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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금에 관한 논쟁의 종결을 기대하면서….

저자:  럿셀 스텐디쉬 의사/목사

이 글을 쓰면서의 나의 소원은 십일금 문제의 주변에 이미 점화되어 있는 불 위에 더 이상의 기름을 붓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이 문제에 대한 주의 종의 권면이 지혜롭고 영감적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지금은 우리 모두에게 유명한 편지가 되버린, 1905년 1월 22일, 엘렌 화잇 자매가 콜로라도 대회장인 왓슨 목사에게 썼던 글 가운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권면을 보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핍절하고 가장 절망적인 일터로 전용 되어온 십일조에 관하여 그대가 말할 것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대는 더욱 더 현명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권면으로 대두되고 있다. 감정적인 논쟁을 자극하는 것이 우리의 부담과 목적이 되어서는 않된다. 콜린 스탠디쉬 박사는 적어도 두번이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십일금 문제를 증폭시키지 말 것에 대해서 촉구하였다. 만일 우리가 감정과 편견을 버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면서 말씀을 연구한다면,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견해는, 십일금이 어디로 보내지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교회가 이 문제를 많이 다루고 강조하면 할수록, “정규적인” 교회 통로로는 점점 더 적게 들어가게 될 것이며, “비정규적인” 통로로는 점점 더 많이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자영선교기관을 자신들의 십일금으로 지원하는 교인들을 낙담시키기 위한 일환으로서, 어떤 교단 지도자들은 십일금에 대한 증언의 말씀을 일방적이고 부분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슬픈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한 것은 교회의 딜레마를 해결하거나 자영선교기관으로 보내지는 십일금의 액수를 줄일 수 있는 지혜가 아니다. (나는 한 보고서를 읽어보았는데, 만일 그 보고서의 내용이 정확하다면) 미국에 있는 모든 재림 교인 가정의 약 27퍼센트만이 십일금을 교단의 정규적인 통로로 보내고 있는 현 상황이야말로 교회가 안고 있는 진짜 딜레마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업의 전진을 위해서 십일금의 신실한 헌납에 대한 각자의 책임을 교인들에게 일깨워 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서부 연합회장에 의해서 작성되어서 연합회 보고서에 실렸던 글은 가장 불행한 글 중의 하나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 “독립 선교기관으로 보내지는 십일금에 대한 연합회장의 견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기사에서, 공정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유익하지도 않으며, 오직 교회 안의 분열과 투쟁의 불을 더욱 격렬하게 점화시키는 진술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글을 통해서 정확한 진리 위에서 냉정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절제되지 않은 감정은 가장 큰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해마다 얼마나 많은 십일금을 독립선교기관이 거두어들이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금년 한해 동안, 대총회는 미국과 해외의 사업 계획에서 8백만 달러를 감축해야 할 정도였으며, 약간의 선교사들을 불러들여야 했다.”
누가 들어도 너무나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첫째, 1991년 한해 동안 북미주에 있어서 십일금은 증가나 감소도 없는 정체 상태로 머물러 왔다. 실제에 있어서, 대총회의 지도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1991년에 4퍼센트에 해당하는 십일금의 증가가 있었는데, 미국과 카나다가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경제 상태를 감안하여 볼 때, 그러한 증가는 매우 고무적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둘째, 자영선교기관들에게 들어오는 십일금의 총액이 전년도에 비교해서 8백만 달라가 증가하였다면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겠는가! 자영선교기관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액수는 상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자영선교인들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숫자를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도 모든 자영선교기관으로 들어가는 십일금의 합계를 알 수 없다.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만이 아실 수 있다. 특히 어떤 자영선교기관들은 교인들이 보내주는 수표에 명백하게 “십일금”이라고 표시가 있을 경우, 그것을 받지 않고 있다. 물론 교인들이 십일금을 보낼지라도 “십일금”이라는 직접적인 표시가 헌금 봉투나 수표에 없을 경우, 그들 역시 그러한 헌금은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접수되는 헌금을 모두 십일금으로 가산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8백만 달러라는 돈은 현실과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교단 지도자들의 눈에 그토록 많은 자금이 자영선교기관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자영선교사업이 매우 활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인 것같다. 그들은 돈의 액수에 의존해서 일하는 일꾼들이 아니다.

세째, 점점 더 많은 재림교인들이 선교지역으로 자신들의 십일금을 직접 보내고 있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좀더 강력한 복음을 가지고 진리를 선포하는 사업으로 십일금을 직접 보냄으로서 하나님의 사업이 전진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십일금 문제는 여러가지 잇슈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연구를 위해서 몇 가지의 책들을 추천하고자 한다. 버논 스파크 의사가 편집한 “십일금에 대한 모든 것”은 가장 좋은 책으로서 모든 재림 교인들이 읽어보아야 할 성경과 예언의 신의 편집물이다. 로이드 박사와 로라 로센볼드 박사가 저술한 “저장 창고에 대한 신선한 고찰” 또한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그리고 콜린 스텐디쉬 박사가 저술한 “십일금과 헌금에 대한 성경적 견해”도 가장 좋은 지침서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십일금에 대한 잇슈는 1990년대 초기에 몇 가지의 책자들이 출판되어 나옴으로서 사람들의 촛점을 모았다. 1991년 9월, 랄프 랄슨 박사가 미국 견고한 토대지에 기고한 글은, 교단이 십일금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한 창고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강력한 공격을 받아왔다. 한편, 1991년 11월, 엘렌 화잇 재단에서 일하는 로저 쿤 박사가 리뷰지에 기고한 특집기사(이 기사는 한국 교회지남, 1995년 5월호에 1,2부로 번역 기재되었음)는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분노를 일으키는 글이 되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최선의 접근 방법은 서로가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서로가 동의하지 않는 예언의 신의 인용구절을 신중하게 검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독자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책임과 결정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십일금을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특정한 결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밝히는 바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십일금을 어떤 사업과 어떤 방법으로 주님께 돌려드려야 되는가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과 결정이 있어야 한다.
다음에 나오는 인용구절들은 십일금이 반드시 교단으로만 들어가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 의해서 자주 인용되는 화잇 자매의 글이다.

논쟁점 1. 하나님께서는 지역 교회를 통하여 대회나 합회로 드려지는 십일금 만을 인정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불만을 품고 이렇게 말해왔다. ‘나는 더 이상 십일조를 드리지 않겠다. 왜냐하면 나는 사업을 처리(manage)하는 본부에서 하는 방법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대들은 사업에 대한 처리가 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도적질 하겠는가? 그대의 불평을 당국자들에게 바른 정신을 가지고 명백하고 공개적으로 말하라. 일이 바로 잡히고 규칙있게 되도록 그대들의 청원서를 보내라. 다른 이들이 올바르게 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사업에서 물러나지 말고, 불충실함을 나타내지 말라.” 교회증언, 9권, 249.

검토: 엘렌 화잇은 여기서 배도한 목사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잇 자매는 사업이 올바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과 관련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사업을 추진하는데에 있어서 생길 수 있는 관리 상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서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교정을 호소할 것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는 글이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배도와 관련있는 경우, 화잇 부인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진리를 설교하지만 진리에 의해서 성화되지 못한 자들, 그리고 말씀과 교리로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성화되지 않은 자들을 받아들이고 유지하는 일에 동의하는 자들에게 무서운 화가 놓여져 있다.” 교회증언, 1권, 261-262.

    “마음과 생애가 성화되지 않았으면서도 진리를 전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는 것처럼, 그들이 차지해서는 않될 자리에 성화되지 못한 자들을 받아들이고 계속해서 그 자리에 있도록 하는 자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교회증언, 2권, 552.
고기를 자신들의 음식으로 삼고 있는 자들이 세 천사 기별의 오른 팔로서 쐐기 역할을 하는 건강 개혁 기별을 전할 수 있을까? 화잇 부인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고기 음식의 사용 여부를 (그리스도인) 교제의 시험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우리는 육식을 하는 공언하는 신자들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의 기별자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말하지 않을 것인가? 고린도전서 10:31. 우리는 비뚤어진 식욕의 방종에 대해서 결정적인 증언을 하지 않을 것인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장 엄숙한 진리를 선포하는 복음 사역자 중의 어떤 사람이 애굽의 고기 가마로 돌아가는 모본을 보일 것인가? 하나님의 창고로부터 나온 십일금으로 지원받는 자들이 자기 방종에 빠짐으로서 자신들의 혈관에 흐르는 생명의 피에 해독을 끼치도록 허용할 것인가? 그들은 빛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경고들을 무시할 것인가?” 교회증언, 9권, 159.
주님의 창고는 오직 교단으로만 제한되어 있는가? 다음의 말씀을 살펴보자. 이 글은 1905년에 콜로라도 대회의 대회장인 왓슨 목사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나는 내 눈에 띈 대단히 궁핍한 경우들을 돕기 위해서 나의 십일금을 전용해 왔다. 나는 이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왔다. 그리고 자금이 주님의 창고(treasury)에 드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므로, 그 문제는 이러니 저러니 하는 비평거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 내가 그 문제를 알려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왓슨 목사에게 보낸 편지, 1905년 1월 22일.

    여기서 화잇 부인은 자신의 십일금을 교단이 아닌 다른 필요로 하는 곳에 보내온 사실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십일금이 여전히 주님의 창고에 드려져 왔던 것을 밝히고 있다. 화잇 부인은 교단을 “창고(보고)”로서 표현했던 것처럼, 주님의 사업이 이루어지고 있던 다른 곳도 “창고”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사업의 전진을 위해서 드려진 자금이기 때문이다.

논쟁점 2. 교회의 창고로 십일금을 드리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화가 놓여 있다.

    “하나님의 사업에 자금을 드리지 않고 있는 그대들이여, 말라기서를 읽고 십일조와 헌물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거기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보라. 그대의 형제들이 하는 모든 일이 그대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대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는 것은 여하한 상황에서도 최선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 없는가? 십일조와 헌물은 어떤 사람의 재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정한 사업을 하는데에 사용되어야 한다.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목사들이 거두어진 자금의 얼마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보고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무릅쓸 사람이 감히 있는가? 나는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

    “만일 합회 사업이 하나님의 질서대로 관리되고 경영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러게 잘못 행하는 사람들의 죄이다. 주님은 그 악을 교정하기 위해서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행한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그대의 책임을 묻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신의 소유를 그분께 드리지 않음으로써 그대 스스로 죄를 범하지 말라.” 특별증언 씨리즈 A, 1번 27.

검토: 이 글은 화잇 자매가 십일조를 자영선교기관에 보내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글은 화잇 자매가 십일금을 내지 않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증언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안에 최초의 자영선교기관이 세워지기 훨씬 이전인, 1890년에 기록된 글이다. 그러므로 자영선교기관이 설립된 이후, 십일금을 내는 일에 있어서 화잇 부인의 권면과 그분 자신의 모본에 따라서 선택의 여지가 생긴 이후의 시대까지 이 글을 적용시키는 것은 타당한 논리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자영선교기관의 사업도 교단에서 운영하는 사업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안수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이것에 대해서 화잇 부인은 강력한 지지를 보여주었는데, 그녀는 행정적, 재정적으로 독립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던 매디슨 대학의 이사직을 수행함으로써 자영으로 이루어지는 사업 형태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강조했다.

    “주께서는 … 사업에 어떤 한계를 정하지 않으셨다. 서덜랜드와 메간 형제는 그들의 사업에서 불필요한 방해를 받고 있다. 메디슨 학교의 조직과 경영 방법이 대총회의 지배 하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인해서 자금이 지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왜 이 학교가 대총회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지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 특별증언 B, No. 11, 31, 33.

논쟁점 3. 십일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않된다. 비록 사용되는 곳이 하나님의 사업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는대로 십일금을 보내서는 않된다.

    “누구든지 십일조를 자기가 가지고 마음대로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다. 물론 위급한 경우에라도 이를 사사로이 쓰는 것은 옳지 않으며, 비록 하나님의 일로 생각되는 일에라도 자기 생각대로 써서는 안된다.” 교회증언, 9권 247.

검토: 위의 인용구절에서 “비록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는 일에라도”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인용문을 조금 더 읽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계속되는 페이지에서 발견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교육사업에 써도 관계치 않는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문서전도인들도 십일조로 봉급을 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을 써야 할 하나의 목적 곧, 목회자의 부양을 위해서 지불하는 이외에 다른 일에 사용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상동, 248. 이제 위에 언급된 인용구절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이 글은 십일조를 교육사업과 문서전도 사업에 사용하려는 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논쟁점인 인용구절을 자영선교사업에게 십일조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적용해서는 안된다.

논쟁점 4.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거룩한 사물을 다루는 모든 자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고 했으며(13-14절), 고린도 사람들로부터 십일금과 헌물을 받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전서 9장 15절.

검토: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사업을 지원하기 위한 십일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바울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음을 보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서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의 형제인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나왔을지라도 율법에 따라 그들에게 십일조를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히브리서 7:5 (킹제임스 성경역).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진리이다. 오늘날 교단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목사들이 더 이상 복음을 설교하지 않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나오는 십일금을 받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우리가 전에도 말한 것같이 지금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이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갈라디아 1:8-9.

    그렇지만 평신도 사업에 종사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은 십일금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충분한 권리가 있는 것이다.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에 있어서의 잇슈는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고린도전서 9장 15절을 면밀하게 살피는 사람이라면, 바울이 고린도 지방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사는 신자들에게서도 사실상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참작해야만 한다. 빌립보에 있는 형제들은 바울의 사업을 위한 신실한 후원자들이었다.

    “그러나 너희가 나의 환란에 동참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인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에서 나올 때에 나와 더불어 주고 받은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밖에 없었느니라. 이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계속해서 나의 쓸 것을 보내 주었음이라.” 빌립보서 4:14:16 (킹제임스 영어성경 번역).

바울이 고린도에서 봉사하는 동안, 빌립보인들이 그를 계속해서 지원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다른 교회들에게 삯을 받은 것이 그들에게서 탈취한 셈이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부족한 것이 있었으나 아무에게도 부담을 지우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마게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충분하게 채워 주었음이니라. 그리하여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려고 주의했으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노라.” 고린도후서 11:8-9 (킹제임스 한글성경).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받는 대신에, 빌립보인들의 관대하고, 은혜스러운 사랑의 선물에 의존했던 사실은, 고린도 지역에 어떤 특별한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도록 만든다. 신실한 자영 선교인은 전적으로 십일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지만, 그것이 투쟁을 일으키는 쟁점이 될 경우, 바울처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지혜가 될 수도 있다.

결론

    우리는 개인의 청지기 직분에 대한 잇슈는 거룩한 문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심판의 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십일조와 헌물을 신실하게 드렸는가와 그들이 드린 장소와 사업에 대한 기록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뜻은 문제를 감정적으로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헌신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결론을 갖고 있는 모습을 보아왔다. 화잇 부인이 말씀했던 것처럼, 주님의 섭리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십일금으로 다른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이런 면에서는 이런 사람에게, 다른 면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확신을 주시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영선교사업과 교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업 위에 모두 하나님께서 안수하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사업 모두,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끝마치는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한다. 또한 환란이 오고 일요일 강제 준수령이 발해진 이후에는, 모든 재림 교인들은 신실한 자영 선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현재 자영 선교기관과 교단에 종사하는 복음 사역자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실한 사역자들 만이 복음의 사명을 완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양쪽을 모두 주시하고 계신다. 진실한 자영선교인들이 교단에 속해 있는 진실한 일꾼들과 연합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우리는 십일금 잇슈가 감정적으로 번짐으로서 야기되는 분열이 하나님의 마지막 교회를 위해서 유익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로 인해서 교회가 더 이상 분열되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원이다. 모든 자영선교인들과 교단의 종사자들은 연합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주님의 사업을 위하여 신실한 십일조와 희생적 헌금을 드릴 것에 대해서 격려하도록 하자. 그리하여 그분의 사업이 전진되어, 완전히 성취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