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 Page

우리 속에 오셔서 사셨던 그리스도 (우리를 체휼 하셨던 분) (Touched with Our Feelings)

 

서론

 

기독교회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의 개성과 사업을 연구하는”(1) 그리스도론은 많은 신학적 논쟁의 중심이 되어왔다. 가장 위험한 이설과 가장 극단적인 분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개성과 사업에 관한 신학적인 다양성에 기원되었다.

 

믿음의 그리스화와 여러 이설의 출현은 예수의 제자들과 그들의 계승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들과 싸우게 만들었다. 이러한 일은 “문자적인 의미로 그리스도학, 즉 그리스도의 개성에 관한 이론”(2)을 창조하게 하였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문제는 기독교의 한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종교단체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이 문제에 그리스도의 사업에 관한 우리의 올바른 이해가 달려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베소서 4:21)에 대하여 연구할 때에 우리 각 개인으로부터 기대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도 이 문제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초기 이설들에 직면한 제자들)

 

기독교의 초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개성에 관한 논점이 “그의 인성이 어떠했는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였는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대답하였다. (마태복음 16:13-16)

 

헬라-라틴 세계에 대한 복음 전파가 진행되면서 이 문제는 단순히 예수가 누구인지 아는 것 이상으로 발전되었다. 이제 이 논쟁은 바뀌어졌다: 예수와 하나님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그가 진실로 신이었는가, 아니면 단순한 인간이었는가? 만약 둘 다라면, 그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이설에 위협받고 있었던 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숙고하고 그들에게 해답을 주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의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일어났던 예수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을 처음으로 책망한 사람들은 바울과 요한이었다. 빌립보에 보내는 기별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언급한 후에,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하였다. 로마서에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로마서 8:3)라고 썼던 것과 같이 바울은 골로세 사람들에게 강조하여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고 말하였다 (골로세서 1:15; 2:9).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더욱 강력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노시스파의 주장에 대항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거절하는 자들에 관하여 교회들을 경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육체로 오신 것]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일서 4:2, 3). 

 

(여러 세기를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론)

 

2 세기초부터 이미 제자들의 계승자들은 그리스도의 개성, 특별히 그의 본성에 관한 논쟁에 쉼 없이 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아리우스주의의 발전으로 니케아 종교회의(Council of Nicaea, A.D. 325)가 열렸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정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남아있던 두 본성, 즉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는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 A.D. 451)에서 결정되어졌고, 이것은 천주교 믿음을 고백하는 교리로서 사용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론의 개혁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론보다는 믿음의 본질과 칭의에 관한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개성의 단일성 그리고 본성의 이중성과 함께 본질적 신성에 관한 기초적 교리”(3)를 모두 받아들였다. 오직 프랑스어를 쓰는 스위스에 사는 소수의 신교도들만이 “두 본성에 관한 교리”를 완전히 거부하였었다. (4)

 

그렇지만, 20세기 여러 신학자들이 그들의 발자취를 따랐다. 예를 들어,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두 본성’에 관한 논쟁은 궁극적으로 헬라적 문제이지 유대인이나 성경적인 문제는 아니다”라고 하였다. (5)

 

에밀 부르너(Emil Brunner)는 “두 본성에 관한 모든 복잡한 문제들은 잘못 이루어진 논점과, 어떻게 신성과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개성 안에 연합할 수 있는가 하는,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것을 알고자 하는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하였다. (6)

 

칼케돈 교리에서 벗어난 이러한 신학자들의 주장은 새로운 그리스도론 확립의 기초가 되었다. 오늘날 천주교와 신교의 대 다수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연구하는 것은, 이 문제가 인류에게 미치는 중요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한다. 다른 말로 말해서, 현대 그리스도론의 한 성격은 이것이 인류학과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이러한 새로운 관계는 신학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더욱 깊은 연구를 하게 만든다. 인자께서 인성을 취하셨다는 개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떠한 인성을 취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타락의 영향을 받은 인성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일찍이 창조하신 그 인성인가? 다른 말로, 아담의 타락하기 전의 인성인가 아니면 타락한 후의 인성인가 하는 문제이다.

 

(현대 그리스도론)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아담의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는 대담한 주장은 심각한 이설로 받아드려졌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남아 있음을 인정한다. (7) 더욱이, 카알 바드(Karl Barth), 에밀 부르너(Emil Brunner),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J.A.T. 로빈슨(J.A.T. Robinson)과 같은 20세기 후반 학자들이 공개적으로 타락으로 영향을 받은 인성을 후원하고 있음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카알 바드(Karl Barth)는 1934년 초에 출판된 기사를 통하여 이러한 가르침을 첫 번째로 동조한 사람이다. (8)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논점은 “진정한 신 그리고 진정한 인간”이라는 제목아래 실린 그의 Domgatics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진정한 신”이었음을 확실히 밝힌 후, 그는 어떻게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가 하는 긴 설명을 더한다.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타락한 인성이 전혀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그는 확신 있게 말하기를, “그(예수)는 죗된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그는 죗된 인간의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담이 했던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담의 행동의 원리와 가정이 이루어지는 형태 속에서 그의 인생을 사셨다. 그는 죄 없이, 아담과 아담 안의 우리 모두를 죄인이 되게 한 그 원인을 지셨다. 그는 자진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바 된 상태에 결속되시고 필요 관계를 이루셨다. 오직 이 길만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과 우리의 화합이, 그 안에서 그리고 그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10)

 

히브리서를 비롯한 다른 바울의 편지서들를 이용하여 결론을 내린 후, 바드(Barth)는 다음과 덧붙였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내신 본성은, 타락에 관한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본성과 동등한 것이었다는 구원의 진리를 연약하게 만들거나 불분명하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우리처럼 되실 수 있었겠으며, 우리와 그가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된 특징을 가지고 서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잃어버리신 바 되었고, 저주받은 상태 아래 있는 우리의 본성의 구체적인 형상 속으로 임하셨다. 그는 이 형상을 우리의 것과 다르게 만들거나 세우지 않았으며, 결백한 자로서 죄 지은 것으로 되셨고, 죄 없으셨으나 죄가 되셨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우리를 그가 우리와 연합한 상태에서 떨어지게 해서는 안되며, 이러한 이유로 그를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해서도 안 된다.” (11)

 

에밀 부루너(Emil Brunner)는 그의 Domgmatic에서 이와 똑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는 “그가 여자로부터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그가 진실로 인간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12)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규명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정말로 우리와 같은, 죗된, 인간이었는가?” 그 해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죗된 육체 안에 보내셨다(로마서 8:3)고 말할 때에 예수의 진정한 인성의 전부를 말하였다. 히브리서에는 다음과 같이 첨가하였다: ‘모든 일에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13) 부루너는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라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또한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은 아니었다”(14)라는 사실을 동시에 인정한다.

 

같은 성경절에 의하여 불트만(Bultmann)과 쿨만(Cullmann)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쿨만(Cullmann)은 빌립보서 2:5-8절에 관한 그의 주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위하여 그는 먼저 인간의 형체, 즉 타락으로 영향을 받은 인간의 형체를 취하셔야만 한다. 이 의미가 바로 ‘사람들과 같이 되셨’(7절)다는 말의 뜻이다. 이러한 호모이오마티(homoiomati)적 이해는 완전히 합리적이다. 더욱이 그 다음 구절이 강조하는 것처럼, ‘인간’ 예수께서는 성육신 하심으로 완전한 ‘인간’의 상태를 받으셨다. 본질적으로 오직 하나뿐인 신-인이신 그분께서는 그의 속죄사업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심으로 죗된 육신 안에 성육화 되신 천인이 되셨다.” (15)

 

여기서 성공회 감독 J.A.T. Robinson의 입장을 밝히지 않는 것은 실례가 될 것이다. 그는, 그의 바울신학 (Pauline Theology)에 나오는 “몸”의 이해에 대한 연구에서, 예수의 인성에 관하여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더 확실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구원의 드라마의 첫 장면은 죗된 상태의 육신을 가지고 있으나 죄가 없었던 하나님의 아들의 확고한 자아-확인에 관한 것이다.” (16)

 

그는 지목하기를 “이러한 말씀들을 강조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학이, 바울이 이 문제에 관한 복음의 위력을 가정에 소개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대담하고 거의 무모하다시피 한 문구들을 이상하게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동방 정교회, 천주교와 개신교 모두는 그리스도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성으로 성육신 하셨다고 믿고 있다.” (17)

 

“그러나 만약 이 문제가 성경적인 어휘로 다시 제시되었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며, 모든 타락의 결과와 영향아래 서 있는 인류를 그리스도께 귀속시킴에 있어서 이것은 가장 확고한 기반이 될 것이다. 하여튼, 이것은 그리스도의 개성에 관한 바울의 견해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에 관한 그(바울)의 이해의 본질이다.” (18)

 

그 외에, 이 문제는 토마스 F. 토런스(Thomas F. Torrance)가 1956년 독일 Herrenalb에서 열린 세계 교회주의 운동 협의회 기간 중, “믿음과 정체성”(Commission“Faith and Constitution”)을 제정할 때에 제시된 주제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sarx, 예를 들어서, 우리의 타락한 인성 (원죄 없이 잉태된 인성이 아닌)을 취하셨고, 이것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고 자신을 거룩이 하셨다는 사실에 관하여 우리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화 안에서 Sancta이다.” (19)

 

토마스 토런스는 더욱 더 명확하게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기독교회 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또는 우리가 한때 막았기 때문에 다시 배워야 할 가장 기초적인 진리는 이것인데, 곧 성육신은 우리의 타락하고 저속한 인성, 즉 하나님의 화해시키는 사랑에 대한 악의와 폭력의 가장 사악한 상태에 있는 인성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 뜻은,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타락한 인성 곧 죄와 범죄로 짐 지워진 실제적인 인류의 존재와, 창조주로부터 이간되고 불화된 마음과 영혼 속에 있는 병든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처음 5세기 동안의 모든 초대교회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교리이며, 이 교리는 사람이 온전히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쳐져야 하는데, 온전히 바쳐지지 않았다는 것은 온전히 고침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으로 취하시지 않은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으로 계속 반복되어 설교되어졌다. 그러므로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죗된 본성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셨다는 것으로, 또한 인류를 육적이고 악한 마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가 바로 그 본성 안에서 죄를 심판하신 그 희생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20)

 

오늘날 이러한 사상을 따르고 있는 신학자들은 더 많이 있다. 그러나 위 사람들에게는 선각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의 선구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현대 그리스도론의 선구자들)

 

이러한 20세기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선구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카알 바드(Karl Barth)는 그의 책 Dogmatics에 타락한 인성을 믿는 여러 19세기 신학자들의 글들을 인용하였다. (21)

 

타락한 인성의 강력한 후원자인 해리 존슨(Harry Johnson)은 더 자세한 방법으로 Gregory of Nazianzus(329-389)에 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는 “그가 취하시지 않은 것은 고침을 받지 못한 것이며, 그의 신성으로 연합된 것은 또한 구원받은 것이다”(22)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존슨(Johnson)은 한 장 전체를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Antoinette Bourignon부터 Edward Irving까지의,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타락한 후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믿는 열 댓 명의 선구자들에 대하여 열거하는데 사용하였다.

 

존슨(Johnson)에 관한 설명으로, 현대 신학자들의 증언에 대한 역사적 요약을 마친다. 1850년대부터, 재림교회 선구자들의 그리스도론은 같은 해석을 하여왔다. 이 시대에 이와 같은 해석은 아직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전통적인 다수의 기독교회로부터 이설취급을 당하였었다. 그렇지만 현대에 가장 이름 있는 신학자들이 이러한 선구자들의 그리스도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다.

 

1852년부터 1952년 사이의 재림운동의 선구자들이 발전시킨 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론의 기초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진보적인 입장을 자세히 연구하는 것은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재림교회 그리스도론의 역사)

 

최근 여러 영어권 저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그들의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타락 전(pre-Fall)” 또는 “개정된 타락 전”의 입장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재림교회가 믿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입장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여러 저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많은 도움이 되는 원고들을 제공해 주었다. 다음은 그 목록이다. (1) Herbert E. Douglass, A Condensed Summary of the Historic SDA Positions oh the Humanity of Jesus; (2) William H. Grotheer, An Interpretative History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as Taught by the SDA Church; (3) Bruno W. Steiweg, The Doctrine of the Human Nature of Christ Among Adventists Since 1950. 이 저자들에게 특별히 감사를 표명한다.

 

이 책에서 제시한 그리스도론의 역사는 5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제 일 편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문제-논쟁이 없이는 많은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문제-로 시작된다. 두 번째 장은 1852년부터 1952년 사이에 온전히 받아들여졌던 그리스도의 타락된 인성에 관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제 이 편은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이 이해한 그리스도론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오며, 제 삼 편에는 교회의 공식적인 문헌들에 나오는 여러 증언들을 모아 보았다. 넷째 편에는 새로운 해석이 나타나는 1950년대의 문제점들에 대한 역사적 요약을 하였으며, 특별히 화잇 부인의 글들을 참고하였다.

 

나는 독자들이 이러한 문제의 중요성과 현재 일어나고 있는 논쟁점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5편에 나오는 현대 견해에 대한 토의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다시 연합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참고 문헌

1Oscar Cullman, Christologie du Nouveau Testament (Neuch:1tel: Delachaux et Niesde, 1968), pp. 9, 11.

2Karl Barth, Dogmatics (Edinburgh: T&T Clark, 1956),vol. 1, part 2, p. 123.

3M. Getaz Op, Les variations de la doctrine christologique chez les theologiens de la Suisse romande au XIXe siecle (Fribourg: Editions de la librairie de l’Universite, 1970), p. 18.

4Ibid.,p.27.

5Cullmann, p. 12.

6Emil Brunner, Dogmatics (Philadelphia: Westrninster Press, 1952), Vol. II, p. 352.

7Henri Blocher, Christologie (serie Fac. etude, Vaux-sur-Seine: 1984), Vol. II, pp. 189-192.

8Karl Barth, “Offenbarung, Kirche, Theologie,” in Theologische Existenz heute (Munchen: 1934).

9Barth, Dogmatics, vol. 1, part 2, pp. 132-171.

10Ibid., p. 152.

11Ibid., p. 153.

12Brunner, Vo .II, p. 322.

13 Ibid., p. 323.

14 Ibid., p. 324.

15Cullmann, p. 154.

16J.A.T. Robinson, The Body, a Study in Pauline Theology (London: SCM Press, LTD, 1952),p.37.

17Ibid., pp. 37, 38.

18Ibid., p. 38.

19Quoted by Harry Johnson in The Humanity of the Saviour (London: Epworth Press, 1982), p. 172.

20Thomas F. Torrance, The Meditation of Christ, pp. 48, 49, quoted by Jack Sequeira in Beyond Belief (Boise, Idaho: Pacific Press Pub. Assn., 1993), pp. 44, 45.

21See Barth, Dogmatics, vol. 1, part 2, pp. 153-155.

22 See Johnson, pp. 129-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