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 제 29 호
그 때의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
제2부-교회가 걸어가고 있는 길
저자: 강명수
제1부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지금은 재림교회를 둘로 나누는 선이 그어지고 있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앞으로 재림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한 시기이다. 재림교회의 현재를 분석하고 앞날을 예측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지나간 역사 중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둘로 나누어졌던 때를 살펴보면 된다. 하나님의 교회가 둘로 나누어졌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속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들의 원인을 분석하고 앞날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성경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교회가 둘로 나누어졌던 역사를 찾아보도록 하자. 이스라엘이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졌던 때가 있었는데 무엇과 무엇으로 나누어졌는가?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나누어졌다. 하나님의 교회가 둘로 나누어졌을 때 양쪽 진영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겪고 있는 위기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숲속을 정신없이 한참 걸어가다 보면 전체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고 보고자 하는 것은 전체 숲의 모습이다. 숲이 어떻게 생겼으며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전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결코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가 둘로 나누어졌는데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로 나누어졌다. 남방 유다는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고, 북방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왕이 되었다. 북방 이스라엘에는 열 지파가 갔고, 남방 유다에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각 지파에서 빠져나온 소수의 남은 무리들만이 남게 되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아주 큰 교회와 아주 작은 교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부터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에서 일어난 일을 살펴보기로 하자. 열왕기상 12장 25절부터 마지막 절을 찾아서 한 절씩 읽으면서 북방 이스라엘의 배도가 어떻게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공부해 보도록 하자. 이 말씀은 교회가 둘로 나누어지게 될 때, 양쪽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북방 이스라엘의 배도 과정
첫 번째 일어난 일 : 진리를 차단하고 옛 신앙을 버림
왕상 12장 25-27절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그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예루살렘은 남방 유다에 있었음)에 있는 여호와의 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둘로 갈라지고 나서 첫 번째로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북방 이스라엘 교회의 여로보암 왕은 백성들이 남방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왜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는가?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방 유다에 있는 여호와의 전(예루살렘)에 가서 예배드리면 백성들의 마음이 남방 유다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전에서 나오는 진리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남방 유다의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남방 유다 제사장들의 설교를 듣고 남방 유다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집회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방 이스라엘 왕인 여로보암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이처럼 교회가 둘로 갈라지면 항상 한쪽 교회에서는 다른 한쪽 교회의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전체의 모습을 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아, 교회는 지금 둘로 나누어지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남방 유다의 왕인 르호보암은 북방의 여로보암 왕처럼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남방 유다 안에 여호와의 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가운데 여호와의 전이 있는가? 우리가 예배드리는 안식일에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는가? 여호와의 임재가 있다면 우리는 남방 유다에 속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예배에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없다면 우리는 북방 이스라엘에 속한 사람들이다. 여호와의 임재하심, 그것이 우리가 어디에 속했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여로보암 왕이 백성들이 여호와의 전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왕상 12장 27절을 다시 읽어 보자.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북방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남방 유다로 쏠리는 것은 여로보암에게 있어서 죽음과도 같다. 북방 이스라엘에 속한 교인들이 남방 유다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좋아서 남방 유다로 가 버리고 나면 북방 이스라엘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 영향력을 잃어버려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교회 안에서의 입지와 정치적 생명이 걸려 있는 문제이다.
자, 그렇다면 여로보암이 백성들이 남방 유다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했는가 살펴보도록 하자. 북방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조건 남방 유다로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먼저 남방 유다에서 가르치는 옛 복음과 옛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대신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그들에게 주어야만 하였다. 남방 유다에서 흘러나오는 진리와 복음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여로보암은 그들에게 새로운 하나님을 소개해야만 하였는데 이것이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서 두 번째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두 번째 일어난 일 : 금송아지 복음과 새로운 예배 방식이 도입됨
왕상 12장 28절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남방 유다에서 흘러나오는 진리를 차단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여호와의 전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무슨 계획을 세웠는가?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여로보암은 송아지에다 금가루를 발라 놓았는가? 불상에다 금가루를 발라 놓는 것과 동일한 이유이다. 우상에다 금가루를 발라 놓는 이유는 그 우상이 돈과 재물과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금송아지는 돈의 신이고 재물의 신이며 풍요로움의 신이다. 여로보암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서 꺼낸 비장의 카드는 돈과 재물을 축복하시는 새로운 하나님을 소개한 것이다. 정말 여로보암 왕은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했다. 자아를 부인하고 율법에 대한 순종, 즉 좁을 길을 걸으라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과 재물을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한 것이다. 얼마나 매력적인 금송아지 복음인가? 이스라엘 주변에 있던 이방인들이 우상을 섬기면서 풍요롭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바로 그러한 면을 여로보암은 이용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면서 순종과 희생을 율법주의로 매도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 교회는 금송아지가 세워진 북방 이스라엘 교회이다.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구원도 약속해 주는 복음, 이생과 내세에서 모두 성공과 축복을 약속해 주는 복음, 이것이야말로 북방 이스라엘 교인들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을 수 있는 복음이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미끼를 던졌더니 남방 유다의 여호와의 전에 가서 예배드리려고 했던 교인들이 그냥 북방 이스라엘에 주저앉게 되었다.
그런데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세워지면 반드시 함께 따라서 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교회의 세속화와 축제 예배이다! 금송아지 신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경건하고 조용히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박수를 치고 드럼과 기타를 치면서 발을 구르게 된다. 어떤 재림교인들은 이렇게 항의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 말씀은 금송아지가 세워졌다고 했지 어디 북방 이스라엘 교인들이 축제 예배를 드렸다고 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선지자와 왕은 다음과 같은 답을 준다.
“그는(여로보암 왕)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왕상 12:28)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금 우상 앞에서 절하고 생소한 형태의 예배 의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선지, 100-101)
분명하다. 금송아지가 세워지면서 생소한 형태의 예배 의식이 함께 따라 들어왔다. 그렇다면 “생소한 형태의 예배 의식”이란 어떤 것인가?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 들어온 금송아지 배도와 생소한 예배 형태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역사 가운데 금송아지가 이스라엘 교회 안으로 들어왔던 때를 찾아보면 된다. 왜냐하면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교회에 금송아지가 들어왔던 적이 언제인가? 출애굽 후 시내산에 있던 이스라엘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들어왔었다.
배도의 책임
다 함께 부조와 선지자 315,316의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하자. “애굽 사람들이 신의 상징으로 존경했던 대상물 중에 황소나 송아지가 있었다. 애굽에서 이런 형태의 우상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하자고 제안했다(이것은 애굽에서 따라나온 잡족의 제안이었음-편집실) …. 그런 위기는 확고부동하고 결단성이 있고 불굴의 용기를 가진 사람 곧 민중의 인기나, 개인적 안전이나, 생명 그 자체보다도 하나님의 영예를 더 높이는 사람을 요구했다. 그러나 현재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이런 성격의 인물이 아니었다. 아론은 무기력하게 백성들에게 항의했다…. 아론은 자기 자신의 안전을 염려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당히 일어서지 못하고 군중의 요구에 굴복하였다…. 그는 이것들(백성들이 가지고 온 금-편집실)을 가지고 애굽의 신들을 모방하여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교회에서 권위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의 욕망에 굴복하여 그들이 범죄하도록 놔두는 우유부단한 아론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은 잡족이지만 그것을 만든 장본인은 이스라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아론이었다. 아론은 ,진리와 하나님의 요구를 분명하게 알지만 교인들의 인기와 교회에서의 자신의 입지 때문에 배도를 인정하거나 묵인하는 지도자를 상징한다. 교인들에게 항상 듣기 좋은 말만 하기 원하는 사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해가 오면 입을 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아론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잡족(섞인 무리)과 가라지는 모든 교회에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회 안에 배도를 들여오려고 그것을 강권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교회가 배도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교회는 배도를 받아들이고 어떤 교회는 그것을 거절한다. 왜 그런가?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아론과 같은 사람이 지도자로 있는 교회는 배도를 받아들이고 모세와 같은 사람이 지도자로 있는 교회는 배도를 거절한다. 교회 안에 배도가 들어오는 이유는 술 먹고 담배 피며 진리를 모르는 교인 때문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분명히 알고 있지만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입지를 중요시하는 사람 때문에 배도가 들어오게 된다.
축제 예배
다음과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생소한 형태의 예배”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다.
“모세는 증거의… 판(십계명)을 들고 여호수아와 함께 산에서 내려올 때 금송아지 주변에서 예배드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 그것은 환락의 소리였다 …. 이는 승전가도 아니요 패하여 부르짖는 소리도 아니라 나의 듣기에는 노래하는 소리로다 진영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그들은 백성들이 우상의 주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애굽의 우상 숭배적 축제를 모방한, 이교적인 방탕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엄숙하고 경건한 예배와는 얼마나 다른가! 모세는 너무나 놀라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는 방금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 있는 데서 왔으며 비록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대해 경고를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이처럼 무서운 타락의 장면을 보고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분노는 불처럼 뜨거웠다. 백성들의 범죄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나타내 보이기 위하여 그는 돌비를 내던졌다. 그러자 그것은 백성들의 목전에서 깨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깨뜨린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들과 세우신 그분의 언약을 파기하셨다는 것을 나타냈다.” (부조, 319-320)
모세가 축제 예배의 광경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것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축제 예배를 보면서 나타내는 반응이다. 모세가 십계명 돌비를 던져서 깨뜨린 것은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세워 놓고 축제 예배를 드렸기 때문이다. 아론과 같은 지도자는 이런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 교회 안에 금송아지 신, 돈의 신이 들어와서 조용히 예배드리던 사람들이 갑자기 박수치며 드럼과 기타로 축제 예배를 드릴 때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파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어떤 재림교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금 재림교회가 축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금송아지와 같은 우상은 어떤 교회에도 없다.” 구약 시대에는 눈에 보이는 금송아지가 세워졌지만 마지막 시대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금송아지가 세워졌다.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복음에는 축제 예배가 발붙힐 자리가 전혀 없었다.
“인디애나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대들이 묘사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직전에 있을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셨다.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 소리가 들리며 춤추는 광경을 재연할 것이다.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없게 된다. 그런데 저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3 가려, 36)
화잇 부인이 이 글을 기록했을 때의 재림교회는 매우 조용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던 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화잇 부인은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직전에 재림교회 안에 축제 예배가 들어올 것이라는 예언을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분명한 경고가 100년 전에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축제 예배라는 강력한 파도가 재림교회를 덮치고 있다. 지금 재림교회는 북방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다!
축제 예배는 금송아지를 가운데 모셔 놓고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금송아지가 없으면 축제 예배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교회가 축제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 교회 중앙에 금송아지가 세워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교회 안에 금송아지 신이 들어오면 항상 교회가 가지고 있던 순수한 복음은 변질된다. 그래서 남은 교회의 복음이 금송아지 복음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금송아지 복음이란 재림교회가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순종과 희생과 극기 대신에 피상적인 믿음과 값싼 은혜를 가르치는 복음을 말한다. 그것은 새로 들어온 복음인데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신신학이라고 부른다.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다음과 같이 반복해 왔던 사실을 …. 초대 기독교회를 세운 열두 제자와 사도들이 죽은 후에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복음이 들어옴으로써 교회가 옛 것을 지키려는 사람과 새 것을 받아들인 사람들로 나누어졌던 것처럼, 종교 개혁자들이 죽은 후에 그의 후예들이 새로운 복음을 개신교회 안으로 들여옴으로써 개신교회는 분열에 분열을 거듭했으며 결국에는 그들의 조상들이 가졌던 정신과 사상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고 종교 연합 운동에 앞장 서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역사는 재림교회에서도 정확하게 반복되고 있다. 화잇 부인과 재림교회 선구자들이 사라진 후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복음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지금 재림교회는 화잇 부인과 선구자들이 세웠던 옛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새 것을 받아들인 사람들로 나누어지고 있다.
복음 안에서 참된 자유를 맛보지 못하고 율법의 종으로 살던 교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다 지쳐서 연약해진 신자들에게 북방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이 금송아지 복음을 소개하자 수많은 교인들이 그것을 붙잡았다.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면서 더 이상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급속하게 세속화되었고 급기야는 축제 예배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들이 지금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제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서 세 번째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세 번째 일어난 일 : 예배의 원칙이 무너지고 가정이 세속화됨
왕상 12장 29,30절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숭배함이더라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세 번째, 북방 이스라엘 교회는 편리함을 추구한다. 예배드리기 위하여 먼지 나는 먼 길을 걸어서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예루살렘의 여호와의 전은 하나이어야 하는데,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두 개를 벧엘과 단에 만들어서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서 가까운 곳에서 예배드리도록 하였다. 북방 이스라엘의 특징 중의 하나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정신이다. 무엇이 진리이고 원칙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쉽고 편리한지를 생각하는 것이 북방 이스라엘의 정신이다. 경건한 예배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에 편리하고 쉬운 예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북방 이스라엘의 태도이다.
예배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정신이 들어오면서 각 마을마다 산당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저가 또 산당들을 짓고” (30절) 금송아지 두 마리가 들어오니까 북방 이스라엘 동네마다 산당이 생겼다. 교회 안에 금송아지가 세워지면 교인들의 가정에 산당이 세워지는데 금송아지 새끼들이 그 속에 들어가 앉아 있게 된다. 가정마다 금송아지 새끼들이 들어와 있으니 금송아지 복음대로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서 세 번째로 일어난 현상이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 네 번째로 생긴 일은 무엇인가?
네 번째 일어난 일 : 제사장직분이 변질됨
다음에 읽는 이 말씀은 재림교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북방 이스라엘의 정신을 갖고 있는 교인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징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왕상 12장 31절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여로보암은 복음을 바꾸고 예배를 바꾼 다음 네 번째로 제사장을 바꾸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 레위 자손만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제사장이 되었다.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사람들이 제사장직을 맡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갖고 있는 독특한 진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제사장들이 교회 안에 크게 늘어나고 그들에 의해서 교회가 움직여질 때 교회는 위기 가운데 있는 것이다. 제사장으로 부름 받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 제사장직을 맡아서 봉사를 할 때는 위기의 시간이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 성소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은 레위 지파의 남자였는데 그들은 스스로 일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대신 다른 지파로부터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받았다, 신약 시대에 와서 영적 레위 지파는 누구인가?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목사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십일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이후 제사가 시작되고 십자가까지 제사장은 항상 남자였으며, 열두 제자와 사도 시대 이후 지금까지 장로와 목사는 항상 남자였다. 인류 역사 6천 년 동안 지켜져 오던 제사장 직분과 예배에 관한 원칙들이 갑자기 깨어지고 있다. 몇 해 전부터 재림교회에 여자 사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다.
원래 금송아지는 애굽의 신전에 있었는데, 이방 신전에는 반드시 여사제가 있었다. 금송아지+축제 예배+여자 사제는 한 세트이다. 이것은 따로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머지 두 개는 항상 자동으로 따라 들어오게 된다. 금송아지 복음을 받아들인 개신교회의 각 교파에서 이것은 그대로 반복되었는데 그 순서까지 정확하게 반복되었다. 먼저 그들의 선조들의 복음과 신앙이 세속적으로 변질되었고 이어서 교회 안에서 박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여자 장로와 여자 목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재림교회에서도 이러한 배도는 순서에 맞추어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재림교회에서 여자 사제를 안수하는가? 여자 장로가 생기더니 여자 목사가 생겼다. 박수와 율동을 하면서 예배드리고 여자 장로와 여자 목사가 안수하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북방 이스라엘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남은 교회의 진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 “보통 사람들”이 제사장으로 받는 일이 크게 증가하더니 이제는 여자 장로와 여자 목사까지 시작되었다. 재림교회는 북방 이스라엘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제사장 직분을 맡기 시작하는 것은 북방 이스라엘 교회 안에 남아 있던 신실한 백성들에게 있어서 남방 유다 교회로 도망하라는 신호가 되기 때문이다.
“(여로보암) 왕은 그의 영토 안에 살고 있는 레위 사람들을 권고하여 벧엘과 단에 건축된 사당에서 제사장으로 봉사하게 하려 하였으나 이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런 고로 그는 할 수 없이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 이러한 광경에 놀란 충성스러운 많은 사람들은 대다수의 레위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요구에 일치하게 예배할 수 있는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다.” (선지, 101)
남방 유다로 도망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했는가? 하나님의 요구에 일치하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참된 레위인들이 북방 이스라엘을 빠져나와 남방 유다로 도망하였다. 보통 사람들이 제사장이 되기 시작하는 것은 남방 유다에 있는 여호와의 전으로 도망하라는 사인이 되었다.
이때까지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는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영적 분별력이 없어서 여로보암 왕의 기만에 속아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우고 새로운 예배 방식을 받아들이는 동안 “좀 이상하다”하면서 “그러나 저 분들도 하나님의 종들인데” 하며 마음에 의문을 갖고 지도자들을 따라다녔지만 레위족이 아닌 “보통 사람들로” 제사장을 안수하는 모습을 보면서 즉시로 북방 이스라엘 교회를 떠나 남방 유다로 오게 된다. 지금은 남방 유다로 도망쳐야 할 시간이다! 여호와의 전이 있는 진리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도망해야 하는 시기이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는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섯째로는 어떤 일이 북방 이스라엘 교회에 생길까?
다섯 번째로 생기게 될 일 : 예배일을 바꾸는 배도
왕상 12장 32,33절 “팔월 곧 그 달 십오일로 절기를 정하여 (남방)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 지은 산당의 제사장은 벧엘에서 세웠더라 저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정하고 제사드리는 날을 바꾸는 것이 무엇인가? 예배일을 바꾼다는 뜻이다. 이것이 북방 이스라엘 교회의 마지막 배도이다. 이것으로서 은혜의 시간은 끝이 난다. 여로보암은 결국 예배드리는 날까지 바꾸게 된다.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이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살피지 않고 제사장을 주다가 결국에는 제사드리는 날까지 바꾸면 그것으로써 은혜의 시간이 끝나게 되고 멸망에 이르게 된다.
왕상 13장 33,34절 “여로보암이 이 일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
이것이 북방 이스라엘 교회의 종착역이다. 이것은 아직 재림교회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이다. 이 예언은 언제 성취될 것인가? 일요일 휴업령이 강요되는 때가 되면 재림교회 안에 있는 북방 이스라엘 교인들은 예배드리는 날짜까지 일요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 짐승의 표를 받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재림교회 안에 있는 북방 이스라엘 교인들이 맞게 될 운명이다.
“현대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 거의 모두가 늦은 비 성령을 받기에 전혀 부적합하다.” (1T, 466) 참으로 두려운 예언이다. 거의 모두가 늦은 비 성령을 받지 못하면, 거의 모두가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하게 되고, 거의 모두가 하나님의 인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거의 모두가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말이 된다. 거의 전부가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말은 거의 전부가 예배일을 바꾸는 배도에 가담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북방 이스라엘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마지막 운명이다. 유대교회가 4천 년 동안 진리를 보관해 왔지만 메시아를 거절하고 오직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 다락방에 모여 이른 비 성령을 받았던 역사는 마지막 시대에도 재림교회에 그대로 반복된다. 재림교회가 100여 년 전에 예수 증거와 계명을 지키는 남은 교회로 출범했지만 거의 모두는 하나님의 인을 받고 늦은 비 성령을 받는 일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거의 모든 재림교인들이 늦은 비를 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들이 일요일을 지킴으로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는 말이다.
자, 이제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금까지 초대 기독교회의 역사가 개신교회와 재림교회 안에서 똑같이 반복되고 있는 모습을 살펴보았으며, 하나님의 남은 교회였던 이스라엘이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나누어졌던 역사를 통해서 재림교회가 영적으로 북방 이스라엘 교회와 남방 이스라엘 교회로 나누어지는 과정과 순서를 살펴보았다.
지금 재림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에 의하여 북방 이스라엘 교회와 남방 이스라엘 교회로 나누어져 가고 있다. 지금은 나 자신과 우리 가족은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시간이다. 북방 이스라엘인가 남방 유다인가?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지금은 우리 모두 이 질문에 대하여 내 자신과 하나님께 정직한 대답을 드려야 할 때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깨어 일어나 남방 유다에 있는 여호와의 전으로 도망쳐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를 인도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