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 Page

감정을 만족시킬까요? 아니면 자아를 죽일까요?

글/익명의 교우

오늘날 현대 진리를 믿고 따라가는 백성들 가운데에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입장과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 모두는 현대 진리를 믿고 따라가기 위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책자와 테잎을 통해서 여러 가지 진리와 기별을 전하고 있지만 우리의 순수한 동기와 마음은 우리의 기별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제대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는 듯 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교회에서 세속을 몰아내고 개혁해야 할 것을 말하면 어느새 우리들은 교회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무리들이 되며, 우리가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어떤 배도에 참여하지 않아야 된다고 말하면 그들은 우리를 교회를 떠나간 무리들로 취급합니다. 아무도 그들은 교회를 떠나는 것과 교회의 어떤 배도에 대해서 참여하지 않는 것을 혼동하고 있는 듯 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설교하면 사랑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원칙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바리새인적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해야 된다고 말하면 우리를 완전주의자들이라고 부르며, 신신학이 들어와 있으니 우리 모두 조심하자고 경고하면 교회의 설교자들에 대해서 불신감을 조장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곧바른 증언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비난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적인 태도가 아니라고 말하며, 시골 생활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면 도시 전도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우리의 진지한 마음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때때로 좌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별을 듣는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를 살피면서 그들의 취향에 맞게 기술적으로 기별을 전할 것을 제의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타협하지 않은 채 반대와 역경을 피하면서 복음을 나누어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자고 합니다. 또한 그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는 방법으로 사업을 하자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어려운 상황들이 우리를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어느 정도 그러한 핍박과 좌절과 소외감과 같은 것들에 대해 많이 익숙해져 있으며, 무엇보다도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압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마음 속에 평화를 주며, 용기를 불러 일으킵니다. 지금에 와서 그러한 문제와 이슈들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한 가지 큰 딜레마가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구원과 영생에 직결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그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의 가정이 시골에 내려 온지도 벌써 5년이 되어 갑니다. 우리는 시골에 내려와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기별을 접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개혁하고 고쳐야 될 것들이 너무 많아서 고민한 적도 있고, 무리가 생긴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개학을 며칠 앞두고 숙제가 밀려 있는 학생처럼 마음이 무겁고 어깨가 축 쳐져 있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하나씩 둘씩 해결해 나온 지금은 하늘의 원칙과 복음 속에서 행복을 만끽하며 살고 있습니다. 시골생활을 하면서 가장 괴롭고 힘든 날은 언제입니까? 하기 힘든 개혁을 단행할 때입니까? 생활비가 부족해서 밤에 잠을 못 이루던 때인가요? 직업이 불안정했을 때인가요? 자녀들이 부모가 지시하는 원칙을 거절하던 때인가요? 아니면 장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로 인해서 마음의 평안을 잃어버렸을 때인가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제게도 괴롭고 견디기 힘든 문제였지만, 제 경우에 있어서 가장 괴로웠던 때는 가끔씩 밤에 기도하던 때였습니다.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찬미를 부르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했지만 낮에 찾아오는 시험과 유혹에 내 자신의 육체와 영혼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면서 시달리다가 밤이 되어서 잠자리에 들 때, 기도가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하루 동안의 보호와 승리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은데 실패에 대한 용서의 기도와 좌절에 대한 위로함을 구하는 기도밖에 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날에 엄습해 오는 좌절감이란 정말 저를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을 버리고 이 시골에 들어와서 많은 개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시험을 물리친 승리로 이끌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버린 사람이 많지 않지만 자신을 버리고 승리한 사람은 너무도 적다”는 화잇 부인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기는 자만이 하늘을 얻으며, 말씀을 순종하는 자만이 영생을 얻는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제게 있어서는 큰 흔들림이었습니다. 시험과 시련이 다가와서 나를 흔들어대는 대로 나의 감정과 육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화가 나며, 미움이 생기며, 질투가 생기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화잇 부인은 이러한 종류의 흔들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은 아무 곳에도 닻을 내리지 못한 채 흔들리는 모래와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쓴 뿌리를 만족시키는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이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영문 112. 우리 속에 좋지 않은 감정이 뿌리를 내리는 이유는 우리가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감정의 쓴 뿌리는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우리를 몰고 갑니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는 항상 불행과 후회입니다. 마음 속에 숨어 있는 감정의 쓴 뿌리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원수입니다. 우리 속에서 육체가 꿈틀거리면서 올라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을 저지하고 분쇄하는 데에 반드시 성공해야겠습니다. 그 일에 성공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믿음을 하늘과 세상 앞에서 증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 동안 마지막 기별을 받았다고 공언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기별을 버리고 떠나가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 속에 생긴 감정의 쓴 뿌리로 인해서 이웃과 형제를 미워하고 증오할 뿐만 아니라 그 쓴 뿌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자신들이 그 동안 믿고 따르며 가르치던 기별을 부인하고 멸시했습니다. 그들의 쓴 감정은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신앙과 노선을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새로운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 속에 불만과 질투와 열등 의식과 원망의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결코 “새로운 빛”을 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 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10-12. 성경은 단물과 쓴물이 한 곳에서 나올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한 입으로 쓴 물을 강같이 토해 낸 후, 같은 입으로 단물처럼 보이는 “새로운 빛”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새로운 빛”은 자신을 쳐서 시험과 시련을 극복하고 승리하여, 마음 가운데 잘못된 감정의 찌꺼기들을 치워버린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자신의 죗된 감정과 이기적인 목적과 필요에 따라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변질된 그들의 믿음과 신조를 받아주는 새로운 일터를 찾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들이 몸바쳐서 일해왔던 일터를 희생양으로 삼는 일마저 불사했습니다. 그들은 감정의 쓴 뿌리와 진리를 혼합함으로써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결국에는 진리를 만족시키는 쪽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형제들에게 악의에 찬 검은 보자기를 뒤집어 씌운 후, 진리로부터 흔들려 떨어져 나가게 되었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그런 일들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기도할 때, 그날 하루 동안에 내게 다가오는 모든 시험과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부인하여 승리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가 응답되어 자신을 부인하고 육체를 저지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즉 시험과 유혹이 오면 자신을 부인하기 보다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오히려 시험에 휘말려서 화를 내고, 억울해 하며, 불평하고, 분한 마음을 자제하지 못합니까? 자신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 시험을 받을 때, 그 결과는 항상 동일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대신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육체의 쓴 감정을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모습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해서 그분의 두 손과 발에 사정없이 못질을 했습니다. 그들의 못질과 창질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심한 통증과 아픔으로 인하여 그분의 입술 사이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불평의 소리도 아니었고, 로마 군인들과 포악한 군중들을 향한 저주의 소리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고통의 신음소리와 동정의 눈길만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께 그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우리에게 마지막까지 선한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때때로 우리에게 로마 군인들과 같은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로마군인들이 우리에게 와서 우리의 손과 발에 못을 박을 때, 포악한 군중들이 우리에게 와서 침을 뱉으며 경멸할 때,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합니까? 우리 구주 예수님의 모본을 따라서 털 깍이는 양처럼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십자가에 못박힐 것을 선택하십니까? 아니면 그들을 대항하여 칼을 배고 듦으로써 또 다시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스도를 못박기로 선택하십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영혼의 고통으로 인한 가느다란 신음 소리와 나를 못박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한 용서의 기도이지 불평과 억울함과 분냄과 짜증과 같은 저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에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기로 선택하는 대신에 로마 군인들의 난폭함과 몰인정함에 대해서 원망하고 불평을 합니까? 뿐만 아니라 그러한 시련과 시험을 허락하신 그리스도를 야속하게 바라봅니까?

그런데 우리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은 누구입니까? 많은 경우에 그들은 우리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에 우리의 아내요, 남편이요, 자녀들이요, 이웃이요, 교우요, 시부모요, 며느리요, 친구요, 직장 동료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서 사는 친구나 친척이 우리에게 시험과 시련을 주는 로마 군인의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와 교우와 이웃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시험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로마군인이 되어서 우리의 가장 친한 이웃과 교우와 가족들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피차를 향하여 서로 못질하는 일을 멈출 때에 우리는 드디어 성도의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자아가 죽어가는 것은 자살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내가 나의 육체에 못을 박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못박힐 때에 우리를 못박는 그 로마 군인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저항하지 않고 잠잠히 있기로 선택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로마 군인과 폭도들이 주는 시험과 유혹에 반응하여서 육체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어떤 것을 부인하고 극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는 일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자아는 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고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를 경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진리를 듣기보다는 진리를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말씀을 읽기보다는 말씀을 경험한 사람의 생활을 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진리를 경험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시험과 유혹에 끌려 다니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시간이 없도록 계획했습니다. 저는 제가 어떤 경우에 쓰러지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하루 종일 그 시험이 언제 오나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막상 기다렸더니 유혹과 시험 자체가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그리고 유혹이 가끔씩 찾아와도 별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영혼이 항상 주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임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부흥회에서 듣게 된 기별은 저와 저의 가정의 부흥과 개혁 사업에 있어서 큰 촉진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아내와 의논하여 5살 난 아들에게 올바른 교육과 훈련을 주며, 가정을 좀더 질서 있게 운영할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다가 얼마 전에 또 다시 실패를 맛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다른 실패였습니다. 그때는 제가 미처 그것을 시험이라고 느끼기도 전에 저의 못된 육체가 꿈틀거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항할 기회도 없이 폭발해 버린 것입니다. 폭발하자마자 “아차!”하는 깨달음이 왔지만, 때는 이미 늦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똑 같은 실패라도 그 실패는 저를 전과 같이 크게 좌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분위기에 매우 민감해야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작은 음성이라도 우리의 온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된다.” 가려뽑은 기별 3권, 355.

바로 그 때 제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작은 음성을 들을 만큼 예민하게 준비되어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장 작은 음성에라도 즉시 굴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예민한 양심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시험과 유혹을 즉시로 감지할 수 있는 예민한 양심과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없겠지요.

우리의 양심을 계속적으로 예민하기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매일 말씀을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게을러서도 안 되지만 너무 바빠서도 안 되겠습니다. 우리의 양심을 예민하게 보존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가 같은 죄를 습관적으로 되풀이 할 때, 우리의 양심은 점점 무디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웬만한 작은 죄에 대해서는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자체가 준비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죄짓기를 멈추는 일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144,000은 경험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들의 경험의 노래는 어떠한 노래일까요?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온 경험과 세상을 버린 경험과 많은 개혁을 이룬 경험의 노래를 부르겠지만 그들의 노래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노래는 자신을 정복하고 승리한 노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소망에는 자신을 버리는, 자신과 싸우는 전쟁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전쟁이며, 이것은 굉장히 큰 희생과 투쟁을 요구할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자신과의 싸움, 그것은 예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전쟁은 길고 피곤하며 힘든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피 흘리기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길고 지루한 시간에 의해서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개혁은 때때로 순간에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자신의 육체와의 전쟁은 그 끝이 안 보이기 때문에 우리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우리에게 정말 인내가 필요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귀에 들리는 두 가지의 복음이 있는데 하나는 시험과 피 흘리기까지 싸울 것을 격려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피 흘리기 보다는 차라리 죄와 더불어 사는 쉬운 삶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둘 중에서 사도 바울의 격려를 받아들이기로 선택했습니다. 우리는 지난 5년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무진 애써왔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진리를 발견한 기쁨과 함께 새로운 생애를 살거나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동안 우리가 전했던 복음을 그들에게 보여줄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전해온 복음을 계속적으로, 실패하는 일 없이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처럼 살아야 된다고 하는 복음의 내부를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좋은 자연 환경과 우리가 다니는 교회의 아름다운 분위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에서 실천되고 있는 복음을 사람들이 볼 수 있음으로써 사람들은 좀더 강한 확신을 가지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가정에서 경건함과 진지함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생동하는 기쁨과 행복함과 질서, 그리고 가난함 가운데서의 풍요로움을 즐기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마지막 기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과 돈과 명예를 버리는 데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소한 시험을 받을 때, 자신의 육체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작은 감정의 덩어리를 제어하고 억제하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는 듯합니다. 비록 과거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버렸을 지라도, 그리고 앞날에 대한 불안함과 염려를 모두 주님께 맡겼을 지라도 오늘 이 순간, 유혹과 시험에 대해서 승리하는 경험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마음의 완전한 평화를 소유하는 일에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복음을 고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가정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 복음을 실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부모로서,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신을 정복하고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체험을 가능케 하는 하늘의 능력과 지혜를 받게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