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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시 재림 교인의 고뇌

저자: 편집실

“ 매달 발행되는 ‘견고한 토대’의 모든 기사, 그 한 줄 한 줄이 너무도 차고, 투명하여서 매번 읽을 때마다 나의 영혼에게 고통과 갈등과 시림을 주어왔다. 왜 그럴까? 나 자신의 몸과 마음 모두가 혼탁하고, 죄가 기생하기에 딱 알맞은 뜨뜻한 도시 생활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교인들 뿐만 아니라, 아마도 다른 이들도 그러하겠지만, 배달되는 ‘견고한 토대’를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한번 훑어 보거나 아니면, 그냥 휙 던져버리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견고한 토대를 일부 극단주의에 치우친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 하다. 안일함과 세속이 주는 안락함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곧바른 진리는 무섭고 듣기 싫고 귀찮은 경고로만 들리게 될 것이다”……

    얼마 전에 받은 한 통의 서신은 우리의 부끄러운 헌신과 수고를 위로하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었다. 한 장의 편지를 읽어가며 느꼈던 우리 모두의 마음은 그 편지를 쓴 그리스도인 형제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편지의 내용은 바로 우리가 몇 년 전에 도시에 살면서 느끼며 고민했던 문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 도시에 살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되기를 소원하는 어떤 재림 신도의 고민과 고뇌의 글을 도시에 사는 여러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날 수많은 대다수의 재림교인들이 “우리는 변화될 수 없다”고 “변화”되기를 거절하는 선택을 하며 “무변화” 속에서 평안(?)을 가진 채 피차를 기만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에도, 예수께서는 조용히 베데스다의 못에 오셔서, 38년 동안 병 고침 받기를 소원해오던 병자를 고치시고 그 병자에게 “변화”를 창조하고 계신다.

    편지를 쓴 형제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그 고뇌와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 드린다.
편집실

이것이 도시에 사는 나와 여러분의 갈등이 아닙니까?

“지난 7월호의 견고한 토대에 실린 시골 생활에 대한 기사를 읽고 참으로 갈등이 많았으며 나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모든 부분이 다시 뜯어 고쳐져야 한다는 깨달음도 갖게 되었다. 특히 그 이전 호 (아마 6월호)에 다루어진 ‘죄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함께 ‘시골 생활’의 기사는 몇 번이고 읽을 때마다 내게 큰 부담과 고통을 주었다. 정말이지 깨끗하고 맑은 시골에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매달 발행되는 ‘견고한 토대’의 모든 기사, 그 한 줄 한 줄이 너무도 차고, 투명하여서 매번 읽을 때마다 나의 영혼에게 고통과 갈등과 시림을 주어왔다. 왜 그럴까? 나 자신의 몸과 마음 모두가 혼탁하고, 죄가 기생하기에 딱 알맞은 뜨뜻한 도시 생활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교인들 뿐만 아니라, 아마도 다른 이들도 그러하겠지만, 배달되는 ‘견고한 토대’를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한번 훑어 보거나 아니면, 그냥 휙 던져버리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견고한 토대를 일부 극단주의에 치우친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듯 하다. 안일함과 세속이 주는 안락함에 젖어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곧바른 진리는 무섭고 듣기 싫고 귀찮은 경고로만 들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많은 이들은 소중한 이 월간지를 읽고 교훈을 얻으며 반성과 회개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에게 있어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교회, 믿음, 그리고 구원에 관한 총체적인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되는 안목이 생김과 함께 느끼게 되는 갈등과 내적 고통이다. 나를 포함한 도시의 재림교인들이 가지게 되는 그러한 갈등과 고통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왜 새롭게 발견한 진리의 빛에 기쁨과 행복함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대신 갈등의 짐으로 스스로 부담스러워 하는 것일까? 도시에서 그 혼탁한 공기와 죄를 마시면서 찌들어진 우리의 육체와 영혼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나 자신을 조명하여 볼 때에 대답은 “그렇다” 이다.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이기기 위해 경쟁하고, 자신의 이익을 남기기 위해 타인의 몫을 가로채고, 손해보지 않기 위해 곤두선 신경으로 타인을 의심하고, 현재에 대한 불만족,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절망스러워하고, 나의 주머니 안에 들어와 있는 부에 의해서 자신과 가족의 행복이 결정되며, 더 많이 얻기 위해 머리를 짜고, 갖가지 폭력과 부조리, 공포스런 범죄를 가까이에서 느끼는 것이 일상의 도시에서의 삶이라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모호함, 불경건함, 습관적인 불순종, 피차간의 무관심, 무정, 세속주의의 경향,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야망은 도시 교회에서 내가 발견하는 나와 우리의 모습이다.

지난번 언제인가 견고한 토대에 실렸던 짐 혼버거 장로의 시골 생활에 대한 경험적 기사와 ‘아브라함’과 ‘롯’의 비유는 참으로 크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 흔들림 (갈등)은 지금도 더욱 큰 파문을 그리면서 계속되고 있다. 나는 알고 있다. 그 진원지는 바로 ‘믿음의 부재’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것은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나를 완벽하게 의탁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따라서 믿음에서 솟아나는 용기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나의 믿음 생활은 모조리 다시 뜯어 고쳐져야만 하는 것이다. 최근에야 나는 ‘죄’에 대해서 올바른 인식을 갖게 되었다. 소위 신앙 생활을 시작한지 20년 만에 (십년의 일요일 교회, 십년의 재림교회) 처음으로 죄를 바르게 알게 되었던 것이다. 바로 ‘견고한 토대’ 6월호에 실린 서너페이지의 기사로 인해서. 죄의 정체에 대해 알게되니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당연한 순서이다. 이제는 진실한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늘 아버지의 의지를 따라 내 앞날 문제를 풀어가려고 한다. 아직도 마음은 갈등으로 요동친다. 이 갈등의 요동은 적어도 ‘시골 생활’이 주제가 되어 그 문제가 내 양심과 영혼 속에서 결정되어질 때까지는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너무 늦지 않게 계획이 세워지고, 너무 늦지 않게 준비가 마쳐져서, 너무 늦지 않게 자연의 삶으로 돌아 갈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노력하고자 한다….”

‘견고한 토대’ 여러분의 꿋꿋하신 삶의 태도와 진리에 올바르게 순종하는 숭고한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계속 수고해 주시기를 바라며 이만 맺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미국 북동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