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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지성소 – 인침의 경험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다. 지성소 안에는 시은좌가 있다.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인 쉐키나가 있다. 지성소는 하나님과 죄인이 만나는 곳이다.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 출애굽기25:20-22.

    지성소는 하나님의 성소의 목적지요, 마지막 결론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성소의 과정들 즉, 성소뜰의 칭의의 경험과, 성소 안의 성화의 경험들을 통과한 것은 지성소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인 쉐키나 앞에 설 수 있게 되기 위함이었다. 죄인이 하나님의 광채 앞에 서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하나님의 고안하신 방법을 따라 해결하였기 때문이다. 지성소는 심판을 의미한다. 죄로 인하여 에덴에서 쫓겨난 인류가 다시 에덴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쫓겨 나도록 만든 그 죄와 우리가 더 이상 관련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사하고 검토하는 일이 선재해야만 한다. 죄와 반역으로 인하여 친구들 삼분의 일을 잃고 그토록 가슴 아픈 하늘의 대 전쟁을 치르어야 했던 하늘 천사들과 우주 거민들은, 죄와 반역이라면 아주 진절머리가 나도록 지긋지긋해 하게 되었다. 그러한 수 많은 천사들이 하늘 조사 심판석에 배심원으로 앉아있는데, 과연 우리가 적당하게 지나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정확하게 조사와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죄 없는 하늘로 되돌아가 구원을 얻기에 안전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저들의 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보혈로 그저 간단하게 용서해 주시고 씻으셔서 모두 다 구원해 주실 수가 있다면 왜 이렇게 오래동안 죄의 역사를 길게 끌고 계시며 재림을 지체해 오셨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정말로 죄를 슬퍼하며, 죄를 버릴 마음이 있는지에 대하여 조사하시고, 또한 아울러 그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정말 죄를 미워하여 버리기로 작정하였으며, 그 증거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죄를 이기고 있는지에 대하여 심판하여 보셔야 하는 것이다. 받은 빛에 대한 온전한 순종은 믿음의 증거이다.
    우리에게 조사 심판을 좀더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국의 한가지 법조항이 있는데, 우리는 그 법을 “인터라커토리 언도법(Interlocutory Judgement)” 이라고 부른다. 그 뜻인즉 다음과 같다. 예를들어 한 부인이 이혼을 신청해 올 때에 판사는 그 부인에게 이혼을 허용해 주되, 2년동안의 유예 기간을 주면서, 그 유예 기간동안에 그 부인은 언제든지 마음을 바꾸어 먹고 다시 본 남편에게로 돌아갈 수가 있다는 판결인 것이다.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는 즉시 그 때로부터 그 조건적인 이혼은 무효가 되고 다시 이전의 상태로 원상복귀 하게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용서와 구원은 우리의 마음과 품성이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하는지에 대하여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있기 전까지 항상 조건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는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서도 모든 일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조사 심판은 오히려 천사들과 우주 거민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의롭고 공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어 보이시기 위하여 각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펼쳐서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행위와 동기와 생각들을 기록한 책들을 펼치시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를 알게 하실 때,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는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라는 찬송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요한계시록 19:1,2).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지만 행함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도록 하자. 하나님의 심판은 자비로우신 심판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기 위하여 심판을 베푸시는 것이지 멸망할 자들을 찾기 위하여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가 “시온은 공평(judgement-심판)으로 구속이 되고 귀정한 자는 의로 구속이 되리라” 라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통하여 구속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1:27).
    성소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죄를 고백하였을 때에 그들의 죄가 용서를 받아 왔는가? 그렇다. 그들은 확실하게 용서를 경험해 왔다. 그렇다면 왜, 다시 대속죄일날 죄를 다시 조사하고 씻어야 하는 일이 필요한 것인가? 왜냐하면 조사심판 전까지는 죄의 용서가 조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 마음이 변하고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그 죄인이 아직도 여전히 진정으로 용서 받고 싶어하는 지를 조사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하기 위하여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로우신 심판을 우주 앞에 펼쳐 놓으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아울러서 죄와 반역의 역사를 마감하기 위하여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의 품성을 조사하여 확정짓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한가지 알고 지나가야 할 사실은, 진정으로 용서받은 상태는 죄를 승리하는 상태라는 사실이다.
    죄의 용서와 죄의 도말은 엄연히 다른 사실이다. 다음 6장에서 설명할 죄의 도말에 관한 내용을 읽는다면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속죄일에 죄를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이 없이는 죄의 도말이 있을 수가 없고 죄의 도말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이 지구의 죄의 역사를 끝내실 수가 없는 것이다.
    본인이 본 성소론을 기록하는 이유는 성소의 각 기구들이나 자세한 분야들을 설명하기 위함보다는 하나님께서 성소 제도를 통하여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청사진을 우리의 경험적인 면에서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소의 구조를 간단하게 언급하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법궤”는 “언약궤”또는 “증거궤”라고도 불리우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기초로 해서 당신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셨던 까닭이라 하겠다. 바로 그 법궤 위를 “시은좌”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당신의 보좌의 기초는 하나님의 십계명인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하는 경험이 중생의 경험이요, 정죄함에서 벗어난 경험인 것이다 (로마서 8:4). 하나님의 은혜는 율법을 없이하고서 베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없이 은혜를 독립적으로 행사 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집행유예 기간을 주셨으되 당신의 아드님의 희생의 피가 율법의 요구인 최후의 심판을 피하고 조건적인 은혜의 기간을 얻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이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속하는 자들에게 그 은혜의 피는 영원한 용서와 생명을 주게 되는 것이요, 그 피를 의지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국에 가서 그 용서의 은혜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입장에 처하고 말게 된다. 법궤 안에 담겨져 있던 만나의 항아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생명의 떡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지마는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과, 또한 건강 법칙을 지키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건강 법칙을 지키는 일과 우리가 죄를 승리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는 필수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계명을 지키는 참된 이스라엘로, 다시 말해서 참된 남은 교회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종 곧 당신이 택하신 선지자를 통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울러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안에서 중생하고, 아론의 마른 지팡이에서 새싹이 난 것처럼,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자 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새로 태어난 새로운 삶을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로 바친다는 표현인 것이다.
    법궤 위, 시은좌의 양 옆에 서 있는 정금으로 만든 두 그룹 천사들은 우리에게 놀라운 의미를 주고 있는데, 이 그룹 천사들에 관하여서는 지면을 좀 할애하여 연구하여 보는것이 좋을 듯하다. 본인은 이 사실을 연구한 뒤에 얼마나 깊은 은혜와 감격을 느끼게 되었는지 모른다.
    먼저 결론을 말해 보자면, 본인은 법궤 위에 있는 그룹 천사들이 구속 받은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좀, 충격적인 말일지는 모르나, 이 특별한 그룹 천사들은 구속 받은 인간들 중에서 뽑히어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서 봉사하게 될 것이다. 아나 지금 벌써부터 봉사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 그룹 천사들이 4명이라고 본다. 법궤 위에 두명이 있었고, 나중에 다윗이 계시 가운데 지시를 받고 아들 솔로몬에 의하여 짓도록 명한 솔로몬 성전에는 두 명의 그룹 천사가 추가되어 지성소 법궤 앞 바닥에 놓여지게 되었다 (열왕기상 6장 참조). 법궤 위에 있던 두 그룹 천사들은 순금으로 만들어졌고 바닥에 놓여졌던 천사들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정금으로 그 위에 씌운 것이었다. 항상 조각목은 타락한 인간의 육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먼저 이 그룹 천사들이 누구인가를 알아 보도록 하자. “그룹들이 올라가니 그들은 내가 그발강 가에서 보던 생물이라… 그것은 내가 그발강 가에서 본 바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래 있던 생물이라 그들이 그룹인 줄을 내가 아니라.” 에스겔 1O: 15, 20.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시편 99:1. 위의 성경 말씀들에 의하여 하나님의 보좌 자체가 네 생물들이요, 그 네 생물들이 곧 그룹 천사들이요, 그 그룹 천사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그룹 천사들이 하나님을 따라 다니는 것이다. 그들의 임무는 하나님을 호위하는 것이다. 법궤 위의 그룹 천사들이 시은좌의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들의 몸과 날개로 반사하고 있는 것처럼 이 네 명의 그룹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온 우주 앞에 가장 잘 반사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과 은혜의 성품을, 타락했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돌아와 주님의 사랑을 통하여 온전하게 변화되고 순결하여진 인간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또한 더 잘 닮을 수 있는 존재가 이 우주 가운데 또 어디 있겠는가!
    요한계시록 4장을 보면 네 생물이 하나님의 보좌 옆에 서 있는 모습이 나오는데, 독수리, 사자, 소, 사람 얼굴의 모양들을 가지고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품성의 양상들을 나타내는 상징 언어인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계시록 5장에 가서 이들이 구속 받은 인간들이라는 강력한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영어 KIV에는”우리들을”이라고 번역됨)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요한계시록 5:8,9. 원래의 헬라어 원어에도 “사람들을” “우리를”이라고 기록하였고 라틴어 벌게잇(Latin Vulgate) 성경에도 “우리를”이라고 번역 되었으며, 위클립과 틴테일 같은 성경의 선구자들도 “우리들”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후세대에 와서 성경 번역자들이 그들의 견해를 가지고 단어를 바꾸어 넣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us”이라고 번역을 하면 그 24장로들과 같이 새 노래로 찬미하고 있는 네 생물도 인간들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번역을 바꾸어서 “사람들”, 혹은 “그들-them”이라고 번역하기에 이른 것이다. 생각해 보자. 천사들은 피로 구속함을 받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범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장로와 함께 새 노래, 즉 구속의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네 생물들이 “우리들을 피로 사서” 라고 찬미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이 땅에서 구원함을 받아 올라간 인간들인 것이다.
또한 그들이 바로 네 그룹 천사들인 것이다. 예언의 신은 이 사상을 다음과 같이 지지해 주고 있다.
    “사단은, 그들에 대한 비난을 하나님 앞에 강력하게 제시하고, 그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잃어버렸다고 역설하고, 그들을 범법자로 죽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기에 합당하다고 선언한다. 그는 말한다. ‘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나의 위치와 나와 연합했던 천사들의 위치를 차지할 자들인가?'” 교회 증언, 5권,473. 루스벨은 타락하기 전에 그룹 천사였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예수께서는 사단의 비난을 논박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세상에 오셨다. 주께서는, 인간속에 일그러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회개하는 영혼속에 거룩한 능력을 주셔서 타락과 부패로부터 들어 올리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고상하게 고양시키시어, 사단과 그의 천사들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생긴 하나님의 궁전의 빈 자리들을 채워 거룩한 천사들과 친구들이 되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오셨다.” 리뷰 앤 헤랄드, 5-8,1894.

    가브리엘 천사도 완전한 그룹이 될 수 없는 이유가 구속을 받은 인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라고 말하였다 (베드로전서 1:1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보좌 주위에, 가장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분의 성품을 잘 닮은 네 명의 사람들을 네 그룹 천사로 삼아 호위하여 서 있게 하실 것이요, 또한 14만4천을 당신의 보좌 옆 찬양대들로 만드실 것이며, 아울러 구속함을 받은 자들 중에서 24 장로들도 택하여 세우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보좌 주위를 이 지구상의 전리품들로 두르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간증과 성품의 전시 때문에라도 다시는 이 우주에 죄와 반역이 일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소제도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이렇게 악하게 타락한 우리를의 모습에서부터 거룩한 천사, 아니 거룩한 그룹천사의 자리까지 끌어 올려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과 오묘가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송하자! 오! 여기를 보라! 양을 끌고 성소로 향해 가는 한 나약한 죄인을, 계획하신 구속의 단계들을 거쳐 드디어는 법궤 위의 그룹들의 위치까지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의지를!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이 있지 아니한가!

자, 그러면 이제 지성소 연구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대속죄일에 대하여 공부해 보기로 하자.
    매일 드리는 제사와 매년마다 드리는 제사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죄의 용서와 죄의 도말의 차이를 다음 장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설명하지 않기로 하겠다. 한가지만 강조하고 지나가야 할 점은 대속죄일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그들의 모든 허물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되고 정결케 되는 경험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 하리라.” 레위기16:30. 말하자면, 대속죄일을 지나기 전까지는 사실상에 있어서 온전한 죄로부터의 정결은 아직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날에 너희가 모든 죄로부터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고 말씀 하시었다. 물론 우리가 매일 자복하고 회개한 우리의 헌신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구원과 용서를 누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속의 경험을 우리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항상 유지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 한번 얻었다고 우리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은 아닌 것이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히브리서에서 힘있게 설명하고 있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는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나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16-18.
    성경에서 대속죄일 장(障)이라면 레위기 16장을 말하는데, 하나님께서 레위기 16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의 도말을 위한 대속죄일을 설명하시면서 제일 먼저, 제사장들의 정결 사업을 설명하시었다. 레위기 16장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나답과 아비후가 술에 취한 채,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거룩한 번제단의 불 말고 다른 불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 가다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불이 나와 태워 죽임을 당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대속죄일에 관하여 설명하셨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2절부터 5절까지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 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내가 구름 가운데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 아론이 성소에 들어 오려면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고 수양으로 번제물을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대속죄일을 시작하실 때에 제일 먼저, 제사장들이 정결케 되기를 원하신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대속죄일의 정결 사업을 선포하며, 그 중요성을 설명하여야 하는 제사장들이 먼저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경험이 없이 어떻게 대속죄일 사업을 집행하고 가르치며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속죄일에 제사장들이 먼저 몸을 씻고 거룩한 옷으로 갈아 입어야 했던 것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의 속죄로부터 교회의 속죄 사업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1888년도 당시에 죤스와 와그너의 기별을 듣고 화잇 부인께서는, 이것이야 말로 늦은비를 불러 오는 하늘의 기별이라고 기뻐하시었으나, 교회의 지도자들이 받아드리지 않고 거절하자, 탄식하시면서 내려 오려던 늦은비가 그쳤다고 말씀하신 사실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는 바다. 항상 교회의 부흥과 개혁은 지도자들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하물며, 대속죄일의 정결 사업은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소에서 지성소로 옮기시어 대속죄일의 조사 심판사업을 시작 하신지 150년이나 지나버린 시기에 살고있다. 무엇이 주님을 이렇게 지체하시도록 만들고 있는가?
    대제사장은 제일 먼저 자기 자신과 자기의 권속들을 위하여 먼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 안에 들어가 시은좌 위와 그 앞에 일곱번 뿌리고 죄를 완전히 용서받고 도말받은 후에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속죄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한가지 유의해야 할 사실은 대속죄일 날에도 매일 드리는 제사가 함께 드려졌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직 고백되어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까 하여 수양을 속죄제로 드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주님을 위하여 뽑은 수염소를 죄의 도말을 위하여 잡을 때까지 아직 그들에게는 용서의 희망이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오늘날 주님께서도 향로를 가지시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나시어 우리들의 죄를 위하여 마지막으로 간구하고 계신다. 마지막 중보의 기도가 올려지고 있다. 언제 매일 드리는 제사의 효험이 더 이상 역사하지 않게 되어 죄의 도말을 위한 제물만 드려지게 될런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대속죄일에 들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성소 뜰에 있을 수 있고, 어떤이들은 성소 안에 서 있으며, 어떤이들은 지성소의 경험을 하고 있을 수 있다. 혹 어떤 이들은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녔어도, 아니 안식일을 지켜 왔어도, 아직 성소 뜰 안으로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자들도 있을 수 있다. 우리 자신들을 철저히 점검하자. 과연 죄의 정결 사업이 나의 영혼의 성전으로부터 진행되고 있는지를! 정말 내가 죄를 승리하고 있는가를! 성령의 능력을 매일 체험함으로 죄와 분리되는 경험이 내게 실재화 되고 있는가를!   우리는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구원은 향상 조건적인 것이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믿는 일이 선재해야 한다. 용서도 조건적인 것이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요한일서 1:9).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누구나 다 칭의하시고 구원을 베푸신 것이 아니다. 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인생들을 위하여 구원을 마련하여 주신 것이다. 용서를 보증하여 주신 것이다. 그것이 실재화 되기 위하여 인간편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믿음의 손이 하늘로 뻗쳐 올라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속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구원을 다 이루어 버리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을 못박은 로마 군인들을 제사장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피를 흘리는 일도 중요하지만 피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타나 중보하고 심판하는 역할도 구속사업에 있어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는 죄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만든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우리를 구원하실 때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능력을(권세를) 함께 주시는 것이다. 이 경험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실재적인지를 조사하고 심판하는 것은 그들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2장의 예복을 심사하는 왕의 혼인잔치 비유는 우리에게 이것을 쉽게 설명하여 주고 있다. 왕의 혼인 잔치에서는 초청장을 받고 잔치에 참석한 자들에게만 예복을 심사하는 일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성소에 들어간 자들만 조사하고 심판하는 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심판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
    레위기 16:29-34은 조사심판을 베푸는 대속죄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규례를 기록하고 있다.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철월 곧 이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그 기름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그 아비를 대신하여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제사장은 속죄하되 세마포 옷 곧 성의를 입고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며 회막과 단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이는 너희의 영원히 지킬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위하여 일년 일차 속죄할 것이니라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대속죄일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태도는 첫째로,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과, 두번째로 모든 일을 중단하고 아무일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것은 철저한 회개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살펴 아직 고백하지 않았거나 버리지 아니한 죄가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라는 분부이었다. 화잇 부인께서는 대속죄일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 표상적 의식에 있어서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봉사를 하는 동안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겸손한 태도로서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여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었다. 그와 같이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서 도말되기를 원치 아니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은혜의 시기가 얼마 남지 아니한 오늘날 죄를 슬퍼하고 진정으로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심령을 괴롭게 하여야 한다. 그들은 심각하고 철저하게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부허하고 경박한 정신은 반드시 버려져야 한다. 지배권을 장악하고자 일어나는 악한 경향들을 이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 앞에는 반드시 격렬한 투쟁이 있다. 준비하는 일은 개인적으로 할 일이다. 우리는 단체적으로 구원을 얻지 않는다. 사람의 순결과 헌신이 다른 사람의 그런 특성의 결함을 보충해 줄 수 없다. 비록 온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사건을 조사하시기를 마치 세상에 그 한사람 밖에는 다른 사람이 없는 것처럼 세밀히 하실 것이다. 모든 사람이 조사를 받되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야 한다.” 각시대의 대쟁투 490. 스스로 괴롭게 하라는 명령에는 금식이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 금식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그것은 곧 우리에게 빛으로 주신 건강 개혁 기별을 지키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건강 법칙은 우리의 몸을 위한 것도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 법칙을 지키면 우리의 뇌의 작용과 마음의 상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백성들에게 명하신 건강법칙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성품변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실패하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모든 일을 중단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까? 그것은 우리가 죄 짓는 일을 그치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모든 죄를 승리하고 더 이상 죄를 짓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참 안식에 들어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4:1-11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대하여 빛을 던져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11절에는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안식은 완전한 순종을 통하여 죄로부터 온전히 쉬는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3절부터 1O절까지는 이 안식의 경험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여 주고 있다.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쉬시는 것처럼 자기 일을 쉬는 것을 말한다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죄를 회개하는 일 그 이상을 하는 백성들. 죄를 고백하고 용서 받는 일 그 이상을 하는 백성들. 곧 죄를 이기고, 쓰러지지 아니하기를 배운 백성들. 계속적으로 죄와 유혹과 자기와 싸워 연속적으로 승리하기를 배운 백성들. 이러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참 안식에 들어가기를 배운 사람들이다.
    갈라디아서 5:19-21절은 우리가 반드시 다시는 반복하지 아니하고 그쳐서 쉬어야 할 육체의 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러한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5:24.

대속죄일날 성소에서 행하여지는 예식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1. 제사장들이 몸을 씻고 흰 세마포와 거룩한 옷으로 갈아 입은 후에,
2. 수염소 두 마리와, 수양 한마리, 그리고 수송아지 한마리를 준비하였는데, 수염소 중 한마리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백성들의 죄의 도말과 성소 정결을 위하여 드려지게 되어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마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염소는 모든 이스라엘의 죄를 지고 광야로 쫓겨 나가는 아사셀 염소였다. 그리고 수양 한마리는 아직도 여전히 계속되는 매일 드리는 용서를 위한 제사이었다.
3. 그런후 대제사장이 수송아지를 잡아 자기 자신과 자기 권속을 위하여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가지고 향과 함께 지성소로 들어가 그 피를 시은좌의 동편 곧 그 앞쪽 부분 끝에 뿌리고 또 그 법궤 앞쪽 밑에다 일곱번을 뿌렸다.
4. 그리고 제사장이 두 염소중 제비를 뽑아 주님을 위한 염소와 아사셀 염소를 나누어 뽑은 다음에는,
5. 주님을 위한 염소를 잡아 제사를 드린후 수송아지에게 한 것처럼 그 염소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시은좌 동편과 그 앞에 일곱번씩 뿌렸다. 그런데 이 제사에 있어서는 그 염소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고백하지를 않았다. 이 피는 그러므로 죄를 짊어지고 있지를 않기 때문에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한 모든 자들의 죄를 영원히 도말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6. 대제사장은 이 주님을 위한 염소의 피를 지성소로부터 다시 가지고 나오면서 성소의 향단과 뜰의 번제단의 뿔에 그 피를 바르고 각각 그 단위에 피를 뿌림으로 성소 자체를 정결케 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성도를의 죄를 도말하심으로 하늘 성소가 더러워졌던 모든 죄의 기록에서 하늘 성소를 정결케 하시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7. 그 다음에는 준비된 아사셀 염소 위에 손을 얹고 회개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그 위에 다 고백하여 전가시킨 후에 그를 미리 정한자의 손에 맡기어 광야로 끌어내어 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드디어 해결되게 되어 있었다.
    아사셀 염소와 미리 “정한자”와의 관계는 참으로 흥미 있는 일로서 결론에 가서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대속죄일날에 모든 죄로부터 깨끗하게 분리되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진 밖으로 끌어냄을 당하여 돌로 침을 당하였다. 인간들의 모든 죄의 책임은 결국 마귀가 지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 죄로부터 자기를 철저하게 정결케 하지 아니하고 죄와 계속 붙어있는 자들은 마귀와 함께, 사단과 그 악한 천사들을 위하여 마련된 불속에서 같이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에서 조사심판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회개한 신자들의 죄가 성소에서 도말되고 있는 동안,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는 정결케 하고 죄를 버리는 특별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이 일이 완성될 때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분의 재림을 위한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각시대의 대쟁투 425.
    지성소에 들어간 대제사장을 기다리며 성소를 향하여 서서 엄숙하게 자기의 영혼을 살피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하늘 성소를 향하여 우리 마음들을 살펴야 하는 시기에 살고 있다. 대속죄일을 통과한 자들만이 장막절에 참여하여 즐길 수가 있게 되었던 것처럼, 모든 죄를 용서함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온전히 이루어 모든 불의로부터 정결함을 받은 자들만이 인침을 받고 유리 바닷가에서 벌어질 진짜 장막절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성소와 유대 절기의 모든 상징들은 그 의미와 시기에 있어서 정확하게 성취되어 왔다. 그러므로 대속죄일과 심판과 장막절도 그 의미와 시기에 있어서 정확한 성취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이를 것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시은좌 앞에 서있는 것이다. 14만4천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흠이 없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어떤 인간 앞에서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다고 하였다. 과거의 모든 죄악들은 사하여 졌으며, 다시는 그러한 죄들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거룩한 품성들을 준비한 것이다. 드디어 예복을 입은 신부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모든 믿는 자들의 죄가 고백되고 진심으로 버려졌고, 대제사장이 그들의 죄를 위한 마지막 중보의 기도가 드려졌으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케이스(경우)들이 각각 개인적으로 다루어진 다음에도 아직도 여전히 꼭 필요한 한가지 일이 남아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내몰아 보내는 일이다. 이 아사셀 염소는 사단을 상징한다. 사단은 자기가 지은 모든 죄와 남을 범죄케 만든 모든 책임들을 지고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아사셀 염소는 속죄 사업의 일부가 아니다. 속죄가 끝난 후에 죄에 대한 책임을 지워 심판하는 과정이다. 예수께서 지셔야 할 죄가 있고 사단이 져야 할 죄가 있으며 사람들 자신이 져야 할 죄가 있다. 거의 모든 죄들은 공동 책임을 져야 하는 데, 예를 들어서 한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도둑질하는 일을 가르치고 시켰으면 그 아버지도 그 아들의 죄에 대한 분명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지은 거의 모든 죄의 책임에 대하여 사단은 분명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나가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 뜨렸으면 분명히 그사람이 넘어지면서 물건을 깨고 부숴뜨리는 잘못을 행하게 되지만 실상은 그러한 입장을 만든, 다리를 걸어 넘어 뜨린 장본인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 형편을 만들어 성도들을 넘어지게 만든 무수한 죄의 책임들이 마귀에게 전가되어야 한다. 용서받은 의인들의 죄는 도말되어 예수께서 지시고 대신 형벌을 당하신 주님의 보배로우신 피로 구속을 받았다. 그러나 마귀의 책임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의 근원과 그 지은 죄악들의 책임을 마귀한테 전가하는 일이 수반되어야 죄의 문제를 없애는 대속죄일의 의식이 그 끝을 맺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사셀 염소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고 광야로 보낸 다음에 마귀(죄)와 아직도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여 없애는 순서가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속은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야 성취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죄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수께서 지시도록 하늘성소로 올려 보내졌는가? 아니면 여러분 자신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는가? 실로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내어 심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리 정한자가 필요한 사실을 레 16장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정한자”는 영어로 “a Fitman” 이라고 부르는데, 유대의 역사에 의하면 대제사장이 이 정한자를 일년전에 미리 정해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는 일년 내내 그가 이루어야 하는 임무를 명상하면서 마음과 몸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그는 대속죄일이 끝나려는 마지막 찰라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엄숙하게 지켜보는 가운데서 아사셀 염소를 끌고 무인지경의 광야로 몰고 나가게 된다. Spalding and Magan’s Collection, 2페이지에서 우리는, 만일 그 정한자가 그 염소를 놓치게 되면 온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을 발견하게 된다. 염소 둘이 끌려 왔다가 한마리는 죽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이 아사셀 염소는 자기의 운명을 알아차리고 도망하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다. 그때 그 염소를 끌고 나가는 이 정한자들은 바로 마귀를 1,OO0년기의 황폐한 곳으로 내 몰고 나가는 14만4천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죄의 도말을 받고, 살아서 승천할 성품을 이루었으며, 중보자 없이 야곱의 환난을 통과하는 그들이, 살아있는 의인들을 범죄케 함으로 승리해 보려고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 사단을 대항하여 마지막 대쟁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각시대의 대쟁투 하권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단이 에서를 충동하여 야곱을 향하여 군대를 진군시킨 것과 꼭 같이 사단은 환난의 때에 악한 자들을 선동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고자 할 것이다. 그가 야곱을 비난했던 것과 꼭같이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하는 일에 진력을 다할 것이다. 그는 세상을 그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적은 무리는 그의 최상권을 거부하고 있다. 만일 그가 그들을 세상에서 제거해 버릴 수만 있으면 그의 승리는 완성될 것이다. 사단은 거룩한 천사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며, 그들의 죄가 용서된 것도 짐작한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문제가 하늘의 성소에서 결정된 것을 모른다.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케한 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므로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가장 크게 과장하여 제시하고,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도록 제거된 것처럼 그들도 꼭같이 제거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들의 죄는 용서해 주시면서 자기와 자기 부하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단은 그들이 자기에게 사로잡힌 자들이라고 주장하고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어 멸망시킬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한 것에 대하여 사단이 비난함으로 주님께서는 그들을 끝까지 시험하도록 사단에게 허락해 준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들의 확신과 믿음과 견인불발의 정신은 격렬하게 시험을 받을 것이다.” 각시대의 대쟁투 618-619.
    그들은 욥과 같은 시련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14만4천은 너무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기 때문에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가 없게 된 자들이다. 그들은 어떠한 시련들과 유혹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우주에 증명하고 있으며, 마귀의 고소가 틀렸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사실을 공표하며 마귀를 천년기의 광야로 끌고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의 인내는 마귀의 고소 즉,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단의 비난이 얼마나 잘못된 것임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14만4천들이 준비되지 않고서는 주님께서 대속죄일을 끝마치실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다.
    우리는 지금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는 한가지 경험 곧, 은혜의 시기가 지난 다음에 중보자 없이 서야 하는 성품을 지금 반드시 가져야 한다. “14만4천들은 개국이래로 없던 환난의 시기를 지내고, 야곱의 환난을 견디어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이 마지막으로 내릴 때 중보자 없이 선 자들이다.” 각시대의 대쟁투 649.
    “오늘날 믿음을 조금 밖에 활용하지 않은 자들은 사단의 기만적 권세와 양심을 억압하는 법령에 굴복될 위험이 가장 크다. 비록 그들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지라도 그들은 환난의 때에 더욱 심한 난관과 고통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습관을 기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등한히 한 믿음의 교훈을 무서운 절망 가운데서 배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주님의 약속을 실증함으로서 하나님과 친숙해져야만 한다. 천사들은 열렬하고 진실한 기도들을 기록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누는 교통을 등한히 하기보다 차라리 이기적 만족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극심한 빈궁과 가장 큰 극기는 그분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시는 부귀와 명예와 안일과 우정보다 더 낫다.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세상 일에 몰두 당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허용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우상이 되어 있는 재산과 가옥과 비옥한 토지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심으로써 우리에게 기도할 시간을 주실 것이다.” 각시대의 대쟁투 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