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lect Page

교회 안에 있는 두 그리스도 제 2부

마샬 그로스볼  

 지난 11월호에서 우리는 재림교회 안에 두 그리스도와 공존하는 사실에 대해 언급을 시작했다. 한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 이전의 본성으로 죄인들을 대신하기 위한 대체물로 왔고, 다른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 후의 본성을 가지고 우리의 대체물 뿐 아니라 우리의 본이 되기 위해 오셨다. 이 두 그리스도는 대단한 차이가 있는데 단적으로 말해 하나는 거짓 그리스도요 다른 하나는 참 그리스도이다.

 어떤 이들은 이 차이를 단순히 어의학적인 문제로 간주하여 말하기를 “신학적 차이는 잊어버리고 연합하자. 연합하자” 한다. 그리스도의 본성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대결의 양편에는 많은 신실한 재림교인들이 가담하고 있고, 또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키 위해 서로 형제를 사랑하며 기도와 성경연구에 몰두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려니와 절대로 이것이 어의학적 문제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이 참 안식일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대결을 보더라도 문제의 양편에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허다하게 가담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단순한 어의학적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참되고 영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연합은 오로지 우리가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합의를 볼 때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성, 인성 및 그의 사명을 논의할 때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논하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다……이것을 우리는 연구해야 한다”(가려뽑은 기별 1권, 244)고 하였다.

그리스도와 구속의 경륜

 그리스도의 본성에 고나한 견해는 구속의 경륜에 대한 개념 전체를 지배한다. 많은 신학자들이 비록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견해 차이는 있을망정 이 사실에 대해서는 서로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다. 조직 신학자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본성이 아담의 타락 이전의 본성과 동일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이기는 승리의 생애는 불가능한 것으로 믿기 때문에 그러한 개념을 믿는 신앙을 “완전주의적”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완전주의”를 믿는 자들은 “율법주의자들”로 낙인이 찍힌다. 이들 신학자들은 대체로 구원에 필요한 것은 칭의(Justification)가 그 전부라고 믿으며,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큰 죄 즉 사회적으로 용납이 안되는 죄들만 이기도록 하라고 격려한다. 저들은 죄를 짓더라도 그 죄인의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이 신학자들은 흔히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토록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once-saved-always-saved)”는 이론이나 그와 유사한 주장을 믿는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의 본성을 쓰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신학자들은 구속의 경륜에 대한 신앙도 그들의 것과는 정반대이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생애를 사는 동안 우리의 죄를 지적해서 알게 해주시며 그때마다 그 죄를 이길 힘도 함께 주신다고 믿는다. 그들은 칭의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구비자격이라 믿으며, 죄를 이기는 것 그 자체로서 하늘에 들어가도록 보장을 얻는 것이라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죄를 이겨야 한다는 조건부로 주어진다고 믿는다. 죄를 이기는 승리는 일순간의 경험이 아니고 매일 매일 순간 순간의 과정이다. 이들은 대체로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토록 구원을 상실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속적인 관계에 의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우리는 기독론과 구원론의 대표적인 두 가지 견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재림교회 안에 급속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제 3의 이론이 하나 있는데 이것을 잠시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것은 전술한 두 견해를 혼합 절충한 이론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하기 이전의 본성을 쓰고 오셨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데스몬드 포드의 기독론을 받아들여 결론만 정반대로 제시하는 이론이다. 우리가 죄를 완전히 이길 수 있는 이유를 저들은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이겨주시기 때문이라고 하며, 인간의 죄를 이기려는 노력은 “자기의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는 무모한 노력”이라 간주한다. 인간일 그리스도와의 신앙적 관계를 가지면 죄를 범하려는 유혹은 없어지고 오직 우리의 신앙적 관계를 단절하려는 유혹만이 있을 뿐이란 것이다. 요컨대 우리도 아담의 타락 이전의 본성-또는 그와 매우 흡사한 본성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금세기 초에 인디아나에서 머리를 들었던 거룩한 육체 운동(Holy flesh movement)과 유사한 것인데 그때의 이론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의 주창자들은 이미 영구한 새 본성을 받았다는 것이었고 오늘의 이론가들은 이 새 본성은 매일 신앙생활의 과정을 통해 받아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본 연구에서 우리는 먼저 성경 말씀을 살펴보고 다음에는 예언의 신의 기록을 검토해보려고 한다. 본 연구는 성서적 구원론의 올바른 이해를 결정적으로 도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아니 영원한 나라에 가서라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을 완전히 깨닫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에 관한 성서적 기록을 거부한다면 성서적 구원론도 역시 거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신약성서에 기록된 바울의 글을 보면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본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롬 1:1-4).
 이와같이 바울은 보편적인 유대사상을 떠나 대담하게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그의 글 첫 부분에서 선언한다. 예수는 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스도의 본성중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인성론이다. 그분의 인성이 지금의 우리가 타고난 그 인성과 같은 것이었나, 아니면 아담이 창조되었을 때의 인성과 같은 것이었나? 바울은 그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 “혈통”이란 족보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즉 다윗의 씨(Seed)로 났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다윗의 혈통에서 인성을 유전 받아 태어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9에서 사람이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씨” 즉 그의 신성을 받아 그 신성이 우리 속에 거하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해준다.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벧전 1:23) 이로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벧후 1:4)된 것이다. 인간이 거듭날 때 우리는 영적인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의 씨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씨에서” 태어나셨다.

 신약성서에서 “육신”은 정욕과 죄가 자리한 본거지이다. “육신”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타락한 인간성, 즉 유혹에 약하고 잘 넘어가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처럼 “육신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 5:19-21). 육신의 일들 중에 하나도 선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고, 하나같이 나쁜 것 뿐이다. 타락 이전의 아담의 육신의 일들은 물론 선한 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일단 타락하자 성경이 지적하는 그 “육신”이라 하는 인성은 죄의 종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인간 가족 중에 그 밖에 다른 인성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타락한 아담의 후손 이외에는 다른 혈통의 인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은 첫 아이를 낳기 전에 이미 타락했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타고 났다면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혈통에서 난 것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께서 태어나신 혈통이 타락 이후의 아담의 계보에서 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가 “다윗의 자손”임을 명백히 한다. 다윗은 실로 고백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말했던 것이다.

 정말 예수님은 인간 조상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받아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그밖에 받아가지고 나올 다른 인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해 죄를 이겨주신 그 위대한 본은 바로 그 타락한 인성을 쓰시고 이루신 업적이다. 그 때문에 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 8:3) 하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이렇다. “인간이 의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랑의 율법을 주셨으나 인간이 타락한 후 육신적 요구 즉 죄악적 성형에 종이 된 연약한 인간성의 소유자가 되었기 때문에 율법이 시도하는 바가 실현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시기 위해 자기 아들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시되 다른 모든 인생들처럼 죄된 본성을 가진 인간의 육신을 쓰고 살도록 출생시키셨는데 그는 자기 육신이 가지 죄악적 세력이 꼼짝도 못하도록 제압했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생을 사실 수가 있었다. 우리도 그의 본을 따라 살면 비록 죄된 성향으로 가득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지만 예수님처럼 육신의 성향을 따라 거기에 지배받으며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의 지배에 즐거이 따라 살면 우리도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로마서 8:3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신학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모양”으로만 왔지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왜 예수께서 타락한 죄된 인간의 모양으로 오셨는가? 그는 인간의 죄된 본성을 극복하고 이기는 길을 보여 주심으로 의로운 율법의 요구가 타락하고 죄된 본성은 타고난 우리 속에도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해서였다(롬 8:4).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는 자들이 다 하나이라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1,17,18).

 로마서 8:3은 예수께서 쓰고 태어나신 인성이 바로 타락한 인성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이같이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을 배척하는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곡해하고 망가뜨릴 연구에 힘을 써왔다. 그들이 내놓는 주장이 무엇인가? 그것은 “모양으로”란 말을 비틀어서 만든 엉뚱한 주장이다. 즉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만 왔지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내놓은 것이다. “모양”으로 번역된 희랍어는 “호모이오마(Homoioma)”란 말이다. 영어로 번역할 때 할 때 이것은 “likeness”란 말로 번역되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바울의 의도가 모양은 비슷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말했을 것이라 주장한다.

 “호모이오마”란 말은 바울의 글 빌립보 2장에도 나타나는데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라고 8절에 기록되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실제로 사람이 되어 우리 속에 사셨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다는 말인가? “호모이오마”는 “같다”는 뜻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라고 못박고 있다.

 우리와 같이(호모이오마) 예수께서도 타락한 죄된 성향을 가진 인생으로 태어나셨다. 우리와 같이 그분도 다른 힘 즉 신령하고 거룩한 본성에 의지함으로써만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와 같이, 거룩한 생애를 살기 위해서 그분은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셨다. 그분은 우리처럼 죄의 결과로 약화된 본성을 타고 나셨을까? 물론 그랬다. 그러나 그의 신성은 바로 천사가 말한 “나실바 거룩한 자”(눅 1:35)였으며 출생시부터 거룩하신 분이시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죄를 범한 일이 없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본성, 즉 영적인 본성과 육적인 본성 – 이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셨다. 출생시부터 그의 육적인 본성은 영적인 본성의 지배하에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는 “육신”의 소욕을 계속 십자가에 못박아 두었기 때문에 단 한번도 그는 육신적 소욕에 마음으로라도 굴했던 일이 없었다. 우리도 중생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본성을 받으면 그와 같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육신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새로남(중생)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롬 8:13, 요 3:3 참조). 예수께서는 이것이 가능함을 효시하셨다. 우리와 같은 타락한 인성을 쓰고 오셔서 죄를 이기심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아담의 자손이 승리하고 영생을 유업으로 받을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5:8-9).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예수께서는 우리가 그를 믿는 믿음을 통해 받을 수 없는 어떠한 성품이나 능력도 소유했거나 사용한 일이 없었다. 그의 완전한 인성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예수께서 하나님께 순복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순복하면 소유할 수 있다”(DA,664). 예수께서는 우리의 본성을 받아가지고 세상에 오셔서 승리하셨으므로 우리도 그와 같은 인간의 유전적 제약 속에서 승리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타락한 인성의 제약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의 비결을 보여주시며 자기 자신도 우리와 똑같은 입장이 되어 승리하는 방법을 보여주셔야 했다. “이 위대한 구속사업은 구세주께서 타락한 아담의 입장을 취함으로서만 수행할 수 있었고……그 결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 인간이 각기 제 나름대로 원수를 이기게 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가! 당신 자신을 비하시키신 얼마나 놀라운 겸비이신가! 영광의 왕께서 타락한 인간이 되어 오시겠다고 자신을 낮추시다니! 그분은 아담의 발자취를 따라 자신의 발걸음을 맞추시려 하셨고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기로 하신 것이다”(Confrontation, 17,18).

사람들로 죄를 이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기만하는 적그리스도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을 취하신 것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증오하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성을 쓰신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를 그의 지배권에서 해방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단은 이 위대한 신약의 가르침을 무너뜨리기 위해 방안을 모색했다.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지 않다고 믿도록 유도할 수만 있다면 인간을 계속 자기의 수중에 움켜쥐고 있을 수 있음을 그는 간파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이 인류 타락 이전의 인성이었다고 믿는 신학자들은 거의 누구나 우리가 지금도 사단의 지배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다. 저들은 인간이 죄를 이기고 승리한다는 사상에 대해 조소한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이 신학자들은 인간이 죄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항상 사단의 종으로 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바로 사단의 목적인 것이다.

사단의 기만

 사단의 주장은 거짓이다.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이론만으로가 아니고)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6).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신학자든 목사든 누구든지) 아무도 너희를 미혹(기만)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냥 의롭다고 칭함이나 받는 자가 아니고)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 3:5-7). 분명히 요한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단한 기만과 배도가 있을 것을 내다보고 미리 경고한 것이다. 성경의 경고는 까닭없이 주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아무도 우리가 알고 있는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도록 기만하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한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 3:8). 요한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대적 기만이 있을 것을 경고함과 아울러 사단에게 이용당할 배도세력과 그들의 행위가 어떠할 것을 구체적으로 밝혀준다. 사단이 사용할 세력은 예언이 말하는 대 적그리스도의 세력으로서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속여 죄는 이길 수도 없고 이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칠 터인데 그 방법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었다는 진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으로 시도할 것이 예언되어 있다. 요한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2-4).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영이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니다. 이야말로 영을 구별하는 절대적이고 분명한 식별방법이다. 인간들은 혼동되는 수도 있으나 영들은 혼동이 없다. 선지자들도 이것으로 시험해볼 수 있다. 많은 거짓 선지자나 교사들이 예수께서는 살과 뼈를 가지고 계셨다. 피로를 느끼셨다. 우리처럼 시장해서 음식도 잡수셔야 했다는 등의 사실을 시인하나 마귀나 그의 천사들은 예수께서 타락한 인성으로 오셔서 죄를 이겼다는 사실을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들의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며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인류는 자기의 속민이며 노예란 것을 주장할 뿐이다.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영이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영을 식별하는 절대적인 표이다

 “육체” 또는 “육신”이란 신약용어는 타락한 인성을 뜻하는 말이다. 모든 신약의 저자들이 그런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였다. 요한 역시 요한일서에서 그런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타락한 인성)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요일 2:16).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타락한 인성)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타락한 인성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 그는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살지 말아야 한다고 할 때 문자 그대로의 살이나 뼈를 말하고 있거나 음식이나 휴식을 필요로 하는 어떤 약해진 상태를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구원을 위한 요구조건이었다면 우리는 모두 맥이 쭉 빠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말한 다음의 것과 일맥상통한 것이다. “내 속에 곧 내 육신(타락한 인성)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18-23). 우리는 오직 “영으로써” 즉 성령의 힘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수 있는 것이다(롬 8:13). 바울의 “육신”은 연약하고 이기적인 본성 바로 그것으로서 그것만 가지고서는 죄의 호소를 물리칠 힘이 없었다. 예수님의 육신도 그와 같은 육신이었다. 바로 그 육신을 주님은 십자가에 날이면 날마다 아니 시간마다 못박아야 했다. 그 결과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그의 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성품을 이루셨다. 이 길만이 그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는 길이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성령의 지도 아래 새로운 생애를 살아야 한다. 이 새 생애는 로마서 6장의 침례로 잘 묘사되어 있다.

 요한일서 4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적그리스도의 엄청난 세력은 온 마귀들과 합세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육신을 쓰고 우리의 인성을 가지고 오셨다는 분명한 가르침을 반대한다. 이 세력은 소위 “무염시태설”이란 용어를 꾸며내어 예수는 타락하지 않은 여인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신약교회 배도의 시작이었으며, 계시록에 언급된 짐승의 세력을 후일에 형성하기에 이른다. 여하튼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예수의 인성이 타락하지 않은 인성이라면 그가 타락하지 않은 여인으로부터 출생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때문에 마리아는 죄가 없는 여인이라 주장하는데 논리적으로 그래야 마땅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러자면 마리아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아담에 이를 때까지 죄없는 타락하지 않은 족보를 꾸며 놓아야 마땅할 것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오신 것은 “실로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히려 (타락한)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하였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식별하는 표식중의 하나는 그 세력이 예수의 육적인 인성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해서 참 선지자인지를 입증하는 하나의 표는 그가 예수의 인성을 우리의 인성과 같은 것으로 가르치는가를 검증해 보면 알 수 있다. 엘렌 화잇은 여기에 합격하는가?

 물론이다. 재림교회의 신학자들 중 허다한 사람이 사도 요한이 경고한 그 주장에 동조하다가 결국엔 예언의 신마저 내버리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타락 이전의 인성론을 견지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아직도 마귀와 죄의 종으로 묶어두는 이론이기 때문에 예언의 신을 믿고 옹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너무도 분명하게 이것을 밝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단은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인간이 순종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기만을 폭로하신다. 그는 우리처럼 인간이 되어 순종의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기 위해 그는 스스로 우리의 본성을 쓰시고 인생을 체험하셨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 만일 우리가 무엇이든 예수께서 당하지 않으신 것을 담당하게 된다면 그걸 가지고 사단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을 위해 충분치 못한 것이라 주장할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당면하는 모든 시련을 당하고 이기셨다. 그는 우리가 자유로이 받아서 사용할 수 없는 어떠한 능력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신 일이 없다. 하나의 인간으로서 그는 유혹을 대면했고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그것을 이겼다…… 신성으로 하나님의 보좌를 붙드신다”(시대의 소망, 24).

 예수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을 통해 타락한 인성의 아우성이 신의 성품의 권세 앞에 여지없이 잠잠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는 보통 인간들처럼 자기의 성품이 어떠한 생각이나 감정에 의해 죄악적 경향을 계발하도록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는 타락한 인성을 소유했으나 그 인성은 허다한 고난을 통해 계속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다.

하나의 로켓은 중력에 끌려 땅으로 떨어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일단 엔진에 점화만 되면 중력의 작용은 상실되고 만다. 그 순간부터 로켓은 위로 치솟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예수님이 그러했고, 우리도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연결된 것처럼 순감마다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투쟁을 하지 않게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분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에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에 그 유혹들을 이길 터인데 주의 능력으로 반드시 이기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는 야곱이 전에 보았던, 밑바닥은 지상에 두고 꼭대기는 하늘 문, 곧 영광의 문어귀에 이른 그 사다리이시다. 만일 그 사다리가 지상에 도달하는 한 개의 계단에 이르러서 쓰러졌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오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성정을 쓰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가 당신의 성정을 취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 위함이었다. 예수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 8:3) 오셨으나 죄없는 생애를 사셨다”(시대의 소망 2권, 27).

 “「그리스도는」스스로 고통당하는 인성, 죄로 비천해지고 더러워진 인성을 쓰셨다”(엘렌 화잇, 본교 성경주석 4권, 1147).

 “율법을 유린당한 하나님의 신성과 율법을 유린한 아담의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다”(상동 7권, 926). 예수께서 오신 것은 아담이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이 있었더라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우리에게 특별한 도우심이 있으므로 죄를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