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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를 무력하게 함

저자: 죠 크루스 목사 – 미국의 대표적인 자영선교기관 중의 하나인 Amazing Facts 기관의 설립자이며, 전도 목사로서 봉사함.
               
           어마어마하게 큰 어떤 컴퓨터가 우리가 한 말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까지도 충실하게 기록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그 컴퓨터의 기록들을 보고 기뻐하겠는가? 우리가 우리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들이 무엇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밝힌 증거인 컴퓨터의 기록들을 보는 것은 아마 충격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어떤 주제가 우리에게 다른 주제보다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는 중요한 주제이며, 우리 마음에 귀중히 여기는 것이 될까? 우리 대부분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컴퓨터가 다른 모든 주제들보다도 예수님과 그분의 영광스러운 진리에 대한 생각들과 말들을 뽑아내게 되기를 원한다.

           진정 우리의 영적인 헌신이 우리의 시간과 주의를 끄는 모든 세상적인 것들 –가족과 직업을 포함해– 보다 우선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생애에 있어서 최상의 것으로 여겨지는 절대적인 주제가 되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아비나 어미, 남편이나 아내, 아들이나 딸보다도 더욱 사랑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다. 그분은 또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누가복음 14:33)고 말씀하셨다. 우선 순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어떤 것이 있으면 즉시로 없애버려야 한다. 우리의 애정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하나님과 경쟁이 되는 어떤 인물이 생기기 시작하면 즉시로 그 인물을 밑으로 떨어뜨려 놔야 한다.

           명백한 사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초점은 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애의 모든 국면은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한 위대한 중심을 구심으로 하여 회전되어야 한다. 이 말은 우리 시간의 대부분을 교회에서 소요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무릎을 거의 하루 종일 꿇고 지내야만 한다는 뜻도 아니다. 가족과 직업과 친구들이 매주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생애는 생계를 유지하고 가족들과 한가한 시간을 즐기며, 친구들과 사귀는 일 등과 관련된 모든 국면에 있어서 마음 속에 항상 거하시는 구세주의 감미로운 영이 그 국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설교나 성경공부를 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으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진리의 아름다운 원칙에 따라 삶으로써 능력있는 설교들을 할 수 있다. 재능이나 교육이나 직업에 상관없이 모든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순종하는 생애를 통한 영혼구원의 증거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은 하나의 평범한 기별을 가진 백성들이 아니다. 우리의 교리들은 성경으로부터 직접 취한 생애를 변화시키는 스릴있는 원칙들이다. 우리들은 이 교회가 주장하는 모든 표준들에 있어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본을 전승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남은 자”들이며, 신약시대의 교회의 마지막 남은 조각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신약시대의 사도들이 지켰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이다. 우리는 해로운 음식을 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신다. 과거의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러했다.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서 우리는 우리 구세주를 불쾌하게 할 위험을 초래하고 싶어하지 않는 때문에 세속적인 장식과 헛되게 모양을 내는 따위를 반대하는 성경의 권면을 순종한다. 세족예식은 우리들의 예배에 있어서 독특한 것인데, 그 예식은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모본으로 남겨두신 것이다. 분명하게 구분되는 우리의 생활 양상은 우리의 매일의 생애의 모든 부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영적인 헌신을 모두 묶는 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주 곧 오신다. 이 마지막 은혜의 순간들은 그분을 맞기 위해 준비하는 때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이 사실인 것을 안다. 우리에게는 텔레비젼이나 춤이나 극장에 가는 것이나 세상의 쾌락 등과 같은 헛된 것을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다. 지속적인 성결의 생애를 사는 능력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물질주의의 공허함에서 해방되도록 이끌어야만 한다. 사단은 이 오염된 유성 둘레에 온통 자신의 기만 전술을 행사해 오고 있다. 심지어 인기있는 종교에 있어서까지 그의 기만전술은 행사되어 그 종교를 쥐고 흔들 정도까지 되었다.

           그 악한 사단을 대항하여 고집스럽게 서서 저항하고 있는 교회는 바로 남은 교회이다. 이 마지막 세대에게 진리의 마지막 경고의 기별을 제시해야 하는 이 백성들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이 주어진 백성들은 일찍이 없었다. 우리는 결정의 골짜기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수많은 군중들에게 생명의 향기든지 사망의 냄새가 되고 있다. 이 기별에 순종하여 우리와 함께 하는 영혼들 외의 다른 모든 이들은 이 기별을 거절함으로 짐승의 표를 받을 것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택하든지 진리에 대항하든 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입고, 먹는 것이 우리들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유일한 설교가 되는 것이 아닐까? 그들중 많은 이들은 확신 가운데 있으나, 또한 그들은 이 인기없는 진리가 요구하는 것을 조그만 틈을 통해 들여다 볼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우리의 생애는 철저한 점검을 받게 될 것이다.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반 정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믿음으로 전진하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은 격려를 받기 위해 우리를 쳐다 볼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안식일 문제로 고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침례받기로 결정한다면 안식일에 열었던 상점을 닫아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주님의 안식일을 거룩히 준수함으로 안식일의 주인되신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들은 우려 속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그대의 현재 안식일 준수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제일 첫째 자리로 모신 즐거움으로 가득찬 모본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대가 안식일 점심을 음식점에서 사먹음으로 그들이 생각하기를 그들이 안식일에 영업을 중지하는 것이 정말로 그토록 중요한지 의문을 자아내도록 하고 있지는 않는가? 만일 안식일 준수가 일요일 준수와 다를 바가 없다면 그들은 안식일에 자신의 고용인들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심판을 두려워하는 어떤 영혼들은 부정한 음식을 포기하는 문제로 인해 투쟁할 것이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전이라는 사실에 확신을 얻게 된 그들이 그들의 투쟁 가운데서 힘을 얻기 위해 교회 안을 두리번거릴 때 그들은 무엇을 보게되는가? 나는 한 사람이 본 것을 지금 말하려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기 2주전에 내가 이끄는 전도회에 왔던 사람에게 있었던 일이기에 나는 그 일을 잘 알고 있다. 한 젊은 어머니가 침례를 받으려고 결정을 했다. 침례 받기 며칠 전에 그녀는 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 여성의 집에 초대받아 갔다. 거기서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이 제공되었다. 꼭 1주일 전에 그녀는 심각한 외상을 입어 평생동안 마셔대던 커피를 안마시기로 작정했었다. 그녀가 그 사실을 그 재림교인 친구에게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는 계속 마시라고 종용했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지는 않았으나 다음날 내가 대답하느라고 진땀을 뺀 몇가지 질문들을 내게 해댔다. 불행히도 그녀는 침례를 받지 않기로 했으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침례를 안받은 채 머물러 있다. 커피를 마시는 것은 그것이 어떤 영혼으로 진리를 순종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할 때에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준들은 그리스도인 증거와 밀접한 판련을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작은 것은 별로 문제가 안된다는 식의 왜곡된 개념에 의해서 자신들의 증거의 힘을 파괴시키고 있다.

           남은 교회에 들어서는 모든 여성들은 화장과 장신구를 착용하는 일에 있어서 굉장한 결정의 산실을 통과한다. 시대와 전통의 관습들을 변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그것들이 허영심 많은 여성들의 본성에 깊이 뿌리박혀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유행은 노예를 잘 부려먹는 주인과 같다. 어떤 때에 남편들은 새로운 종교가 그들의 부인들에게 일으키는 모든 변화들에 대해 반대한다. 특별히 그 부인들이 다른 장식품들과 함께 결혼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버릴 때, 그 가족에게는 진짜 위기가 생긴다.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얻은 이 부인들은 하나님을 첫째로 삼기로 결심하고 자신들의 장식품을 제거함으로 믿지않는 자기 남펀들을 구원하라는 베드로의 도전(권면)을 받아들인다(벧전 3:1~3). 그 다음에 그들은 지지와 승인을 얻기 위해 교회를 두리번거린다. 그들이

보는 것은 무엇인가? 반짝거리는 결혼반지들 뿐만이 아니라 휘황 찬란한 브로우찌들, 핀들과 목거리 등을 보게 된다. 그들이 그런 것들을 보고 힘을 얻었는가? 그렇다. 그들은 힘을 얻고 결혼반지를 다시 낀다. 만일 상징적인 반지들이 괜찮다면 졸업반지, 생일반지, 약혼반지, 우정반지들도 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아마 작고하신 할머니가 추억으로 남겨준 귀거리도 별 하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실제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런 일들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는가? 참으로 그렇다. 많은 이들은 교인들이 자신들이 전하는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진리로부터 돌아선다. 유행에 투신해온 어떤 여성들은 세상의 허영을 포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은 교회에서 그들 자신의 세상적 자만을 달래기에 충분한 염색한 머리, 가발, 그리고 인공적인 장식품들을 본다. 바지를 입는 것에 대한 그들의 의문도 그들이 안식일 아침이나 화요일 저녁에 교회 안에 출현한 것을 보고 재빨리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다.

           문제는 아무도 그들이 은밀하게 칭송하는 것이 있으면서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자매들은 세상을 은밀히 사랑하므로 헛된 자만심과 세속을 대항하는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그들이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자아를 부인하는 법을 배우기까지 그들은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 생애에 있어서 이러한 중대한 문제들에 관한 교회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부흥케하는 길은 무엇일까? 어떻게 우리가 교인들로 하여금 진리에 대해 전율을 느끼게 하여 그 진리가 그들의 생애를 채우도록 할 수 있을까? 전도회가 있을 때 모든 교인들은 그 전도회에 참석해야 하며, 진리를 나눌 수 있는 기회에 대해 간절하고 열렬한 마음으로 고대해야 한다. 비참하게도 오직 충실한 소수의 교인들만이 기별이 전파되는 매일 밤마다의 집회에 참석하여 돕는다. 나는 훌륭한 신사들이 전도회에 참석하여 결심을 하고 교회에 오는 것을 보아왔다. 후일 그들은 그 전도회에 잠시 얼굴을 비친 집사들과 장로들의 가정에 초대를 받는다. 그러나 초대받은 집에서 그 새신자들은 오후 내내 텔레비젼에서 하는 운동 경기를 관람하느라고 시간을 다 보내게 된다. 거기서 교회의 지도자는 막 흥분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쪽 팀이 다른 팀을 짓밟고 누르는 것을 보고 하는 흥분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던 것과는 모두 상치되는 행동에 완전히 몰입하면서 그는 여러 시간동안 앉아서 외치고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집사는 점수와 기록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있으나 그 다음 안식일 교회에서는 반쯤 조는 채로 안식일 학교 교과에서 묻는 질문의 답 하나도 대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가 수확운동 목표를 달성하고, 문서 분배에 관한 평신도 활동 계획에 관한 입발린 소리는 할지 모르나 그의 인생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업이 아니다. 롯의 처처럼 그는 세상의 것에 묶여 있고, 그의 고질화 된 종교적 모든 관습들은 그에게 사형선고가 내린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운동 경기에 대해서 보다 영혼 구원하는 일에 더욱 소리를 지르게 되지 않는 한 그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흔들려 떨어져 나가는 이유이다. 그들은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그들의 경험을 갉아먹는 것을 허용하며, 그리스도인 표준이 손상되는 것을 따른다. 마침내 환란의 때에 밀어닥치는 스트레스 하에서 신속하게 부스러질 죽은 형식만이 남게 된다.

           경기가 끝난 후에 우리의 새신자가 그 집사님에게 십일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에 관해 질문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사업을 하는 자로서 그는 총수입과 순수한 지출에 관해서 약간 오해를 하고 있다. 또한 십일금 말고 연금은 어떻게 되는건지? 사람들이 그들의 수입의 10%보다 더 많은 것을 드릴 여유가 있는 건지? 이 사람이 침례 받기로 결심한 것은 굉장한 믿음의 행위였는데, 이는 그의 사업이 잘 안되는 고로 십일금을 드리는 것은 정신나간 것처럼 보이는 때문이다. 이제 그는 성경의 약속들을 주장할 수 있는 교회지도자로부터 재확신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집사님이 충실한 청지기들을 위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에 관한 전율 할 만한 증거들을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십일금을 충실히 내는 51% 가운데 속한 한 사람으로서 교회의 직원이 된 그는 전 세계에 있는 우리 교인중 십일금을 전혀 안내는 49%에는 속하지않는다. 아마 어떤 이들은 수입이 없는지 모르나 많은 이들은 문자 그대로 매주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십일금을 잘못 적용함으로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앞에 있는 이 사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 중 대부분이 시험의 때에 흔들려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아마 더 많은 재림교인들이 다른 것보다도 돈 문제로 인해 잃어버려짐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청지기 직분에 관해 그토록 많이 말씀하신 이유가 될 것이다. 오늘날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시대에 있어서 사단이 돈이라는 매체에 온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은 꽤 논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사단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속임수를 행사하는 것은 사람의 육적인 마음 속에 자리한 이기심이 있는 때문이다.

           소작인이 농사를 지어서 추수한 것의 9O%는 자신을 위해 간직하고, 10%는 소유주에게 드리는 것이 아주 합리적인 처사가 아닐까? 우리의 손을 통과해 나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그분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 그분이 단지 십분의 일만 요구하시어, 그것으로 복음의 전파에 사용토록 명하신 것을 보면 얼마나 선하고 은혜로우신 분이신가!

           충실하게 주는 것에 대한 약속들이 그 약속 그대로를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탐욕자를 꾸짖으실까? 그러면 십분의일 이상을 드리는 것은 어떨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 다른말로 하면 우리는 주님보다 더 많은 것을 드릴 수 없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믿음을 행사하여 희생적으로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늘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되돌아 온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절대 실패하는 일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주머니 챙기기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들이 적게 가졌든 많이 가졌든 잡은 것을 더 꽉 움켜쥐고, 더 많은 것을 잡으려고 허우적대며 노력한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중에 천국에 갈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돈이나 소유를 가지는 것이 죄이기 때문이 아니다. 부유한 어떤 이들은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이며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부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부유하게 만든 자들과 하나님이 부유하게 해주신 자들이다. 관대한 마음으로 자꾸 준 어떤 이들은 성경에 약속된 넘치는 축복들을 주장하며, 계속 쏟아내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분량의 축복으로 계속 쏟아 부으신다.

           어떤 이들은 반대하며 말할 지도 모른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한정된 액수의 돈일 때에 하는 소리다. 그리고 그 돈은 너무 멀리 간다.     그렇게 반대하는 자들은 그들이 그 약속을 실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진짜로 당황하며, 그러한 식의 계산이 헛된 추측이며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줌으로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을 보리떡과 생선 몇 마리 가지고 수천명의 군중을 먹인 것과 비교하여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그렇게 해본 자들은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안다. 그들은 그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종이 위에서는 계산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들이 주님께 더 많은 것을 드릴수록 그들이 경제적으로 더욱 윤택해지는 것을 안다.

           나는 여러해 전에 한 친구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도전한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께 그의 수입의 25%를 드리고 있었는데, 굉장히 번영했다. 나도 내 아내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큰 희생을 치루면서 더 많이 드리는 계획을 짜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힘썼다. 점차적으로 우리는 25% 드리던 것에서부터 올라가기 시작했다. 30%에서 35%로, 그리고 일년에 거의 4O%에 달하기까지 계속 드렸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증가하는데 비례하여 물질적 축복들도 증가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 친구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시험해 보라고 한 것을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리떡을 늘리심으로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케 하시는 것을 보는 기쁨을 갖지 못하는 자들을 볼 때 얼마나 유감으로 느끼는지!

           세계 각곳의 수천의 도시들과 마을들에서의 하나님의 사업은 자금의 결핍으로 수난을 겪고 있다. 이 문제는 오늘날 남은 교회가 직면한 가장 작은 문제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사업을 마칠 재정을 주신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소유와 돈이 무가치해 질 때까지 그것들을 움켜쥐고 있는다면 그 때에 어떻게 느낄 것인가! 그것들은 지금 하나님의 왕국에 들일 영혼들을 준비시키는데 사용 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돈과 재물을 하늘 창고에 쌓으라고 하셨지, 그것을 이 땅의 창고에 저장하여 동록이 쓸도록 하지 말라고 하셨다. 수백만불의 유산이 불경건한 자녀들에게 주어지는데, 그렇게 유언을 남기는 재림교회 부모들은 그 유산이 진리 대신에 마귀의 사업을 진전시키는데 사용되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돈은 예수님의

오심을 촉진시키고 모든 것들을 회복시키는데 사용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22에서 “재리의 유혹”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러한 재리의 유혹이 언젠가 자신들의 소유를 하나님을 위한 제단 위에 바치려고 계획하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인들까지도 기만할 것인가? 많은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축적한 부가 사업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하며 마지막 기회가 지나가기를 주시하고 있다. 사업을 위해서는 비참할 정도로 적게 드리면서 그들은 호화로운 안이 속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얼마나 진실한가!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태복음 6:21). 그 돈이 하나님의 사업에 투자되었을 때 그 돈을 드린 자의 마음은 그 사업에도 묶여 있다. 이런 자들은 부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며 하늘에 보화를 쌓아놓는 예외의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