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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금 문제, 누구의 책임인가?

저자:  랄프 랄슨 박사

서론 – 교회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지난 몇년 동안, 나는 수많은 신실한 재림 교인들로부터 십일금과 헌금에 관한 청지기 직분에 대해서 문의하는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는, 과연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이 양심적으로 믿는 신앙과 전혀 다른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서 그들의 재정 지원을 요구하시는가에 대한 갈등이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서, 나는 많은 시간을 예언의 신을 연구하는 일에 사용해야 되었고,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십일금과 헌금에 대한 나의 연구 결과를 1991년 9월호 미국 견고한토대 월간지에 기고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나의 연구 결과는 1900년대 초기에 이루어졌던 윌리 화잇, A. G. 다니엘스 목사님, 그리고 W.프레스캇 목사님의 견해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십일금에 대한 나의 보고서가 공개되자, 어떤 교회 행정자들은 여느 때와는 다른 반응을 나타내었습니다. 어떤 연합회장은 나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이 담긴 분노의 편지를 내게 보내왔으며, 카나다 연합회장인, 더글라스 데브니치 목사는 1991년 12월에 카나다 연합회에서 발간하는 기관지인 “기별자 “에 나와 나의 보고서에 대한 반박 기사를 썼는데, 그 기사에서 그는 “반쪽 진리”, “엘렌 화잇의 글을 왜곡시킴”, “문맥을 무시한 잘못된 예언의 신 인용”, “교회의 지도자들과 목사들을 배도한 자들로 고소함”, “기만적인”, “부정직한”, “고의적으로 백성들을 잘못 인도함”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 후, 약간의 수정 작업을 거친 후, 1992년 4월에 콜롬비아 연합회의 기관지인 “방문자”에서는 “세계 도처에 있는 재림교인들에게 유익한 중요 권면”이라는 제목으로 그 글을 다시 실었습니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한명의 목사를 놓고 펼쳐지는 전례없는 공격적인 기사를 읽은 수많은 재림교인들은 한 개인의 성품과 품위에 대한 교회의 비그리스도인적인 처사를 보면서 깊은 갈등과 당황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의 연구 결과가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인 윌리 화잇 목사님, 다니엘스 목사님, 프레스캇 목사님의 견해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오늘날의 재림교회 지도자들에게 그토록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나와 나의 연구 결과를 평가하는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에 세 목사님들은 교회로부터 개인적인 품위에 대해서 나와 같은 정죄를 받지 않았는데, 왜 나는 정죄받아야 하는가?”

    어떻게 교회의 행정자들과 편집인들은 그 기사의 정확성에 대한 사전 검토와 확인도 없이 무책임하게 그와 같은 글을 출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나는 카나다 연합회장인 더글라스 데브니치 목사에게 공개적으로 요구하는데, 만일 그가 표현한대로 나의 연구 보고서에서 어떠한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잘못을 발견한다면, 나는 데브니치 목사에게 $1000을 제공할 의사가 있음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오니 나의 보고서로부터 증거를 찾아서 내게 보내주기 바랍니다.

    카나다 연합회장은 교회증언 7권 176에는 십일금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지 않음을 근거로 해서 내가 화잇부인의 글을 왜곡시켰다고 고소했습니다. 나는 그 페이지에 십일금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글에는 “청지기 직분”이라는 단어가 여러번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십일금에 대한 의무의 충실한 이행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청지기 직분을 잘 감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재림교단의 입장을 옹호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가복음 12장 42절에 나오는 과부와 두 렙돈의 이야기를, 모든 십일금은 모든 상황에서 항상 교단을 통해야 되는 증거로서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에도 십일금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지는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기만적이고 부정직한” 사람으로 고소해야 되겠습니까?
몇주 전에 대총회 본부로부터 흘러나온 한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교회로부터 출교당하게 될 사람들의 명단 중에서 나의 이름이 윗부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명단에 오른 사람들을 출교시키기 위한 첫번째 단계는 그들의 성품에 대한 평판을 파손시킴으로서 교인들의 마음을 사전에 준비시키는 것이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지금, 그 첫단계가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 또한 잘 지켜보기 바랍니다. 상황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재림교인들의 반응을 잘 주시하기 바랍니다. 교회가 그 명단에 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근거없는 고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교인들이 알게 될 때, 그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확신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는 진심으로, 여러분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고소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으므로, 그 잘못된 고소에 대한 전 세계적인 시정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문제가 공정하고 정의롭게 다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나에 대한 고소에 대해서 답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정한 기회가 지면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미 나의 입장을 지면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두번이나 카나다 연합회의 편집인들에게 요구했습니다. 지금, 나는 정의와 공정을 믿는 여러분들에게 나의 이러한 요구를 고려해 줄 것을 다시 한번 요청하는 바 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나에 대해서 들었던 것과는 상반되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나와 내 처가 평생을 바쳐 헌신한 교회를 결코 비난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교회 안에 들어온 배도에 대해서 솔직하고 정직하게 이야기 함으로서, 안수받은 목사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여 왔습니다. 나의 모든 전도 여행과 모든 쎄미나에서, 나는 백성들에게 교회를 떠나야 된다고 촉구한적이 없으며, 그 대신 부흥과 개혁 사업을 해야 될 것에 대해서 호소하였습니다. 내가 믿는 신학은 재림교회의 정통 신조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분리주의자라면, 재림 교회의 신조 또한 분리주의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시여, 여기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들에게 보내는 질문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배의 선장인데 한 선원이 여러분에게 선창에서 물이 새어 들어온다고 경고한다면, 무엇이 가장 현명한 조치가 되겠습니까? 배의 선창에 뚫린 구멍을 수리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선원을 배 밖으로 내어 던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고 인도해 주셔서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깊이 고려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랄프 랄슨 드림.

십일금 문제, 제1부

    오늘날 청지기 직분에 대한 질문은 많은 재림교인들의 마음 속에서 점점 더 큰 잇슈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에게 위탁하신 것을 관리하는 개인적인 책임에 대한 각성은, 어떻게 하여야 우리의 책임을 신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헌금을 위한 호소가 아니다. 다만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봄으로서 십일금에 엉켜있는 진실과 허상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분리시키는데에 이 글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모든 독자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의 직분을 신실하게 수행하기 위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기를 소원한다. 이 글은 랄프 랄슨 박사의 십일금에 대한 보고서를 편집한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편집실

십일금에 대한 나의 환상

    십일금에 대한 주제는 지금까지 감정적이고 예민한 문제가 되어왔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상당한 주의가 요구된다. 십일금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사람마다 그 동기와 목적을 추적당하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연구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이다.

십일금에 대한 문제를 내가 처음 직면했던 곳은 학교였다. 당시 나는 아시아에 있는 재림교회 신학원에서 목사들을 위한 과목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강의 시간 중에 가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었다. “십일금을 정규적인 교회의 통로 이외에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이 타당한 일입니까?” 그때마다 나는 확고하고도 분명하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학생들에게 주었다. “안됩니다. 어떤 상황 하에서도 정규적인 교회 통로 이외의 어떠한 곳으로 십일금을 결코 보낼 수 없습니다.”

그 당시 나는 눈으로 확인한 증거에 의해서 대답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그러한 대답을 예언의 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근거로 대답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학생들의 수업 준비와 전도 집회로 매우 바뻤으며, 십일금 문제가 나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위해서 시간을 내어 연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5년, 내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문제가 많은 교인들에게 상당히 심각한 질문으로 되어 있음을 보고 놀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완전한 확신과 기대를 가지고 예언의 신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언의 신의 어떤 곳에서도 십일금을 언제나 정규 교회 통로로만 보내야 한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한 나의 조사 결과는 내 자신에게도 굉장히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을 찾아내는데에 실패했던 것이다. 내가 확신을 가지고 믿어왔던 것이 영감으로 기록된 글 가운데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선구자들의 결론

혹시 나는 내가 읽었던 글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나는 윌리 화잇(엘렌 화잇의 아들로서 그녀의 비서였음), A.G. 다니엘스 목사, 그리고 W.W. 프레스캇 목사에 의해서 준비된 십일금 문제에 대한 글을 읽어보았는데, 그들 역시 나와 동일한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세 사람이 십일금 문제에 대한 글을 작성하게 된 역사적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07년 5월 9일, 챨스 스튜어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요양원 내에 소재한 화잇 부인의 사무실로 한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는 엘렌 화잇의 봉사 사업과 영감성에 대한 의혹과 도전이 담겨 있는 49페이지에 달하는 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 그 글은 베틀크릭에서 소책자로 인쇄되었으며, 얼마 후에 화잇 부인에 대한 또 다른 비평가인 E.S. 벨링저에 의해서 캘리포니아의 리버사이드에서 다시 출판되었다. 화잇 부인의 유산 관리 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서류 WDF 213은 윌리 화잇, 다니엘스, 프레스캇 목사에 의해서 준비된 기록으로서, 이 글은 십일금에 대해서 화잇 부인의 권면한 내용과 그녀 자신의 실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다시 말해서 화잇 부인은 항상 그녀 자신의 권면을 따르지는 않았다는 도전에 대해서 답변하기 위해서 준비된 것이다. 그 글의 2페이지에 있는 제6항을 보면, 그들이 십일금에 대한 화잇 부인의 총체적인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된다.

“6. 십일금의 타당한 사용에 대해서: 이 항목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한 서술임:

    십일금에 대한 엘렌 화잇의 글과 그것의 용도에 관하여 서술함. 화잇 부인의 십일금에 대한 증언과 그녀 자신의 실행은 정규적으로 지정된 창고에 자신의 십일금을 보내는 것이었고, 십일금은 위원회의 권면에 따라서 사용되어야 함을 서술함.

    또한 십일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책임을 지니고 있는 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 실패함으로써, 십일금의 분배를 위하여 조직된 통로가 십일금의 적절한 사용에 대하여 장애물이 될 경우,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십일금은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 개인들은 그들의 십일금을 필요로 하는 곳으로 직접 보낼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따르는 각 개인들에게는 상당한 책임이 수반된다. 십일금에 대한 정규적인 계획으로부터의 이탈에 관한 문제는 오직 정규적인 계획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지 못할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서술은 내가 십일금에 대한 자료들을 잘못 이해하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 세 사람의 결론은 나의 결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십일금에 대한 기본적인 욧점들은 엘렌 화잇의 글에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로서 십일금을 주님께 되돌려 드려야함을 분명히 했으며, 이러한 의무에 대해서 불성실한 자들은 하나님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말라기 3장 참조). 또한 그녀는 십일금은 오직 하나의 타당한 사용처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업의 지원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고 단호히 증언했다. 그녀는 목소리와 펜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십일금이 지원되어야 함을 증언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형태의 그리스도인 봉사 행위 즉, 학교를 위한 목적과 문서전도, 교회 경비와 같은 일들은 십일금의 사용처에서 제외시켰다.
하나님의 영감받은 기별자의 증언에 따라서, 십일금은 신실하게 주님께 되돌려져야만 한다. 모든 십일금은 하나님의 사업의 지원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사업, 무슨 사업을 지원해야 된단 말인가? 바로 이 질문이야말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다. 만일 어떤 사업이 거룩한 의무로부터 벗어나 있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만일 어떤 사업이 신학적으로 깊은 혼동 가운데에 빠져서 하나님의 진리로부터 이탈되어 거짓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만일 교회의 지도자들이 십일금을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용하는 일 이외의 목적으로, 즉 교회에서 필요되는 여러가지 사무나 법정 소송비용 등과 같은 곳에 사용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어깨를 한두번 으쓱하면서, “우리가 그러한 것까지 신경을 쓸 필요가 어디 있어? 그러한 일들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야.” 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엘렌 화잇은 교회 안에서 엄청난 배도가 일어날 것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러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부인하고 있다면, 그것이 예언의 신을 조심스럽게 읽는 재림 교인다운 태도인가? 윌리 화잇, 다니엘스, 프레스캇과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과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글에서 나타난 바처럼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았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결론을 다시 읽어보라. “십일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책임을 지니고 자들이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 실패하여 십일금의 분배를 위하여 정규적으로 조직된 통로가 타당한 십일금의 사용에 대해서 장애물이 될 경우 …. 오직 정규적인 계획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지 못할 경우” WDF 213.

십일금에 대한 화잇 부인의 증언과 자신의 실행

    십일금에 대한 이러한 연구 결과는 엘렌 화잇이 생존해 있을 경우 나온 것인데, 그들의 조사 결과가 나오기 2년 전에 엘렌 화잇은 자신은 교단에 의해서 소홀히 여겨져 왔던 목사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의 십일금을 “수년 동안” 사용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내가 그 글을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분은 선지자이지만, 나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지시를 선지자에게는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화잇 부인은 자신의 한 편지(일명 “왓슨 편지”)에서,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십일금을 화잇 부인에게 주면서 그녀가 최선으로 생각되는 곳에 사용해 줄 것을 부탁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화잇 부인은 그것을 받았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난하고 연로한 목사들을 지원하였다. 아마 사람들은 그녀는 선지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십일금을 배분하였을 것이라고 여전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엘렌 화잇의 그 편지에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나 있다. “만일 우리의 자매들이 그들의 십일금을 남부에 있는 유색인종을 위한 사업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목사들에게 지원하기 위해 그들의 십일금을 전용하였다고 할지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잠잠하도록 하라.”

    이 경우에 있어서의 십일금은 엘렌 화잇의 손을 거쳐서 지나가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그 일에 대한 문의를 받았을 뿐이다. 교인들에게 있어서 궁핍한 것으로 알려진 목사들에게 십일금은 직접 전달되었다. 엘렌 화잇은 그들의 그러한 십일금의 사용을 견책하거나 “도적질”하는 것으로 고소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그녀의 편지 내용은 그녀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나는 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는 사업을 돕는 일에 있어서 자금이 필요되는 곳에 자신들의 십일금을 드린 그 자매들을 칭찬하는 바이다.”

    그러나 엘렌 화잇은 감정적이며 사려가 깊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균형을 잡아주는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였다. “이 문제가 널리 알려지게 되면, 알려지지 않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그런 ,’지식’을 만들어 내게 된다. 나는 주께서 나에게 행하도록,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행하도록 주께서 지정하신 이 일을 널리 알리고자 애쓰지 않는다. 나는 그대가 실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문제에 대해서 편지한다. 상황은 경우에 따라서 변한다. 나는 십일조 자금을 모아들이는 일을 하라고 어느 누구에게도 조언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주의를 가지고 읽어야 할 내용이 나와 있다. 그녀는 각 사람이 자신의 십일금에 대해서 사려깊은 책임을 가지고 자신들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보내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그러한 방법으로 “수년 동안” 십일금을 타당성 있게 전용해왔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십일금의 전용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도와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편지에 기록한 것처럼 “상황은 경우에 따라서 변한다.”라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본을 따라서 남부의 유색인종을 위한 사업이나 그 가난한 목사들에게 자신들의 십일금을 보내게 될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상황은 경우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개인적인 인도하심과 자신의 엄숙한 책임 하에서 십일금의 올바른 사용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러한 말을 덧붙이고 있다. “내가 이 편지를 그대에게 쓰는 것은 그대가 냉정을 유지하도록, 그리고 격정에 불타올라 이 문제를 널리 퍼뜨림으로써 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본을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녀는 자신이 그러한 본을 보였고, 자신에게 직접 문의한 사람들의 십일금의 전용을 도와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군중심리에 의해서 자신의 십일금을 보내거나, 냉정함을 잃은 상태에서 십일금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또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될 사실은, 그 당시의 교회는 오늘날의 재림교회와는 전혀 다른 형편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에도 배도는 존재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응하였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오늘날처럼 공공연하고 공식적으로 백성들을 혼돈 가운데로 몰고 들어가는 분위기는 없었다. 그러므로 교인들의 십일금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규적인 교회의 통로로 보내지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상황은 경우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다. 오늘날과 100년 전의 재림 교회 사이에는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정직하게 인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오늘날 어떤 교인들은 헌신과 희생으로 강력한 복음을 전하는 복음 사역자들에게 자신들의 십일금을 직접 보내고 있는 상황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윌리 화잇, 다니엘스, 그리고 프레스캇 목사가 작성한 화잇 부인의 권면과 그녀 자신의 실례에 대한 종합적인 진술은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좋은 증거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조금도 더하거나 빼는 일없이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달하였다. 엘렌 화잇의 증언과 그녀가 남긴 자신의 실례는 모든 십일금이 모든 상황에 관계없이 언제나 정규적인 교회 채널로만 들어가야 한다는 인간적인 견해를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그 당시, 세명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솔직한 진술로 인해서 교회 안에 커다란 문제가 생길 것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엘렌 화잇의 증언에 따라서, “교회로 보내지는 십일금이 책임있고 타당하게 사용되지 못할 경우에” 각 교인들은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서 십일금이 사용될 곳을 결정할 수 있다는 글을 쓸 수 있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그러한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다. 세명의 지도자들은 교회 안에서 요즈음 일어나고 있는 엄청난 배도의 결과로서 생기는 교인들의 갈등과 고통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

    그러나 오늘날의 재림 신자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으로 인해서 딜레마에 빠져들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재림교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일에 엄청난 액수의 성결한 헌금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깊은 회의 가운데로 빠져들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서 적어도 한 사건에 있어서는 수많은 벌금을 부과하였고, 그 당사자를 감옥 속에 넣은 것을 미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어떤 교인들은 이러한 특정한 사건들에 대해서 모르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북미 지회에 속하여 있는 교인들은, 십일금 잇슈가 일어나도록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대담하고 공공연한 신학적인 배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교인들이 안식일 아침마다 교회에서 배도적인 가르침과 설교를 듣고 있다.

    재림 교회의 많은 목사들과 교회 대학의 교수들과 각 계층에 있는 행정자들이 계속적으로 진리를 사단이 말하는 거짓말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다고 할지라도 결코 죄짓기를 중단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엘렌 화잇은 그러한 주장은 사단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35번 이상이나 경고하고 있다. 그러한 가르침의 가면을 가장 확실하게 벗겨낼 수 있는 영감의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사단은 아담의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는 지혜와 사랑이 부족하다는 도전이 생기게 되었다. 만일 사람들이 법을 지킬 수 없다면, 그 법을 만든 자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사단의 지배 하에 있는 자들은,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함으로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사단의 거짓말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당신의 신성에 인성을 입으심으로서 인간 가족을 대표하는 머리로서 서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교훈과 모본으로서 육체 안의 죄를 정죄하셨고,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사단에게 돌렸다.” 영문시조 3권, 264.

    나는 우리의 지도자들과 설교자들이 위에 언급한 영감적인 증언을 다시 한번 깊이 숙고해 보기를 소원한다. 교회 안에 있는 어떤 지도자들과 설교자들, 그리고 각 계층의 행정자들은 사단의 가르침 위에 서있다는 증거가 안식일 아침의 설교 예배와 각종 출판물과 야영회에서 수없이 드러나고 있다. 화잇 부인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에서 일어날 그러한 배도를 예언하였다. 우리가 그 예언의 성취 장면인 현실을 보면서 예언의 정확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 십일금에 대한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설교 단상에서 사단의 거짓말을 설교하고, 학교의 교실에서 사단의 거짓말을 강의하는 자들과, 그리고 교인들의 절망적인 호소를 무시한채 그런 거짓 사역자들을 십일금으로 지원하고 있는 교회의 행정자들이야말로 십일금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장본인들이 아닌가?
자영 선교기관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주역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인 주장이 될 수 있는가? 재림 교회의 분열은 교회 안에서 어떤 목사들와 교수들이 칼빈주의적인 복음을 가르침으로서 시작되었다. 나는 교인들이 이 문제를 좀더 냉정하고 양심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호소한다.

    우리 모두 어떤 평범한 재림 교인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현실적으로 함께 생각해 보자. 그는 마지막 시대를 위한 기별을 이해하고 있으며,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대로 받고 헌신하는 평신도이다. 그는 신실하게 십일금을 내는 재림교인이며, 여러해 동안에 걸쳐서, 엘렌 화잇의 책으로 자신의 서재를 채워왔고, 깊은 주의를 가지고 그녀의 증언을 연구해왔다. 그런데 그가 일련의 충격적인 일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어떤 안식일이었다. 그는 주님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선언을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의 목사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 목사는 주님께서 죄와 유혹에 대처하는 면에 있어서 우리와는 전혀 달랐었다는 인상을 교인들에게 계속해서 주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혼돈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 안식일 오후, 시대의 소망 을 읽어가면서 혼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였다. 그는 시대의 소망 25, 49, 112, 117, 174-5, 그리고 311-2에서 그날 아침 설교와 정반대되는 글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음 안식일, 그는 설교 시간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죄짓기를 멈추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가르침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소망 , 24, 29, 117, 761에서 그러한 주장은 사단의 거짓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해진다라는 내용의 증언이 78개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각시대의 대쟁투 를 읽다가 489 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되었다.

    “(사단은) 치명적인 궤변을 가지고 사람들이 죄를 정복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계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을 기만하려고 한다.”

    마음에 깊은 고통과 혼돈을 가져오는 이러한 경험이 안식일마다 계속됨에 따라서, 그 평신도는 화잇 부인이 예언한 바대로 재림 교회 안에서 엄청난 배도가 자신의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습을 결국에는 인정하게 된다. 그때, 다음과 같은 고뇌가 섞인 질문이 그의 마음 속에서 떠오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십일금으로 이러한 배도를 지원할 것을 요구하시는가?”

    두 평신도 이전의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논리적인 대답을 찾아내게 된다. 바로 그 무렵, 그는 친구를 통해서 자영 선교기관에서 보내는 월간지와 테잎을 받게 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자신이 처음 재림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부터 지금까지 믿어온 역사적인 재림 신앙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영 선교기관에 자신의 십일금을 보내기 시작하였다.

    자, 이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자 한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그 교인이 교회에 십일금을 보내지 않게 된 것은 자영선교기관의 책임인가? 아니면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구원에 관한 칼빈주의적인 거짓 복음을 설교하기 때문에 생긴 심경의 변화인가? 다시 질문한다. 누가 그 평신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가?

감정적인 해결법

자영선교기관을 없애버림으로써, 교회 안에 구원에 관한 거짓 복음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경고를 백성들이 듣지 못하게 된다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또는 교회의 지도자들도 완전한 승리와 순종에 대한 가르침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그리고 교회 안에 신신학이 들어와 있지 않다는 평화의 선언을 하면서 뿌연 연기를 자욱하게 뿌린다고 해서,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 또는 그렇게 믿어도 좋고 이렇게 믿어도 좋다는 식의 가장 치명적인 기만을 백성들에게 주입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의 눈과 진리를 이미 이해하고 있는 신자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자영선교기관의 글과 테잎을 듣는 신자들을 교회의 직책과 프로그램에서 제외시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변은 너무도 분명한 것이다. 겉으로 나타난 증세를 없애는 것이 진정한 치료법이 될 수 없다 . 진정한 치료는 항상 그 원인을 찾아 내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참으로 슬픈 사실은, 자영선교기관을 계속적으로 정죄하는 어떤 지도자들과 행정자들에게 있어서, 분명하고도 명백한 진실과 진리는 잃어버린바 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모든 어려움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러한 어려움을 눈에 안보이는 곳으로 밀어내어 버리는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해결책을 사용하고 있다.

    나는 자영선교기관과 교회 조직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린다는 몇몇 회의에 초청이 되어 간 적이 있다. 그러한 회의 중의 어떤 회의에서도, 교회 안에서 공공연히 가르쳐지고 있는 거짓 복음을 문제의 중심 또는 일부분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 배도를 시정하기 위한 어떠한 개혁이나 시도도 없었으며, 다만 자영선교기관들에게 “당신들, 오직 당신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만일 그대들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특히 십일금을 거두어 들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대들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받게 될 것이요.” 라는 메세지를 전달할 뿐이었다.

    서두에서 말했던 것처럼, 십일금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할 때, 우리 모두는 강력한 감정의 시험을 받기 쉽다. 감정적인 긴장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일에 균형과 정확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교단에 대한 열렬한 충성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증명될 수 없다면, 그것은 충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좇지 않은 맹종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모든 십일금이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반드시 교단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단지 높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한 맹목적인 열심으로 불리워 질 수 밖에 없다.

경고와 우리의 자세

    화잇 부인은 교회 안에 커다란 배도가 일어날 것을 예언하였다. 그런데 그 배도에 참여한 자들이 무엇을 가르치던지, 무슨 설교를 하던지, 그리고 무슨 글을 쓰던지에 상관없이 그들이 교단 안에 속하여 있다는 이유 때문에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항상 십일금으로 그들을 부양해야 된다는 것은 너무도 비논리적이고 상식을 초월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화잇 부인은 배도에 참여한 자들과 그러한 자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엄숙한 경고를 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업을 해치고 망가뜨리며, 계속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표준을 낮추는 자들을 그분의 금고에서 나온 자금으로 후원하는 것은 빈약하고 서투른 정책이 될 것이다.” 교회증언, 3권, 553.

    “진리를 전파하지만 진리로 성화되지 못한 자들과, 말씀과 교리로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에 성화되지 못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유지시키는 일에 동의하는 자들에게 무서운 화가 놓여 있다.” 교회증언, 1권 261.

    “마음과 생애가 성화되지 않았으면서도 진리를 전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는 것처럼, 그들이 차지하고 있을 수 없는 자리에 성화되지 못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도록 허용하는 자들 위에도 화가 있을 것이다.” 교회증언 2권, 552. `

이 글을 읽는 독자들과 나에게는 교회와 자영선교기관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우리의 십일조로 어떤 사업을 지원할 것인가에 대해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선택과 결정을 하기에 앞서 영감의 기록들을 앞에 놓고 주님께 무릎을 꿇을 때, 주께서 지혜와 진리를 가르쳐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모든 사람은 신성한 신임을 맡은 청지기들이 되어야 한다. 각자는 주신 분의 지도에 따라서 그에게 맡겨진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재정을 투자하는 일에 있어서 책임이 있다.” 교회증언, 7권, 176-7.

    “사람들이 용기가 너무 없어서 잘못을 견책하지 않거나, 너무 관심이 없거나 방종하여 가족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음으로서, 존재하는 악들을 직면하여 점검하지 않을 때, 그들이 의무를 소홀히 여긴 결과로 생기게 되는 악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견책이나 경고을 하며, 부모 또는 목사로서의 권위를 행사함으로서 막을 수 있었던 악은, 마치 우리 자신이 그 악을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교회증언, 4권, 516.

이 혼돈의 시대에 주께서 우리 모두의 양심과 눈을 씻어주셔서 주님의 뜻과 역사를 분명히 식별함으로써,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드린다.

제2부 – 로저 쿤 목사의 견해에 대한 분석

어드벤티스트 리뷰 지에서 십일금에 대한 기사를 특집 부록으로 다룸으로써, 모든 교인들이 십일금 문제에 얽혀 있는 논쟁점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집 부록은 로저 쿤, Roger W. Coon 목사에 의해서 작성되었는데, 한국 교회지남 1995년 5월호에서 번역 기재하였음 – 역자주). 우리는 모든 교인들에게 리뷰지에서 다룬 십일금 기사와 견고한 토대에서 다룬 십일금 기사를 함께 비교해서 읽어보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십일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무엇이 십일금에 대한 잇슈의 핵심인가를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두 기사를 비교하는 재림 교인마다 진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을 확신한다. 모든 교인들이 말씀의 증거들을 고찰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인 결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이 문제의 중심을 다루고 있는 영감의 글을 함께 읽어보자.

“유대의 관원들은 십일조에 대한 의무를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이 의무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수행하도록 버려두지 않았다.” 시대의 소망, 3권, 78.

    교인들은 십일금에 대해서 강요받아서는 않된다. 그들은 먼저 진리를 이해하여야 하며, 그것을 기초로 해서 생긴 자신의 확신에 의해서 움직여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리뷰지의 편집인들이 십일금에 대한 문제를 공개한 `사실은 긍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기본 원칙

    재림 교회의 모든 목사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적으로 전부 거절하고 있는가? 물론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 가운데에 항상 신실한 남은 무리들이 존재하고 있었는가? 그렇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거절하였었는가? 아니다. 그들이 모든 진리들을 거절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거절하셨다. 오늘날 재림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거절하였는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모든 진리들을 거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배도는 항상 징책을 받아왔다. 어떤 교회와 어떤 사업도 그들이 가진 특권과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보장받았던 적이 역사에 없었다.

“하나님의 약속들과 경고들을 꼭 같이 조건적인 것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가려뽑은기별 1권, 67.

    로저 쿤 목사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하게 된다. “배도한 교회와 교회 안에 있는 배도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것 같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올바른 견해이다. 내가 아는 한, 미국에 있는 모든 주요 자영선교기관 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교회를 “배도한 교회”로 표현하고 있다. 나머지 모든 자영선교기관들은 그의 표현처럼 “교회 안에 배도가 있는”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로저 쿤 목사 말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 존재하는 배도가 눈에 보이지도 않고 귀에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사소한 것은 아니다. 그는 배도라고 부르기에도 어려운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자영선교기관들이 풍선처럼 과장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 정말 교회 안의 배도는 그런 정도의 것인가?
나는 어떤 연합회장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나는, 재림교인들 중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정통적인 재림교회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서는 자영선교기관의 기별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절망 가운데로 빠지고 있습니다.” 왜 너무도 많은 재림교인들이 역사적인 재림 기별을 듣기 위해서는 자영선교기관에서 나오는 글과 테잎을 받아야 한다고 그 연합회장은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적어도 그 연합회장은 진리와 현실에 대해서 정직하였다. 1973/1974년에 나온 대총회 연례회의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견고한 토대, 93년 10월호에 기재했음) 을 읽어보면 그 당시의 대총회장(로버트 피얼슨) 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깊어 가는 배도의 증가로 인해서, 교회 안에 배도가 있다는 표현과 교회가 배도했다라는 표현 중에서, 적당한 표현을 선택하는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교인들의 숫자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실정에 있다. 대다수의 목사들이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에 대해서 더 이상 설교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재림교회의 어떤 일부 목사들은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와 순종의 생애를 설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정직한 고백이 될 수 있을까? 차라리 “재림교회의 어떤 일부 목사들은 아직도 여전히 역사적인 재림 신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좀 더 현실감 있는 표현이 아닐까?

    내가 미국 각지로부터 받고 있는 질문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나가고 있는 교회에서 제시되고 있는 어떤 가르침과 교리는, 자신들이 오래 전에 재림 교회에 첫 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들었던 것, 또는 어렸을 때에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하소연 해오고 있다. 다른 개신교회에서 개종해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에 다니던 장로교회 또는 감리교회에서 들었던 가르침을 요즈음은 재림교회에서 듣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재림교회 안에서 자신들이 전에 다니던 장, 감리교회 식의 구원론을 듣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와 대회의 행정자들에게 호소하고 있지만, 반응없는 메아리가 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변질되지 않는 재림교회의 복음을 전하는 사업을 찾아나선다. 그들의 한결 같은 질문은, “하나님께서는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사업을 위해서 나의 십일조를 보내라고 요구하실까? 내가 양심적으로 믿고 있는 복음을 전하는 사업에 나의 십일금을 보내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이다.

    나는 그들의 고뇌를 동정한다. 지금 내가 교적을 두고 다니는 교회는 역사적인 재림신앙을 설교하는 목사에 의해서 지도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십일금을 내가 다니는 교회에 드리는데에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목사가 교체되고, 칼빈주의적 재림 신앙을 설교하는 목사가 전임되어 오게 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오는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나는 십일금에 대한 문제를 조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보고서를 미국 견고한 토대지 1991년 9월호에 기고하였다. 다음의 글은 나의 보고서에서 결론으로 정했던 진술이다.

“엘렌 화잇의 증언과 그녀 자신의 행습을 통해서, 모든 십일금이 모든 경우를 불문하고 항상 정규적인 통로를 통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지받지 못하는 견해이다.”

    로저 쿤 목사는 리뷰 지에서, 모든 십일금은 항상, 어떤 경우에서도 정규적인 통로를 통해야 한다는 결론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를 분석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그의 주장을 분류하였다.

1. 성경에서 뽑은 그의 주장
2. 예언의 신에서 뽑은 그의 주장
3. WDF 213에 대한 주장
4. 신학적인 질문들

1. 성경에서 뽑은 그의 주장

로저 쿤 목사는, 성경에서는 하나의 논쟁점을 제시하였다.

    “구약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되돌려드리는 것과 그 사용처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신약은 그 문제를 더 자세하게 풀어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십일조를 드리는 일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권리와 신임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13-14절). “성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것을 먹고, 제단을 섬기는 사람들은 제단에 있는 것으로 나누어 가진다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셨느니라”

    13절의 말씀은 레위인들이 받게 되는 십일금에 대한 말씀 임에 틀림없으며, 14절에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대한 언급이 나와 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신임서는 그들이 전하는 복음에 달려 있다. 바울은, 어떤 종류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를 불문하고 모든 복음 사역자들이 십일금으로 부양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갈라디아 1:8-9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우리가 전에도 말한 것같이 지금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이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저주를 받으리라”는 말씀을 “십일금을 받으리라”라는 말로 변경할 수 있을까? 바울이 자신까지 포함시켜서 경고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리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시험할 것을 촉구하고 있으며, 그 시험 기준은 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참된 복음이야말로 가장 높은 신임서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바울이라 할지라도, 그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서 다른 복음, 신신학을 가르친다면, 우리는 바울을 거절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목사가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있고, 교회가 주는 신임서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가 가르치는 복음에 관계없이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금으로 그를 후원해야 된다는 말인가? 로저 쿤 목사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들은 성경적으로, 그리고 양심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가?

2. 예언의 신에서 뽑은 그의 주장

자영선교기관은 십일금을 호소하여 “거두어들이고” 있는가에 대한 논쟁점.

    십일금에 대한 예언의 신의 말씀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십일금을 내지 않는 동결(withholdlng)에 대한 경고의 내용이다. 로저 쿤 목사가 인용한 예언의 신의 글은 자영선교인들에게 적용되기 보다는 십일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십일금을 반드시 드려야 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는 자영선교기관들이 “십일금을 거두어들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아는 바로는, 어떤 자영선교기관도 교인들에게 십일금을 자신들에게 내라고 호소하지 않는다. 자영선교기관으로 드려지는 십일금은,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서 제시되는 잘못된 복음에 지친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들은 대개 과거 수십년 동안 자신들의 십일금을 교회에 신실하게 드려왔던 교인들이다. 그들은 십일금을 동결하여 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적 양심과 확신에 따라서 십일금을 보내는 것이다. 다른 모든 진리에 대한 그들의 충성과 헌신이 십일금에 대한 진리의 면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진리가 가르쳐 지는 곳마다 십일금이 드려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십일금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창고”에 대한 논쟁점.

    “주님의 보고(창고)”(the Lord treasury)는 오직 교회와 합회의 재정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주장이 펼쳐졌다. 그러나 화잇 부인은 교회가 아닌 궁핍한 목사들에게 직접 십일조를 보내면서, “돈이 주님의 보고(창고)에 드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왓슨 대회장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라고 말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로저 쿤 목사는, 엘렌 화잇이 말했던 “주님의 창고”는 항상 교회와 합회의 재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한 후, 엘렌 화잇이 교회를 통과하지 않고 직접 궁핍한 목사들에게 자신의 십일금을 보낸 것은 그 십일금을 받는 사람들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목사이었기 때문에 “주님의 창고”로 십일금이 드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우리가 궁핍한 목사들에게는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십일금을 직접 보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앞서 말하기를 십일금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항상 교회와 합회로 보내져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문제를 설명하면서 십일금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궁핍한 목사들에게 보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길의 양쪽 보도를 한꺼번에 걷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의 주장은 논리의 일관성을 잃어버렸다.

“자금”과 “십일금”의 용어에 대한 논쟁점.

    엘렌 화잇이 “자금”(means)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경우, 그것은 일반적으로 십일금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면서, 자금(means)은 교회가 아닌 다른 가치있는 사업에 쓰여질 수 있지만, 십일금은 반드시 교회에 드려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나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 문제에 대해서 조사하였다. 화잇 재단에서 만들어낸, 모든 예언의 신을 컴퓨터에 입력시킨 자료 덕분에, 나의 조사는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십일조, 십분의 일, 십일금”과 관계있는 “자금”을 찾아달라고 컴퓨터에 주문했을 때, 168개에 달하는 인용구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한 인용구절들은 나로 하여금 십일금과 자금(means)을 분리시킬 수 없도록 만들었다. 화잇 부인이 “자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경우, “십일조”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다. 어떤 글에서는 십일조와 헌물이 “자금”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었으며, 어떤 글에서는 “십일금”이라는 단어가 자금을 의미하고 있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청지기 직분을 영예롭게 여기는 모든 영혼은 십일금을 주의깊게 보존해야 한다. 이것은 거룩한 자금(means)이다.” 원고, 1권, 185.

    “교회 녹명책에 이름을 두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만일 그들이 주님께 그분의 몫인 십일금을 정직하고 신속하게 돌려드린다면, 재정은 자금(means) 부족을 겪지 않을 것이다.” 청지기 직분에 대한 권면, 95.

    “하나님께서는 십일금의 사용에 대해서 특별한 방향을 주셨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사업이 자금(means)의 부족으로 인해서 절름발이 되는 것을 계획하지 않으셨다.” 복음사역자, 224.

    엘렌 화잇은 168번에 걸쳐서 십일금과 자금을 동일하게 사용하였으며, 어떤 경우는 십일금이라는 단어를 반복할 경우에 자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리뷰지에 글을 쓴 저자가 어떻게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로저 쿤 목사는, “주님의 보고(창고)”는 오직 교회와 합회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두가지 증거를 제시했는데 그 두가지가 모두 진리로서 입증되지 못함으로써, 그가 주장하는 바의 무게를 잃어버렸다.

    “십일금을 내지않고 동결하는”(withholding tithe) 행위에 대한 화잇 부인의 경고를, 자신들의 십일금을 신실하고 강력한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에게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십일금에 대한 토의를 할 경우, 화잇 부인이 경고하신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함께 다루어야 한다.

    “주께서는 자금(means)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어떤 정규 통로를 지정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여러 매체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만일 새 일터로 들어가서 새로운 분야의 활동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하도록 그들을 독려하라… 조용히 그러면서도 효율적인 방식으로 선교사 사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자금(means)이 직접 흘러 들어가지 않을까 염려하지 말라. 모든 자금(means)이 한 기관(agency)이나 조직(organization)에 의해서 다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스폴딩-메간 콜렉션, 421.

3. 서류 DF 213에 대한 논쟁점.

    제1부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서류 DF 213 에는 화잇 부인의 아들이자 비서인 윌리 화잇, 대총회장인 A.G. 다니엘스, 그리고 W.W. 프레스콧 목사와 다른 몇몇 사람들이, 1907년에 스튜어트 박사에 의해서 출판된 화잇부인의 비판서에 대항하기 위해서 작성한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스튜어트 박사는, 엘렌 화잇이 십일금에 대해서 권면하였던 바는 조직의 통로를 통해서 십일금을 내야 된다는 것이었는데, 자신이 행한 행습은 자신이 말했던 바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도전하였다. 이러한 도전에 대해서, 그 세명의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십일금에 대한 타당한 사용에 대해서: 이 항목은 다음과 같은 내용에 대한 서술임.

    화잇 부인의 십일금에 대한 증언과 그녀 자신의 실행은 정규적으로 지정된 창고에 자신의 십일금을 보내는 것이었고, 십일금은 그것을 위해 조직된 위원회의 권면 하에서 사용되어야 함을 서술함.

    또한 십일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책임을 맡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 실패하여 조직된 통로가 타당한 십일금의 사용에 있어서 장애물이 될 경우, 십일금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서 가장 지혜로운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각 개인들은 그들의 십일금을 필요로 하는 개인들에게 직접 보낼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따르는 각 개인들에게는 상당한 책임이 수반된다. 십일금에 대한 정규적인 계획으로부터의 이탈에 관한 문제는 오직 정규적인 계획이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지 못할 경우에만 인정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리뷰 지에 글을 쓴 저자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위에 언급한 증거를 부인하고자 하였다:

    첫째, 로저 쿤 목사는, 위에 언급한 글이 포함되어 있는 서류 DF 213의 작성 날짜와 작성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가 왜 그와 같은 의문을 갖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 서류는 스튜어트 박사가 보낸 4통의 편지를 포함하고 있는데, 4통 모두 수신인이 윌리 화잇(화잇 부인의 아들 겸 비서) 으로 되어 있다. 또한 그 서류에는 윌리 화잇이 스튜어트 박사에게 답장한 편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메모 내용에는 스튜어트 박사의 편지에 답변했던 윌리 화잇에 관한 10개의 언급 사항이 있는데, 그 중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십일금 – 누구에게 지급되어야 하는가”

“이것을 윌리 화잇에게 문의할 것. 매우 중요함.”

    이러한 증거들을 볼 때, 윌리 화잇이 십일금에 관한 서류 DF 213의 작성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타당한 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작성 날짜에 대한 의문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설명함으로써 밝혀지게 된다. 스튜어트 박사의 4통의 편지 작성 날짜가 1906년 10월 22일, 1907년 5월 8일, 같은 해 6월 10일, 같은 해 6월 24일로 되어 있으며, 스튜어트 박사에게 보낸 윌리 화잇의 편지가 같은 해 6월 9일로 되어 있다. 스튜어트 박사가 화잇 부인에 대한 비평서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 1907년 10월 중순이며, 자신의 책을 윌리 화잇에게 보낸 날짜가 10월 27일이다. 십일금에 대한 진술을 포함하고 있는 그 서류는 스튜어트 박사가 보낸 책에 관한 특별한 답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해서 볼 때, 우리는 DF 213에 포함되어 있는 십일금에 대한 기록이 언제쯤 작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둘째, 로저 쿤 목사는 화잇 부인의 아들인 윌리 화잇이라고 할지라도 화잇 부인의 생각을 잘못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이 그들보다 화잇 부인의 견해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지자의 측근에 있었다는 사실이 옳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화잇 부인의 아들이자 26년 동안의 개인 비서였으며, 사업의 동반자 역할을 했던 윌리 화잇이, 십일금에 대해서 화잇 부인이 천번 이상 기록한 문제에 대해서 잘못 이해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로저 쿤 목사는 그 당시로부터 80년 이상이 지나간 지금의 입장에서 자신이 윌리 화잇보다 더 정확하게 화잇 부인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DF213 서류가 신빙성 없는 자료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 로저 쿤 목사는 다음과 같은 질의 응답을 하였는데,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하나의 수수께끼 같은 것이었다.

“질문: 미국 남부의 목회자들을 위한 엘렌 화잇의 ‘십일조 계획’에 함께 가담했던 다른 여성들이 있었다. 그 여성들이 그들의 십일조를 화잇 여사에게 보내지 않고 궁핍한 목사들에게 직접 보냈으며, 화잇 여사가 그런 행동들을 승인했음에 틀림없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그렇지 않은가?”

“답변: 그렇지 않다.” (이어서 장문의 설명이 있음.)

로저 쿤 목사는 화잇 부인이 콜로라도 대회장인 왓슨 목사에게 보낸 편지 전문을 이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입증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가 다음과 같은 글들이 그 편지에 있음을 간과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 편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들을 자신의 주장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의 자매들이 남부에서 유색인들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목사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들의 십일조를 사용한 사례들이 있지만,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잠잠하도록 하라.”

    “나는 하지 않은채 방치되고 있는 사업을 행하는 일을 돕는데 있어서 자신들의 십일조를 드린 저 자매들을 칭찬하는 바이다.”
어떤 누구도 화잇 부인의 글을 자신의 눈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읽으려고 하지 말기를 바란다.

교회가 인정하며, 교회에게 협력하는 자영선교기관만을 화잇 부인은 인정했는가?

    로저 쿤 목사는 자영선교기관들이 교회와 조직의 감독과 지배하에 완전히 또는 어느정도 들어오지 않는 것이 바로 자영선교기관들이 십일금을 받을 수 없는 이유라고 말하였다. 교단에 종사하고 있는 많은 지도자들과 목사들 역시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듯 하다. 그들은 자영선교인들이 십일조를 받지 않고, 교회 안에 들어온 배도와 오류를 경고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교회에게 협력하고 충성하는 증표로서 생각하고 있다. 교회가 원하지 않는 설교를 하지 않고, 교회가 원하지 않는 글을 쓰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참된 충성이라는 주장은 성경과 예언의 신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는 견해인가?

    로저 쿤 목사는 주장하기를, “화잇부인은 교단의 인정을 받은 자영 사업만을 지원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진실로 입증될 수 있는가? 우리는 최초의 자영선교기관인 메디슨 대학의 설립 과정에서 있었던 기록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E.A. 서덜랜드 교수와 함께 메디슨 대학의 설립자로 헌신했던 P.T. 매간 교수와 화잇 부인, 그리고 교단 지도자들의 견해에 대한 기록은 우리 모두가 그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에 있어서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이다.

    1904년 8월 8일: “그(서덜랜드)는 (테네시주) 네쉬빌에 있는 학교의 법인화에 대한 계획을 준비하느라고 오전에 윌리 화잇과 함께 일했다. 오후에 그는 다니엘스 목사(당시 대총회장), 프레스콧 목사, 그릭, 와쉬번, 그리고 윌리 화잇과 만나서 조직에 대한 계획을 협의했는데, 다니엘스 목사(대총회장)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904년 8월 9일: “엘렌 화잇과 윌리 화잇과 학교 조직에 대한 계획에 대해서 대화함. 화잇 부인은 우리는 남부 연합회의 지배 하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음.”

    1906년 8월 14일: “대총회장 다니엘스 목사와 오전에 대화함…. 왜 우리 학교가 독립적이 되어야 하며, 왜 우리가 떡상의 떡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에게 말해 주었다.”

    1907년 5월 7일: “우리를 향한 대총회장의 태도에 대해서 화잇 자매와 대화 하였음. 사라 맥켄터퍼 부인과 릴리안이 참석함. 우리 학교가 대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자금을 요구할 수 없다는 대회 행정부의 견해를 그녀에게 말해 주었음. 그녀는 대답하기를, ‘우리는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의 두배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대들이 얻을 수 있는 모든 기부금을 받으십시요. 그 돈은 주님께 속한 것이지 그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취하는 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남부 연합회는 그대들을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대들의 재산을 그들에게 양도해서는 안됩니다.'”

    1907년 5월 14일: “나는 대회에 소속되지 않는 기관은 돈을 받을 수 없다는 대총회장의 입장을 화잇 자매에게 말했음. 그녀는 대답하기를, ‘다니엘스 목사와 그의 동역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지시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1907년 5월 23일: “윌리 화잇과 오전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는 나에게 화잇 자매가 우리에 관해서 대총회장에게 쓴 편지를 주었다. 그는 모든 돈이 자신들의 손을 통과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와싱턴의 행정자들의 견해를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가 대회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로저 쿤 목사가 말했듯이, 엘렌 화잇은 메디슨 대학의 이사로서 봉사하였다. 이 사실은 기관과 사업이 교회의 조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엘렌 화잇 당시에도 자영선교 사업에 대한 개념은 교단 종사자들에게 있어서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대들(메디슨 대학의 설립자들)에 대한 반대 또는 무관심의 태도로 인해서 그대들의 사업이 더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대들은 어떤 격려의 말도 듣지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대들이 쉽게 낙담하지 않는 것을 기뻐하고 계신다.” 스폴딩 앤 메간 콜렉션, 411.
“어떤 사람들은 메디슨 대학이 대회조직에 의해서 소유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학교를 책임맡고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 백성들에게 자금을 호소하는 일을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를 가지고 있다. 주님의 창고로 들어온 돈의 분배에 있어서, 그대들(메디슨 대학의 설립자들)은 주님의 지시에 조화있게 추진하는 다른 사업들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대들의 몫을 받을 자격이 있다.” 상동.

4. 신학적인 질문.

    우리가 정직하게 인정해야 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배도가 십일조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를 향하여 정규적으로 드려지던 어떤 십일조들이 그 방향을 바꾼데에는 특정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로저 쿤 목사는 그러한 배도를 다루는 대신, 십일금의 방향을 재조정한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서 유죄를 선언하였다. 그들이 그의 글을 읽으면서 갖게 되는 안타까운 질문은, “왜 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짜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가? 왜 그는 우리가 믿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마치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것처럼 말하는가?” 그는 우리가 아닌 어떤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그것을 자영선교인들의 대표처럼 공격하였다. 우리는 그가 말하던 것처럼 믿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정통 재림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불과 몇 명의 사람들을 교정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표현했다. 정말 그런가? 정말 대다수의 사람들이 남은 교회의 “옛 진리”를 그대로 붙들고 있는가?
그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면에 대해서 자영선교기관들을 정죄하였다.

1. 십일금을 거두어들이는 일.
2. 교회가 배도했다고 말하는 것.

어떤 사람들은 자영선교기관들을 마치 십일조를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설립한 회사처럼 표현한다.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 중의 대부분은 자영선교기관에서 나오는 간행물과 테잎을 실제로 듣고 보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서 또는 자신의 갖고 있던 선입관념에 의해서 책임질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재림신앙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자영선교기관을 위해서 그들의 헌금을 바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영선교기관이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보내라고 호소하는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자영선교인들도 십일조에 대한 호소를 하지 않고 있다.

로저 쿤 목사는 교회가 배도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러나 나는 질문한다. 그는 누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자영선교인들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다른 사람들인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자영선교인들도 교회 전체가 배도했다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자영선교인들은 교회 안에 커다란 배도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경고하면서 부흥과 개혁을 촉구하는 엄숙한 기별을 전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교회를 배도한 바벨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자영선교인들은 교회의 연약함과 실수를 과장하여 엄청난 배도가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수많은 증인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지난 수년 동안 나에게 이렇게 증언하였다.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 안에서 성소 진리가 짓밟히고 있으며

, 칭의와 성화에 대한 칼빈주의적 가르침이 성행하며, 예언의 신에 대한 공공연한 무시와 무관심이 표현되며, 교회의 표준을 낮추는 일이 생기는 현실을 나에게 전화로, 편지로, 또는 자신들이 안식일에 들었던 설교테잎을 보내주면서 조언을 구해왔다. 마지막 시대를 위한 현대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 재림 교인이라면, 재림 교회 안에서 바벨론의 가르침이 오히려 남은 교회의 가르침을 압도하고 있는 현실을 정직하게 인정할 것이다.

    교회 안에 배도가 항상 존재해 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그는 과거에 있었던 캘록 의사의 배도를 지적했고, 화잇 부인 당시에도 배도는 존재했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캘록 의사의 배도는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강력한 저항을 받았다는 사실을…. 캘록 의사의 배도가 온 교회 안에 아무런 저항없이 퍼져나갔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재림 교회의 과거 역사에 있어서, 공개되거나 드러났던 배도는 항상 교회의 지도층에 의해서 강력한 저지를 당해왔다. 다니엘스 대총회장 당시에 있었던 오류에 대항하기 위해서, 다니엘스 대총회장은 자신의 권한과 직위가 갖고 있는 모든 영향력을 다하여 그 오류에 정면으로 맞섰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재림교회의 지도층에서 이러한 결정적인 결단이 오류와 배도에 대해서 내려지고 있는가? 예언의 신은 소리없는 나팔을 손에 들고 의미없이 서있는 파수꾼들에게 동일한 배도를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역사적인 재림 신앙을 믿는 신실한 재림신도들은 나약하고 결단력이 없는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장 크게 낙망하고 있는 것을 우리의 지도자들은 알고 있는가?

    교단과 자영선교인들 사이에 커다란 오해의 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인정해야 된다. 정직하고, 신중하며, 마음을 열어 놓은 대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교단에서 종사하는 어떤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교단이 자영선교인들을 일방적으로 가혹하게 다루고 있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있다.

    교회의 어떤 목사들과 지도자들은 자영선교인들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평신도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 그러한 평신도들에게 우리의 진정한 목적과 사업을 설명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런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기별과 사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항상 우리를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고의적인 악한 동기를 가지고 교인들을 그렇게 교육시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영선교인들에 대한 무관심과 부족한 이해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기별을 듣고 역사적인 진리를 받아들이는데에 있어서 어려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목사들과 지도자들에 의해서 잘못 교육된 신자들이 자영선교인들을 “분리주의자, 교회를 비난하는 자, 문제를 일으키는 자, 교회를 공격하는 자” 로 보는 한, 그들에게 남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현대진리를 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자영선교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온 배도와 오류를 경고할 때마다, 교회가 자영선교인들의 성품과 동기를 불신하는 말들을 교인들에게 주입시키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에게 깊은 슬픔을 가져온다.

    공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재림 교인이라면, 교회 안에 생기는 분리 현상, 교회 안에 생기는 문제가 구원에 대한 가르침의 차이에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자신의 구원에 대한 성경 상의 진리에 대해서 굳건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자신들이 믿는 바를 곧바르게 말할 때, 그것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되며, 분리를 야기시키는 것이 되는가? 주님의 권면을 교회가 진실하게 따라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이 되는가? 만일 배도와 오류에 대해서 경고하는 어떤 외침이 들려지게 될 때, 자신은 그러한 배도와 오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곧바른 경고에 대항하여 일어서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다.

    로저 큰 목사는 다음과 같은 질의응답을 통해서, 교회가 자영선교기관들을 공정하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질문: 나는 재림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은 선한 일을 하고 있는 ‘독립적인 목회’를 ‘격파하고’ ‘파멸시킴으로서’ 십일조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다고 최근 읽었다. 정말 그런가?”

“답변: 그렇지 않다.” (장문의 해설이 뒤따름)

    정말 그렇지 않은가? 어떻게 그러한 대답을 그가 서슴치 않고 할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이 교회 안에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는 어떻게 그러한 답변을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었을까? 1991년, 대회가 주최하는 한 야영회에서 있었던 일을 예로들어 보자. 그 야영회의 강사는 교회 행정부의 가장 높은 계층을 대표하는 지도자였다. 그는 자영선교기관들에 대한 어떤 의견들을 전한다고 말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담겨 있는 테잎을 어떤 사람이 내게 보내 주었다. 나는 깊은 슬픔을 가지고 자영선교기관에 대한 그의 평가를 듣게 되었다. 그는 그의 말을 마치면서 청중들에게 그들이 다니는 지방 교회로부터 교회를 공격하고 비난하는 암적인 존재들을 “처리”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 강사는 자신의 설교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는데, 참으로 놀라웁게도 그는 오늘날 역사적인 재림 신앙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지지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옛” 진리를 “새로운” 견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1950년대 이전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인용구절이 1200개가 있는데, 그 중에 400개는 화잇 부인 자신의 글이다. 그 모든 기록들은 오늘날 역사적인 재림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의 믿음을 “옛” 것으로 증명하고 있으며, 칼빈주의에서 나온 견해를 “새로운”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칼빈주의의 지지를 받고 있는 “새” 것을 원래부터 있었던 “옛” 것으로 대치시키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자영선교인들은 과거에 그들이 교단에서 봉사할 때에 받았던 월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적은 돈을 가지고 그들의 생계를 어렵게 꾸려가고 있다. 그들 중의 누구도 교단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100,000불 이상의 돈을 연봉으로 받고 있지 않다. 그들은 대개 시골과 산속의 초라한 집이나 모빌홈에서 살면서, 고생과 희생의 교훈을 배우기를 기꺼워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자영선교인들은 자신이 설립한 기관을 비영리단체로 등록하여 헌금을 내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감면받을 수 있는 정확한 영수증을 발급하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자영선교인들도 교회를 분리시키는 것을 그들의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많은 자영선교인들은 그들이 자영선교사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교단에서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일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또는 재정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어서 교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자영선교사업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겸손하게 믿는 사람들이며, 교회와 협력하며 충성스럽게 일하는데에 있어서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다.

최근에 어떤 은퇴한 한 연합회장이 내게 말하기를, “나는 우리의 보수적인 재림 신도들이야말로 교회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의 형제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 연합회장의 이러한 지적은 꽤 의미있는 말이다.

    문제를 요약해서 다시 살펴보자. 오늘날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안에는 3가지 부류의 교인들이 있다. 한쪽 끝에 한 무리가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교회가 시작부터 소유하고 있던 교리를 고치기 위해서 활동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도 죄짓기를 중단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신학을 근거로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그들로부터 여러가지의 다양한 오류들과 잘못된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른 한쪽 끝에도 한 무리가 있는데, 그들 역시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서 백성들을 준비시키며, 남은 교회가 이어받은 진리를 순결하게 고수하고 보존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이다. 그들에 대한 각종 반대와 왜곡된 평판에도 불구하고, 이 무리는 꾸준하면서도 빠른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 두 무리의 중간에 제3의 큰 무리가 있는데, 그들은 두 양쪽 끝에 있는 두 무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혹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자신들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의 결핍으로 인해서 도덕적인 용기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쪽이든지 저쪽이든지를 불문하고 자신들이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을 하는 곳을 향해서 박수를 친다. 그러나 결코 어떤 한쪽에 자신의 발을 깊이 들여 놓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신학의 신봉자라는 평가를 받기 싫어하며, 동시에 완전주의자라는 고소도 받기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중간에 서서 어느 쪽에도 관대하고, 어느 쪽에도 무관심한 자들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긴장과 문제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부족하며, 자신이 믿는 바를 성경과 예언의 신에 비춘 후 자신의 온 생애를 자신이 믿고 확신하는 진리 위에 올려놓은 일을 결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교회 안에서 일어날 배도와 분리 현상에 대한 선지자의 예언을 소홀히 여기거나 그것에 대해서 무지하다.

거의 모든 교회 행정자들은 우리의 신앙을 바꾸려는 위험한 시도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때때로 연합에 대한 간곡한 호소를 발하지만, 다음과 같은 화잇부인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연합해야 한다. 그러나 오류의 토대 위해서 연합하라는 것은 아니다.” 특별증언 씨리즈 B, No. 2, 47.

교회가 역사적인 재림 신도들에게 일방적으로 행하는 비공정한 처사가 행해질 때마다, 그들은 “왜 아무도 우리와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우리에 대한 공정한 청문회를 열어주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나는 그들의 이러한 질문에 양심적으로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이 기사는 십일금에 대한 문제로 인해서 시작된 것이므로, 이 문제에 대한 마지막 결론을 맺도록 하자. 최근에 나는 천명 정도가 모인 어떤 집회에 참석했는데, 그 집회에서 대총회의 대표자는 “교회의 돈을 빼내어 가는 자영선교기관”들에 대한 견책의 설교를 했다. 나는 침묵 속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에서는 “형제여, 문제의 핵심에 대해서 말하다오. 문제를 있는 그대로 백성들에게 전해다오” 라는 절규가 흘러 나왔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 목사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아직도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개신교회의 유명한 텔레비젼 방송 목사인 제리 포웰이 말하기를,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교인들이 내는 경제적인 후원금이 자신의 사업을 지원하는 그룹 중의 두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어디서 나온 이야기냐고 물었더니, 그는 연합회 서기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서기에게 전화했는데, 그는 그것이 사실임을 입증하였다. 그 서기가 말하기를, 그는 자신이 직접 제리 포웰 목사로부터 그 보고를 들었다고 했다.
또한 그 연합회 서기는 개신교회의 팻 롸벌슨 목사가 이끄는 기관에서 가끔씩 봉사(?)하는 어떤 재림 교인이 자기에게 말해 주었는데, 재림 교인들이 팻 롸벌슨 목사의 사업에도 후원금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리 포웰과 팻 롸벌슨 목사가 이끄는 사업은 엄청난 규모의 사업임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들의 사업은 수백만 달러 규모의 사업이다. 그런데 그들의 사업을 지원하는 그룹 중에서 재림교인들의 후원금이 두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평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자영선교기관의 예산을 모두 합쳐도 그들이 매년 재림 교인들로부터 거두어 가는 후원금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이다.

왜 아무도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가? 왜 너무도 많은 숫자의 지도자들이 교회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불쾌한 그림자에 대해서 무지한 것처럼 보이는가? 왜 수 많은 재림 교회에서 강력한 기별이 설교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지도자들이 아무런 염려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가? 개신교회의 방송목사들이 하는 설교(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를 돌봐주시는(caring) 분이라는 설교)를 자신들이 다니는 재림교회에서 반복해서 듣게 되는 어떤 재림교인들이 좀더 강력하고 엄숙한 기별을 찾아서 움직이는 것이 이상한 일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그 나머지 부분을 공백으로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면, 노아의 방주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의 가족들마저 홍수에 멸망되었을 것이다.
만일 모세가 사랑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설교하고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았다면, 속박의 땅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love)과 돌보심(caring)에 대해서만 설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대로 세천사의 기별을 전파하기 위한 또 다른 백성을 일으키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랑과 돌보심의 하나님은 동시에 행위의 하나님이시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분의 행위가 구속의 마지막 장면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다. 마지막 경고의 기별은 세상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이제 좀 더 깊은 사고를 요구하는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자. 마지막 시대의 재림 신도의 사업에 대한 두가지의 분명한 예언이 있다. 하나는 불신실한 목사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인데, 그 예언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표현으로 제시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설교 단상 위에, 사단의 지옥의 횃불로부터 점화된 잘못된 예언의 횃불을 들고 서게 될 것이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409.

“우리의 가장 중심부에서 거짓 교사들이 일어날 것인데, 사단에게서 나온 교리들을 가지고 영혼들을 미혹할 것에 대해서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교사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이끌어 내어서 자신들의 뒤를 따르도록 할 것이다.” 리뷰앤헤럴드 5권, 9.

또 나머지 다른 한 예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업을 마치실 때에 그분께서는 교육 기관에서 훈련받은 사람들 대신에, 평범한 사람들을 자신의 일터에서 불러내어 마지막 기별을 전하도록 부담주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대쟁투, 608, 교회증언, 5권, 80을 볼 것).

두 부류의 목사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한 부류는 높은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을 신뢰하며, 자신을 의지하는 자들로서 불신실한 자들이다. 다른 한 부류는 많은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께 전적인 신뢰를 두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에 전적인 믿음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은 예언의 신에 대한 가치를 충분하게 인정하고 있는 자들이다. 독자들은 두 부류 중에서 어떤 목사들이 십일조로 부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모두는 두가지의 국면을 맞게 되어 있다. 한 국면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으로서, 우리가 사랑하는 남은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국면이다. 또 다른 국면은, 예언의 신이 우리 앞에 펼쳐 놓은 것으로서 교회가 마지막 때가 다가옴에 따라서 강력한 흔들림의 경험을 갖게 되는 국면이다. 그것은 수많은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이 흔들림과 함께 사라지게 되는 국면을 말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국면과 경험을 통과하고 있는가? 우리는 포근한 휴식을 취하면서 다리를 쭉 뻗고 누워 있어야 되는가? 아니면 흔들림의 시기를 지나는 사람들처럼 살아가야 하는가?

어떤 면에 있어서, 우리의 기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흔들림의 뒤에 있게 될 늦은비와 큰소리 외침의 시기가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을 여호수아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모아보자.

“내가 네게 이미 명하지 않았더냐? 마음을 강하게 하라” 여호수아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