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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관한 혼돈과 답변

“교회”에 대한 마지막 시대의 혼돈

생애의 빛 편집실

교회관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마지막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또한 그것은 우리의 영적 생활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교회관이란, 교회에 대한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서 무엇이 교회이며 누가 교회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언뜻 생각하면 이것은 추상적이고 막연하며, 그리스도인 생활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야말로 구약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상황과 위급한 시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온 성경상의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시에 백성들에게 이것이 잘못 이해되고 가르쳐졌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 되시고 그 자체가 교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위 “하나님의 교회”라고 공언하던 조직으로부터 배척 받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던 것처럼 예수께서 두 번째 오심을 고대하고 있는 지금 우리 백성들 가운데 이것이 또 다시 잘못 가르쳐지고 오해된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그분과 그분의 성령의 역사를 거절하게 될 수밖에 없다. 교회관이라는 말 자체는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과 연결되어 있는 여러 가지 중요하면서도 실제적인 사상과 개념은 종종 우리들을 혼돈 가운데로 몰고 가고 있는데 이러한 것들 중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으로 알아보자!

문: 1. 하나님의 교회란 무엇이며 누구인가?

답: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교회를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커다란 건물도 아니고 그것은 국가적인 설립기관도 아니며, 또한 그것은 여러 각종 교파들도 아니다. 교회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20. 그리스도께서는 초라한 몇 사람들 중에라도 계신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이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거하시는 높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만이 교회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를 향하여 쳐다봄, 영문 315.

문: 2. 그러나 우리가 교회의 현실을 보면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배도와 죄가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가?

답: 우리는 두 개의 교회, 즉 비 가시적인 교회와 가시적인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비 가시적은 교회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로서 그들의 녹명책은 하늘에 보존되어 있는 “승리한 교회”이다. “태초부터 충성스러운 영혼들이 세상에서 교회를 구성하였다. 모든 시대에 있어서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파수꾼들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들은 저희가 살았던 세대에게 정확한 증언을 하였다…. 암흑 시대 동안에 하나님의 교회는 산 위에 세운 도성이었다. 시대에서 시대로 이어지는 세대를 통해서 순결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공개 되어 왔다.” 사도행적 11,14.

가시적인 교회는 연약하고 실수가 많고, 종종 배도와 세속에 휩쓸림으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크신 사랑으로 그들에게 기별자를 보내시고 개혁자를 파송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의 역사 아래로 인도하고 계신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볼 때,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보내신 기별자들을 멸시하고 탄압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적합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모든 사람은 반대를 당하게 되어 있다…. 옛날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시대에도 이 세상의 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순수하게 전파하는 사람들은 오늘날도 그 당시보다 더 큰 환영을 받을 수는 없다. 진리를 반대하는 방법이 바뀌어지고 더욱 교묘해진 나머지 적의가 공공연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동일한 적개심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대쟁투 상권230.

가시적인 교회는 그 안에 알곡과 가라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진리와 오류의 쟁투, 그리고 거룩함과 세속의 격돌이 존재하는 “투쟁하는 교회”이다. “우리는 낙담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가 완전하다는 결론에 이를 보장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열성으로도 투쟁하는 교회를 승리한 교회처럼 순결하게 할 수는 없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65.

교회 안에 투쟁이 존재하는 이유는 진리와 비 진리,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쟁하는 교회” 안에서 가라지들에 의하여 고통 당함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붙잡고 있는 알곡들의 고뇌와 번민을 이해 해야만 한다. “신령한 기독교 신앙은 불순종의 자녀들로 말미암아 반대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투쟁이 생기는 것은 복음의 영향이 아니라 복음에 반대하는 결과이다.” 시대의 소망 2권 96. 마지막 시대의 투쟁하는 교회에 대해서 주의 종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계신다. “교회의 위험과 쇠퇴가 가장 심할 때, 빛 가운데 있는 적은 무리는 이 땅에서 자행되는 가증한 일을 보고 탄식하며 부르짖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교회를 위해서 더욱 많이 드려질 것이다…. 이 탄식하고 부르짖는 자들은 생명의 말씀을 전하고 있었다. 그들은 책망하고 권면하고 호소하였다…. 하나님의 진노가 심판으로 나타날 때, 이 겸손하고 헌신적인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탄식과 통곡과 책망과 경고로 표현되는 그들의 심령의 고민에 의하여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될 것이다…. 그들은 거의 모든 종류의 교만과 탐욕과 이기심과 기만이 교회 안에 존재함으로 탄식하고 마음의 고통을 느낀다. 교회 안에서 사단의 종들이 승리를 얻는 한편,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발 아래에 짓밟힌다.” 증언보감 2권 64.

비 가시적인 교회인 하나님의 교회와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는 가시적인 교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뚜렷한 한 선이 그어져 있는데, 그 선은 두 교회의 녹명책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므로 생기는 선이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하늘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감명 깊게 새겨 주기를 원한다. 교회에 소속되는 것과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은 별개이다. 교회의 녹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람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외관상으로는 진실한 신자처럼 보일지라도 그리스도와 산 연결을 이루고 있지 않다. 그들은 교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은혜의 내적인 역사는 마음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교회증언 5권280. 가시적인 지상의 교회가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어질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 진리와 연합하고 있는 알곡들의 모임인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포함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문: 3. 그렇다면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교회는 지금처럼 알곡과 가라지가 교회 안에서 함께 자라는 “투쟁하는 교회”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죄인과 의인이 함께 끝날까지 교회 안에 존재할 것이며, 오류와 진리가 끝날까지 항상 함께 존재할 것이므로 교회 안의 문제들에 대해서 너무 심하게 공격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이 조용하고 안전한 배를 흔들지 마십시오!

답: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기 위해서 마태복음 13:24~31절에 있는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이해해야 한다.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 13:27~31. 이 비유에서 밭은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의미하며, 추수 때는 세상의 끝으로서 은혜의 시기가 마치는 때를 말한다(실물교훈 63,65). 즉, 알곡과 가라지는 재림의 날까지가 아니라 그 이전인 은혜의 시기가 마치는 때까지 교회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세상 끝은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이 아니라 은혜의 시기가 마치는 때가 되는 것이다.

화잇 부인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 안의 알곡과 가라지들 사이에서 연합과 분리가 동시에 생기는데 이 일은 교회에 제시되는 진리와 곧바른 증언에 의해서 생기는 흔들림으로 인해서 발생된다고 말씀하셨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곧바른 증언이 제시될 때,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곧바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에 대항하여 일어나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 흔들림이 일어나도록 만들 것이다.” 초기문집, 영문 270. “한 새로운 생명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는 분리가 생길 것이고 두 무리가 형성될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추수 때까지 함께 자랄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2권 139.

진리와 곧바른 증언의 제시에 의해서 생기는 분리와 연합의 현상은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가시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 점차적으로 뚜렷하게 발전되어 나갈 것이다. 분리와 연합의 과정 중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지 알 수 없다. 이 일은 하늘의 존재들만이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가라지는 오류와 거짓 원칙의 열매나 또는 그 화신이 되는 자들을 대표한다…. 가라지는 잎이 아직 푸른 동안에는 곡식과 아주 흡사하다…. 경건한 모양을 내는 죄인들이 한때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섞여서 가식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많은 사람을 속이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추수기가 이르면 선한 자와 악한 자 사이에는 같지 않은 것이 드러날 것이다. 그 때에는 교회와는 연합하였으나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은 자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실물교훈 63,67.

은혜의 시간이 끝나고 환란이 시작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와 품성을 온 세상과 하늘 앞에 드러낼 것이다. 바로 그 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마지막으로 정결케 하실 것이다. 알곡과 가라지는 천사들에 의해서 완전히 분리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교회에는 오직 승천을 위해서 모든 준비를 마친 알곡들만의 교회가 될 것이다.

인간인 우리가 알곡과 가라지를 분별할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교회 안에 존재하는 공공연한 죄와 잘못된 오류의 가르침과 공개적인 배도들을 경고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알곡과 가라지의 문제는 개인적인 영혼의 품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영혼의 품성에 대한 판단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영역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고 공개적인 죄와 배도와 잘못된 가르침, 즉 교회에서 공공연하게 가르쳐지고 있는 신신학이나 축제식 예배, 그리고 세속적인 교회 성장법 등은 반드시 지적되고 경고 받아야 되는 문제들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공공연한 죄를 고집하는 자들은 교회에서 제명되어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품성과 동기를 판단하는 일을 맡기지는 않으셨다.” 상동 64.

신신학을 가르치고 축제식 예배를 장려하며 타 교파와의 부드러운 관계를 위해서 천주교회의 신부를 우리의 교회의 설교 단상에 세우는 것과 같은 배도가 공공연한 죄가 아니란 말인가? 북미 지회에서 리뷰지에 게재한 다음과 같은 글은 우리 백성들을 오류 가운데로 인도해서 결국은 죄에 붙어 있으면서도 영생을 바라보게 하는 기만을 가르치고 있는 드러난 공식적인 교회의 배도가 아니란 말인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는 완전 문제와 인간의 순종 문제에 대해서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적이 없다.” 논점 7. 교회 전체에 만연되어 있는 어떠한 배도를 경고하는 것이 어떤 특정한 개인의 품성과 동기를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인가? 우리는 교회의 공공연하고 공개적인 배도와 죄를 경고하는 것과 가라지를 뽑는 일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잘못을 책망할 용기가 없는 자들이나 게으름과 관심의 부족으로 인하여 가정이나 하나님의 교회를 순결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저희가 의무를 태만히 함으로 인해서 초래한 악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부조와 선지자 하권 252.

마지막 시대를 사는 한 백성으로서 우리가 이 문제를 오해하거나 혼돈할 때, 우리는 개혁과 반란, 그리고 교회에 대한 충성과 불충성을 구별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개혁자와 충신을 반란자와 역적으로 몰게 되며, 그들을 핍박하고 내쫓는 일의 선봉에 서게 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 안에 가라지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실망하고 낙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교회 안에 참 신자들과 거짓 신자들이 섞여 있는 것을 볼 때에 탄식한다. 저들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든지 하려고 할 것이다. 집주인의 종처럼 저희는 가라지를 뽑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길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상동 64. 교회 안에 교인답지 못한 자가 있음으로 인해서 세상 사람이 그리스도 교회의 진실성과 아름다움을 의심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이런 거짓형제들 때문에 낙심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단에 대해서 오랫동안 참으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가라지의 비 그리스도인적인 태도와 정신에 대해서 인내할 것을 부탁하고 계신다.

우리 모두 혼돈하지 말자. 곧바른 증언은 교회 안의 가라지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앞에 공공연하게 드러난 배도와 오류와 죄를 지적하여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죄에 참여하지 않도록 하는 것임을…. 우리 모두 기억하자. 우리의 공격 목표는 동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그들을 미혹시키고 있는 배도와 오류와 세속인 것을…. “누가 이와 같은 때에 하나님의 권면을 따를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 중의 잘못을 실제로 변명하고, 공개적은 아닐지라도 마음 속으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한 자들에 대하여 불평하는 자들이겠는가? 책망자들을 반대하고 잘못을 범하는 자들을 동정하는 자들이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회개하여, 사업의 짐을 지고 있는 자들을 핍박하고 시온의 죄인들의 손을 붙들어 주는 사단의 일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인치심을 통한 인정의 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살육하는 기계를 든 다섯 사람의 사업으로 표상된 전반적인 악인의 멸망에 빠지게 될 것이다. 다음의 요점을 주목하라.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에 의해 찍혀지는 표로 표상된 진리의 순결한 표, 즉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들에게 이루어진 그 표를 받는 자들은 교회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들임을 관심 있게 주목하라. 하나님의 순결, 명예, 영광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그들이 고민 중에 있고 탄식하며 우는 모습으로 표상될 정도로 깊다. 그들은 죄악의 지극히 죄됨에 대하여 분명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에스겔 9장을 읽어 보라.” 교회증언 3권 267.

문: 4.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하나님의 남은 교회이며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통과할 것인데, 왜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고 교회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며, 심지어는 교회 밖으로 나간 것처럼 행동하기까지 합니까?

답: 우리는 교회에서 발해지는 모든 지시와 명령을 주 안에서 순복해야 한다. 교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할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권위를 최고의 봉사와 헌신으로 받들어야 한다. 우리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지시를 순종해야 하며, 아합왕과 헤롯왕의 명령을 주님의 이름으로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 지혜가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어떠한 인간의 지혜나 제도가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깨뜨리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의 청사진을 성경과 당신의 백성에게 보내신 증언의 말씀 속에 그려 놓았다. 인간의 권위는 인간의 서명 날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권위는 도덕적인 위엄과 권능으로 최상의 권위로 군림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여, 하나님의 권위만을 인정하자. 온 우주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권위만을 인정하자. 모든 영혼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나누어짐 없이 굳게 메어 달리라고 호소하는 바이다.” 베틀크릭에 보내는 편지 74.

하나님의 남은 교회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는 쓰러질 것처럼 보이나 결코 쓰러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통과할 것이다. 그러나 그 구성원들은 흔들림과 체질을 통하여 정결함을 받을 것이다. 끝까지 통과하는 것은 지금 현재 교회라고 불려지고 있는 교단과 조직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와 증거의 말씀으로 승리한 자들인데… 진리를 순종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혼을 순결하게 한 남은 무리들은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힘을 합칠 것이며, 배도로 둘러싸인 가운데에서도 신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 서신55. 일요일 강제령이 선포되고, 환란이 시작되고, 사형 명령이 발해질 때까지 제칠일 안식일예수 재림교회의 깃발을 높이 들고 서있으며, 여전히 제칠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자들만이 “승리한 교회”의 선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하에 항구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이다. “충성된 것이 증명된 투쟁하는 교회의 신자들이 승리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마지막 날 사건들 61.

그분께서는 기별자와 개혁자를 통하여 “투쟁하는 교회”에 진리와 곧바른 증언을 보내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결정하도록 할 것이다. 진리와 증언의 말씀에 대해서 불평하는 자들,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목사들이나 알지.’라고 말하는 자들, 망설이는 자들, 겁먹은 자들, 불확실한 자들, 중간에 서서 줄타기를 하는 자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결국 죄와 배도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말씀과 거룩한 충동으로 일어난 기별자들을 대항하여 일어설 것이다. “교회는 계속해서 경고를 받아왔다.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와 위험은 분명히 밝혀졌다. 그러나 그들에게 세속적 요소가 너무도 강함이 입증되었다.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습관과 행습과 유행이 경고와 성령의 호소를 무시하고 여러 해에 걸쳐 기반을 구축해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의 길이 그들 자신의 눈에 바르게 보이고 성령의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다.” 교회증언 5권, 영문 103.

때때로 그리스도인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들은 인간의 권위와 지상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마음과 양심으로 받아들인 어떤 진리가 교회가 가르치는 교리와 서로 부딪히게 될 때, 만일 그가 계속해서 진실하게 자신이 믿는 신앙과 진리를 고수한다면 그는 결국 교회의 권위를 깨뜨리는 상황까지 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얼마 동안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음으로서 그 지방에서는 교권제도의 권력이 깨지는 것처럼 보였다.” 시대의 소망 2권 149.

“우리는 인간이 세운 정부를 하나님이 임명하신 규범으로 인정하고, 그 정당한 범위 안에서 거기에 순종하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와 상치될 때에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법보다 높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란 말을 “교회가 이렇게 말하기를” 혹은 “국가가 이렇게 말하기를” 이라는 것 때문에 파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면류관이 지상 군주의 왕관보다 더 높임을 받아야 한다.” 사도행적, 영문71.

진정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개인이나 단체를 향하여 “그(그들)는 교회 밖으로 나간자(무리)야!”라고 말하기 전에 한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를 떠나 갔다는 말은 진리를 버리고 떠나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교회를 떠났지만 여전히 교단에는 소속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재림교인들이 이미 남은 교회를 떠나갔지만 여전히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의 녹명책에는 그들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권위와 진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형제들이시여, 그대들의 영혼과 양심속에서 속삭이시는 세미한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진리가 이끄는 대로 그대들의 의지를 굴복할 교회라는 배가 아무리 격렬하게 흔들릴 지라도 그대들은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항상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지금 그대들에게 불어오고 있는 타협의 미풍이나 부드럽고 듣기 좋은 거짓교리의 바람에 그대들의 머리를 숙이지 말라. “모든 목사들은 자신의 직무의 신성함과 자신의 사업의 거룩함을 깨닫고 엘리야가 나타낸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와 나단과 침례 요한 같은 사람을 부르신다. 결과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기별을 충실히 전할 사람, 비록 그것이 저희가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도록 요구할지라도 담대히 진리를 말할 사람을 부르신다.” 선지자와 왕, 영문 142.

문: 5.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배도한 이스라엘 교회에 대한 모세의 태도를 보라. 그는 교회가 배도하였을 지라도 교회의 죄를 지적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탄원하지 않았던가!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보라!

답: 우리는 모세가 배도한 교회를 위해서 드렸던 위대한 중보의 기도를 기억하며, 백성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칭송하기를 좋아한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를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출 32:31~32.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내놓고 드렸던 모세의 중보 기도는 교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적합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간과하지 않아야 할 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중보의 기도를 드리기 전에 그가 취했던 가혹하리만큼 엄숙하면서도 거룩한 사업이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 나오는 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출 32:25~28.

모세는 배도에 가담한 3000명의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도륙하라는 말씀에 따른 후에야 비로서 백성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삼천 명을 도륙한 이후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했던 말을 살펴보자.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이튿날 모세가 백성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의 죄를 속할까 하노라.” 출 32:20~30. 모세는 이스라엘 교회에 들어온 배도를 제거했으므로 이제 비로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백성들 앞에 선언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 기억하자.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 존재하고 있는 배도와 죄와 오류를 제거하여 버리기 전까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올바른 헌신을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에 대한 순종과 거룩한 헌신이 결여된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모든 예물과 헌물은 우리 자신의 양심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가증한 뇌물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예물 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정결한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모세의 엄숙하고 과감한 명령과 조치는 대다수의 백성들에게서 원망과 불평을 불러 일으켰다. 백성들은 그들의 배도에 대해서 관대한 이해와 아량을 보여주었던 아론에게 더 많은 존경을 표현하였지만, 모세의 도덕적인 용기와 결단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로 받아들여졌다. “모세가 진영에 돌아와 반역자들과 대면했을 때에 그의 날카로운 책망과 의분 곧 그가 율법이 기록된 신성한 돌판을 깨뜨림으로 나타낸 분노는 백성들이 볼 때 그의 형의 유쾌한 말과 품위 있는 태도와는 대조적이었다. 백성들은 아론을 동정했다.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론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의 점잖음과 참을성을 찬탄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같이 보지 않으신다. 아론의 양보하는 정신과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소망은 그가 재가하고 있었던 범죄의 극악함을 볼 수 없도록 그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도록 영향력을 끼친 그의 태도는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벌하실 모든 죄 중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격려한 죄보다 그분께서 보시기에 더 큰 죄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가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분의 종들은 신실하게 악을 책망하는 것으로 저들의 충성심을 나타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겨 주심으로 영예를 얻은 사람들은 약하고 구부러지기 쉬운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를 갖지 말아야 하고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 의무도 피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성실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 공의 못지않게 사랑도 이들의 죄에 대한 심판이 집행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의 통치자이실 뿐만 아니라 보호자이시다. 그분께서는 반역에 고착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파멸로 인도하지 않도록 그들을 죽게 하신다.” 부조와 선지자, 영문 323~325.

문: 6.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남은 교회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인데 어떤 소수의 사람들이 교단의 조직과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어떠한 기관을 세울 수 있는가?

답: 이 질문에 대한 가장 믿을 만하고 정확한 답변을 위해서 우리는 화잇 부인이 생존해 계실 당시에 독립선교기관이 존재했었는가를 알아보아야 하며, 만일 존재 했었다면 과연 화잇 부인은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적합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화잇 부인 생존 당시, 교육 사업이 제일 먼저 독립 기관으로 개혁되었다. 써덜랜드와 매간이라는 두 교수들이 교육에 관한 예언의 신의 권면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도무지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 테네시 주 메디슨에서 그들의 사업을 시작하였다. 써덜랜드와 매간은 대총회로부터 심한 반대를 당했는데, 그 당시 대총회장은 그들에게 조직을 벗어나서는 결코 일할 수 없음을 강조 했으며 대총회가 개입되지 않은 사업에 대해서는 결코 재림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헌금의 호소를 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화잇 부인께서는 대총회의 그러한 강압적인 결정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편지(1907년 5월 4일자)로써 써덜랜드와 매간 교수를 격려하고 그들에게 사업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나는 당신과 당신의 동역자들이 지금 하고 있는 사업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라고 맡겨 주신 사업이라는 확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의 정신과 무관심의 정신은 여러분들의 일을 필요 이상으로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비록 당신들이 많은 격려의 말을 듣지는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들이 쉽게 실망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계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메디슨 학교가 대총회에 소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금이 그토록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에게 당신들이 헌금 호소를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즐거워하고 재미있어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은 시정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정으로 들어온 자금을 분배하는데 있어서 주님의 지시에 조화되는 다른 사업들을 운영하기 위해 자금의 일부를 배당하는 것과 꼭 같이 당신들도 자금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스폴딩-매간 증언 모음 411.

화잇 부인 당시부터 독립 기관들은 존재했었다. 화잇 부인은 그들에게 사업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을 주었고 그들을 격려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하고 유일하게 당신 자신이 메디슨 학교의 이사직을 수락하심으로 교단으로부터 행정적으로, 재정적으로 독립하였던 그 기관에 적극 협력하셨다는 사실은 독립선교 기관에 대한 그분의 강력한 애정과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특정한 구역 안에서 헌금(십일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금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대회에 있는 형제들에게 나는 지금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다. 그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대의 금지 조치를 철회하라. 하나님의 사업에 그러한 방법으로 족쇄를 채워서는 안 된다. 그대가 주시하며 비난하고 있는 이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봉사 받고 계신다.” 스폴딩과 매간 콜렉션 422.

“주께서는 …사업에 어떤 한계를 정하시지 않으셨다. 써덜랜드와 매간 형제는 그들의 사업에서 불필요한 방해를 받고 있다. 메디슨 학교의 조직과 경영 방법이 대총회의 지배하에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금이 지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나는 왜 이 학교의 조직과 경영 방법이 대총회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고 하는지에 관하여 잘 알고 있다.” 특별 증언 B, No. 11,31,33. 하나님께서 독립 선교기관을 인준하셨는가? 한 교회로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 때문에 허락하셨다. 교회를 떠나기 위한 목적으로 독립 선교기관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의 독선적인 편견과 지배하려는 정신 때문에 어떤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들은 이 교단의 조직 하에서 하나님의 지시대로 사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시작하게 되었다. 1888년 당시 A.T. 존스 라는 젊은 목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전할 때, 대총회가 그에게 교단 안에서 설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자, 화잇 부인은 당신 자신이 직접 그를 데리고 다니면서 독자적인 야영 집회를 개최했다. “우리는 도시에 있는 공회당을 빌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존스 형제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은 백성들에게 나누어질 것이다.” 1888년 재료 847~848. 바로 이러한 딜레마가 오늘날 소위 말하는 독립선교 기관을 산출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오늘날 존재하는 독립선교기관들은 크게 두 가지의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 한쪽은 그들이 전하는 기별 중에 곧바른 증언을 포함시키고 있는 기관들이고, 다른 한 쪽은 그들이 전하는 기별에서 곧바른 기별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키고 있는 기관들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셋째 천사의 기별, 즉 인치는 기별을 전하는 것이 그들 기관의 존재 목적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교단과 조직은 전자에 속해 있는 기관들에게 “분리주의자들, 교회를 떠난 자들, 교회를 비난하는 자들”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여줌으로 그들이 교회의 형제들에게 공식적으로 접근하여서 기별을 전하고, 교제를 나누는 거의 모든 통로를 쉽게 차단시키는데 성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늘로부터 오는 신선한 빛의 광선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모든 통로를 막으려고 결심한 듯이 보이는 많은 부류의 종교교사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규칙과 제약을 세워 그들의 교회의 교인들을 묶어두어서 그들이 다른 예배 장소에 가는 것을 금하고, 특정한 부류의 교사들 외에 다른 기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을 금한다. 이런 방법으로 남녀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자유를 포기하도록 인도 되어지며, 그들 자신의 교회 외에 진리의 원천으로부터 방사되는 하늘의 빛을 모으지 못하므로 마음과 정신을 계발시키고 증진시키는데 실패한다.” 영문시조 3권 142.

이와 반면에 곧바른 증언과 교단의 일반적인 입장과 반대되는 가르침들, 즉, 완전 문제, 그리스도의 인성문제, 죄의 본질 문제, 그리고 교회 속에 들어와 있는 공공연한 배도와 세속과 오류에 대한 경고 등은 후자에 속한 기관들에게 있어서 외면 당하고 있거나, 교단의 눈총을 받지 않을 정도의 선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낮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후자의 경우 어느 정도 교단과 조직의 인정을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이 마지막 시대의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행하고 있는 것일까? 둘 중 어느 쪽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신실한 목자일까? 둘 중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인가? “침례 요한은 비천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죄를 견책하였다. 그는 왕들과 귀족들이 기별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간에 저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말하였으며, 또한 노골적으로 말하였다. 그는 산헤드린의 바리새인들이 순결하고 자원하는 순종의 의를 따르지 않고 있으며, 저들의 신앙이 외식으로 가득 찬 것임을 견책하였다…. 우리들이 전해야 할 기별 역시 침례 요한의 기별처럼 단도직입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는 죄악 때문에 왕들의 죄를 견책하였다. 그는 헤롯왕의 간음죄를 견책하였다.” 가려뽑은 기별 2권 181~182.

문: 7. 경고를 하고 책망을 해도 꼭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가? 좀 더 사랑이 가득하고 그리스도인적인 방법은 없는가? 그렇게 해서 영혼에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고쳐주고 싸매시기 위해서 찢으시는 것이지 실망시키고 낙담시키기 위해서 채찍질하지 않으셨지 않는가? 형제를 서로 끌어 당겨주고 밀어주도록 하자.

답: 아, 이 얼마나 그럴 듯 하게 들리는 인간의 방법과 논리인가? 그들은 개인의 실수와 연약함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아량 또는 관대함과, 배도에 빠져 있는 교회를 향한 경고와 책망을 분별치 못하고 있다. 교회를 향한 경고와 책망의 기별은 몇몇 지도자들의 실수와 개인적인 연약함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며 교회 전체에 만연되고 있는 배도와 세속적인 정책, 그리고 잘못된 가르침을 지적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형제들이시여, 우리 모두 기억하자. 인간적인 합리주의 사고 방식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색깔로 포장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사랑을 실현하는데 있어서는 항상 반역자의 역할을 해왔던 역사를…. 여기 하나님의 참 치료 방법과 하나님의 참 사랑이 있다. “자기들의 진정한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면, 뭐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할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또한 왜 침례 요한이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말할 필요가 있었는가? 라고 질문한다. 왜 그는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와 사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말해서 헤로디아의 분노를 살 필요가 있었는가? 그리스도의 전주자(前走者)는 그의 직설적인 말로 인해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왜 그는 죄악 중에 사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행동할 수 없었을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실한 수호자로 서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 해왔다. 그리하여 정책이 충실을 대신하고 죄는 책망을 받지 않은 채 지나간다.

언제 충실한 견책의 음성이 다시 한 번 교회 안에서 들리게 될까?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나단이 다윗에게 말한 것과 같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한 말을 오늘날 설교단에서 거의 들어 볼 수 없고 공공의 정기 간행물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러한 말이 그처럼 드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사람들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많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주의 사자들은 인정을 받으려는 욕망과 인간들을 즐겁게 하려는 야망으로 진리를 말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기 전에는 그들의 노력에 결과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 것이다. 하나님께서 평안을 말씀하시지 않으신 때에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부르짖는 목사들 곧,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목사들은 하나님 앞에서 저희의 마음을 철저히 낮추고 그들의 불성실과 도덕적 용기의 부족에 대하여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다. 저희에게 맡겨진 기별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요 저희가 방종과 안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참 사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첫째로 삼는다. 이러한 사랑을 가진 자들은 명백하게 말함으로써 이르러 오는 불유쾌한 결과를 피하기 위하여 진실을 속이지 아니할 것이다. 영혼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에게 주신 말씀을 말할 것이며 악을 변명하거나 핑계하지 않을 것이다.” 선지자와 왕 131~133.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법으로 사업을 한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족한 판단과 견해가 때때로 교회를 깨우기 위한 하나님의 기별 위에 멍에를 뒤집어씌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는 그들의 태도가 자신들의 마음에 정확하게 합치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의 잘못을 찾아내고 비난하는 것은 죄이다. 메디슨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나 책망하지 말라. 형제의 사업에 대해서 불평을 할 시간에 소홀해진 그대 자신의 일을 추진하라. 형제의 성품에 있는 흠을 찾는 대신에 그대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그대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정직하게 대하라.” 스폴딩과 매간 콜렉션 421. 형제들이시여, 아직도 독립선교 기관을 교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교회의 원수라고 생각하시렵니까?

결론의 글

마지막 흔들림 시대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혼돈과 불확실성의 터널을 지나야 되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교회관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정립은 매우 긴요한 일이다. 우리가 교회관에 대한 올바른 사상을 소유해야 되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과 중세 기독교회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부흥과 개혁의 기별을 보내셨던가?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기별에 대해서 그들이 나타냈던 반응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인데 감히 누가?” 라는 저항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리와 기별을 보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연약한 인간을 바라봄으로써 그들 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하였던 것이다. 교회관에 대한 가르침의 목적은 새로운 교단 조직을 세우기 위함도, 더 많은 신자들의 확보를 위함도 아니다. 교회관은 진리와 오류 사이에서, 그리고 진리와 진리를 무시하는 군중들의 압력 사이에서 갈등하며 방황하고 있는, 진실하지만 연약한 영혼들에게 정로를 제시하기 위한 가르침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거에 있었던 종교계의 큰 개혁자들에 대해서 칭송하는 말들을 많이 한다. 우리들은 그들에 대한 우리의 존경심을 이렇게 표시한다.

“유대나라의 교만과 형식주의를 책망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그리스도의 선구자 침례 요한을 보라. 또한 나이 많은 바울이 쇠사슬에 매인 채로 가이사의 영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한 것을 기억하라. 이 세상 지혜의 대 걸작품인 천주교회를 대항하여 홀로 싸웠던 마틴 루터를 생각하라. 형식주의와 무신론주의가 성행했던 시대에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전파한 요한 웨슬리를 생각하라. 1844년의 대 실망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는 기도와 성경연구로서 마지막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낸 엘렌 지 화잇을 보라. 우리들은 그들의 용기와 불굴의 투지, 그리고 대담했던 그들의 개혁과 책망의 기별에 대해서 칭송하며, 때때로 그들을 추모하는 기념행사를 가지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 때에 살았더라면 우리는 그들의 개혁을 도왔고, 그들의 책망의 기별을 겸손히 받았을 텐데….”

정말 우리가 그 당시에 존재했다면 그렇게 했을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겸손히 명사해 보아야 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에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마 23: 29~30. 오늘날 우리는 곧바른 증언과 개혁의 기별을 듣기 위해서 엘리야와 침례 요한과 엘렌 지 화잇의 부활을 기다려야 하는가? 이미 그들이 남기고 간 증언과 기별이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오늘날과 같이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가르침과 신조들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는 아합왕의 기별과 엘리야의 기별, 헤롯왕의 기별과 침례 요한의 기별, 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기별과 예수 그리스도의 기별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가 남은 교회임을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마지막 남은 자손이 매우 적다는 진리 또한 믿어야 한다.

“나는 결론적으로 가장 엄숙한 시간에 살고 있다고 말하는 바이다. 나는 지금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자들 중에 매우 극소수만이 그 진리에 의해서 성화되고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깜짝 놀랄만한 사실을 보게 되었다…. 겸손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예수의 추종자들만이, 영적으로 별 관심 없이 지나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뒤로 두고 완전에 나아가게 될 것이다.” 교회 증언 1권 608~609.

사단이 교단 내에서 역사해온 것처럼 독립선교 기관에도 강력하게 역사해오고 있다. “견고한 토대” 역시 사단의 마지막 공격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악한 자들의 마지막 기만을 경고하며,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충실한 파수꾼이 되기를 소원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결국 각자가 홀로 서는 경험을 해야 한다. 아무도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우리의 영혼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어떤   다른 인간을 찾을 수 없다. 우리는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우리 자신의 의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 1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