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담
저자: 강병국 목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사단은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율법으로 통제받을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쓸데없이 규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고소하였습니다 (대쟁투 하권 299 참조). 그리하여 교만하여지고 이기적이 된 루스벨은 하늘에서 선악간의 대쟁투를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또한 아담과 해와를 타락시키는 일에 성공한 마귀는 더욱 더 과감하여져서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결단코 지킬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가려뽑은 기별, 3권, 136 영문 참조). 그러므로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이 불완전한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 내고 있는 사본이므로 하나님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이 모든 죄와 반역의 문제는 하나님 자신과 흠이 있는 율법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고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우주의 대쟁투의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둘러 싸고 있는 전쟁이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이 바로 그 문제의 잇슈와 핵심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귀는 하나님의 율법과 성품과 또한 하나님 자신까지 우주의 심판대 앞에 올려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시점에서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에는 비단 이 지구 뿐만이 아니라 온 우주 앞에 사단의 고소가 잘못된 기만이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고, 그 길만이 우주의 행복과 질서를 위한 길이라는 사실을 전시하여 보여 주셔야 하는 일이 포함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속하시는 일에는 타락한 인류가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을 통하여 죄를 용서 받을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음이 나타나져야 하는 것입니다. 구속은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5장에서 두명의 아담을 만나게 되는데 이 두 아담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구속의 문제를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구속 문제를 이해할 때에는 서론에서 언급한 것 처럼 인간을 어떻게 하나님께 다시 순종 할 수 있는 자들로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두 아담이 인간의 구원의 역사에서 어떠한 역활을 했는지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해와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타락하자마자,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실상인즉 구속의 계획은 창세 이전부터 이미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타락한 인류들을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경은 영원한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영원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실 뿐만이 아니라 사단의 고소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확실하게 증명하여 보이실 것입니다. 이 영원한 복음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율법 그리고 그분의 성품이 너무나 선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이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품성과 죄의 성질과 대쟁투의 성패가 달린 진정한 문제를 잘못 나타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쟁투 하권, 411).
그래서 우리가 마귀의 기만에 속지 아니하고 참된 죄의 성질과 그 본성, 그리고 구원의 섭리를 옳바로 알기 위하여서 두 아담의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부터 15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 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한 17,18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하여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자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 말씀은 좀 어려운 듯이 보여도 실은 아주 단순한 논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하는 의도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첫번째 아담에게서 받은 영향과 그 결과 때문에 사망에 이르게 되고 죄가 우리를 다스리게 된 것처럼 우리가 두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부터 그 다른 영향을 받고 그 결과에 참여 하면 우리는 생명에 참여한 바 되고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두 아담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또는 어떠한 영향과 결과를 받는 것인가 하는 문제를 대조적으로 설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창조 받았을 때는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한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 속에 욕구들과 경향들과 정욕들과 식욕들이라고 하는 필요를 채우기위한 기능들이 있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었고 하나님의 율법이 그의 마음 가운데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대쟁투 하권, 255-256 참조). 그러므로 그는 이러한 기능들을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조화시키며 살 수가 있었습니다.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에는 그가 실패하던지 성공하던지 간에 그의 성품과 본성이 자기의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전수되어져야 하는 조건 가운데 창조되었 읍니다 (원고책 9권, 229 참조). 아담에게는 굉장한 선물인 자유 의지의 선택권이 주어졌는데, 이 선택권을 가지고 그는 자기 자신과 자기 후손의 장래의 유산을 위하여서 사용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조상은 실패하였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 타락하게 되어 그의 본성이 쇠락하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해와의 죄는 자기의 식욕에 굴복한 것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그분의 권위를 거절한 일이었습니다. 선악과 그 자체에 독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타락한 본성과 그 경향들 그리고 그 모든 연약해진 기능들과 죄의 결과를 유전으로 받을 수 밖게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함께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사망의 지배를 받는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첫번째 아담에게서 받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서 끝나지를 않습니다. 바울은 두번째 아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좋은 소식입니다. 영원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둘째 아담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오셔서 그를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셨을 뿐만아니라 첫번째 아담이 우리에게 실재적으로 영향력을 미친 것처럼 우리에게 실재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구원의 능력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권 없이 우리가 참여함이 없이, 두 아담으로 부터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 것입니다. 첫번째 아담으로부터는, 우리의 선택없이, 불순종과 죄와 사망을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둘째 아담으로부터도, 우리의 선택권 없이, 영원한 죽음의 선고를 우리 자신들 스스로의 선택과 생애에 대한 심판이 있을 때까지 연기하여 주는 자비를 물려받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은혜의 기간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칭의되고 거룩하게 되어 영생을 얻는 것은 아직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두번째의 유예의 기간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둘째 아담을 통하여 우리는 어느 정도의 하나님에 대한 빛과 종교심 그리고 영적인 식별력, 선을 사모하는 소원과 힘, 무엇보다도 각 개인에게 자유 의지의 선택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도매금으로 멸망당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첫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반역하는 죄의 본성을 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옛 육신의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신체적으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어쩔 수 없이 첫번째 아담의 실패에 동참 할 수 밖에 없는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형편에서 구원 얻기 위하여서는 우리 주님 그리스도, 즉 두번째 아담의 가족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의 처절한 입장에서 구원을 얻는 길은 연약한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려고 애쓰는 행위가 아닙니다. 해결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자가 되어 영원한 복음, 하나님의 구속의 능력을 받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가 첫째 아담에게서 부터 실재적으로 육신적으로 영향을 받고 태어났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둘째 아담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믿고 받아드릴 때에 실재적으로 우리의 도덕적인 본성과 영적인 본성에 변화가 오면서 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드디어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주의 계명을 순종 할 수 있는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사슬을 끊는 경험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5장 19절과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공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되리라…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아담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그저 개념적인 것이 아니요, 그저 마음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실재적인 것이었다면, 왜 우리는 둘째 아담에게서 받는 은혜를 개념적이요, 사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 예수를 알기 전에 죄가 우리를 주관 했던 것처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가 우리를 주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하는 것은 힘입니다. 죄는 힘입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도 능력입니다. 그것은 덮어 씌워 주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화잇 부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잘 고안된 방법일 뿐만 아니라, 범죄의 치료와 영적 건강의 회복을 위해서 내리신 하나님의 처방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위에 입혀지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머물러 있게 한다”
(편지 406, 1906. 주해 복음 성경 신약, 259).
여러분들은 이 영원한 복음의 능력을 아십니까? 우리의 죽을 죄의 몸에서 옮겨 생명의 왕국에 들어가 살게 하는, 죄와 모든 썩어질 것들을 승리하여 이기게 하는 그 복음의 능력을 말입니다. 여러분은 두번째 아담을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