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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안에서의 외로움

오늘날,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신자의 고통과 눈물은,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기도회,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완수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혀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조차 외로움과 설움을 맛보게 된다. 내가 너그러운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면, 그들은 사기로서 나를 맞아 준다. 그들이 내게 속옷을 구할 때에 내가 겉옷까지 벗어 주면, 그들은 오히려 신발과 모자까지 달라고 한다. 나의 정직을 이용하여 그들은 나를 그들의 편리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가끔씩 내가 교회를 위하여 곧바른 말을 하면, 그들은 나를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자로 몰아부쳤다. 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단 말인가? 교회는 나에게 죄를 강요하고 있다.

죄를 죄로 느끼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는 매우 외로운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들의 설교나 신앙 태도는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죄에서 구원받으려는 자는 그리스도 교회로 오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방패 삼아서 대담무쌍하게 죄를 범하고자 하는 자들도 교회로 오라!”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고 있지만, 율법에 대해서 올바로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대담한 무법자로 양육시켜 가고 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를 안내해 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지옥불에 대하여 두려워 떠는 신경쇠약 환자로 만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얻지 못한 대답

나는 내 죄가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하나님의 겨누는 표적이 된 듯하였고, 그의 화살에 맞아서 비틀거렸으며 그의 손이 나를 누르셨다. 내가 동으로 가도 그가 계셨고, 서로 가도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죄로 인한 가책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히 삶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식욕을 잃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일할 기력조차 없었다. 하루는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가 내 영혼의 고통을 말하면서 도움을 구했으나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을 줄 뿐이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 역시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목사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 놓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목사가 말하기를 “아마도 당신은 악마의 종이 되었나 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죄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성경과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목사야말로 자신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를 모르는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떠한 신앙이나 종교도 모두 거짓이다.

봉사와 희생의 위험성

나는 희생적인 봉사를 통하여 영혼의 고통을 잊기로 결심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심지어는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나 역시 한때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험을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빈민 구호 병원에 보조 간호원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배설물을 닦아주며, 환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내의 수련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선과 봉사는 사랑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서부터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자선과 봉사 사업에 종사하면 결국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사실처럼 보이지만, 진리는 아니다. 자선과 봉사의 행위가 자비로운 마음을 배양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 이상의 봉사와 자선을 억지로 이끌어 낼 경우, 자선은 위선이 되고, 봉사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위하여 수많은 자선과 봉사를 베푼 사람이 결국에는 교만한 목사와 장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선과 봉사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나의 선행은 나의 원수이다. 이러한 경우에 자선과 봉사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만과 위선의 깊이는 깊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선과 봉사라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면, 그는 거의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적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조심하라! 고아원을 세워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자여! 세상이 그대의 자선심을 인정하고 교회가 그대의 신앙적 헌신을 칭찬할 때, 그대는 바로 지옥의 벼랑길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눈에 보이는 사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그대의 이름이 높이 들리면 들릴수록 조심하라! 위대한 자선 사업가 하워드는 임종시에 단 두마디의 유언을 남겼다. 하나는 그의 미친 아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과 자기를 위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수록 안전하다.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자선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가? 조심하라!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정치가와 연예인들이 자선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라! 그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자선과 봉사를 인기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야심적인 목사도 자선가가 되면,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지 말라! “너는 남을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구제를 은밀히 하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니라.” 마태복음 6:4.

마지막 시도, 목사의

자선 사업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나는 마침내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같은 결과가 생길까 봐 오래 전부터 두려워하였으며, 이러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이제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나는 목회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지만, 목사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기독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부터, 나는 “결코 목사는 되지 않을 것이야” 라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게 아무리 천한 직업을 주시더라도 제발 목사는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다. 물론,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목사직을 택하여 Rev.(경건한 목사) 라는 명칭을 내 이름 앞에 얹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비록 내가 마차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여러 번 다짐하였지만, 결국 나는 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밭에 곡식이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 추수할 것이 많은데 추수할 사람이 너무나 적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 나에게 여러 사람이 이러한 말로서 신학 공부를 권했었다. 그러나 나는 목사를 나의 직업으로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내가 생각하는 목사와 달랐다. 나는 바울과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루터와 같은 목사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나는 리빙스턴과 같은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나에게 그러한 목사가 되라고 권했으면, 나는 높으신 부르심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제대로 성경을 배우지 못했고,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자신의 죄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목사가 되어서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사직에 대해서 환멸을 느껴왔다.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깃발이 피로 물들었을 때에는 매우 적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목사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목사직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직장으로 전락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최소한의 생존경쟁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기나긴 씨름 끝에 결국 나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사욕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 마지막 제물을 바치고 목사로서 최대의 고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다. 내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목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인생 최대의 행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교는 중세기 때의 수도원과는 전혀 달랐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처음 느낀 것은 너무나 편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빈민 구호 병원에서 수련하던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신학교에서의 실망

신학교에서 배운 어떤 학문들은 나의 사상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연구를 통해서 나는 모세와 바울을 직접 대면하는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여기서 제한하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진지한 성경 연구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혼을 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웅변학, 설교학, 목회학, 변증학과 같은 것들을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바쳐야만 하였다. 나는 모세와 바울이 배웠던 신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신학교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신학교 역시 나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신학교의 아침 기도회, 쉴새 없는 찬미소리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사슬을 벗겨주지 못했다. 성경 연구, 기도, 찬미와 같은 것들이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의무로서 나에게 부담을 주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거룩한 힘으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더우기 종교 비판학과 같은 강의 시간에는 두려운 마음 없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마치 오래된 돌멩이나 나무조각의 이름처럼 불러댔다. 신학교에서 내가 경험했던 위험은 바로 신성모독의 죄였다.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마음이 죄의 죄됨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경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치료하고 죄의 사슬을 끊어주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대신에 하나의 학문과 학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나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학교에 있는 어떤 교수들은 죄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나에게 강요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문을 발견하곤 깊은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신학의 중심은 마음에 있어야 한다. 전도는 정신이지 기술이 아니다. 목사의 설교는 배우의 연극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정신적 사업을 위해서 기술적 훈련을 받는 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연극 배우가 될 수 있다. 자기가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고, 자기가 확신하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연극 배우의 필수 연기가 아닌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특별한 하늘의 계시와 영감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신학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신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현대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다. 설교는 제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글은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되어야 비로서 바울의 사상과 경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억지로 바울의 사상을 꾸며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목사의 양성은 신학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훌륭한 종교가 중에는 신학교 출신이 많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길리얏의 야인이었으며, 그의 사업과 정신을 물려주려고 선택한 후계자 역시 소를 모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을 구하려고 계획하셨을 때에도, 당신의 아들을 히렐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지 않으시고 나사렛 벽촌에 두셔서 천연계를 통하여 아들을 친히 가르치셨다. 19세기 최대의 전도자인 무디 역시 세탁소의 일꾼이었다. 훌륭한 목사는 결코 신학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학교가 만들어낸 목사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그렇다! 신학교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신학교는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해서 공격하기 좋은 최대의 공격 목표이다. 신학교가 마귀의 공격 목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말하고 설교하는 것과, 그들의 품성과 사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귀는 그리스도의 거짓 대리자들을 통하여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하나님의 교회 속으로 밀어 넣음으로써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다.

신학자와 목사가 만들어 놓은 거짓 평안

죄의 죄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의 은혜됨을 알 수가 없다. 자기 죄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절실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가장 큰 위험은 죄를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부산물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타조가 사냥꾼한테 쫓기다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지면, 그 머리를 모래 속에 박고 그것으로서 온 몸을 숨겼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죄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은 죄를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것으로 부각시킴으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나 거룩해서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는 식의 설교를 한다. 그러나 죄를 범한 교인들은 심한 양심의 가책과 심판의 두려움을 목사와 신학자에게 호소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십계명은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잘 믿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라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으로서 열렬히 구해야 할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마음 속 깊이 구하지 않게 된다. 죄를 범한 죄인은 죄책감에 눌리게 되고, 죄인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께 나오도록 계획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인데, 신학자들은 죄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신학을 고안해 내므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의 마음에 거짓 평안을 넣어주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만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생각하지 않거나, 인위적으로 율법을 폐지시킨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는 죄를 죄 되게 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은혜 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