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죄이다!
저자: 데니스 프리비
문제는 죄이다. 죄를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간의 타락한 본성 자체를 죄라고 간주한다면, 죗된 본성이 제거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까지 우리는 죄를 정복할 수 없고 죄에 대한 승리와 극복은 허망한 환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를 버리고 승리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과 인내와 투쟁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따라서 참된 회개와 거듭남은 우리 가운데서 희귀한 경험이 되며 죄를 정복하고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시대의 늦은비는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져 가게 된다. 또한 우리가 타락한 본성 자체를 죄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일환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본성을 취하셨다고 말하게 되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타락한 우리 인간의 모본으로 강조하기 보다는 우리의 죄에 대한 대속으로만 주장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죄에 대한 정의를 화잇 부인처럼, 요한 일서 3장 4절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니라”에서 찾는다면 우리는 죄짓기를 중단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필요성과 중요성과 가능성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의 죗됨과 연약함을 더욱 더 깊이 느끼게 됨으로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간구해야 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고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의 보장인 그리스도의 피와 희생에 대해서 진정한 감사의 마음이 깊이 우러나오게 된다.
새로운 빛을 주장하는 신신학의 추종자들은 죄에 대한 정의를 “타락한 본성”,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어지는 것”, 유혹을 받았을 때 옳지 못한 생각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 자체가 죄임” 등으로 나타냄으로써 죄를 정복할 수 없는 난공 불락의 성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낙담케 만들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가르침을 구원에 있어서 불필요한 구시대의 율법주의적 유물로 취급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선을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로 유도하는 대신에 역사적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신앙을 일반 개신교회의 오류가 섞여 있는 믿음과 뒤섞어 놓고 있다. 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들을 죄짓고, 용서 받고, 죄짓고 용서 받는 영적 악순환 속으로 유인하여 결국에는 세속과 죄와 배도의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마음과 양심의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로 입적시키고 있다. 우리 모두 죄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탈출하여 유혹과 시험이 다가올 때마다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우리의 양심과 귓전에서 속삭이시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을 좇아 죄와 유혹에 대항하여 싸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기원한다. –편집실–
1990년도 1, 2월에 에드벤티스트 리뷰지에 게재된 기사(미주 교회지남에서 “대속인가? 모본인가?”라는 제목하에 몇 차례에 걸쳐서 번역 연재하였었음)를 읽고 난 재림교인이라면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여섯 번에 걸쳐서 연재되었던 씨리즈에서 놀만 걸리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의 기본 교리에 있어서 마치 바퀴의 철사들로 만들어진 살들에 비하여 바퀴의 중추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 두개의 살이 휘어져 있다고 해도 괜찮을 수 있으나 바퀴의 중추가 중심을 잃으면 그 바퀴 자체에 큰 문제가 생기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안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교리적인 난처한 궁지이다.” 1990년도 1월 18일 에드벤티스트 리뷰지.
얼마나 잘 표현한 말인가! 예수는 누구이며, 그분께서 무엇을 성취하셨는가를 잘못 오해하게 되면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복음, 그리고 교회의 선교 목적을 왜곡케 만드는 것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목적과 복음의 중심부를 다룰 때에는, 비록 근본적인 문제점이나 이슈를 논하는데 있어서 혹 투쟁적인 성격을 띈다고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회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죄의 문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하여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와 진정한 문제는 죄란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우리의 결론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걸리 박사는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에 대한 서로 상이한 두 견해는 “죄란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죄에 대한 정의와 그리스도의 인성 사이에 존재하는 뗄 수 없는 관계를 인정하였다(1990년 1월 25일자 에드벤티스트 리뷰지).
우리는 이 문제의 중요성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죄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우리의 믿는 바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칭의와 성화가 이루어지는 우리의 이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또한 성품의 완전과 죄짓지 않는 생애가 성경적, 합법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극단적인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라는 책에서 리챠드 테일러 목사는 수년 전에 이미 이 점을 인식하였다.
“죄에 대한 질문은 제일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구속의 경륜에 관계된 문제이며, 이 문제야말로 다른 모든 교리들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설명케 만드는 질문이다. 더 나아가서 죄에 대한 정의는 다른 가르침들의 성경적 정확성을 조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논리적인 측정표가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교리를 중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학적인 문제들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많은 아마도 거의 모든 기독교 신학 속으로 들어온 오류들의 출처를 찾아보면 결국은 죄에 대한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연유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사람의 죄에 대한 개념이 빗나가 있기 때문에 그의 전체적인 믿음과 신앙의 방향이 잘못 틀어져 버리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잘못된 전제에서 비롯되고 시작된 논리는 끝없는 잘못된 결론들의 연속을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다른 어느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가질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법과 구속에 대한 신앙과 신조 가운데에 나타나게 된다…. 죄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갖자고 주장하는 기본적인 진리에서 멀리 떠나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Beacon Hill 출판사 1945년 pp. 9-11.
이 주제가 그렇게 혼란을 일으키는 이유 중의 하나는 단순한 정의의 결핍 때문이다. 죄의 영향과 죄 자체에 대한 구분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언급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아담의 죄는 이 지구상에 많은 영향들을 미쳤다. 죽음이 인간과 동물과 식물계를 지배하고 고난과 고통이 우리의 날들을 채워가며, 자연계는 이빨과 발톱으로 장악하는 악한 생리를 드러내고 있으며 지구 자체는 죄의 저주인 폭력과 비극으로 가득 차 있다. 죄의 영향이 극도로 치명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누구도 죄의 영향에 대하여 개인적인 죄책이나 정죄를 부여 받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식물이나 동물이나 인간도 죄의 치명적인 영향 아래 갇혀 있다고 해서 죄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죄에 대한 개념은 죄책과, 정죄와,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됨과 심판과, 둘째 사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혹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토의할 때 우리는 죄의 영향이 아니라 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우주로부터 죄의 영향을 모두 제거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적인 복음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죄란 무엇인가, 또한 죄는 어떻게 용서 받는 것이며, 어떻게 지금 정결케 됨을 받을 수 있는 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요즈음의 토론하는 주제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대한 문제이다. 타락한 인성이 죄 그 자체의 일부분인가? 아니면 죄의 영향과 결과 가운데 하나인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우리의 결론들은 바로 이 간단한 질문에 대한 해답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원죄
우리는 놀만 걸리 박사가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밝혀 준데 대해 빚을 지게 되었다. 죄를 행동과 본성들로 표현한 세가지 주된 정의를 나열하고 나서 걸리 박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죄란 이 세가지 정의들 모두를 포함할 수 있을까? 죄됨과(본성, 깨어진 관계), 죄들(행동)을 원인과 결과로 볼 수는 없을까?” 1990년 1월 25일자 에드벤티스트 리뷰지.
다른 말로 해서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그 자체로서의 죄는 근본적인 죄이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법을 어기는 그 다음의 죄로 인도한다는 논리이다. 걸리 박사는 더 나아가서 이것은 어거스틴(중세기의 천주교회 신학자-역자주)의 죄에 대한 견해라고 설명을 한다. 이러한 견해에 있어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성적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요, 이미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적으로 죄인인 인간은 죄의 행위를 필연적으로 범할 수 밖에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 그는 부가되는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이 된다. 아마도 이러한 죄에 대한 견해의 가장 정확한 설명은 수세기 전에 요한 칼빈이 그의 책 “기독교 신앙의 설립” 에서 설명하였다. “모든 사람은 원래부터 부패하게 되었다…. 죄의 책임은 본성에 있는 것이다…. 어린 아기까지도 그 어머니의 태 속에서 고통할 때부터 그는 정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인간들은 포악하게 태어난다….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죄인이다.” 2권, 1장 pp 5-10, 27.
이것이 올바른 견해라고 믿는 사람은 죄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가지 계속되는 것이라고 믿어야만 한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을 받고 태어나서 출생 이후로 계속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여러 가지 종류의 죄짓기를 선택하지 않고 거절할지라도 우리의 근본적인 죄는 항상 우리 생애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출생으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적으로 죄를 지으며 또한 우리의 계속적인 죄책 때문에 계속적인 용서를 받아야만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걸리 박사가 말하는 이러한 식의 죄에 대한 이해는 초기 재림교회의 신학도 아니며 또한 몇가지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어린 아기가 자기의 개인적으로 타고난 타락한 본성에 대해서 어떠한 죄책이나 용서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개인적인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 누가 아기를 위하여 선택하여 주는가? 우리가 침례의 물 무덤에서 올라온 후, 우리는 새로 태어나기 이전과 꼭 같은 죄인으로서 남아있게 되는 셈이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본성적인 원래의 죄가 회개함으로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혜의 시간이 끝난 후에, 용서하는 은혜의 향로가 땅에 던진 바 된 후에도 우리는 본성적으로 계속 죄를 짓게 된다는 말이 된다. 비록 우리가 죄짓기 보다는 죽기를 선택한다 할 지라도 우리는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할 때와 다를 바 없이 우리의 본성적인 근본 죄 때문에 죄가 있다고 선고되는 것이다. 또한 은혜의 시기가 마쳤을 지라도 그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계속적인 죄에 대한 용서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다. 죄인들을 위한 은혜의 역사가 끝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중보자 없이, 죄에 대한 중보의 기도가 없이 서게 될 때에 어떻게 용서의 은혜가 공급될 것인가? (영문 초기문집, 48, 71; 대쟁투 614; 남은 무리들 403페이지 참조).
이러한 칼빈주의식 죄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는, 우리가 타락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비록 “우리는 죄없는 생애를 살 수 있다”라는 영감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리뷰 앤 해랄드 Vol. 4, 395; In Heavenly Places, 146 참조) 죄에 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기독교 역사에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재림교회가 이해하는 영육간의 대쟁투에 대한 견해와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것이다.
걸리 박사가 그의 이론을 위하여 제시하는 기본적인 성경적 증거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아담과 인류의 비교이다. 이 비교에 근거해서 그는 말하기를 “이 죄의 상태, 혹은 죄의 본성은 처음 의식적으로 죄를 알고서 짓기 훨씬 이전에 이미 구원의 필요성을 요구하고 있다…. 죄와 죽음을 개인적인 죄지음의 결과로 국한 시키는 자들은 이러한 분명한 비교를 간과하는 것이다.” 1990년 1월 5일 에드벤티스트 리뷰지.
이것은 참 이상한 결론이다. 로마서 5장의 성경절 내용은 전혀 반대의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전체장의 명백한 골자는 18절에 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걸리 박사는 우리가 이 성경절의 평행법을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그는 가장 분명한 평행을 간과해 버렸다.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은 참으로 정죄함을 받았다. 그의 반역 때문에 모든 사람은 참으로 정죄함을 받았다. 그의 반역 때문에 아담은 즉시로 죽음(둘째 사망)을 당하게 되었고 모든 인류가 같은 정죄와 죽음을 당면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성경절의 절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아담에 의하여 정죄당한 같은 모든 사람들의 형벌을 바꾸어 주신 사실을 말하고 있다. 다른 말로 말해서, 아담에 의하여 가져오게 된 집단적인 정죄는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집단적인 칭의에 의하여 취소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대속의 죽음 때문에 모든 사람은 아담을 통하여 이르러 오는 정죄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영감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온 인류를 하나님께 은총을 입을 수 있도록 회복시켰다”라고 한다(영문 가려뽑은 기별1권, 343). E.J. 와그너 목사는 백년전에 이 성경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정죄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처럼 칭의가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 값없는 선물이 모두에게 임한다.” 영문 시조, 3, 12. 1896.
이 로마서 5장의 곧바른 이해는 수세기의 기독교 역사의 긴 기간 동안 그리스도인들을 잘못 오도해 온 원죄설의 잘못된 개념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장은 절대적으로 죄인들은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실상은 이 성경절이, 우리는 아담이 이 세상에 가지고 온 어떠한 정죄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인류의 참된 머리가 되시기 때문이며, 비록 우리가 죄의 모든 영향을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날 지라도 우리는 죄책을 가지거나 정죄 받아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걸리 박사는 구약 성경중에 원죄설을 명확하게 지지하는 성경절이 시편 51편 5절에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그 성경절 자체가 죄인이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죄악 중에 출생하였으며 죄중에 잉태”하였다는 것은 단지 아담의 죄의 영향이 인류에게 임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엇이 죄를 구성하며 개인적인 죄책을 만드는지에 대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아담의 죄악 때문에 모두 다 죄의 본성을 가지고 죗된 환경 가운데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죗된 본성 자체가 죄를 구성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훨씬 명확한 증거를 얻어내야만 한다.
걸리 박사가 가장 크게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은 말이다. “만일 아기가 출생하기 몇시간 혹은 몇일 후에 죽는다면, 그 아기가 비록 한번도 계명을 범한 적이 없을 지라도, 그 아기는 여전히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죽는 아기들은 구세주가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1990년 1월 25일자 리뷰지.
로마서 5장은 아기가 둘째 사망을 당한다는 그의 논리를 완전히 파괴하고 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아기들은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말은 요즈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신신학적 사상을 역설할 때 많이 사용되고 있는 상투적인 문구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로 인하여 전 인류는 아담의 죄 때문에 얻는 자동적인 정죄로부터 해방을 받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계속적인 죄의 결과로 받는 선천적, 후천적인 영향을 가지고, 예수 재림시에 재창조의 구속의 국면이 이를 때까지 이 영향력들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은 진실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되는 구속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기도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말은 개인적인 죄의 책임으로부터 개인적인 용서를 베푼다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아기도 구세주가 필요하다. 고통하는 지구도 구세주가 필요하다. 장님과 앉은 뱅이도 구세주가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죄와 죄의 책임의 의미에서 필요한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는 죄의 영향과 죄 그 자체를 혼돈해서는 안된다.
걸리 박사가 언급한 바대로, 중점적인 문제는 타락한 본성이 죄의 영향이냐 아니면 죄 그 자체냐에 있는 것이다. 죄의 문제에 있어서 성경 가운데 가장 명확한 빛을 던져 주는 성경절 중 하나를 가지고 그 질문을 해답해 보도록 하자. 요한일서 3장 4절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죄는 불법이니라,” 거기에 “죄를 짓는 자마다…”라는 말이 붙어 있다. 이 말씀 전체는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하는 우리의 선택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법을 범하기 이전에 선제하는 계속적이며 필연적인 죄의 상태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나 적용이 없는 것이다.
엘렌 화잇 여사는 여덟 번이나 각기 다른 경우 다음의 언급과 같은 말씀들을 하셨다.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법을 범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시조, 2권, 363, 가려 뽑은 기별 1권, 320; 재림교회 성경주석 7권, 951. 대쟁투, 493. 등등).
만일 요한일서 3장 4절이 참으로 우리에게 가장 명확한 죄에 대한 정의라면, 다른 종류의 죄에 대한 정의를 지지하고 재해석하기 위하여 애매한 다른 성경절들을 찾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찾을 필요가 과연 있겠는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이미 그들이 어거스틴과 같은 철학자가 만들어낸 비 성서적인 정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 논리에 맞지 않는 신조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죄에 대한 다른 정의를 찾기 위하여 분명치도 않은 성경절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떤 이들이 영혼 불멸설과 일요일 신성설을 지지하기 위하여 뜻도 맞지 않는 성경절들을 억지로 재해석하여 가르치려고 애쓰는 비슷한 행습이 아니겠는가?
로마서 14장 23절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성경절 내용은 의심과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둘 다 분명히 알고서 죄를 선택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 4장 17절은 우리에게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죄는 아는 것과 선택의 결과로 제한되어진 것으로 말해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죄를, 지을까, 말까 하는 선택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계속적인 어떤 상태나 유전으로 물려받은 타락한 본성 그 자체라고 말하는 언급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본성이 죄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우리가 죄 짓기를 선택하지 않을 때에라도 우리는 죄를 짓고 있다라는 말이 된다. 죄는 필연적인 것이고, 계속적인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은 진짜 죄(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신앙적 감각을 무디게 하여서, 사소한 죄악들은 단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큰 죄에 의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하나의 표현들에 불과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죄짓는 것을 정상적인 생활, 아니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한 부분으로 용납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깨어진 관계, 또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정의한다. 이사야 59장 2절은 죄와 분리의 관계를 묘사해 주고 있다.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죄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요, 그분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지 개어진 관계 자체가 죄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엘렌 화잇은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실과를 먹은 것이 “하나님의 불변의 법을 범한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게 한 것이다”라고 정로의 계단 33페이지(영문)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 죄는 참으로 어떠한 상태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상태는 하나님을 반대하는 선택의 결과로서 뒤따르는 것인데, 그러한 상태는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는 한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죄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용서는 불가능하고 우리는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이다. 죄의 상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요, 우리가 현재 어떻게 가르침을 받고 있던지 간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필요한 상태는 아닌 것이다.
타락한 본성은 죄의 영향이 아니라 죄 그 자체라고 증명하라고 애쓰는 자들은 아직 그 입장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몇 가지를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배고픔과 목마름과 피곤함과 고통과 아픔과 죽음에 종속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죗된 부모에게서 태어나 죄의 본성을 받고 죗된 환경 속에서 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책임을 가지고 태어난다거나, 혹은 타락성 때문에 정죄를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우리가 타락한 본성을 포함해서 모든 죄의 영향들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죄의 책임을 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타락한 세상에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를 범하도록 기울어지게 되었다. 죄의 행위는 그 행위가 일어날 때가 아니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는 생각에 머물러 있거나 그러한 동기를 품을 것을 선택하였을 때이다. 우리가 죄를 짓겠다는 선택을 회개하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죄의 상태로 인도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와 방황을 초래하게 된다. 죄의 상태는 그 영혼이 밤처럼 어두어질 때까지 반역과 흑암을 증가시키는 길로 인도한다.
원죄설과 재림신앙
어드밴스트 리뷰지에 실린 그의 기사(1990년 1월 25일자)의 거의 끝 부분에 가서 놀만 걸리 박사는 엘렌 화잇의 글을 몇 가지 인용하며 인간의 본성은 아담의 죄로 인하여 타락되었으며, 그러므로 결론 짓기를 모든 사람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나면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가 인용한 화잇 부인의 모든 글들은, 사람은 그 깊은 본성 속에 아담의 죄의 영향들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이 본성적으로 죄인이라고 말하는 사상은 성경에서 온 것도 아니요, 재림신앙에서 온 것도 아니요, 그것은 바로 바벨론에서 온 사상인 것이다. 그 뿌리는 멀리는 로마 천주교회의 어거스틴에게 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사상은 루터와 칼빈의 서적들을 통하여 개신교 주류파들에게 스며들어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복음주의 개신교회들은 죄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옹호하게 되었고 또한 그들은 이러한 견해가 재림교회의 사상이 되도록 무척이나 애써오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그러한 노력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아연 실색하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한 복음주의 개신교회들의 사상은 오늘날 우리 교회의 고위 신학자들과 여러 분야의 고위층 행정자들에게 있어서 깊이 스며들었다.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로 재림교회의 신학에는 그 위기가 점점 깊어만 가게 되었다.
복음주의 자들의 죄에 대한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재림교회가 오랫동안 고수해 온 입장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본성을 취하시고 그러한 위험스러운 본성으로 죄를 승리하시고, 죄의 치명적인 영향에 사로잡힌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변화시키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피할 길을 제시해 주시고 계시다는 사상을 용납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재림신앙은 오랫동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주와 동시에 모본이 되신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우리 중의 많은 사람들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 복음 주의자들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만일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실 때에 진실로 우리와 같은 본성을 취하셨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믿게 된 것이다.
단순하고 곧바른 복음을 대신하여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유전법칙을 어떤 부분은 받았으나 반면, 어떤 부분은 유전의 법칙에서 제외되셨다고 설명하는 복잡미묘한 고안을 꾸밀 수 밖에 없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죄와 유혹에 대해 저항하고 승리하는 면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소유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가르침이 교회를 휩쓸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교회 안에서 완전한 순종과 그리스도의 타락한 인성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말하는 자들은 “이상하고 위험스런 사람들”로 취급받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죄에 대한 새로운(?) 재림 신앙은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완전히 죄를 승리하는 가능성에 대한 의미 심장한 말을 하기에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비 재림교회의 사상과 타협하기 위하여 우리의 분명함과 단순성이 희생을 당한 것이다. 교회는 남들의 신학적인 인정과 용납을 추구함으로써 배도의 길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지불한 대가는 너무나도 값 비싼 것이 아니었는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요일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