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성소에 대한 첫 계시
저자: 강병국 목사
우리는 하나님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성소에 대한 계시를 보여 주시고 지시하신 모양대로 정확하게 성소를 짓도록 명령하신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8:5.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에게 당신의 구원의 계획의 청사진인 성소에 대한 계시를 알려 주신 사실을 창세기 3장을 통하여서 엿볼 수가 있다.
그 이야기는 창세기 3:20, 21에서 시작이 된다. 방금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형선고를 듣고 또한 땅을 향한 저주의 선고를 들은 아담이 곧 자기의 아내를 향하여 돌아서더니 느닷없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아닌가. “여보, 이제부터 당신의 이름을 하와라고 합시다. 당신은 이제부터 모든 산자의 어미가 되었소.” 불과 몇 분 전에, 죄의 결과로 죽어야 한다는 죽음의 선고를 받은 아담이 왜 그렇게 했을까?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고 지은 것은 범죄 전이 아니라 범죄한 후에 지은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아담의 믿음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할 수가 있었을까? 그 해답은 21절이 해 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가죽옷을 해 입기 위해서는 어떤 동물이 죽어야 한다. 죄의 결과인 기후의 변화를 대비해 벌거벗은 인간의 몸을 덮어주기 위하여 희생양이 죽어야 하였다. 범죄함으로 빛의 옷을 잃은 인류를 위하여 죄의 즉각적인 심판에서 가리워 주시는 구세주의 의의 옷을 그들에게 가르치시면서 주께서는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셨을 것이다.
그때의 장면을 상상해 보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멀찍이 에서 놀고 있는 두 마리의 어린양을 부르라고 명하신다. 그때 아담은 휘파람소리로 양들을 불렀고 두 마리의 양들은 영문도 모른 채 기뻐서 껑충 껑충 뛰어와, 한 마리는 아담의 품안에 다른 한 마리는 하와의 품 안에 덥석 안긴다. 양들을 귀엽게 쓰다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아담아, 저기 돌들이 보이느냐?” “네, 하나님.” “저기 두 돌을 가져와 서로 두들겨 날카롭게 만들어 보렴.” 시키는 대로 하여 날카롭게 된 돌을 들고서 있는 아담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신다. “이제 그 돌로 양의 머리를 쳐 봐!” “네? 아니 양을 이 돌로 치면 죽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저보고 양을 죽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그렇다. 자, 어서.”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에 하는 수 없이 아담은 날카로운 돌로 안고 있던 양의 머리를 내리쳤다. “더 세게!” 두 번째 세게 내리치자 양은 그만 큰 눈을 뜨고, 마치 “왜 나를 이렇게 치는 거예요” 라고 말하는 듯이 공포의 표정을 지으며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처음 죽음의 공포를 바라보고 있던 아담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죽은 양의 시체를 땅에다 얼른 떨구면서 이렇게 하나님께 묻는다. “하나님, 우리가 범죄했으므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다, 아담아! 너희가 범죄하였으므로 앞으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서 저렇게 죽어가야 한다.”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속의 방법을 들은 우리의 시조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하나님!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돌아가셔야 한다면, 우리는 그 죄를 정말로 미워합니다. 다시는 하나님을 죽게 하는 죄를 반복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성소의 목적은 죄인들에게 죄를 미워하게 하며 의를 사랑하도록 만드는데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창세기 3:24절의 내용을 그린 화가들의 그림들을 접하게 된다. 엄위한 얼굴을 하고 불붙는 칼을 들고 에덴 동산의 입구에 서 있는 천사를 뒤로 힐끗 바라다보며 무서워 떨면서 쫓겨나고 있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우리는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양을 잡고 옷을 해 입히신 동정과 사랑 넘치는 하나님께서 돌아서셔서, 떨고 서 있는 두 인간들을 공포에 사로 잡히게 하면서 에덴 동산으로부터 내어 쫓으시겠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생명나무에 접근 하지 못하도록 천사를 두어 막으시고 금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뒤에 또 한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창세기 3:24절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여기에 “두루도는 화염검”이라는 낱말이 나오는데, 이 두루 도는 화염검이 그룹들 사이에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누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가? 시편 99:1은 “여호와께서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 또는 임재의 곁에서 항상 호위하는 천사들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계시 가운데 이 장면을 보았을 때에 그룹들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시는 한 분이 마치 불붙는 광채나는 검처럼 보였기 때문에 두루 도는 화염검이라고 표현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왜 두루 돌고 계셨을까? 그것은 떠나 나가는 아담과 하와를 보시면서 안타까이, 자주 내게로 와서 예배하며 구속의 경륜에 대하여 공부하자고 말씀하시는, 마치 집 떠나는 자식을 보며 안절부절하는 애절한 부모의 성정처럼 왔다갔다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닐까? “에덴 동산은 사람이 그 즐거운 통로에서 추방된 후에도 오랫동안 지상에 남아있었다 (창세기 4:16절 참조). 타락한 족속이 오랫동안 무죄한 시대의 집을 바라보는 것은 허락되었다. 그 들어가는 입구는 파수보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막혔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 천사들이 경배하는 낙원의 문에 나타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룹사이에서 나타났으며 후에는 이것을 쉬카이나라고 불렀으며 이스라엘 예배의 중심인 지성소 안에 거하였다. 출애굽기 25:32, 시편8O:1, 이사야 37:16 참조). 이곳으로 아담과 그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나아왔다. 그 곳에서 저들은 저들이 범법함으로 에덴에서 추방당한 그 율법에 대한 순종의 맹세를 새롭게 하였다.” 부조와 선지자62. 하나님께서 그룹 천사들을 에덴 동산의 입구에 두신 또 다른 한가지의 이유를 구태여 언급하자면, 한때 그룹이었던 루스벨의 접근과 기만을 막기 위한 이유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 동편 문으로 예배 드리러 오는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처음으로 성소의 제도 즉,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며 죄와 반역의 문제를 취급하시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 창세기 3장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성소에 대한 첫 계시를 엿볼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기억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시기 위하여는 무한한 희생을 치르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 첫 번째의 성소에 대한 계시에서 우리는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보게 된다. 인간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어가는 희생양 앞에서 두 가지의 경험을 체득하게 된다. 하나는 죄의 결과를 깨닫고 죄를 미워하게 되며, 두 번째로는 자기가 어긴 그 하나님의 율법에 죽도록 순종하겠다는 의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시 샘솟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