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장과 독수리의 죽음
저자: 편집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로마서 6장 1-8절.
로마서 6장의 전반부는 우리가 그분의 영생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는 그분의 죽으심에 함께 동참해야 된다는 사도 바울의 사상이 거듭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의 죽으심”이란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의미한다. 6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 말씀은 우리의 죗된 본성이 멸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며, 바로 그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죽게 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 들을 수 있는 질문들은 “죽는 것이 왜 필요합니까?” 또는 “꼭 죽어야 합니까?” 그리고 나아가서는 “지금 내 안에 있는 어떤 선한 것을 계발시키면 어떨까요?” 라는 것들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인간의 본성을 좀더 나은 것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애써 온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해 왔다. 또한 오늘날에도 자신 안에 있는 선한 것을 계발시킴으로써 어느 정도의 선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이해해야 될 것은 인간의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그 사람 마음의 됨됨이 보다 훨씬 악하다는 진리이다. 사람이 행하는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악한 나무에서 나오는 열매일 뿐이다. 악한 나무에서 어떻게 선한 열매를 낼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원래 악한 존재들이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도 악을 생산해 내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리는 죽어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좀더 나은 방향으로 향상시켜 나가기 위해서 애써야 되는 것인가? 이 질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기에 앞서 반드시 도전 받아야 되는 질문이다. 오늘 우리는 이 도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마태복음 15:18-20. 겉으로 보이는 열매의 출처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사납고 비열한 독수리와 같은 근성을 확실하게 죽여야 한다. 그런데 독수리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독수리를 잡아야 한다. 필자가 살고 있는 죠지아 북부에서는 가끔씩 땅에 앉아 있는 독수리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어떤 먹이를 먹고 있는 독수리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우리가 독수리를 잡기 위해서는 먹이가 필요하다. 어떤 새들은 수수나 조와 같은 곡류를 놓을 때, 그것을 먹기 위해서 날라오지만, 독수리는 무언가 죽어서 냄새를 풍기는 것에 이끌려 날라오게 된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 마태복음 24:28.
독수리는 무언가 죽은 것 주위로 무리를 지어 몰려든다. 높은 하늘 위를 날다가 어디선가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나면 그곳으로 그들은 쏜살같이 날라온다. 참새나 비둘기라면 관심도 갖지 않은 채 지나쳐 버릴 죽은 송장에게 그들은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가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독수리의 본성은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신선한 과일이나 야채나 곡식보다는 썩어서 냄새가 나는 죽은 시체를 좋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멋지게 생긴 독수리를 잡은 다음, 독수리를 길들여서 독수리의 태도와 습관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로 하자. 그는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먼저 독수리가 들어갈 만한 커다란 새장을 만들어서 독수리를 그 속에 넣는다. 그리고는 독수리의 식생활 습관을 변화시켜 보려고 날마다 사과, 오랜지, 바나나, 또는 밀고기를 준다. 여러 주일 동안 그렇게 잘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독수리는 새장 한 구석에 있는 구멍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 구멍을 통해 날라가 버렸다. 독수리는 다시 하늘 높은 곳으로 날라간 후, 먹이를 찾아 그 지역을 빙빙 돌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이쿠 내가 너무 오랫동안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했는데, 어디 맛있는 시체가 없나?”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소나 나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그 곳으로 날아가, 조그맣게 생긴 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기쁨의 환호를 지르며, 먹이 곁에 앉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사람이 독수리를 좀더 좋은 방법으로 양육시켰는데도 불구하고 독수리는 여전히 자신의 옛 습관으로 돌아가 옛 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왜 독수리는 자신의 습관과 방법을 고집할까? 그것은 바로 그가 독수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독수리이다.
형제들이시여, 우리는 독수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독수리인데, 우리가 독수리라는 사실을 빨리 발견하고 인정할수록 우리에게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우리가 비둘기와 함께 한 동안 먹이통 곁에 앉아 있을 수 있다. 또한 과일과 곡류와 그러한 것들을 좋아하는 흉내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이 보지않고 있는 듯한 틈만 있으면, 또한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지 않을 때가 되면, 우리는 독수리의 근성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며 독수리의 세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바로 그 때, 우리를 지키는 하늘의 천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우리가 다시 독수리로 돌아간 사실에 대해서 슬픔의 기록을 해야 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말씀이다. “베드로야, 네게 문제가 있다. 네가 회개하지 않는다면(회개의 의미는 변화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너는 무언가 매우 두려운 일을 하게 될 거야. 무언가 무서운 것, 무언가 네게 큰 실망을 가져올 것, 무언가 네 자신에 대해서 깜짝 놀라게 할 어떤 것을 너는 저지르게 될 것이야! 그러나 베드로야, 문제는 바로 네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라. 그러니 베드로야, 너는 가서 기도해야 된다. 너는 깨어 있어야 해!” 그러나 주님의 간곡한 경고에 대해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 저는 당신을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일요일 휴업령과 살인 명령과 같은 마지막 시대의 두려운 예언이 지금 나에게 성취된다 할지라도 저는 주님을 부인하기는커녕 도시에서 순교하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자신이 독수리가 아님을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쌍한 베드로…. 베드로는 위기가 다가왔을 때, 주님을 부인했다. 그는 왜 그렇게 했을까? 왜냐하면 그의 옛적, 육적 본성이 그 자신도 잘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마음과 생애를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아시고 있었는데, 베드로는 자신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불쌍한 베드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형제들이시여!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는가? 예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있는 것처럼 정확하게…. 여러분들의 마음이 여러분 자신을 놀라게 한 적이 없었는가? 우리가 확실하게, 그리고 언제나 기억해야 될 것은 낡아빠진 우리의 이기적 본성은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점점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수리는 그가 살아있는 한, 언제까지나 독수리일 뿐이다. 그렇다. 독수리를 없애기 위한 유일한 소망은 그 독수리가 죽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시여, 독수리인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유일한 소망은 죽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값을 갚으시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함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동참해야만 할 한 죽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우리의 죗된 자아, 독수리의 본성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는 배고픔으로 허덕여야 하며, 부인되어야 한다. 우리 속에서 독수리가 육체에 대해서 무엇을 요구할 때마다 “안돼”라는 분명한 거절이 있어야 된다. 그리하여 결국 그것이 죽을 때까지, 세력을 잃어버릴 때까지….
형제들이시여,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평생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해야 되는 경험인 것이다. 오늘의 승리가 내일의 승리를 약속해 줄 수 없다. 우리는 매일 죽음의 경험에 동참함으로써 드디어 사도 바울이 말하는 “매일 죽노라”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을 실제적인 생활에서 체험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혼돈하고 있는 한 가지 경험이 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회심하는 경험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모든 자들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 속에서 때때로 올라오는 옛 본성으로 인해서 혼돈과 당혹감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들의 속에서 죗된 욕구가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심한 경우 유혹을 느끼는 자체까지도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이 드린 헌신과 회개를 받지 않으신 것으로 스스로 오해한다. 그들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는 것을 느낀다 (갈 5:17). 그들은 왜 그런가하고 의아해 한다. 영감의 말씀은 이러한 경험에 대해서 분명히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고자 하는 충동을 느낄 것이다. 이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영문 114.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인가? 그렇다. 왜 그런가?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은 옛날의 이기적인 본성, 즉 독수리의 본성이 우리 속에서 계속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과와 당근을 달라고 부르짖지 않는다. 그것은 썩은 고기나 죽은 송장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언가 죽은 것을 원한다. 죽거나 썩은 것 외에는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여러분과 저는 “나는 그리스도인이었다고 생각했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한 충동과 유혹을 느끼는 그 자체가 우리가 회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확인시키는 것은 충동과 유혹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굴복하느냐, 아니면 승리하느냐 하는 문제에 달려있는 것이다.
조금 다른 쪽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자. 이쪽에 십자가가 있고, 저쪽에 마음의 보좌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고, 공언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보좌가 있고, 십자가가 있다. 예수께서 우리 마음의 보좌에 앉으시도록 우리가 허용하면, 우리의 옛 본성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우리가 예수께 대해서 “예”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옛 본성에 대해서 “안돼”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생애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라오디게아인들의 특성은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예”라고 말하는 동시에 육체의 부르짖음에 대해서도”예”라고 부드럽게 응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께 “예”라고 대답했던 사실만을 기억하며 자신들의 양심을 위로하며, 회개할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뻔뻔스럽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십자가에는 어떤 것도 못 박히도록 허용하지 않으면서 보좌에 예수님과 옛 본성과 세상을 동시에 모시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보좌 위에는 예수님 한 분만, 그리고 십자가 위에는 자신의 옛 본성만 못박도록 허용한다.
십자가에 달린 옛 본성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자신을 놓아달라고 부르짖고, 구하고, 탄원하고, 요청하며, 위협하는 것이다. 우리의 옛 본성은 우리에게 죄를 범하도록 요청하고, 부르짖을 수는 있다. 그래서 옛 본성은 자신의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빼달라고 간청하며, 소리친다. 그것은 “나는 이곳에서 내려가야 한다. 나는 해야 될 무엇이 있다. 잠깐 풀어놨다가 내일 오후에 다시 나를 이곳에 매달아 놓으면 된다. 나를 좀 풀어다오!”라고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해 올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가 내일은 풀어주고 그 다음날은 다시 못 박고…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이 얼마나 피곤하고 비참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한 잘못하면 나중에는 피곤하고 지칠 뿐만 아니라 심한 망각 증세까지 겹쳐서 옛 본성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일마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사는 중증 라오디게아 병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부르짖음과 요청에 따라 그들을 풀어주기로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눈과 손과 발과 옆구리를 바라볼 것인가? 선택하라!
담배를 끊었을 때의 필자의 경험을 이야기 해보자. 필자는 분명 이 경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천 가지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저는 여러 해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저는 어느 날 하나님께로 나아갔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저를 위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당신께서 오셔서 제 마음의 보좌에 좌정하시기를 원합니다.’ 예수께서는 ‘너의 옛 자아를 못박으면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단다. 나를 도와주렴’ 그래서 저는 ‘제 자신과 담배와 모든 것을 포기합니다.’ 라고 주님께 말했습니다. 그러나 1주가 지나고 2주가 지나면서 때때로 담배를 다시 피우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습니다. 그때 저는 그 요구에 굴복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복되신 주여, 제 마음의 보좌에 계속 남아 주시옵소서. 저와 담배를 향한 욕구는 이미 죽었습니다. 저로 하여금 죗된 욕구에 굴복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는 로마서 6장 11절로 가야 한다.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 자로 여길 지어다.” 여기서 우리는 “여길지어다”(consider)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어린 아이들처럼 “꼭 그런 것처럼 “여기는 것을 말한다. 독자 중의 어떤 분은 이렇게 항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가련한 죗된 본성의 문제는 그것이 죽지 않음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인데, 그것이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죽은 것으로 여기십시오.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것은 옛 본성의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므로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에 있어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못하고, 부르짖을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절제를 하고 자제를 하고 있지만 “죽은 것으로 여길지어다”의 의미를 곡해하거나 소홀히 여김으로써 그들의 그러한 열심이 허지로 돌아가며, 실망하여 뒤로 물러가는 슬픈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한번 영감의 말씀을 읽어보자.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으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다. 이는 육체의 소욕이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육체를 거스려 싸울 때, 끊임없는 전쟁이 있게 된다. 그리스도의 도우심이 필요 되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영문 114.
이제 다시 독수리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 가보자. 독수리 한마리가 여러분의 어깨 위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독수리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나며, 가끔씩 이상한 소리를 지르는 행동이 뛰쳐나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독수리가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우리가 그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뒷 뜰에 큰 새장을 짓고 독수리를 그 안에 가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굶어서 자신의 힘을 잃어서 살아있지만 죽은 것처럼 될 때까지, 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 길이 현명한 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독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결코 자만에 빠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더러운 냄새를 피우며, 고상하지 못한 소리를 지르는 독수리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나의 진짜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바로 우리가 우리의 추한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진정 선한 어떤 것을 사모하게 될 때,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라고 하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시작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비둘기 같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취되는 것인데, 우리는 비둘기 같은 성령과 독수리 같은 본성을 둘 다 사랑할 수 없다. 우리가 비둘기를 사랑하여 비둘기를 기르기로 선택하였다면 우리는 비둘기에게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 독수리는 굶겨야 한다. 비둘기는 죽은 송장이나 썩은 고기는 전혀 먹을 수 없다. 형제들이시여, 우리의 하루의 생활 중에서 우리는 어떤 먹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텔레비전 속에 숨어있는 애굽의 개구리 같은 것들을 즐기고 있는가? 온갖 책들과 잡지들 속에 가득 숨어있는 더럽고 악하며, 무신론적인 사상과 암시를 받아먹고 있는가? 우리가 그것들을 보기 시작하고, 읽기 시작하면, 우리 속에 있는 독수리는 먹이를 찾은 환희로 “바로 이것이 내가 기다리고 원하던 것이다. 좀더 자극적이고, 더러운 것들을 내게 달라!” 라고 소리치며,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보고자, 읽고자, 먹고자, 마시고자, 생각하고자, 그리고 행하고자 하는 그것 안에 어떤 종류의 먹이가 들어있는지 확인하고 시작해야 되지 않겠는가? 독수리와 비둘기는 우리가 먹이기로 선택하는 것에 비례하여 성장해 나갈 것이다. 우리가 독수리를 위한 먹이를 공급하면 할수록 독수리가 활개를 치는 영역은 점점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유다의 경험을 깊은 관심으로 읽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유다가 구세주를 배반했던 두려운 사실을 보고 치를 떨곤 한다. 유다는 참으로 좋은 기회를 가졌었다. 그는 건전한 회심의 경험을 가졌었고, 그의 마음은 영적인 감화력에 대해서 좋은 반응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유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문제점은 그가 자아를 완전히, 끝까지, 계속적으로 못 박는 지점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독수리의 근성이 너무도 자주 보좌 위로 기어 오르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경험이 있는데, 그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과 안에서 실제적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신령한 것과 인간적인 것이 유다의 품성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사단은 인간적인 것 위에 역사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신령한 것 위에 역사하고 있었다.” 본교 성경주석 5권, 1101.
유다에게도 신령한 것이 역사하고 있었다. 요점은 사단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독수리의 본성 안에서 독수리의 본성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신령한 본성 위에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령한 것과 인간적인 것이 유다의 품성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사단은 인간적인 것 위에 역사하고 있었고, 그리스도께서는 신령한 것 위에 역사하고 있었다. 주께서는 유다가 그에게 맡겨진 특권들을 위해서 과감히 일어서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유다의 품성 중 인간적인 쪽이 그에게 더 절실하고 필요 되는 것으로 여겨진바 되었다.” 상동.
유다는 전략을 짜고 계략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유다는 자신의 그러한 속성이 그리스도의 사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으로 스스로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전략가적인 속성이 주님의 사업에 진정한 기여를 이루고 있다고 굳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그러한 뛰어난 속성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당신의 섭리로 12제자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고 추리하였다. 형제들이시여, 유다는 자신 안에 있는 독수리의 야비하고, 계산적이며, 계략적인 근성을 진저리 나는 것으로 보는 대신에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으로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독수리가 장악한 정신을 품고 그리스도와 식탁을 마주 대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에 있어서 독수리와 같은 속성이 필요된 때는 결코 없었다. 주님께서는 야곱과 같은 계교를 필요로 하신 때가 한번도 없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때때로 필요하고, 절실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바로 그 독수리의 근성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독수리가 머리를 들고 일어날 때마다, 우리의 기도는 “복되신 주님, 제 안에 독수리가 또 머리를 들려고 합니다. 저는 자아가 못 박히기를 원합니다”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속에 독수리의 근성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서만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매일 읽는 말씀과 명상을 통해서 명확히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혹시 우리들의 경험이 이러하지는 않은가? “독수리야, 안돼! 나는 그 사람을 결코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그에게 조금 성질을 부릴지는 몰라. 그리고 그를 은근히, 남의 눈에 보이지 않게 괴롭힐 거야. 그렇다고 해서 그의 뺨을 치지는 않을 것이야. 나는, 독수리, 네가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니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많은 경우에 독수리에게 끌려 다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킴으로써 스스로를 속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후일지라도 독수리의 본성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괴롭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독수리가 다시 머리를 쳐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자. 그것은 단지 옛 독수리의 근성이 여전히 동일하다는 사실 만을 증거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회개한다면 독수리의 근성이 우리를 장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못 박혀지고 가두어지게 된다. 우리의 선택과 비둘기 같은 성령에 의해서 독수리는 굶어 죽게 되는 것이다. 굶어 죽어가는 독수리의 절규와 탄원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고 … 너희 지체를 … 하나님께 드려라” 로마서 6:12-13. 형제들이시여,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우리 속에 계신 비둘기 성령의 속성을 살찌우게 하자. 그리하여 독수리는 십자가 형에 처하고,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 만이 나타날 수 있도록 인내하고 근신하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한다는 의미가 정확하고 분명하게 우리에게 이해되고 경험되기를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