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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들인 태풍 (Reaping The Whirlwind)

 

제7장 신신학이 감행한 공격

    “신신학”이 가지를 쳐나간 첫 번째 근본적인 오류는 원죄에 대해 중세기의 어거스틴이 설정한 교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죄가 입혀졌다는 이론에 근거하여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은 물려받은 죄뿐만이 아니라 천국에 도달하기에는 너무도 철저하게 부패한 성정을 가졌으므로 결코 죄를 안 지을 수는 없다는 가정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범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유전인자와 홀몬을 가진 탓으로 돌려 문제를 합리화시키는 기초를 놓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신신학이 감행한 첫 번째 공격입니다.
    이런 식으로 감행된 공격은 또 다른 진리의 곡해를 초래했습니다. 만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그의 죄를 물려받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도 탄생하시자마자 그 죄를 물려받으신 것이 됩니다. 물론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분은 아무도 구원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분 자신이 죄인인데 어떻게 남을 구원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천주교회는 동정녀 마리아는 아담의 죄를 물려받지 않았다는 무염시태의 교리를 창안함으로 그 문제를 말끔하게 처리해 버렸습니다. “신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마리아의 타락한 속성 대신에 아담의 타락하지 아니한 속성을 지니고 태어나셨다는 천주교의 입장을 받아들인 옛날 개신교회의 주장을 단순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은 수많은 성경절의 진술과 상반될 뿐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이 죄를 이길 희망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 태어난 사람 중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떤 인류도 완전한 순종의 모본을 보인 경우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타락한 인간들의 유혹들에 감히 직면하려 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인간이 그러한 유혹들에 대항하여 승리 얻기를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한 교리는 하나님의 율법이 어쨌든 순종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것이라는 사단의 제의에 박수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신신학이 감행한 두 번째 공격입니다.(1)
    어떻게 이러한 두 가지 오류가 율법에 대항하여 감행하는 “신신학” 의 계속되는 공격과 연관을 맺고 있을까요? 매우 이상하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그 속성에 있어서, 도움이 심히 필요 되는 인류와 아주 동떨어진 분으로 묘사하면서도 그분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속죄의 죽으심을 죽으신 것을 통해 그분의 순종을 포함한 그분의 거룩한 생애의 모든 공로들을 죄인들에게 입혀주실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매우 훌륭한 신학처럼 보이지만 좀 더 유의하여 잘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이들 새 빛의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이 입혀주시는 공로를 가리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고 부르고 있지만 성화의 문제는 이 은혜의 보고에서 고의적으로 특별히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주장하기를 순종은 구원의 요구 조건에서 완전히 분리된 것이며 오직 입혀 주시는 칭의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데 요구되는 유일한 “행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의 경험에 있어서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감행한 세 번째 공격입니다.(2)
    입혀주신 의에 초점을 맞추면서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님의 속죄의 죽으심이 구속사업을 마치신 것으로 여기며, 그런고로 그분께서 온전한 순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하는 전부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돌아가심이 죄인을 위한 속죄사업을 마치신 것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의 돌아가심은 온전한 희생제물이 되신 것이며 흠 없는 어린 양을 드리는 일은 영원히 끝났지만 최종적인 구속사업은 그분의 보혈이 지성소에 뿌려져서 죄악의 기록들이 도말 되기 까지는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이 땅의 성소에서 수행되던 표상을 성취하시려고, 그분 자신의 피로 봉사하시기 위해 하늘 성소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그 사업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 사업에 포함된 것이 무엇입니까? 왜 그 사업이 필요 됩니까? 어떻게 그 사업이 지상성소에서 수행되었던 사업을 능가하는 것입니까?
이 점에 있어서 주요한 초점은 지상성소의 봉사는 오직 죄에 대한 용서만을 제공할 수 있었지 죄짓기를 멈추게 하는 능력은 결코 제공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린 양과 염소들을 제사로 드리는 것이 어떤 사람을 결코 완전케 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히 10:1) 그와 반면에, 바울은 하늘 성소에 계신 참 대제사장이 죄들을 제거하시고 사람들을 온전케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여기에 하늘에 계신 예수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업이 그렇게도 필요됨이 나타나 있습니다. 죄들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기록책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애로부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이 요구된다는 말 입니다. “신신학”은 구속사업이 십자가에서 끝났으며, 이제는 더 이상 매년마다 “지성소”에서 하는 하늘의 대제사장의 봉사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성도들을 성화시키는 어떠한 필요나 성화나 완전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 모두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두째 칸에서의 봉사를 부인함으로써 “신신학”은 우리의 주의를 법궤의 속죄소 밑에 자리한 율법의 높여진 위치에서 돌려버립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경험에서 성화가 필요 없다고 하는 저들의 주장이 어디에서 기인 했는지를 아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율법은 구원의 원대한 계획에 있어서 아주 미미한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대항하여 신신학이 감행한 네 번째 공격입니다.
    그러면 하늘성소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완전케 되는 계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대부분의 “신신학자들”은 육체 가운데 있으면서 죄를 완전히 이기고 승리한다는 가르침을 부인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란 그들이 태어날 때 함께 가지고 태어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야 그들이 변화되어서 모든 타락한 몸과 마음이 제거된다고 그들은 믿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견해를 볼 때에 왜 성화의 문제가 그들에게 어설프게 취급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만일 모든 죄를 극복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사람이 정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어떤 죄들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셔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 집니다. 그렇지만 어떤 죄가 얼마만큼 용납된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이길 수 없는 죄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어떤 사람이 자신이 좀 더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죄를 극복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어떤 사람이 어떤 특정한 종류의 죄 짓기만을 멈추거나, 혹은 그가 짓는 죄들의 양을 감소시킨다는 언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에게 ”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녀에게 그녀가 범하고 있는 간음의 양을 어느 정도 감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제가 어떤 죄들은 극복하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제 생애 가운데서 그 죄들을 짓지 않으려고 구태여 애쓰지 않을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 죄를 용납하실 것이라고 제 자신을 속도록 내버려 둘 것입니다. 또한 저의 가련한 인간적 속성은 제가 포기하기 싫은 어떤 죄를 극복할 수 없는 죄로 여기게 되기가 얼마나 쉽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주시는 능력 안에서 어떤 죄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고 결론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아차리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죄들은 이길 힘을 주실 수 있고 또 주실 것이지만(아마 뿌리 깊이 박히지 않은 죄들은), 또 어떤 죄들은 이길 힘을 주실 수도 주시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논리 정연한 생각 같이 보입니까? 그 모든 개념은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상반됩니다. 죄를 취급하는 유일한 길은 죄짓기를 멈추고, 죄를 내버리며, 그 죄에 대한 승리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 죄를 지어야만 한다는 상식 밖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부인일 뿐만 아니라 사단이 옛날부터 일삼아 온 거짓말에 찬성표를 던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신학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항하여 감행한 다섯 번째 공격입니다!(4)

(1)~(4)에 관한 더 자세한 기록을 알기 원하시면 영어로 표기한 책은 Amazing Facts에서, 한글로 표기한 책은 미주 시조사를 통해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1) Christ’s Human Nature
(2) Satan’s Confusing Counterfeits
(3) 휘장 뒤의 피
(4) Is It Possib1e to Live without Sin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