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성소 뜰에서 – 칭의의 경험
C. 속죄제
속죄제는 죄지은 자가 자기의 죄를 용서함 받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로서 가장 중요한 제사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죄없는 어린양의 피가 우리의 죄를 속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실물 교훈을 통하여 죄인에게 실감시키는 제사이다. 피는 그 생애에 따라서 가치가 생기는 법이다. 죄를 지은 우리를의 피는 죄를 속하는 힘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죄를 한번도 지은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보혈이 되어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 샘물이 되는 것이다. 법을 만드신 하나님의 죄 없으신 피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흘려짐으로 우리가 다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정하게 되겠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속죄제를 드리는 제물을 가져오는 일부터 우리는 교훈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제사장이나 혹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범죄하였을 때에는 수송아지를 가져 오게 되어 있는 사실이다. 수송아지는 제물 가운데서도 가장 값비싼 것이었는데, 그것은 지도자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온 백성들이 다 함께 지은 죄와 같이 중하게 취급하신다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이 배도하면 온 백성들이 배도하게 되며 함께 멸망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의 책임이 얼마나 엄숙한가! 교인들을 잘못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가르쳐 놓으면 온 교회가 망하는 것이다. 또한 지도자가 진정한 의미의 속죄제를 경험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할 수 있겠는가? 또한, 백성들의 족장들 중 하나가 범죄했으면 그 다음으로 비싼 수염소를 제사로 드려야 하였고 평민 가운데 하나가 범죄하였으면 암염소나 양을 아니면 형편에 따라 비둘기들을 가져오도록 하였다. 이것은 같은 죄라도 책임 한계에 따라 다르게 취급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맡은 직분과 의무의 중요성에 비례하여 그들의 죄의 심각성도 커진다는 사실이다.
속죄제는 죄인이 죄를 용서받기 위한 유일한 제사 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속죄의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 휘장 앞에 일곱번 뿌리고 나서 중보 기도를 드림으로 죄인의 죄가 용서받는 제도는 이 제사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속건제는 속죄제에다 피해의 보상을 더해 준 제도라 할 수 있으며, 또한 알고 지은 죄에 대한 속죄의 가능성이 포함된 제사인 것이다. 그러나 번제나 화목제는 그 자체가 죄를 속하는 제사일 수는 없으며, 속죄제를 드린 후에 같이 드리는 헌신과 감사의 제사들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속죄제를 가장 중요한 제사라고 결론을 짓고 싶다.
속죄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잠간만 믿음과 회개에 대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생각해 보고 지나가도록 하자. 믿음과 회개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왜 그것이 선물일까?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에서 자라나면서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과 돌보심, 젖먹여 주고 기저귀 갈아주시며, 추위와 더위에 대처하여 돌보아 주시는 사랑과, 또한 위험과 아픔에 대처하여 간호해 주는 자상한 손길을 경험하고 피부로 느끼며 성장해온 아이는 어머니를 신뢰하고 믿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머니를 믿지 말라고 해도 믿지 않을 수 없는 자연적인 느낌과 신뢰의 발로인 것이다. 어머니를 믿는 것 이외에 달리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사랑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믿음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인데, 그러므로 곧 믿음은 선물인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회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영문에는, “회개를 주시기 위하여”로 되어 있음 –필자주)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사도행전7:31.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를 선물로 주시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오시었는데, 죄인들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너무나 엄청난 사랑과 희생을 목격하며 하나님의 진정한 성품을 이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무릎을 꿇고 자기의 악함을 자복하며 회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 속에 넣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 속죄제는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되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셔야 하는지를 보여주심으로 인간이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도록 만드시는,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회개를 불러 일으키시기 위하여 고안된 제사 제도인 것이다. 그래서 속죄제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으로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장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또 그 피로 회막 안 여호와 앞에 있는 단뿔에 바르고 그 피 전부는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그 기름은 다 취하여 단위에 불사르되 그 송아지를 속죄제의 수송아지에 한 것 같이 할 것이며 제사장이 그것으로 회중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들이 사함을 얻으리라 그는 그 수송아지를 진 밖으로 가져다가 첫번 수송아지를 사름같이 사를지니 이는 회중의 속죄제니라.” 레위기 4:13-22.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그 희생 동물의 전부를 태우는 것이 아니고 그 동물의 기름만 태우게 되어 있었다. 지난 장에서 공부한 것처럼 기름은 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시편 37장2O절은 “악인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는 어린양의 기름같이 타서 연기되어 없어지리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고기 타는 기름 냄새를 맡으면 구역질이 나게 마련이다. 만일 독자들 가운데서 고기 기름 태우는 냄새가 코에 즐거움을 준다면 자신의 식욕을 다시 검증하여 거듭나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성소 제사에 있어서 이러한 고기 태우는 냄새를 좋아서 흠향하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가 우리의 죄를 포기하고 고백하며 하나님께 드릴 때에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기름을 완전히 도려 내어 단위에 태운 나머지 고기는 진 밖에 나가서 불태워 버려야 하였다. 그것 역시 죄를 굴복시키지 않고 품고 있던 죄인들이 당하는 최후의 운명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도들이 있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세상이 새로운 하늘과 땅으로 재 창조되기 전에 악인들은 유황불로 최후의 멸망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 성소 문제를 공부하면서 우리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은 재림 교회의 모든 기본 교리들은 성소 제도를 통하여서 증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속죄제에 있어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했을 때나, 온 회중이 다 함께 범죄 했을 때에, 그 속죄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지성소 앞의 휘장 앞에 피를 뿌리고 제사장이 중보의 기도를 드리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떤 평민이나 족장 중 개인이 범죄했을 경우에는 그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죄가 성소 안으로 옮겨질 수가 없는 것이요, 그렇다면 제사장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기도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죄인이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하면 그 죄가 양에게 전가되는 것이요, 그 죄인이 양을 죽인 후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 성소로 들어가는 것이니 곧 그 피 속에 죄인이 고백한 죄가 들어있는 것이다. 일반 개인이 속죄제를 드릴 때에는 피가 성소로 들어가지 않고 번제단 주위에 뿌려지고 나머지는 단 밑에 붓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속죄제를 드리던 죄인이 양의 피가 성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을 보자 너무 의아스러워서 제사장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니, 제사장님! 내가 나의 죄를 고백한 그 양의 피가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떻게 내 죄가 성소안으로 옮겨지며, 어떻게 당신이 내 죄를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사장님?” 그 때에 조용한 미소와 함께 제사 드리러 온 그 사람을 쳐다보며, 친절하게 설명하여 주는 제사장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는 자상하지만 아울러 엄숙하게 그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속죄의 의미를 설명하여 준다.
“자, 형제여 보십시요. 피가 들어가지 못하면 당신의 죄가 성소로 옮겨지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죄가 옮겨지는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어떻게요?” “자 보십니까? 이제 내가 이 양의 고기를 조금 떼어서 먹겠습니다. 당신이 고백한 죄가 이 양에게 전가되었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그 죄가 내 몸으로 전가되는 것이지요. 이제부터는 그 죄가 당신의 죄만이 아닙니다. 이제 그 죄들은 곧 나의 죄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제 성소로 들어가, 당신의 죄를 위하여 아니 바로 내 자신의 죄를 위하여 기도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가 기도 드리는 동안 당신도 여기에서 간절한 참회의 기도를 드리십시요!” “이제 먼 훗날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실 터인데, 바로 그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여기에 있는 이 양처럼 죽음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과 상하심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고 나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나는 바로 그 분을 예표하기 위하여 이 제사를 행하는 것입니다.”레위기 6:25-30 참조. 이 말을 듣고 서 있는 죄인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겠는가! 자기가 양을 죽일 때에 이미 그는 죄없는 양이 자기 대신 이렇게 무참하게 죽어야만 자기의 죄가 사하여 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고 죄의 결과의 무서움을 벌써 느끼기 시작한 터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더욱 더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는, 제사장이 자기의 죄를 대신 진다는 분명한 사실 앞에 떨며 서게 된 것이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마치 옛날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처럼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 “제사장님! 나는 내가 지은 죄를 미워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요. 아니 하나님께 말씀드려 주세요. 나는 다시는 이러한 죄를 짓고 싶지 않다고 말입니다. 나는 이제 죄가 싫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고 싶습니다.” 이 때에 드디어 속죄제의 그 의미가 죄인에게 실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속죄제를 고안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가 용서 받기 위하여 어떠한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깨닫도록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용서하시기는 하나 그 대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이다. 용서란 그저 하나님께서 그 죄를 단지 간과하시고 잊어버리시는 것이 아나라 무한한 대가를 치르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에 가서 예수께서 어떠한 희생을 치르시고 어떻게 영원히 그의 본질이 바꾸어 지셨는지를 보기 전까지는 주님의 희생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제는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의 죄가 용서 받기 위하여 어떠한 일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아울러 그 죄를 미워하게 하며 의를 사모하게 만드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속죄제를 고안하신 목적이라 하겠다.
고린도후서 5:21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베드로전서 2:24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이 얼마나 생생한 묘사인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당신의 몸에 지시고 담당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확실히 이해하고 지나가야 할 사실이 있다. 어떻게 예수께서 당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는가? 증언보감, 226-242 페이지를 (교회 증언,2권, 200-215)읽어 보라. 거기에는 영감으로 설명하여 주는, 예수께서 우리 죄를 십자가 위에서 어떻게 지셨는가를 생생한 묘사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우리의 죄 그 자체가 되시어 죄인이 자비가 섞이지 않는 심판을 지나가는 경험을 대신 경험하신 것이다. 증언보감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보도록 하자.
“인간의 죄를 짐에 따라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분리됨을 느낄 때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 당한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대하여 우리는 희미한 개념밖에 가질 수가 없다. 그분은 타락한 인간을 위하여 죄가 되셨다.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그분으로부터 거두어짐을 느낄 때에, 그분의 고민에 찬 심령은 다음과 같은 비통한 말씀을 발하였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증언보감, 1권, 225. “영원히 신비로 남게될 영원한 사랑외에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로 하여금 하늘에서의 그분의 존귀와 위엄을 버리고 죄된 세상에 오셔서 그분이 구하고자 오신 자들에게 무시와 멸시와 배척을 받으시고 마침내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시도록 할 수 없었다.” 상동, 226.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렇게 신속히 끊어진 것은 육체적 고난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짓누르는 세상 죄악의 무게와 하늘 아버지의 진노 때문이었다. 하늘 아버지의 영광과 유지하시는 임재가 그분을 떠났으며 절망이 그 흑암의 짓누르는 무게로 그분을 눌렀으므로, 그분의 창백하고 떨리는 입술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고통의 부르짖음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마태복음27:46). 의혹까지도 운명 중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공격했다. 그분은 무덤의 입구 너머를 보실 수 없었다. 밝은 희망은 그분에게, 그분이 정복자로 무덤을 나설 것과 아버지께서 그분의 희생을 받으실 것을 제시하지 않았다. 세상의 죄가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에게 절실히 느껴졌다. 죄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불쾌와 그 형벌, 즉 죽음이 이 놀라운 흑암을 통하여 그분이 인식할 수 있었던 전부였다. 죄가 하늘 아버지의 목전에 너무 가증하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과 화해할 수 없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유혹을 그분은 받으셨다. 그분 자신의 아버지께서 그분에게 영원히 남겨두신 격렬한 시험이 십자가 상에서 뼈에 사무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복수가 죄인들에게 내려질 때 죄인들이 느낄 그 절망을 느끼셨다. 죽음의 휘장 같은 검은 절망이 그들의 죄의식에 시달리는 영혼 주위에 몰려들 것이요, 그들은 그때 비로소 죄의 가증함을 충분히 깨닫게 될 것이다.” 상동, 228, 229.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셨던 당신의 가납하심과 동의에 대한 확신을 이제 제거하셨음으로, 믿음과 희망은 그리스도의 숨이 끊어지는 고통 가운데서 흔들렸다. 그리하여, 그 때 세상의 구속주는 지금까지 그를 강건하게 하여 온 증거, 즉 하늘 아버지께서 그분의 수고를 가납하셨고 그분의 사업을 기뻐하셨다는 증거들을 의존하셨다. 숨을 거두는 고통 가운데서 그분의 고귀한 생애를 마치면서, 그분은 오로지 믿음만으로 당신이 항상 즐겨 순종하던 하나님을 의뢰하셨다. 그분은 좌우편 어디에서도 명확하고 밝은 희망의 빛줄기로 격려를 받지 못하셨다. 모든 것이 짓누르는 흑암에 둘러싸여 있었다. 동정하는 천연계에까지 느껴진 그 두려운 흑암 가운데서, 구속주께서는 그 신비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밝은 희망, 장래에는 그분의 것이 될 승리에 대한 확신도 얻지 못한 채, 그분은 큰 목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상동,229, 230
“어떤 이들은 속죄에 대해 제한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의 형벌 중 작은 부분만을 당하셨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진노가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에 의해 느껴졌으나 아들은 그분의 고통스러운 고난의 전 과정을 통하여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가납하심의 증거를 가지셨으며, 그분 앞에서 무덤의 문은 밝은 희망으로 밝혀졌고, 그분은 장래의 영광의 계속적인 증거를 가지셨다고 가정한다. 여기에 큰 잘못이 있다. 그리스도의 가장 심한 고민은 하늘 아버지의 불쾌히 여기심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한 심적 고통은 너무나 진했으므로 그에 대해 인간은 단지 희미한 개념밖에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단지 육체적인 고통뿐이었다면, 그분의 죽음은 다른 순교자들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고뇌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세상의 죄가 그분을 눌렀으며, 범하여진 율법의 형벌을 당하는 동안 하늘 아버지의 진노에 대한 깨달음이 그분을 눌렀다…. 죄가 일으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리가 무고하게 고난당하는 갈바리의 사람에게 충만하게 인식되었으며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분은 흑암의 세력에 의해 압제를 당하셨다. 그분에게는 장래를 밝혀주는 빛줄기가 한줄기도 비치지 않았다.” 상동,232,233.
오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영원히 죽어 없어진다고 해도 우리를 구하실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오, 독자들이시여, 여러분들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마음을 모두 바치셨는가? 그리고 모든 죄를 버리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어 다시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를 반복하기 원치 않으니 힘을 주십사고 기도하였는가? 그리고 주님 뜻대로만 살기로 결심하였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바로 속죄의 경험을 맛본 것이다. 만일 그러한 경험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늦기전에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게 되기를 초청하는 바이다. 아직도 주께서는 하늘 지성소에서 그대를 위하여 기다리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인 2,000년 전에 자기가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예수를 죽였다고 생각지 않는 자들이 있다. 감히 어떻게 그러한 생각을 할 수가 있을까? 예수께서 돌아가신 것은 십자가에 달리는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의 죄의 의식들을 대신 지시고 느끼심으로 인하여 그분의 심장이 파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었고, 우리의 죄가 그를 찔러 돌아가시게 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천천히 신음하시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요 크게 소리를 지르시고 고개를 갑자기 떨구시고 돌아가셨다. 로마 군병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찌르자 피와 물이 흘렀다고 성경은 말하여 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예수께서 심장이 터져서 돌아가셨다는 과학적인 증거들인 것이다. 시대의 소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빛을 던져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범죄한 인류를 위하여 자비가 더이상 간청하지 않게 될 때에 죄인이 느끼게 될 고민을 느끼셨다. 그가 마신 잔을 그처럼 쓰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시킨 것은 인류의 대리자인 그에게 아버지의 분노를 가져오게 한 죄의식이었다.” 시대의 소망 753.
예수님의 고난의 장면을 예언한 시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게 된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음으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시 40:12. 우리의 많은 죄악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죄악이 되어서, 나의 죄악이 머리털보다 많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다시 말해서 심장이 터졌다는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 오, 어떻게 우리가 계속적으로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으로 계속 끌고 갈 수가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그치고 모든 유혹을 승리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거기에 감동되어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는 길 밖에는 없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돌비를 주실 때에 번개와 우뢰와 지진과 흑암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갈바리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돌아가실 때에 십자가의 주위에 번개와 우뢰와 지진과 흑암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새언약을 세우고 계셨다는 증거이다. 옛언약의 마음상태를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현시하여 보이심으로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당신의 율법을 기록하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에 너무나 감동되어 우리의 마음이 녹아질 때에 히브리서에 있는 새언약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히브리서 10: 16.
그 후에 우리는 시편에 다윗이 기록한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시편 119:127.
이러한 속죄제의 이해에서 볼 때에 죄는 칭의에서 끝나는 것이다. 모든 죄는 고백되고 버려져서 의롭게 되는 상태를 가르켜 칭의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성소뜰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인 것이다. 성소뜰에서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 사람은 드디어 믿음으로 제사장을 따라 성소 안으로 들어가 주님과 동행하는 성화의 과정을 시작 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성소 안에는 죄를 속하는 제사가 없으므로 성화의 과정에서 연약하여 실수하거나 범죄하는 자들은 다시 양을 가지고 와 제사를 드린 후 다시 성소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죄를 지으면 반드시 다시 거듭나는 경험을 그 지은 죄에 대하여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중생의 경험은 매일의 경험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성소에 대한 이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만하여 거짓 구원의 확신과 가짜 영적 경험과 안전감을 불러 일으키는 신신학의 가르침과 강조가 이렇게 교회 안에 파다한 것이다. 100% 다 신신학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문제는 신신학을 진리에다 조금씩, 아니면 두드러지게 많이 섞어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많기 때문에 신자들이 혼돈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이 진정한 재림 교인들이라면 성소에 나타난 유일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과, 교회에서 난무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인간적인 가르침과를 대조하여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음 장에서 새언약의 경험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에 대하여 필자의 한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하여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