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 오셔서 사셨던 그리스도 (우리를 체휼 하셨던 분) (Touched with Our Feelings)
제 16 장 그리스도론의 성경적 자료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는 입장은 기독교회의 역사에서 오직 적은 수의 지지자들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렇게 가르쳤던 사람들은 빈번히 이단으로 간주되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서슴없이 받아들여wu야 한다. 그러나 진리는 지지자들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중요한 성경적 진리들이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선입견과 잘못된 생각으로 말미암아 곡해되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경우 성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과 운명의 문제가 바로 그 중요한 한가지 예이다. (1)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을 받아들임으로 교회 부조들은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관한 심각한 오류를 심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신약성경의 자료들을 무시함으로 독단적인 이론들을 만들었으며, 그 결과 잘못된 교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신약성경의 증거)
한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관련된 자료들을 신중히 분석해야 한다. 문제 자체를 이해하는 것은 바로 그 문제를 반 푸는 것과 같다. 분명히 정의된 그리스도론에 관한 성경적 자료들은 다음과 같이 하나의 역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어떠한 죄에도 참여하시지 않은 채 “죗된 육신의 형상” 안에 참여하셨다.
이 중복된 증언은 요한 복음의 서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다”; 그리고 다른 한쪽으로, 그는 말하기를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문제는 타락한 상태의 인간으로 되셨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이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을 우리 가운데서 사셨다는 사실에 있다.
요한은 이 진리를 그의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육체로 오심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일서 4:2-3)
요한복음에 나오는 “육체”라는 말은 경멸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인간은 “육체의 의지”를 (요한복음 1:13) 따라 태어나며, “육체를 따라 판단한다” (요한복음 8:15). 그리고 요한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 2:16). 예수께서도 조직적으로 “육체”와 “영”을 분리하였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복음 3: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63).
바울도 역시 그의 편지서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개성 안에 있는 육체와 영의 대립을 강조하였다. 로마서의 서론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본성의 이중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정한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로마서 1:3,4) 그리고, “경건의 비밀”의 위대함을 말하며 바울은 다음과 같이 다시 한번 그리스도론의 기초를 언급한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디모데전서 3:16).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이시자 동시에 영이심을-즉 진정으로 인간이시자 진정으로 하나님이심을-더욱 강조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죗된 육신의 형상”으로 보내셨고, “죄를 육신에” 정하셨다고 언급한다 (로마서 8:3). “형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던지 간에 이 말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을 때의 육체가 다른 인류의 육체와 다른 것이었다는 의미는 되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아담의 타락전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죗된 육신의 형상”으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예수께서 가지셨던 인성의 실제성과 그의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해하셨던 순종의 완전함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한편으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온전하고 완전한 인성의 참여를 강조한다: 그는 “종의 형체를 가져” (문자적으로, 노예); 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으며”;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7,8). 다른 말로 말하면, 비록 “여자에게서 나사, 법 아래 나시고,” 모든 인간들처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육체에 정하셨”(로마서 8:3)으며 또한 “죄 아래 있는 자들”의 (갈라디아서 4:5) 구세주가 되셨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2).
히브리서도 그리스도의 개성과 사업에 관한 이중적인 국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히브리서 2:16:17). 형제들이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였다” (14절).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 (히브리서 4:15). 이것이 바로 그의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브리서 2:17,18).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론의 기초적인 성격적 자료들이다. 어느 누구도 건강한 성경적 기초 없이 이 자료들을 바꾸거나 연약하게 만들 권리가 없다.
(죄의 성경적 개념)
그리스도론의 한 중심적 문제는 바로 죄의 본질에 관한 잘못된 개념에서 유래된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경적인 죄의 개념을 결정해야 한다. 세기를 걸치면서 이것은 여러 방법으로 해석되어졌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합당하는 것은 거의 찾기 어려웠다.
천주교회와 많은 신교들이 원죄를 가르친다. 이 교리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들이 존재하나, 기본 개념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죄인이라는 것이며, 우리가 단지 아담의 자손으로서 인류 가족에 속한다는 이유로 죄 있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여, 만약 예수께서 다른 인간들처럼 같은 죗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는 죄인이며, 태어남으로 죄를 가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게 된다.
복음주의적 신학자들과 화합하기 위하여 이러한 가설을 받아들임으로, 재림교회 새 그리스도론의 주창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 전의 본성을 취하셨다”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죄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만약 그가 아담의 타락 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는 이것을 가질 수 없다.
성경적으로 원죄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으므로, 전통적인 재림주의는 이 교리를 정죄 하던지, 아니면 단순히 무시하였었다. 엘렌 화잇은 그의 저서들을 통하여 이것을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직 한번, 이 말을 아담이 제일 처음 지은 죄를 가리키기 위하여 “원죄”라는 말을 사용하였었다. “모든 죄는”, 엘렌 화잇은 쓰기를, “원죄의 메아리를 일깨운다.” (2) 오늘날,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몇 신학자들도 원죄의 교리를 성경의 가르침과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한다. (3)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4)는 것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로마서 5:12)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성경 저자들은, 특별히 바울은 특별한 차이점들을 지적하였는데, 이것들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이해할 수 없다. 먼저, 행함의 원칙으로서의 죄와, 행동 속의 죄들에 관하여 혼동해서는 안 된다.
1. 힘으로서의 죄와 행동들로서의 죄들
성경은 시험의 능력으로서 단수로 나타난 죄와, 범법의 행동들로서 복수로 나타낸 죄들에 관하여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특별히 바울은 그를 “잡아가는” (로마서 7:23) “죄의 법”과, 그가 따로 분류한 “육체의 행위들”(갈라디아서 5:19-21, 디도서 3:3)을 분리하고 있다.
바울은 “죄에 팔린” 사람에 대한 분석에서, 죄의 원칙이 그 안에, 즉 그의 육체 안에 산다고 지적하였다. 이 원칙은 그의 지체속에서 행동하며, 마음의 “법과 전쟁을 벌인다.” 심지어는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여도”, “악이 나와 함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결과적으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14-23)
바울은 인류를 “죄의 법의 가두는” 법칙에 관하여 여러 표현들을 사용하여 언급하고 있다. 먼저 그는 이것을 “영의 마음”(phronema tou pneumatos)과 대조되는 “육체의 마음” (phronema tes sarkos)이라고 부른다 (로마서 8:6). phronema라는 단어는 “죗된 본성에 의하여” 또는 “영에 의하여” 살고자 하는 자의 애정과 의지와 이유를 가리킨다. 바울은 또한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육체의 욕심” (epithumian sarkos) (갈라디아서 5:16,17), 이것은 주로 “소욕(lust)”라고 번역되었다 (로마서 1:24; 6:12, 7:7). 마지막으로 “죄의 권능”은 (dunamis tes hamartias) (고린도전서 15:56) 인간 안에서 활동하며 인간을 죄의 노예로 만드는 그 원칙의 역동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표현을 통하여 바울이 죄의 활동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를 죄 짓게 만들려는 육체의 성향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들은 단지 성향이며, 아직 죄는 아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연적인 불순종의 성향은 우리가 그들의 유혹에 굴복할 때에 실제적인 죄로 된다.
유혹의 과정에 관한 분석을 통하여 야고보는 “정욕(lust-epithumia)”과 죗된 행동의 차이점을 정확히 확립하였다. 그에 의하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epithumia)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야고보서 1:14, 15)고 하였다. 다른 말로, 유혹의 근원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한일서 2:16)등은, 광야에서 예수께서 시험 당하신 것들을 포함하여, 유혹 받는 자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한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이러한 견해를 강조한다: “사단에 의하여 제시되고 일어나는 생각들과 감정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가장 강한 자에게도 일어난다; 만약 그들이 이것들을 마음에 품지 않고, 증오함으로 거절하면, 그 영혼은 그 죄에 감염되지 않고, 그 영향력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 (4) 유혹의 정도가 아무리 강할지라도, 그 유혹 자체는 죄가 아니다. “어떤 사람도 죄짓게 강요할 수 없다. 먼저 그가 동의해야 하며, 정욕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양심에 대항하여 죄악이 승리하기 전에, 영혼은 먼저 죗된 행동을 계획해야 한다. 유혹은 아무리 강할지라도 죄의 이유가 될 수 없다.”(5)
엘렌 화잇은 이렇게 적는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인성 안에서, 식욕과,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과, 세상을 숭배하는 것과, 이 생의 쾌락을 위하여 천국의 영원함을 희생하고자 하는, 인류를 맹렬히 공격하는 유혹들과 같은 무섭고 압도적으로 보이는 유혹들과 씨름하셨다.” (6) “그는 경험을 통하여 인류의 연약함과, 우리가 원하는 것과, 시험의 힘이 놓인 곳을 아시는데, 그 이유는 그가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 받으셨으나 죄 없었기’ 때문이다.” (7)
예수와 인간의 차이점은 육체와 유혹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와 같이 모든 면에서 시험받았기” 때문이다. 그 차이점은 예수께서는 육체의 유혹에 전혀 굴복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유혹에 굴복 당하였으며, 그럼으로 죄의 힘(로마서 7:18)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어떤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자 하더라도, 그는 자신 안에 거하는 죄의 힘을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로마서 7:18).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그가 바로 이 능력의 공급자이시다) “죄와 대항하되 피 흘리기까지”(히브리서 12:4) 하실 수 있으셨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확증한다: “비록 그(예수)는 모든 인류의 정욕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순결하고 고상하지 못한 어떤 한 행동이라도 하게 만들려는 유혹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으셨다.”(8)
예수께서 어떻게 죄 없이 “죗된 육체의 형상”안에 사실 수 있으셨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중요한 설명이 필요하다: “유전의 대 법칙”(9)에 의하여 자손들에게 전달되는 아담의 죄의 결과와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죄의 차이점.
2. 죄 진 자만 죄인이다
원죄설에 의하면, 육체의 소원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인이 되며, 또한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인류는 자연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된다. 원죄설은 왜 유아세례라는 것을 행하여 죄의 저주를 없애려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조와 관습은 전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원죄설의 locus classicus인 로마서 5:12절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바울은 이것을 모세 시대에 적용하면서 인류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14절)
성경은 죄(guilt)가 유전적으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오직 죄 진자만이 죄인이 된다. “아비는 그 자식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신명기 24:16, 열왕기하 14:6). 에스겔 선지자는 이 같은 법을 다음과 같이 반복하였다: “범죄 하는 그 영원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에스겔 18:20).
각 사람은 자신의 잘못으로 죄인이 된다. 결과적으로, 비록, 시편기자가 말한 것처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을지라도 내가 나의 조상들로 인하여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쓰기를 이삭과 레베카의 자녀들이 태어나지 않았을 때에 그들은 아직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로마서 9:11)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분명히 그들도 유전에 의하여 아담의 죄의 결과들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이렇게 하나님의 법을 범함으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죄인이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본성으로도 또한 유전적으로도 죄인이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처럼, “여자에게서 나고 율법 아래 난”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자녀들이 부모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참여하지 않은 부모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녀들은 부모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부모로부터 오는 유전과 본으로 인하여 아들들은 아비의 죄에 참여하게 된다. 잘못된 성향, 삐뚤어진 식욕, 타락된 도덕성과 또한 육체적 병과 연약함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삼 사대까지 상속된다.”(10)
아담과 하와의 자손들이 물려받은 것은 바로 죄에 대한 성향이며, 죄의 결과인 죽음이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뱀의 독은 치명적인 바이러스처럼 인성 안에 주입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살리는 백신을 공급하셨다.
(“죗된 육체의 형상 안에”)
지금까지 설명한 죄의 본질에 관한 빛에 의하여, 예수께서 죄 짓지 않고, 생각과 행동으로, 모든 퇴락으로부터 벗어나, “죗된 육신의 형상 안에서” 사는 것이 가능하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형상(homoiomati)”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관한 여러 논쟁들이 있었다. 분명히 이 단어는 닮음, 비슷함, 동일성 등을 강조하는 것이며, 다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 표현이 쓰인 3 구절에서, 이 단어는 언제나 육체와의 유사함을 나타내는 어떤 본질의 동질성을 가리키고 있다 (히브리서 2:17).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돕기 위한 위치에 있기 위해서 “그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한다” (히브리서 2:16, 17).
그렇지만, 이 뜻이 그리스도께서 육적인 사람을 “닮았다”라고 바울이 말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육체가 죗된 생활로 더럽혀진, 악한 성향의 노예가 되어버린 죗된 인간의 육체와 “닮았다”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닮음의 의미를 “죄의 법”이 거하는, 또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한일서 2:16)이 군림하는 그 육체에 국한시켰다.
야고보서 1:15에 의하면, 정욕의 단지 죄의 아비일 뿐이며, 죄가 죽음의 아비이나 죽음 자체가 아닌 것처럼, 정욕은 죄 자체가 아니다. 이러한 정욕들은 모든 인류가 맞아야 할 유혹들이며, 예수께서도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았기”(히브리서 4:15) 때문에 이 유혹들과 맞서야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유전적이고 잠재적으로 죗된 그의 악한 성향이 죄가 되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언제나 “악을 버리고 선을 선택할 줄”(이사야 7:5) 알았다.
엘렌 화잇과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성향들”과 “후천적으로 얻어진 그릇됨을 향한 성향”을 분리한다.(11) 만약 예수께서 악한 성향을 물려받으셨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에 따라 “행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께서 “경험으로서… 우리의 유혹의 강도”(12)를 또는 “인류의 정욕의 힘”(13)을 아시지만, 그들의 유혹의 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고 적은 것이다.
유전 받은 성향과 후천적으로 얻어진 성향에 관하여 가장 좋은 설명은 베이커에게 보내는 엘렌 화잇의 편지에 나타난다. 이 설명은 신 그리스도론의 주창자들이 그리스도께서 타락하기 전 죄 없는 아담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하여 가장 크게 의존하는 문서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사실,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타락하기 전의 아담의 본성과 대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서 죗된 성향이 있는 인간으로 제시하지 말라. 그는 둘 째 아담이시다. 첫 째 아담은 순결하고, 죄 없는 존재로서 창조되었고, 그에게 어떠한 죄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는 실패할 수 있었으며, 그는 범죄 함으로 실패하였다. 죄로 인해서 그의 자손들은 유전적인 불순종에 대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는 그 안에 인성을 취하셨고, 인성이 시험받는 대로 모든 면에서 시험 받으셨다. 그는 죄 지을 수 있었다. 그는 타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 순간이라도 그분 안에 악한 성향은 존재하지 않았다.”(14)
예수께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악한 성향”과 아담의 모든 자손들이 물려받은 “유전 받은 불순종의 성향”을 같은 것으로 취급함으로 신 그리스도론의 신학자들은, 중립적인 신학자들처럼, 베이커에게 보내는 엘렌 화잇의 편지를 그녀의 다른 글들과 모순되게 만듦으로 잘못 해석을 하였다.
엘렌 화잇은 베이커에게 쓰기를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다룰 때에” “당신은 모든 주장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내세움으로 당신의 말들이 그 말이 암시하고 있는 뜻 이상의 것이 되지 않도록 하여, 신성과 연합된 그의 인성에 관한 명확한 이해가 희미해지거나 없어지지 않도록 하라.”(15) 그녀는 덧붙이기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에 관한 주제들에 접근함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나는 안다”고 하였다.(16)
그럼으로 이렇게 썼다: “조심하라, 당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생각할지 아주 조심하라. 그를 사람들 앞에서 죗된 성향이 있는 인간으로서 나타내지 말라.”(17) “어떠한 경우라도, 그리스도에게 타락의 흔적이나 경향이 있었다거나, 어떤 경로라도 그가 죄에 굴복하였다는 경미한 인상이라도 사람들 위에 남기지 말라…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만들려고 하는 시도에 대한 경고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18)
비록 엘렌 화잇이 한 쪽으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죄 없음을 주장하였지만, 다른 쪽으로는 그의 죄 없는 본성은 “가장 극심한 상황아래서”(19) “인간이 처해있는 모든 유혹의 힘을 그가 이해하기 위하여”(20) 얻어진 것이라고 또한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때라도 사단의 복잡한 유혹들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한번도 그를 유리하게 만들기 위하여 사단 편에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았다. 사단은 그가 계속 할 수 있을 만한 어떠한 구실도 찾지 못하였다.” “‘기록하였으되’가 그의 저항의 무기였고,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가 쓸 수 있는 성령의 검인 것이다.” (21)
분명히,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모든 면에서 우리처럼 시험을 받았으나, 죄는 없으”셨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지금까지 그러하였듯이 앞으로도 신비로 남을 것이다.”(22) 바울은 심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디모데전서 3:16).
신 그리스도론 자들이 엘렌 화잇의 언급에 의존하여-특히 베이커에게 보내는 편지-주장함으로 이 편지가 초기 선구자들의 가르침과 완전히 동의하는 것이었으며, 사도들의 가르침과도 화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겠다.
(성육신 하신 이유)
의심할 바 없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은 언제나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신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밀은 성육신의 이유가 아니라 방법에 더 관련 된 것이다. 성경은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지, 또는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의 개성 안에서 연합될 수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그의 오심의 이유를 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그 빛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세기를 걸쳐서 신학자들은 왜 성육신 하셨는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 혼란 된 답변을 하여왔다. 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설명하려고 하였다. 형벌의 대속의 이론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통, 또는 죄 없는 자의 희생의 피가 필요한 것처럼 만들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존재자로서, 본질적으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시는”(출애굽기 34:6,7)분으로 나타내었다.
이사야 53장은 어느 정도까지 하나님의 선물에 관한 인간의 이해가 잘못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렇지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사야 53:4,5). 분명히, 예수께서는 성난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으로서 바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판을 실행하기 위하여 예수께 복수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오심의 이유를 설명하는 모든 성경절들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구속의 경륜의 창시자로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 나타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 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hyper] 내어주신 이” (로마서 8:32). 예수께서는 이것을 성만찬 예식을 통해서 확고히 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hyper] 주는 내 몸이라…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hyper]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19,20)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오심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큰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멸망에 이르느니”(베드로 후서 3:16)라고 편지서에 말한 베드로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한다. 바울의 그리스도론은 실제로 가장 어려운 문제들 중 하나이다. 그렇지만, “죄에 팔린” 그 곤고한 사람의 입장(로마서 7:14-24)을 설명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죗된 육체의 형상 안에”(로마서 8:2-4) 보내신 이유를 설명하는 부분보다 더 분명히 나타난 것은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 죽음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고 스스로 던진 질문에, “하나님께 감사리라로다-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이다”라고 대답한다(로마서 7:24,25). 그리고 사도는 하나님의 구속의 활동의 4가지 이유를 요약한다..
1.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하여”
이 이유는 근본적이고 모든 다른 이유들을 정당화시킨다. 왜냐하면 분명히, 만약 태초에 죄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불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 때문에, 또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으며,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3:16). 성경 전체는 죄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자의 법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자마자 하나님께서는 구속의 경륜을 나타내셨다. 우리의 첫 부모에게 죄의 결과를 나타내시기 전,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씨로부터 태어나실 구세주에 관하여 약속하셨다.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나, 그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었다 (창세기 3:15).
그러므로, 세기를 걸쳐서, 구세주에 관한 약속은 재확인되어졌다. 가브리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다니엘에게 메시아가 정해진 시간에 그의 구속의 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실 것을 계시하셨다: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다니엘 9:24). 궁극적으로, 예수께서 침례 요한에게 요단강 변에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요한은 그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양”(요한복음 1:29)으로서 선언하였다.
그리스도의 사명이 일단 완결된 후, 바울은 이와 비슷한 언어로 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죗된 육체의 형상 안에” 즉, “육체에 죄”를 정하시기 위하여 보내셨는지를 설명한다.
2. “육체에 죄를” 정하시기 위하여
분명히, 이 정하심은 단지 “대리적으로(vicariously)”, 또한 하나님 편에서 단순한 법적 처리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죄 때문에 말씀은 육신이 죄셔야만 (요한복음 1:14) 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시고” (히브리서 2:17), 그가 “우리처럼 시험받으나, 죄 없이”(히브리서 4:15) 되실 수 있었다.
“죄를 육체에” 정하는 것은,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죄를 “그의 육체의 몸 안”(골로세서 1:22)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항하여 승리하셨고, 죄에 대항하여 피 흘리시기까지 저항하셨다 (히브리서 12:4). “그의 육체”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를 이룰 “새롭고 산 길을 여셨다” (히브리서 10:20).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2:24)고 선언한다.
더욱이, 죽음과(디모데후서 1:10) 모든 “마귀의 일”(요한일서 3:8)을 폐하시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혈육”에 참여하셔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셨다” (히브리서 2:14).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는” “대 제사장”(히브리서 7:26)이 되시기 위한 조건이었으며,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기 위한” 자격을 얻기 위한 조건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바울이 말한 세 번째 이유이다.
3. 인류를 “죄의 법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죄를 육체에 정함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인간을 죄의 속박에서 구출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브리서 2;18; 4:15). 그러므로 죄로부터 인간을 구해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주된 목표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거룩한 저자는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몸값을 내야만 하는 노예제도를 실행하고 있던 사회의 용어를 써서 표현하였다. 예수께서도 그의 사명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셨다. 예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는 청중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덧붙이셨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한복음 9:34, 36). 왜냐하면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마가복음 10:45; 마태복음 20:28)이기 때문이었다.
바울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였다. 그는 갈라디아서에 이렇게 썼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문자저으로: “인수하다”]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라디아서 4:4, 5). 디모데서에서 그는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으니”(디모데전서 2:6)라고 상기시켰으며, 디도서에서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문자적으로: 해방]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디도서 2:14)고 적었다. 짧게 말해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들을 “없이 하려고” (요한일서 3:5) 오셨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해방”(요한계시록 1:5; 요한일서 1:7-9)시키기 위해서도 오셨다는 것이다.
4.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하여”
이것이 바로 그의 아들을 “죗된 육신의 형상”안에 보내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바울의 마지막 진술을 소개하는 연결구로 쓰인 “…하기 위하여”(ina)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활동의 목적을 표시하고 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이 의롭다함-justification (dikaiosune)이 아니라 율법의 의로운 (dikaioma) 요구를 가리킨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상태, 즉 죄의 법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가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능력이 부족하다. 더욱이, 법은 스스로 우리를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킬 수 없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21). 그러나, 이 의미가 계명은 폐하여졌고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린도전서 7:19)고 주장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법에 표현된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오셨고, 이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모본을 보이셨다.
인류의 혈육에 참여하심과, “육체 안의 죄”에 대한 그의 승리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원칙이 되셨으며, 모든 죄인들을 “믿어 순종케 하는”(로마서 1:5; 16:26) 능력을 주실 수 있는 변화의 능력이 되셨다. 인간적 결속을 통하여,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을 지라도, 바울은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우리에게 보증의 말을 한다 (로마서 5:19).
그리스도께서 중보자 되시는 새 언약과의 조화 속에서 법은 더 이상 돌비에 적혀있는 상태로 남아있지 않는다.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히브리서 10:16).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법의 의는 우리 안에 이루어질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육체를 따라 걷지 말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영을 따라가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을 통한 승리)
로마서의 같은 문구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이유만을 설명하지 않고, 죄에 대한 그의 승리의 비밀과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사도는 두 번 영에 관하여 언급한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영”이심을 말하고, 그 다음,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1. “영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그리스도
그리스도론의 한 본질적인 계시는 바로 그리스도께서도 육체에 계실 때에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디모데전서 3:16) 받았다는 사실이다. 죄와 죽음에 대한 그의 승리로 인하여, 예수께서는 “성결의 영으로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로마서 1:4). 비록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로마서 1:3)이었지만, 마태는 그가 성령에 의하여 잉태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마태복음 1:18, 20). 시편기자에 의하면, 그는 태어나심부터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었다. (시편 22:10).
그리고, 그가 침례를 받으실 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았다. 성령은 그를 또한 광야로 인도하여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갔다” (마태복음 4:1). 하나님께서 예수께 “성령을 한량없이”(요한복음 3:34) 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썼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골로세서 2:9).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었다” (고린도후서 5:19).
인류의 구원을 위한 그의 모든 사업처럼, 이 세상에서 예수의 전 생애는 그 안에 있었던 “생명의 성령”의 인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사도생전 10:38). 성령 없이, 예수께서는 그가 이루셨던 어떠한 일도 행하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아들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나니” (요한복음 5:19, 30). 더욱이, 하나님의 성령이 없이, 그는 그의 육신 안에서 죄의 능력을 정복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그는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대 제사장”(히브리서 7:26)이 되시기 위하여 자신을 성화 시켰다 (요한복음 17:19).
그리스도의 승리로부터 어떤 이익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얻기를 원하시는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바울은 두 아담의 표상학을 거론한다. 그는 범죄 한 아담을 대신하도록 정한 예수를 새 아담으로서 제시한다.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15:45) 다른 말로, 생명을 창조하는 영. 그러므로, 인간적 결속의 원칙에 따라, 첫 아담의 불순종에 의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로마서 5:12). 그러나 둘 째 아담은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이 생명에 이르렀다” (로마서 5:18). 사도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고린도전서 15:49). 그러나, 한 조건에 여기에 존재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로마서 8:9)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변화됨
예수를 죄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한 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을 가지고, 일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것을 처음으로 설명한 분이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너는 거듭나야 한다.” 바람의 활동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한복음 3:5-8).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 곧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설명하기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7:39).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의 승천에 관하여 말씀하신 후 그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재 확신시키신 것이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한복음 16:7,8).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라” (요한복음 16:13).
그의 부활직후, 예수께서는 그의 약속을 갱신하셨다: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사도행전 1:5). 그리고 그는 이렇게 반복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사도행전 1:8).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들에게 약속하셨고, 오순절에 성취되었던 그 약속은 성령의 호소에 응하는 모든 자들에게도 주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바 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8:18) 예수께서는 인류에게 진리를 분명히 보이시고, 그가 하신 것처럼, 그들도 성령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모든 인류를 그에게로 이끄신다 (요한복음 12:35).
오순절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그의 성령을 부어주셨다 (누가복음 11:13). 누구든지 성령을 받는 자마다 성령이 그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그 안에 거하신다. 예수께서 성령을 통하여 “육체 안의 죄”를 정복하신 것처럼, 예수께서는 그의 자녀들도 성령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신다. 진정으로 베드로후서 1:4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그의 사업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성령의 길을 여셨으며, 성령에 의하여 거듭난 새로운 세대의 인류를 탄생시키셨다.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거절할 수 있게 하며, 또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신다 (디도서 2:12, 13).
엘렌 화잇은 믿는 자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성령의 역할에 관한 재림교인들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완전하게 요약한다: “세상의 구세주께서 이루신 것들을 효력 있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령이다. 마음이 순결하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인함이다. 성령을 통하여 믿는 자들은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고 후천적인 악한 성향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신성의 능력으로서, 또한 그의 성품을 그의 교회 위에 새기기 위하여 성령을 주셨다.” (23)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죗된 성향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갈바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2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공헌하는 자들의 생활은 죄의 용서와, 또한 “노력과 자아부정이 없고, 세상의 헛된 것들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하지 않는 쉬운 종교”(25)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은 그리스도인들을 구세주의 모본을 따라서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셨다. “이 땅에서 사신 그리스도의 삶을 남녀들은 그의 지도아래서 그의 능력을 통하여 살 수 있다. 사단과의 그들의 투쟁 속에서, 그들은 예수께서 가지셨던 그 모든 도움을 가질 수 있다.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의하여 자신을 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은 승리자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 (26)
(결론)
이 장을 끝마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굴욕에 관한 엘렌 화잇의 서신을 마지막으로 인용할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더 이상 분명히 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방법으로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먼저, 엘렌 화잇은 성경적 그리스도론의 기본적인 자료를 언급한다: “그는(그리스도) 천사의 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죄의 더러움만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본성과 완전히 동일한 인성을 취하셨다.”
그리고, 일반 교회들의 신조들과 전적으로 반대되는 이 진리를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을 깨달은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 속에서, 일반적이고 세상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삐뚤어진 생각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었던 사단의 유혹에 굴복할 수 있었던 가능성이 그의 인성을 타락시켰다거나, 그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죗된, 타락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성과 결합된 신성은 그로 하여금 사단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시험은 아담과 하와의 것보다 더 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타락되었으나 퇴폐 되지 않은, 그가 사단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 때신 받아들이지 않는 한 퇴폐 되지 않을,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유혹에 굴복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를 인간의 완전한 모본이 될 수 없는 곳에 두는 것이다.” (27)
계속되는 문구는 만약 예수께서 우리와 다른 인성 속에서 죄 없는 삶을 사셨다면, 그리고 만약 그가 “범사에 그의 형제들과 같이 되지”(히브리서 2:17) 않으셨다면, 그는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없을 것이라고 명확히 설명한다. 이것은 바로 요한이 그의 복음서의 서론에서 요약한 진리와 같은 것이며, 이것은 성경적 그리스도론의 핵심이다: “말씀”이-“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2, 14, 16, 12).
(참고 문헌)
1See Jean R. Zurche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New York: Philosophical Library, 1969).
2Ellen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Apr. 16,1901.
3See our chapter 7, and Emil Bmnner, Dogmatics, vol. 2, p. 103.
4E.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Mar. 27,1888.
5_, Testimonies for the Church, vol. 5, p. 177.
6_, Selected Messages, book 1,. p. 95.
7_, The Ministry of Healing, p. 71.
8-, In Heavenly Places, p. 155.
9_, The Desire of Ages, p. 49.
10-‘ Patriarchs and Prophets (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Pub. Assn., 1890), p. 306. (Italics supplied.)
11_, Counsels to Parents, Teachers, and Students (Mountain View, Calif: Pacific Press Pub. Assn., 1913), p. 20; Christ’s Object Lessons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 Assn., 1941), p. 330.
12_, The Ministry of Healing, p. 71. Ellen G. White letter 8, 1895, in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llen G. White Cornrnents, vol. 5, p. 1129. (Italics supplied.)
13_, In Heavenly Places, p. 155. (Italics supplied.)
14Ellen G. White letter 8, 1895, in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llen G. White Cornrnents, vol. 5, pp. 1128, 1129. (Italics supplied.)
15Ibid.
16Ibid.
17Ibid.
18Ibid.
19Ibid.
20Ibid.
21Ibid.
22Ibid.
23E. G. White, The Desire of Ages, p. 671.
24_, Review and Herald, Feb. 2,1992.
25-, The Great Controversy, p. 472.
26_, Testimonies for the Church, vol. 9, p. 22.
27Ellen G. White manuscript 111,1890. Extract from Joumal14, pp. 272-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