 (민수가 25:38).
    그대들은 오늘날 사단이 현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깜짝 놀랄 만한 방법의 유사점을 발견하지 못하겠는가? 뻔뻔스런 나체로 성적인 방종을 자극시킨 사단의 간사한 꾀를 통하여 마지막 필사의 노력이 이미 남은 교회의 도덕적인 고결성을 뒤엎어버리기 위해 감행되었다. 이스라엘 진영에 염병이 덮칠 때에 있었던 심판으로 24,OO0명이 죽었다. 그들은 세상 여자들의 이국적 미에 압도되어서 약속된 땅에 들어가는 특권을 잃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러한 육욕적 정욕의 재현에 이끌려서 멸망당할 것인가? 바울은 바알브올에서의 참혹한 광경을 되새기면서 이러한 호소를 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1, 12).
    단 한명의 남성이나 여성도 지금 세대에 편만한 세상적인 영화를 대항할 큰 힘을 가졌노라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진영에 침입한 모압 여인들의 아름다움에 이스라엘인들의 감각이 사로잡힌 것과 같이 현대 이스라엘의 가정들도 총천연색으로 고안된 텔레비젼의 나체와 육욕적인 정신의 현란한 유혹에 의해 침입당하고 있다. 자기가 섰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슬프게도 이미 타협하고 말았으며, 심지어는 자신들이 타협했다는 사실마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유행하는 옷 벗어 버리기 행렬은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방어벽들도 이미 무너뜨려 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숙하지 못한 복장의 감각적인 호소에 굴복해 버렸는지는 오직 시간과 영원만이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바알브올에서의 사건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덕관에 그렇게까지 대담한 계획적인 공격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궁금하게 여긴다. 미니스커트의 고안자인 메리 퀜트(Mary Quant)의 의기양양한 공언을 살펴보라. 이 패션 디자이너는 자신의 작품의 목적인 (불법적인) 성행위가 오후에 더 많이 성행하게 하기 위해 미니스커트를 창안했다고 말했다.그녀는 면담에서 오늘날의 여성은 어떤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성적인 피조물”. 그녀는 자신의 성을 감추려 하는 수줍어하는 태도 대신에 자신의 성을 과시한다. 그녀는 그렇게 입고 오늘날 말한다. “나는 섹시하다. 나는 남자들을 좋아한다. 나는 인생을 즐긴다.” 라고. 그렇게 말한 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대담한 진술을 했다. “짧은 옷들은 남성을 유혹하기 원하는 여성들을 상징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날 발람의 영리한 성 유혹 작전에 휘말려들 정도로 순진하고 바보 같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메리 퀜트의 공언 앞에서 자신들의 미니스커트를 유쾌하게 걸쳐 입은 수천 명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단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첫 번째 증거 가운데 하나는 옷을 벗어 제치는 것이다. 우리는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거라사 지방의 무덤 곁에서 쇠사슬에 매여있었던 귀신들린 가련한 사람에게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오래 옷을 입지 아니”(누가복음 8:27)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후에 그가 악한 영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을 때 그는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 아래 앉”(35절)았다고 묘사되었다.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았을 때 처음으로 보인 그의 행동은 분명히 다시 옷을 입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정신이 올바로 박혀있지 않은 사람들만이 옷을 입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뜻을 명확하게 내포한다.
    우리는 나체에 대해 열광하는 저 군중들이 아마 현대판 마귀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렇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정신적 및 정서적 질병의 통계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올바른 정신이 박혀있지 않다고 하는 결론에 대해 지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은 헐리웃의 흥행자들과 음탕한 작가들, 외설적인 열광자들, 괴상망칙한 디자이너들에 의해 오늘날 이용당하고 있다. 그들은 인류에게서 모든 정숙함과 단정한 것들을 모조리 쓸어 내려고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마귀적인 작품들로 인류의 정숙함에 대해 몸서리칠 정도의 모욕으로 제거하려 하고있다.
    유명한 신문 논설위원인 포올 하비는 범죄 통계와 짧은 치마의 유행이 놀랄 정도로 정비례하고 있다고 시사했다. 미연방 조사당국의 범죄 기록철은 강간 사건의 수가 치마 길이가 짧아지는 것과 거의 정비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미 50개 주에서의 법률 강화위원들의 여론은 미니스커트와 성범죄와의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모두 동의했다. “짧은 치마가 성범죄를 몰고 오느냐?”는 질문에 대한 법률 강화위원들의 반응은 91%가 “그렇다” 는 답이었다. 한 큰 도시의 청소년 교도관이 종합해서 본 견해에 의하면 “개인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어떤 성범죄는 그들의 감각적 감지력에 의해 일어나며, 어떤 여성들의 짧은 복장은 그러한 성범죄를 유발시킬 수 있다” 고 말했다.
    캐나다 토론토의 어떤 신문에 나오는 기사는 캐나다의 경찰들이 미국의 보고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을 확증한다. “91%의 토론토 경찰들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성이 그녀의 정숙한 자매보다 강간의 희생자가 되기에 훨씬 쉽다.” 고 토론토의 한 연사가 “Tuesday”라는 일간지에서 말했다. 미니가 여성의 패션에 도입된 1964년 이래로 미국에서의 강간사건은 68%가 증가했으며, 영국에서는 90%나 증가했다고 경찰 전용 출판물인 “The Law Officer”는 말했다. Toronto’s Mora1ity Squad의 죠지 고우 고문관(Sgt. George Gough)은, “짤막한 복장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여성에 대한 범죄를 유발시키는 요소임에 틀림없다. 밤거리에 차에서 내린 후에 어떤 남자에 의해 쫓기고 있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에게 있어서 그녀의 무엇이 그 남자를 유혹했는지에 관해서는 별로 의문을 제기할 것이 없다”고 말했다.
    뉴욕시에 있는 툼스 교도소 (Tombs Prison)의 의사인 루첸스타인 박사(Dr. Luchenstein)는 12년이란 기간 동안 17만 명의 수감자들을 상대로 일했는데, 그는, “소위 정욕으로 인한 범죄가 놀랄 정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내 생각에는 주요한 원인이 제거되기 전에는 그 증가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한마디로 말하면 그 주원인은 현시대의 복장 스타일이 정숙하지 못한 데 있는 것 같다. 정숙하지 못한 복장은 그러한 복장을 한 사람이 얼마나 순진한지와는 관계없이 범죄를 선동하는 직접적인 원인이다”고 말했다.
    남자라고 하는 친구들은 어쩔 수 없는 성의 포로들이라고 이 데이터로부터 결론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는 이 말을 서둘러 하고 싶다. 모든 사람은 개인적인 결정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각 사람은 자신의 판단과 의지력으로 선택할 책임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유혹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순종하느냐 거절하느냐에 대한 잘 숙고된 행위에 의해서 서든지 쓰러지든지 하며, 흥분시키는 복장의 영향력은 성령에 의해 강화되지 않은 마음들을 습관적으로 지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