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에 오셔서 사셨던 그리스도 (우리를 체휼 하셨던 분) (Touched with Our Feelings)
제 15장 비평과 평론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문제가 오직 신학자들만이 가지고 있는 흥미와 관심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재 이 문제는 많은 교인들에게 문제를 만들고 있으며 이 문제들로 인하여 교회들은 갈라질 위험에 놓여있다. 한 독자가 어드벤티스트 리뷔우에 보낸 다음의 편지는 그 심각성을 절실히 표현하고 있다.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에 대하여 반으로 갈라져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은 안식일 학교 때에도, 교회가 끝난 후에도, 안식일 식사 때에도, 기도회 때에도, 전화할 때에도-어느 곳에서나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논쟁 때문에 사람들은 실제로 친구들을 잃고 있다. 올바른 재림교인이 되기 위하여 이 문제가 결정되어져야 하는가? 이것은 나를 화나게 한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1)
이러한 심각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이것을 단지 “큰 비밀”이라고 말하면서 우리가 “이 문제에 관한 교회의 주체를 연구하는 것이 신뢰할 만한 것이며, 신랄한 논쟁을 피하는 길이라는 것을 가정으로 우리가 성경과 예언의 신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2)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는 반드시 이 중대한 진리를 이해하고자 애걸하는 마음을 만족시킬 수 있으며, 이 문제로 인하여 혼란 된 상태에 있는 양심을 달랠 수 있는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묶는 금 사슬이다. 이것이 우리 연구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3)
구속의 경륜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인성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사도 요한의 권고에 따라 이것을 그들의 그리스도론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한일서 4:2,3).
이 성경절은 우리가 구속의 문제가 걸려있는 교리를 다루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의 독자가 질문한데로 단지 “좋은 재림교인이 되기 위하여 결정해야될 것인가?”
(이것이 필수적인 문제인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대립이 중점적인 문제로 발전됨에 따라서, 많은 재림교인들은 이 문제가 꼭 결정 내려져야 하는 필수적인 문제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되었다.
1978년 초, 대총회장 로버트 피어슨은 이 문제가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 문제에 관한 분리가 끝나게 되기를 바랬다. (4) 같은 이유로 1980년 대총회 때에 결의된 “아들”에 관한 기초교리 사항 4에도 이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었다.
어떤 특정 교리를 지적으로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구원의 필수적인 사항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지 나이트는 다음과 같이 적절히 설명하였다: “우리의 신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학의 구주께서 하시는 것이다.” (5) 예수를 우리의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고 그의 거룩한 삶에 참여함으로 우리는 그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다. 여러 세기를 걸쳐서 오늘날 우리가 논하는 것 같은 구체적인 그리스도론을 논하였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거의 드물었다. 그러나 십자가상의 강도처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복음을 찬양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복음을 숭배하지 말고 그 복음의 구주를 숭배해야 한다,”라고 엘렌 화잇은 말한다.
그러나, 복음 또는 교리의 내용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 삶과 영적인 자라남은 오직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베소서 4:21)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에베소서 1:17)기를 기도하였던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골로세서 3:10) 자라나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히브리서 5:12)에 머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비밀” (고린도전서 4:1)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또한 특별히 “경건의 비밀” 즉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3:16).
그리스도인 경험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의 구속의 사업에 대한 이해에 직접 관련되어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에 대한 이해이다. 성육신의 의미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굴욕의 실제성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그의 구속사업(Work of Justification)에 대한 실제성을 오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재림교회 그리스도론의 역사는 우리가 만든 잘못된 해석들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적어도 세 가지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 중 한 사실이다. 분명히 그 모든 해석방법들이 다 성경과 엘렌 화잇의 가르침에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연구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대립적 요소들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행해야 한다. 각 그리스도론에 대한 짤막한 요약을 다음에 실었다.
(현존하는 3가지 해석들에 관한 요약)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의 중심이 되는 분에 관한 재림교회의 사상이 불분명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그 다른 입장들을 잇는 공통적인 요소들을 검토해보자. 기초교리 조항 4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간의 아들이신 예수에 관한 재림교회의 믿음을 매우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음은 1980년에 의결된 내용 전체이다:
“하나님, 영원한 아들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하셨다. 그를 통하여 모든 것들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성품이 계시되었으며, 인류의 구속이 완성되었고, 세상이 심판을 받았다. 영원한 진실된 하나님께서 또한 진실된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으며,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그는 인간으로서 사셨고 시험을 경험하셨으나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완전히 나타내셨다. 이적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고 또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우리를 대신하여 자발적으로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시기 위하여 승천하셨다. 그는 그의 백성들을 마지막으로 구출하고 모든 것들을 복원하기 위하여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7)
분명히 이 조항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대립적인 문제에 관하여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1931년까지 바뀌지 않고 지속된 1872년 신조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아담의 씨 안에 있는 본성을 취하셨다”고 밝히고 있다.(8) 그러나 1950년대 이후로부터 이 특별한 부분에 대한 다른 의견들이 대두됨에 따라 1980년 대총회 대표자들은 이러한 어법을 제하여 버리고 공통적인 신조만을 나타내는 표현방법으로 대치시키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것은 논쟁을 잠재우지 못했으며, 도리어 다른 견해들이 더 분명히 구체화되고 대안이 나오기까지 더욱 강해졌다. 우리는 이것을 대안(alternative)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사상은 양쪽 그리스도론, 즉 신학적으로 이들을 Postlapsarian 또는 Prelapsarian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론의 양쪽 모두의 기본 사상을 빌려쓰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 3가지 그리스도론의 요약이다.
1. 전통적 또는 역사적 그리스도론
이 입장은 재림교회 안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Postlapsarian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타락한 인성 즉 아담이 타락한 후의 인성을 가지고 오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육체는 다른 모든 인류의 것과 같았다고 간주한다. 이 육신은 육적인 육신이 아니라, 유전의 법칙에 의하여 죄에 대한 성향-그러나 예수께서 한번도 굴복하지 않으신 성향을 가지고 있는 육신을 가리킨다. 비록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받았으나”(히브리서 4:15) 그는 범죄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육체에 죄를 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셨다 (로마서 8:3,4).
이 가르침은 비록 신약성서에 기초하고 있으나 일반 기독교의 교리와는 반대된다. 그렇기 때문에 재림교인들이 종종 이단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다른 인류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재림교인들이 그들의 교회가 재림운동의 시작부터 1950년대까지의 한 세기동안 이러한 입장(Postlapsarian)을 가르쳐 왔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타락한 인성 안에서 죄 없이 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몇 재림교회 신학자들은 새로운 그리스도론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2. 새 그리스도론 또는 Prelapsarian 입장
이 새 그리스도론의 기본 논리는 잘 알려져 있다: 예수께서는 “아담의 죄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 즉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인성이다. 실제로, “그 안에 죄가 없었으며, 모든 아담의 후손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유전 받은 또는 후천적으로 습득된 죄는 없었다.” (9) “만약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받으셨다고 하여도” 그는 아담으로부터 우리의 죗된 경향을 유전 받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것은 안으로부터 시험받으신 것이 아니다.
짧게 말해서, “예수께서 어떤 것을 취하셨든지 간에 그것이 그의 본질적이거나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예수께서 취하신 모든 것, 그가 지신 모든 것, 그것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벌이거나 짐이던지, 질병이거나 인성의 연약함이던지 간에 모든 것은 우리를 대신하여 (vicariously) 취하시고 지신 것이다.” (10) “우리의 대리자로서 그는 우리의 죗된,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과 시험들을 우리의 대리자로서 그가 우리의 죄악을 지신 것처럼 지셨다.” (11)
왜 전통적인 가르침이 갑자기 거절당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전통적인 입장에 대하여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정통적”인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새 그리스도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론을 엘렌 화잇의 글에 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논쟁의 가장 치열한 핵심은 특정 엘렌 화잇의 증언에 대한 해석에 집중되고 있다.
3. 대체적인 입장
대체적인 그리스도론은 가장 최근의 것이며, 오늘날 가장 널리 퍼진 그리스도론이다. 이것은 교단 안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있는 200명이 넘는 교회 지도자들과 학자들이 준비한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신조(12)에 나타나 있다.
선구자들의 그리스도론에 화합하여, 이 입장은 예수께서 아담이 타락한 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 이 가르침의 후원자들에 의하면,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영광과 능력” 안에 오시지 않으셨으며, 또한 아담의 죄 없는 본성 안에 오시지도 않았다. 그와 반대로, 그는 4000년간의 인류의 퇴락으로 연약하여진 인성을 가진 하인의 형태를 취하셨다.
그렇다고 이 뜻이 그리스도께서 “악한 성향”을 아담으로부터 유전 받았다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몸은 육체적인 퇴보의 영향아래 있었고, 인간의 육체적 조직의 연약함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타락한 인류와 관련된 악한 성향들은 유전 받지 않으셨다.
엘렌 화잇이 이용한 한 출처, 즉 성공회 목사 헨리 멜빌로부터 빌려온 한 공식에 의존하여 그들은 예수께서 아담으로부터 오직 “순수한 연약성(innocent infirmities)”과 “배고픔, 고통, 연약함, 슬픔, 그리고 죽음 등과 같은 것들만” 유전 받았다고 주장한다. “비록 이것들은 죄의 결과들이지만 이들은 죗되지 않다.” (13)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기 전과 후의 아담 모두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다른 모든 타락한 인류들과는 달리 그는 악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이 점에서 그들은 새 그리스도론과 동의한다.
이 그리스도론들은 인간 유전에 기초하여 설명되어졌다. 분명히 서로 다른 해석들은 그 안에 어떤 실수가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엘렌 화잇은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구주의 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 말미암아 많은 실수를 한다. 우리가 그의 인성에 인간이 사단과의 투쟁에서 가질 수 없는 능력을 부과한다면 우리는 그의 인성의 완전함을 파괴하는 것이다.” (14)
이 언급은 어떠한 해석을 할 때에 반드시 재어보아야 할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성경적인 그리스도론으로 돌아가기 원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죗된 인성에 참여하신 사실을 축소시키거나 불분명하게 만드는 모든 해석들을 재차 고려해야 한다.
(잘못된 값)
해마다 열리는 엘렌 화잇 협회 심의회에서 우리는 선구자들의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연구할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그리스도론의 특정 부분을 비판하기도 한다. 잘못된 것들은 (어떤 것들은 매우 심각한 것들) 상정되어져 고쳐진다.
가장 근본적인 잘못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간과한 것이다. 재림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하여 만장일치로 선택되어 한 세기가 넘도록 지속된 결정을 철저한 검토 없이 잘못된 것으로 취급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새 그리스도론의 지지자들이 교회의 공식적인 문헌들을 조금이라도 검사해보았더라면, 역사의 빛 아래서, 그들은 오직 소수의 재림교인들만이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 즉, 아담의 타락한 후의 인성을 취하셨음을 주장했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이들을 “책임성 없는 극단주의자”들에 속한 “잘못된 소수의 입장”(15)이라고 감히 주장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욱 심각한 잘못은 엘렌 화잇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것이 있으며,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새 그리스도론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한다. 엘렌 화잇의 글의 어느 곳에도 이러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이와 반대되는 언급은 수 백 번이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사람들은 엘렌 화잇의 “모든 영감의 글 가운데 오직 서 너 군데만이”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음을 암시하고 있다고 쓸 수 있는가? (16)
1950년대 성육신의 문제를 같이 논하였던 복음주의적 탐구자들이 그들의 대부분의 비평을 Bible Readings for the Home Circle에 기초하였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책은 그리스도께서 “죗된 육체”안에 오셨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들이 이 표현을 알 수 없는 실수로 “슬쩍 끼어 들어온 것”(17)이라고 믿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 책은 실제로 1950년대의 변화가 오기 전까지 재림교회의 일반적인 신조를 대표하는 책이었다.
마지막으로, 신 그리스도론이 제시된 방법에 또 다른 잘못이 포함되어 있다. 교리에 관한 재림교회의 대답이라는 표제 하에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출판한 사실은 정당한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왜 교리에 대한 답변 안에 포함된 신 그리스도론이 Bible Reading에 전에 포함되었던 것에 비하여 더 성경적이라고 단정지어진 이유가 무엇인가? 이 질문의 응답은 여러 다른 문제들에 관한 비판적 검토로만이 가능하다.
(교회가 거절한 교리)
신 그리스도론은 그 후원자들에 의하여 재림교회의 “새로운 이정표”로서 발표되어졌다. 두말할 것 없이 재림교인들에게 이러한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반 기독교회들이 옛날에 내세웠던 가르침으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인성, 즉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것 같은 인성을 가졌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천주교회 공의회는 성모 마리아에 의한 무염시태설을 만들게 되었다. 신 교회들은 이와 반대로 어거스틴의 원죄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설을 기반으로 그리스도론을 구축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들과 달라야만 하였는데, 그는 죄인도, 죗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하실 때에 아담의 타락하기 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재림교회 선구자들은 무염시태설과 원죄설을 반대하였다. 재림교회로 새로 개종된 몇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을 가지시고도 죄 없이 사셨다고 가르친 선구자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엘렌 화잇에게 보내어진 여러 편지들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같은 인성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는데, 만약 그렇다면 그도 비슷한 시험에 굴복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화잇부인은 이렇게 썼다: “만약 인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의 모본이 될 수 없으며, 만약 그가 우리의 본성에 참여하지 않으셨다면 인간들이 시험받았던 것처럼 시험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가 시험에 굴복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의 조력자가 되실 수 없다.” (18)
신 그리스도론은 이러한 옛 기독교 사상에 되돌아간 것이며 또한 재림교회가 공식적으로 거절한 신조로 돌아간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육체 운동이 만든 불행한 경험을 기억해야 한다. 이 운동도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하기 전의 인성을 취하셨고, 그러므로 그는 에덴 동산에 존재하였던 인성을 취하였다”(18)라고 가르쳤었다.
이 가르침은 1901년 대총회 당시 논의되어 거절되었다. 엘렌 화잇에게 이 문제가 알려지자 화잇부인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돌아와 직접 이 거룩한 육체 교리를 반대하였다. 화잇부인은 이것을 “잘못된 교리들과 방법들”로서 또한 “거짓말의 아비가 준비한 인간적 이론의 값싸고 비참한 발명품”(20)이라고 표현하기에 머뭇거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 그리스도론의 후원자들은 재림교회 교리의 역사를 논할 때에 이 사건을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Movement of Destiny의 저자는 선구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다른 견해들을 어떻게 이겨냈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다루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단결된 견해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는 여러 장을 1888년 기별과 와그너와 존스의 역할에 대하여 할애하였지만 그들의 그리스도론에 대해서는 큰 침묵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다.
(편향적인 방법)
1956년 9월 미니스트리 잡지에 나타난 새 그리스도론의 첫 언급은 9개의 엘렌 화잇의 인용문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인용구들에 대한 논평이나 성경 관련 구는 제시되지 않았다. 여기 사용된 표제는 새 그리스도론의 기본 개념을 설명하고 있다: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죄 없는 인성을 취하심.” 그리고 각 인용구들이 제시되어졌는데, 주개념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소제들이 사용되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인성을 취하셨다”; “타락된 죗된 본성이 아닌 인간의 형태를 취하셨다”; “아담의 죄 없는 본성을 취하셨다”; “완전한 죄 없는 인성”; 등. (21)
우리가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이 문서에 사용된 엘렌 화잇의 증언들이 주어진 소제목들과 실제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엘렌 화잇은 그 소제목들이 암시하는 것들을 절대로 쓰지 않았으며, 이와 반대로 정반대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입장의 글들은 하나도 인용되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일반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입장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분명한 엘렌 화잇의 입장으로서 받아들임으로, 편집인들은 그들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편향적으로 선택된 인용구들을 객관적인 문맥적 기초 없이 출판하였다.
Movement of Destiny에 요약된 언급은 또 다른 전형적인 예를 제시한다. 참조문 없이 인용된 각 언급들은 조심스럽게 검토되어져야 하며, 그 글과 이어지는 다음 구절과 연결되어져야 하며, 엘렌 화잇의 전반적인 가르침에 의하여 설명되어져야 한다. (22) 다음의 한 언급을 예로서 제시하겠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같았다-‘순결하고, 죄 없었으며, 죄의 흔적이 없었다’.”(23)
이것은 원문을 해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인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같았다”라는 한 것은 겉으로 보기에 정말로 엘렌 화잇의 펜으로 써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글을 쓴 저자에 의한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인 “순결하고, 죄 없었으며, 죄의 흔적이 없었다”라는 글은 엘렌 화잇이 직접 쓴 것인데 이것은 아담을 설명하기 위하여 쓰인 것이지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 그 원문을 소개한다: “첫 아담은 순결하고 죄 없는 존재로서, 죄의 흔적 없이 창조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 안에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는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성이 시험받는 것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셨다.” (24)
만약 W.H.L 베이커에게 보내는 엘렌 화잇의 편지가 충분한 설명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시대의 소망에 나온 다음의 증언은 엘렌 화잇이 이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어떤 의심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인성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유혹자로부터 시험받았을 때에는 그에게 어떠한 죄의 영향도 없었을 때였다. 그는 완전한 인간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음과 몸의 충만한 활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에덴의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단과 대항하시기 위하여 광야로 이끌리셨을 때에는 그렇지 않았다. 4천년간 인류의 체력과 정신적 능력, 그리고 도덕적 가치가 퇴보되어 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퇴보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써만 그는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셨다.” (25)
“잘못된 방법”에 관한 또 다른 예는 베이커에게 보내는 편지 안에 기록된 언급들에 편중함으로 시대의 소망에 나타난 확실한 언급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오직 균형에 관한 모든 감각을 잃어버린 자만이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엘렌 화잇이 사용한 “타락한 본성”과 “죗된 본성”이라는 말이 나타나는 “서너 군데”와 베이커에게 보내는 편지가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방법들과 이론들”에 대하여, 오직 모든 가능한 방법들과 사용된 용어의 의미들을 참작하는 건강한 해석방법만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일치된 해석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신신학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극소수만이 신신학의 설립자들이 이루어 놓은 잘못된 방법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한 논쟁점만-실제로 한 단어-이 사용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이 정밀한 검사를 통과할 수 있을까?
(허구적 논쟁, 오도시키는 표현들)
교리에 관한 질문들 책 안에 사용된 방법과 체계는 어떤 면에서 신 그리스도론의 기본 문서에 쓰인 것들과는 다르다. 여기서 신 그리스도론의 지지자들은, 비록 “그의 인성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하고 죄 없었다”(26)는 단호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러나 더 이상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죄 짓기 전의 죄 없는 본성을 취하셨다”고 뚜렷하게 지지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이시며, 죗된 인간의 육신의 ‘형상’안에 오셨음(로마서 8:3)”(27)을 부인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엘렌 화잇이 “경우에 따라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죗된 본성” 또는 “타락한 본성”이라는 표현을 썼음을 인정한다.(28)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어떠한 것을 취하셨던지 간에 그것은 타고난 또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하게 명시한다. “예수께서 취하신 모든 것들, 그가 지신 모든 것들은, 그것들이 우리의 범죄 함으로 인한 짐이던지 형벌이던지 또는 우리 인성의 병이던지 연약함이던지 간에 모든 것들은 대리적(vicariously)으로 지시고 취하신 것이다.”(29) 교리에 관한 질문들 책의 저자들은 “엘렌 화잇이 경우에 따라서 죗된, 타락한 그리고 저하된 인성을 언급할 때에 이 모든 것들은 이러한 의미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30)
정말로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죄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단순히 대리적으로 취하셨다고 썼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논쟁점이다. 실제적으로 엘렌 화잇은 한번도 “대리적”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으며, 도한 그리스도께서 “죄 없는 인성을 취하셨다”(32)고 쓴 적은 없다.
그러나, 엘렌 화잇은 딱 한번 “vicarious”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희생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33) 분명히 예수께서는 대속을 통하여서만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그의 의를 주입시키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그가 인성을 대리적으로 받았다고 말할 때에 이 뜻은 실제로 취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겉으로만 취하셨다는 의미가 된다. 또한 이 뜻은 죄의 결과는 죽음이므로 그리스도의 죽으심도 대리적으로 되며,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간단히 말해서, 이러한 추론은 결국 도세티즘(Decetism)으로 귀착되는데, 이 이론은 그리스도께서 오직 겉으로만 인간이셨다는 이론이다.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체와 피” “죗된 육신의 형상”안에 참여하셨다는 실제성을 강조하기는 하였으나, 실제로 그 참 의미는 대리적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그녀의 글 안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지지할 어떤 근거도 없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타락한 인성의 실제성을 끊임없이 강조하였었다.
엘렌 화잇이 얼마나 더 확실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체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실제적으로 인성을 취하셨다.” 그리고 그 인성의 종류에 대한 어떠한 의심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그녀는 이렇게 더하였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 (히브리서 2:14).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었고, 그는 인간, 심지어는 인간 그리스도 예수가 되실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34) “그는 몸의 형태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는 인성을 취하셨고, 인성의 삶에 참여하셨다.” (35) “그는 육체로 되셨을 뿐만 아니라 죗된 육신의 형상이 되셨다.” (36)
엘렌 화잇은, 하나의 규칙으로서, 이중 의미가 있는 상징적이거나 은유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화잇 부인이 표명한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화잇 부인 자신의 글을 해석하는 것과 같다: “성경의 언어들은 그 말이 상징이나 비유적으로 쓰인 것 외에는 그 말의 명백한 의미에 따라서 해석해야 한다.” (37) 화잇 부인은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말을 단순한 언어로 명확히 나타내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다룰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이다.
(대체적인 그리스도론의 장점과 단점)
만약 대체적인 그리스도론의 기본적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으면 이 연구를 완성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중간적인 입장은 한쪽으로 타락 후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지만, 다른 쪽으로는 그리스도의 죄 없는 본성을 선언함으로 타락 전의 입장의 오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 대체적인 그리스도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선구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순결한 본성을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고 주장한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죄와 같은” 육체 안에 보내셔서 구속 사업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그가 “그의 성육신 하실 때에 예속, 복종, 종속을 가리키는 종의 비천한 모습으로 오셔야 한다. 그는 아담이 죄를 지긴 전의 완전한 본성이 아닌 연약하여진 인성을 취하셨다.”(38)
이러한 입장은 복음의 중심적 진리로 돌아가는 데에 큰 도약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입장도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원죄 교리의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수는 죄를 물려받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는 죄 없는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육체적인 연약성만, 즉 “순수한 연약성”(the innocent infirmities)을 유전 받으셨다고 한다: “배고픔, 고통, 연약함, 슬픔, 그리고 죽음” 아래 있었으나, “죄에 대한 성향”과 “죗된 성향”(39)은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유감스럽게도 여러 문제들을 감추고 있다. 그 첫 번째 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명에 관한 것이다. 성육신의 목적은 우리를 “순수한 연약성”에서 구해내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 목적은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잡아오는 내 지체 속의 한 법”(로마서 7:23)인 내 안의 죄로부터 구해내시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죗된 육신의 형상”안에 오셔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히브리서 2:17) 되셨던 이유는 우리를 죄의 종 된 상태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또한 “유전되는 성향(inherent propensities)”과 “악한 성향”과 같은 용어들에 관한 잘못된 해석의 문제도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엘렌 화잇의 글 안에서 같은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성향(propensity)은 한 경향(tendency)이고, 시험으로 구부려지러는, 유혹을 받으려하는 성질이다. 만약, 이것을 저항하면 죄가 되지 않는다. “유전적인 성향”은 시험에 굴복할 때만 “악한 성향”이 된다. 엘렌 화잇은 “그를 사람들 앞에서 죗된 성향이 있는 인간으로서 나타내지 말라. 그는 둘 째 아담이시다. 첫째 아담은 순결하고, 죄 없고, 죄의 흔적도 없이 말들어졌다… 죄로 인하여 그의 자손들은 불순종의 성향을 유전 받은 채로 태어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셨다. 그는 인성을 취하셨다. 그러나 그 안에 한 순간이라도 죗된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40) 물론 “그는 경험을 통하여 인간의 연약함과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의 유혹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아신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4:15) (41)
이와 같이 “죗된 성향(tendency)”과 “악한 성향(propensity)”의 관계에 관하여도 잘못된 이해가 있다. 엘렌 화잇은 이 두 표현들을 확실히 구별하였다. 화잇부인은 예수께 “악한 성향(propensity)”는 절대로 없었지만, 그러나 그는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기 위하여 모든 방법을 통하여 일하는 인간에게 유전된 악한 성향(tendency)을 만나시고 그 영향아래 있었다”고 하였다. (43)
윌리암 하이드가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는 비록 타락한 인류의 연약함을 지셨으나, 그는 인류의 tendency와 propensity가 evil propensity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는 인류의 연약함이 개인적인 죄가 되도록 허용하지 않으셨다. 비록 그는 죄로 시험받으셨으나, 죄에 참여하지 않으셨고, 그 안에 악한 또는 죗된 성향(propensity)을 만들지 않았다.” (44)
예수께서 죄 없는 인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하여 헤펜스터는 죄는 “자연적인 유전”으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영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죄 자체가 “유전적으로 전달될 수” 없다. (45)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그리스도께서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 나셨다”고 선언함으로 바울은 예수께서 , 모든 사람들처럼, “유전의 대 법칙의 결과를 받으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예수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는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당하시고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사실을 확고히 하였다. (46) 예수와 다른 인류와의 다른 점은 모든 인류가 유전적으로 죄인이라는 데에 있지 않다. 그들은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로마서 5:12) 때문이다. 비록 예수께서는 “죗된 육신의 형상”으로 오셨지만, 그는 죄를 짓지 않았다.
분명히, 그리스도의 조상들은 “순순한 연약성”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께서 타락된 인성의 연약성을 취하셨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서만 그는 인간을 퇴락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구하실 수 있으셨다.” (47) “타락된 상태의 인성을 취하셨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죄 안에 전혀 참여하지 않으셨다.” (48)
이러한 모순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염시태설과 원죄의 오류로부터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이다.
(참고문헌)
1Adventist Review, Mar. 31, 1994
2Ibid.
3Ellen G. White, Selected Messages, book 1, p. 244.
4Robert H. Pierson, in Review and Herald, Dec. 7, 1978. See Adventist Review, Nov. 1, 1990: “An Appeal for Church Unity,” from the Biblical Research Institute.
5George R. Knight, From 1888 to Apostasy, p. 135.
6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llen G. White Comments, vol. 7, p. 907.
7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p. 36.
8See our chapter 2.
9R. Allan Ande~on, in Ministry, September 1956. See our chapter 14.
10Questions on Doctrine, pp. 61, 62.
11W. E. Read, in Ministry, April 1957. See our chapter 10.
12See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pp. 45-52.
13Ibid., p. 68.
14Ellen G. White manuscript 1, 1892. In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llen G. White Comments, vol. 7, p. 929.
15LeRoy Edwin Froom, Movement of Destiny, p. 428. See our chapter 10..
16Anderson.
17Ibid.
18E. G. White, Selected Messages, book 1, p. 408 (Review and Herald, Feb. 18, 1890).
19S. N. Haskell to Ellen G. White, Sept. 25, 1900. (Italics supplied.) See our chapter 7.
20Ellen G. White letter 132, 1900 (Selected Messages, book 2, p. 37). See our chapter 7.
21Anderson. See our chapter 10.
22Ralph Larson does a critical analysis of this statement in The Word Was Made Flesh, pp.249-261.
23Froom, p. 497.
24Ellen G. White letter 8, 1895, in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llen G. White Comments, vol. 5, p. 1128.
25E. G. White, The Desire of Ages, p. 117.
26Anderson. See our chapter 10.
27Questions on Doctrine, p. 55.
28Ibid., p. 52.
29Ibid., p. 60.
30Ibid., pp. 61, 62.
31See the Ellen G. White CD-ROM. It is true that the word “vicariously” appears in a subtide in Selected Messages, book 3, page 133. Obviously, that subtide should be credited to the autho~ of the compilation of the book and not to Ellen White’s pen.
32Questions on Doctrine, p. 650.
33E.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Nov. 1, 1892.
34E. G. White, in Review and Herald, April 5, 1906 (Selected Messages, book 1, p. 247).
35Ellen G. White letter 97, 1898.
36Ellen G. White letter 106, June 26, 1896. Quoted in 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llen G. White Comments, vol. 5, p. 1126.
37E: G. White, The Great Controversy, p. 599.
38Edward Heppenstall, The Man Who Is God, p. 74. See our chapter 12.
39Roy Adarns, in Review and Herald, Apr. 26, 1990, and The Nature of Christ, pp. 68, 69.
40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llen G. White Comments, vol. 5, p. 1128.
41E. G. White, The Ministry of Healing, p. 71.
42The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Ellen G. White Comments, vol. 5, p. 1128.
43Ellen G. White manuscript 303, 1903, published in Review and Herald, Feb. 17 , 1994. However, not only was this manuscript never published in Ellen White’s lifetime, it was never even mailed, and so must be used with extreme caution.
44William T. Hyde, in Ministry, February 1972. See our chapter 12
45Heppenstall, p. 126. See our chapter 12.
46E. G. White, The Desire of Ages, p. 49.
47Ibid., p. 117.
48E. G. White, Selected Messages, book 1, p. 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