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의 종교 자유
마샬 그로스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큰 소원은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엡 5:27)는 순수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를 소유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교회의 청지기로 삼으셨고, 각 교인으로 하여금 교회의 영적인 면을 수호하도록 부르셨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25에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경고하셨다.
여기 주님께서 교회를 순결하게 지키시고, 가라지가 교회의 밭을 채우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네 가지 기본적인 방도가 있다:
1) 교회는 새로운 교인을 교회로 받아들일 때에 그들을 사랑스럽고도 현명한 방법으로 돌봐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교인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지망자로 나설 때 우리는 그의 생애에 나타난 열매를 시험해야 하되, 그의 동기에 대한 책임은 그 자신에게 맡겨야 한다……왜냐하면 사단이 거짓 형제들을 교회 안으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그럴듯한 계획들을 세우기 때문이며 그는 그런 자들을 통해서 더욱 성공적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복음전도, 308).
2) 어떤 교인에게 드러난 죄가 있을 때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사랑과 겸손으로 그의 마음과 행습의 변화를 호소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범죄한 자의 죄로부터 교회가 정결해 지든지 변화될 때까지 마태복음 18:15-17의 단계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죄악이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 의해 간과된다면, 하나님의 노하심이 그들 위에 내릴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한 몸으로서 그 죄악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과거에 당신의 백성을 취급하심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교회를 잘못으로부터 순결하게 하실 필요를 보여 주신다. 한 죄인이 하나님의 빛을 전 회중으로부터 차단할 흑암을 퍼뜨릴 수도 있다”(3T, 265; 증언보감 1권, 343).
3) 과거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순결케 하시기 위해 심판(형벌)을 보내셨다. “엘리야[가]……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약 5:17). 신약시대의 교회가 성화되지 못한 두 교인인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의해 위험에 처해 있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들을 치심으로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고]……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행 5:11, 13)더라. 우리 교단의 역사에서도 교회가 배도 가운데 휩쓸리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배틀크릭에 있는 우리 교단 총본부에 불의 심판을 보내셨었다. “밤의 계시 가운데서 나는 배틀크릭 위에 걸려있는 불의 검을 보았다. 형제들이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지하게 다루신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을 내심으로 경고를 주신 후에 우리 백성의 지도자들이 과거에 했던 것처럼 자신들을 높인다면 다음번엔 그들의 몸을 취하실 것이라는 것을 그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분이 살아계신 것이 확실한 것처럼 그분께서는 그들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이다”(The Publishing Ministry, 171; 5T, 210-212도 볼 것).
4)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곧바른 증언의 외침을 통하여 교회를 정결케 하시려고 계획하셨다. “하나님의 영의 탐색하는 증언은 교회의 부패를 막기 위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법대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스라엘로부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분리해낼 것이다. 잘못은 잘못으로 불려져야만 한다. 탐욕적인 죄악들은 그 이름이 응당 불려져야 할 그대로 불려져야만 한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께로 더 가까이 나와야 한다…그때에 그들은 참 빛 가운데서 죄를 보게 될 것이며, 그 죄가 하나님의 목전에서 얼마나 가증한 것인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명백하고도 곧바른 증언이 교회 안에서 살아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가 고대 이스라엘이 저들의 범한 죄들로 인해 저주를 받았던 것처럼 당신의 백성들 위에 임하게 될 것이다”(5T, 676; 강조는 필자가 한 것임).
이런 것들이 교회를 정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참된 방법들이다. 그러나 교회를 정결케 하는 방법과는 달리 그 정반대의 결과를 낳는 가짜 방법이 있다. 과거시대를 통하여 그 방법은 교회를 보존하는 가장 잘 쓰여 지는 방법이었는데, 그것은 개혁을 일으키기 보다는 항상 배도로 이끈 교회의 법과 박해이다.
교회가 그 교인들을 조종하기 위하여 그 교권제도적인 권세를 행사하여 교회질서를 유지하려 할 때마다 예외 없이 항상 배도와 박해가 뒤따랐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했다.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은 교인들에게 대하여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회당 밖으로 쫓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요 9:22 참조). 그러나 그러한 지도력에 의한 조종이 교회를 순결하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정반대의 결과만을 가져왔다. 교권제도적인 조종은 교회를 죄와 타락으로부터 보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교회를 정결케 하기 위해 보내신 침례 요한, 당신의 아들, 다른 사도들의 곧바른 증언을 받지 못하도록 하였다. 사실 그러한 교권제도는 교회를 “정결케”하기 위해 일하다가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였다. 너무도 강력하게 교권제도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곧바른 증언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은 먼저 그들의 생애에서 교권제도의 세력을 부수는 것이었다. “유전을 존중히 여기고 타락한 제사장에 대한 저들의 맹목적 신앙을 통하여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다. 이 사슬들을 예수께서는 깨뜨리셔야만 하였다. 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바리새인들의 성격을 더욱 더 충실히 폭로시켜야만 하였다”(시대의 소망 3권, 68). “얼마 동안 갈릴리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음으로써 그 지방에서는 교권제도의 권력이 깨지는 것처럼 보였었다”(상동 2권, 149).
암흑기 동안에도 동일한 경험이 자행되었다. 교회가 중세기 동안에 큰 박해를 몰고 오면서까지 행사했던 권세보다 더 큰 권세를 행사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그 지도자들을 통하여 더 큰 권력을 행사하면 할수록 배도는 더욱 깊어졌다. 개신교회의 개혁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중봉사시에 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백성들을 누르는 교권주의의 세력을 부서뜨리려 노력했다. 맹목적으로 교회 지도층에 대한 존경을 표해온 자들은 마치 아이가 자신의 구명조끼를 붙들고 있으면서 개신교의 개혁운동을 거절하는 것과도 같았다.
“위클립은……국회에서 두려움 없이 교직[권]정치를 비난하고, 교회가 시인한 무서운 악폐들을 혁신할 것을 요구하였다”(쟁상, 140). “그 결과 승려계급[교권주의의 지도자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복음 사도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대쟁투, 109). 독일의 개혁 운동 후에 교회는 개신교의 지도자들에게 교권제도를 다시 한 번 받아들이도록 위협하거나 감언이설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교의 교권정치의 재확립은 필연적으로 옛날의 악폐를 부활시키는 결과가 될 것”(쟁상, 326)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신교와 로마교 사이의 주요한 차이점들 중 하나는 그들이 갖는 교회 구조였으나 오늘날 “개혁 교회들을 교황주의의 교권주의로부터 분리시키는 교리에 관한 무관심이 증대되고 있다……그때는 개신교도들이 양심의 자유에 높은 가치를 두고 간절히 사모하여 샀었던 때였다”(예언의 신 4권, 380). 교권주의는 결과적으로 종교자유를 말살시키고 필연적으로 박해를 가하는 결과를 몰고 온다.
권위의 남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됨을 부인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교회 안에 현명한 행정체제와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있어야 될 것을 인정하셨지만 절대로 모든 부면의 고삐를 인간의 권위에 부여하신 적은 없으셨다. “그[예수님]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 1:8).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권위를 정당하지 않게 행사하려 할 때마다 그들은 교회에 배도를 몰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살후 2:4)는 짐승의 세력이 짓는 죄이다. 이것이 우리가 속한 교회의 위험이 아닌가?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지 않을 것인가?
주님께서는 이러한 위험이 우리 자신의 교회 안에서 발전되고 있음을 미리 보시고 그에 반대하는 충실한 경고들을 보내셨다. 1895년에 주님의 종은 기록했다: “장악하려는 정신이 우리 대회장들에게 확대되고 있다……그들은 로마교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TM, 362). 이러한 상황에 대한 그녀의 권면은 다음과 같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의 형제들을 장악하려 하면서 자신이 지배하려는 권세를 행사하기 위해 권위를 부여받았다고 느낄 때 큰 해나 자신의 영혼의 잃어버림이나 다른 영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한 최선이면서도 유일한 안전한 길은 그를 그 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상동).
신약에 보면 아주 능률적인 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조직은 본질상 교권주의적인 것이 아닌 단순한 조직이었다. 거기에는 조종하려는 것이 협력이 있었다. 바울은 형제들과 협력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나 빌립보, 혹은 그가 방문하는 다른 동네에 교회들을 세우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사실 바울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우려와 가장 엄중한 경고들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교인들이 어떤 바깥의 압력에 의하여 부정당한 조종이 행사될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마지막 여행에서 그는 그가 밀레도를 통과할 때 에베소에 잇는 교회 장로들을 청하였다(행 20:17 참조). 그가 불러 모은 에베소 사람들은 교회 “장로”가 아니라 “장로들”이었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이 장로들은 예루살렘 본부에서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들의 이사회와 위원회에서 마치 교회와 강단이 자신들의 것인 양 교회를 장악하도록 임명받은 전문인들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다! 이들은 지역 교회의 청중들이 뽑은 지역 교회의 장로들이었다(행 14:23 참조). 바울은 지방 교회의 장로들을 만나 다음의 권면을 하였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 20:28-31).
바울이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은 교회 안에 자신들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려 하면서 자신들이 좌지우지하는 세력을 얻는 자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지방 장로들에게 그들이 양떼들의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양떼들을 지배하는 목자가 아니라 그들이 “다 형제라”(마 23:8)는 것을 인식하면서 섬기는 목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이 지방 장로들이 양떼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해야 할 이리들이란 어떤 이리들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오는 모든 이리들이 안에서부터 왔든 밖에서부터 왔든, 혹은 탁월했든 평범했든 그 모든 이리들로부터 교회를 지켜야 했다. 이 문제는 갈라디아에서 일어났던 문제에서 잘 예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목적이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혹은 교회들은 바울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서 그는 극소에 있는 지방 교회들에서 장로들을 선택하는 것을 감독하였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설립된 교회들은 독립된 교회가 아니라 성령의 지도아래 권면을 중시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본부 교회로부터 오는 도움과 성서적인 지침 혹은 주님께서 선택하시는 어떤 다른 원천으로부터 오는 도움과 성서적 지침을 따르려고 하는 분별력이 있으면서도 자치자양할 수 있는 지방조직이었다. 그러나 밖에서부터 이 갈라디아 교회들에서 목회를 하려고 하는 형제들이 왔을 때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이 대사들은 바울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다른 사도들이 가르치는 교리와 정반대의 가르침을 전한다”(Sketches from the Life of Paul, 188)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호의를 얻은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의문의 율법의 준수가 구원에 필수적이니 의문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강조하였다”(상동).
갈라디아에 있는 형제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이들 대표자들에게 큰 존경을 표했음이 틀림없다. 갈라디아인들은 회심하기 이전에 이교의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었고, 그곳에 온 형제들은 태어날 때부터 유대인이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요 형제였던 베드로와 야고보를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이들 대표자들은 갈라디아에 있는 형제들에게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가 야고보에게서 온 대표자들과 함께 외식하며 할례 받지 않은 자들과 함께 먹기를 거절한 것 때문에 안디옥에서 그를 문책했던 일을 상기하였다. 갈라디아인들은 그것이 예루살렘에 있는 대총회 본부에서부터 왔든지 혹은 하늘에 있는 천사로부터 온 것이든지 모든 영향력을 대항하여 진리를 위해 서야 하였다. 갈 1:8 참조.
바울은 갈라디아의 형제들이 교회 안에 배도를 이끌어 들인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대표자들을 받아들인 것에 대하여 꾸짖지 않은 채 놔두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그가 말할 때 “무엇”이 너희를 꾀더냐고 하지 않고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한 말을 유의하라. 진짜 문제가 된 것은 그들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그들의 사고와 행습에 쉽게 영향 받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바울도 이러한 배도의 상황을 명확하게 해야 했다면 장래에 다른 거짓 영향력에 의해 교회 안으로 도입되는 동일한 정도의 악한 배도는 어떻게 막아야 하겠는가? 아니라 “누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했느냐와, 왜 그들이 그러한 바깥의 세력들에 의해 영향을 받을 만큼 약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왜 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단순한 인간 교사들에 의해 그토록 쉽게 영향을 받았는가? 바울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 대해서 동일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겠는가?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고 말했다. 종의 멍에는 단순히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갈라디아 3:1에 나오는 그의 의문에 따르면 이러한 교리 면에 있어서 그들을 흔들리도록 한 거짓 영향력에 묶이는 멍에이기도 했다. 그는 계속 말하기를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이라]”(갈 5:8-13)고 한다. 바울은 교인들이 지도를 위해서 성령보다는 교회 총회나 지도자들을 바라보도록 필연적으로 이끌 교권주의적 체제를 매우 두려워했다. 그의 봉사를 통해 교회들은 전 세계에 흩어진 신도들의 조직의 일부로서의 단순한 조직을 형성하였고,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진실한 대표자들의 회의에 대한 합당한 존경심과 성령에 의해 지도되는 지도자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은 거의 자율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모체 조직을 그저 맹목적으로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 책임질 수 있고 또 생각하는 존재들이 되었다. 그 교회들이 접붙여야 할 모체조직은 인간의 조직이 아닌 그리스도였다. 이것이 하나님의 오순절의 축복이 조직에 돌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순결함은 늘 동행한다. 그 둘은 서로가 분리될 수 없다.
“단순한 조직과 교회 질서는 신약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교회의 연합과 완전을 위해 임명하셨다. 교회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은 지도자로서, 또한 사업의 부담을 수행하는 충고자요 상담자요 돕는 자로서 일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일꾼들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도록 임명되지는 않았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기업인 자녀들을 주관하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만일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지 않은 권세를 가진 위치에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다면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고린도전서 12장과 13장, 사도행전 15장을 연구하도록 하자”(The Paulson Collection, 298).
“ 에서와 다른 곳에서 우리 사업 가운데 들어온 꽤 많은 난점들은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동료 일꾼들을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의 개인적 책임에 관한 오해에 기인한다. 책임을 맡은 인물들은 그들의 공적 지위가 그들로 공직에 있도록 한 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생각하며, 심각한 난점들이 그 결과로 생겨났다……
“여러 해 동안 권리를 행사해 온 대회에 있는 지도자들은 그들의 지위가 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판단과 처지에 따라 사업을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상동, 298, 299).
특별히 교회가 더욱 크게 성장하고 더욱 철저하게 조직되게 되자 엘렌 화잇은 우리 가운데로 들어오는 “왕 같은 권세”를 반대하는 경고를 거듭거듭 하였다. 그녀는 말했다: “지위가 사람을 신으로 만드는 양 발전되어 온 높은 권세는 날로 두렵게 하며, 두렵게 해야 한다. 그것이 어디서, 누구에 의해 행사되든지 간에 그것은 저주이다”(TM, 361).
엘렌 화잇이 편지를 쓰고 교회에 대한 경고를 보낸 많은 지도자들은 처음에 매우 겸손하고도 신실히 주를 섬기기 시작했던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더욱 큰 권세와 힘을 가진 양 생각하기 시작했고, 사업의 번영이 그들의 지혜에 달려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신실했던지 간에 마치 신실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람들처럼 이런 그릇된 행로는 여전히 그 화를 몰고 왔다. 엘렌 화잇은 그 사람들의 영혼과 사업의 번영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지배하자, 지배하자가 그들이 취하는 행로이다. 사단은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가졌었다”(상동, 363). ‘나로 하여금 우리 지방 대회들과 우리 교회들이 사람들을 의존하고 육체를 저들의 무기로 삼는 일을 그치도록 간청하게 하라……우리 교회들은 교인들이 사람을 바라보고 사람에게 의존하도록 교육받는 때문에 연약하다“(상동, 380).
일반적인 배도 외에 권위를 남용함으로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중 하나는 그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 특별히 곧바른 증언을 하는 자들에 대한 박해이다. 이것이 암흑기 동안 순교자들을 불태우게 한 것이며, 성경 역사를 통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것을 포함하여 수많은 선지자들과 기별들을 투옥하고 죽도록 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교회 안에 박해를 이끌어 들일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을 맘대로 다룰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죽이거나 투옥하리라고는 결코 꿈꾸지 못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의심할 것 없이 큰 “경건”과 “주저”하는 태도로 교회의 고결함을 보존하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했다. 요 11:40, 50 참조. 또한 그때에 실제적인 사형 집행을 했던 것은 정부의 세력이었으나 정부에게 그 집행을 하도록 강요했던 것은 교회였다. 예수님의 감화력을 제한하려 모든 조치를 다한 후에 그들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십자가를 바라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들은 자신들을 민족의 구원을 도모한 애국자처럼 생각하였다”(시대의 소망 2권, 360).
오늘날 우리는 사도들과 개신교의 개혁자들로부터 종교자유의 유물을 전수받았다. “오늘날 우리들은 이 원칙을 확고부동하게 지지해야 한다. 복음 교회의 창시자들과 그 이후에 경과된 세기 동안의 하나님의 증인들에 의하여 높이 드렸던 진리와 종교자유의 깃발은 이 마지막 투쟁에 있어서 우리들의 손에 위임되었다. 이 큰 선물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의 지식으로 축복하신 사람들에게 놓여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인간의 정권을 하나님의 정하신 법으로 인정하고 그 정당한 범위 안에서는 신성한 의무로써 거기에 순종하기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그 요구가 하나님의 요구와 충돌될 때에는 우리는 사람들에게보다 차라리 하나님께 순종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인간의 법보다 높다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기를」이란 말을 「교회가 이렇게 말하기를」혹은 「국가가 이렇게 말하기를」이라는 말로 인하여 파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면류관은 세상 군주의 왕관보다 높임을 받아야 한다”(사도행적, 71).
교회가 세상 세력의 지원을 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능력 즉 그분의 강권하시는 사랑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
종교자유의 기치를 든 자들로서 우리 중 어떤 이도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이나 암흑기 동안의 천주교의 교권주의가 했던 것처럼 교회 정책에 반대하는 자들을 핍박하거나 우리의 결정이나 계획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해 어떤 사람에게 벌금을 매기거나 투옥하기 위해 정부와 연합하리라고 생각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일에 참여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최근에 교적을 박탈당한 한 설교자가 처음에는 벌금을 물어야 했고, 그 다음에는 그와 그의 신도들이 그들의 확신에 다라 그들 자신을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회중교회”라고 부른 이유 대문에 그 설교자가 투옥된 사실이 있었다. 이 일은 멀리 떨어진 어떤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곳 미국에서 교회 자체가 먼저 소송을 제기하여 정부와 연합하여 교회 교인들의 십일금을 사용하여 그 사건의 비용을 부담하게 된 오랜 기간을 끈 소송사건이었다. 그 설교자가 신학적으로 옳았는지 잘못됐든지는 문제의 요점이 아니었고, 교회가 자신의 선고를 강행하기 위해 정부의 강력한 힘에 호소한 사실이 원칙을 위배한 점이었다. “교회가 세상 세력의 지원을 구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능력 즉 그분의 강권하시는 사랑이 없다는 증거가 된다”(MB, 127). “교회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정부의 세력을 이용할 때”(GC, 443) 미국의 개신교회들은 암흑기 동안 교회와 정부를 연합시켰던 짐승의 우상을 세우게 될 것이다.
세계 각지에, 특별히 공산주의 국가들에 있는 상당히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교회 내의 배도를 반대하는 곧바른 증언을 한 이유로 처음에는 제적을 당하고, 그 다음에는 “교회”의 선동을 통하여 정부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여러 번 개인적으로 헝가리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수백명의 제적당하여 박해당하는 형제들을 만나보았다. 이 사랑스러운 형제 자매들은 진실하고도 충성스러운 재림교인들이지만 단지 교회가 정부의 정책과 종교통합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반대하는 곧바른 증언을 한 것 외에는 별 잘못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기별은 안수 받은 목사들과 헌신한 평신도들에 의해 교회 지도자들에게 직접 전달된 것이었고, 그 결과는 그들 모두가 아무 절차를 치르지 않고 제적된 것이었다. 심지어 애드벤티스트 리뷰(Adventist Review)지에서조차 그 전 과정이 불법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고치거나 전 세계적인 조직의 대표들에 의해 그러한 처사를 정죄하지 못함으로 우리는 전체적인 조직으로서 그러한 처사를 사실상 관대히 보아주는 격이 되었다.
헝가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들에게 자문해 보도록 하기 위한 한 예로서 언급한 것인데, 우리는 그리스도시대의 교회와 암흑기의 교회가 밟았던 동일한 길을 걷기 시작하는 것은 아닌가? 미국 내에서의 제적과 목사들을 해고시키는 것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 간 충실하고도 오래 믿은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인들이 그들이 대회 산하에 있지 않은 어떤 미니스트리와 관련된 것 대문에 그 지방 교회들에 교적 이전이 안되는 상황도 생겨나고 있다. 역사는 다시 반복되고 있는가? 우리는 화잇 부인으로 하여금 떨도록 한 박해로 이끄는 교권주의의 길을 걷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우리들이 대적해야 될 원수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이며 우리들이 그를 대적하기 위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함을 생각할 때 나의 심령은 몹시 떨렸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체험하게 될 그 입장을 설명해 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련과 그리스도의 초림 직전에 저들이 보인 태도에 대한 광경을 여러 번 반복해서 나에게 보여주셨다”(가려 I, 513).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초림 하셨을 때에 산헤드린 회원들은 그들의 의지에 따라 사람들을 지배하는 그들의 권위를 행사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속박에서 자유케하시려고 당신의 생명을 주셨던 영혼들이 다른 형태로 사단의 속박에 얽매이게 되었다”(TM, 361; 가려 I, 407도 참조).
여러 해 동안 제임스 화잇 부부는 조직을 설립하기 위해 일했다. “어떤 형태의 조직이 없이는 큰 혼란이 있을 것이며 사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TM, 26)고 화잇 부인은 말했다. 하늘나라는 질서가 있는 곳이며, 하나님께서는 조직을 파괴하는 것에 대해 축복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조직은 그 본질상 지배하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조직은 결코 곧바른 증언의 전파를 방해하거나 곧바른 증언을 하는 자들을 박해하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어떻게 인도하셔야 할지를 명령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조직은 항상 인간의 능력이나 지혜보다 하나님을 더 의존하는 단순한 조직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조직은 지역 교회들과 지역 교인들을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었다. 지도자들은 모본과 기도와 믿음으로 지도하게 되어 있었다. 지도자들은 교인들과 하나가 된 형제들이 되어야 했다. 조직은 복음과 곧바른 증언의 전파를 장려해주고 배려해 주도록 고안된 것이지 그것을 제한하고 지배하기 위해서 고안된 것은 아니었다.
마귀는 이 교회가 조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가 그 점에서 실패하자마자 다른 점에 그의 노력을 집중시켰다. 그것은 우리가 과도하게 조직되도록(overorganized)하는 것이었다. 대총회가 조직 된지 4년 후인 1867년에 이미 화잇 부인의 두려움은 조직의 미비에서 조직이 오용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 해에 교회를 위한 일반적 증언에 기록되어 있는 그녀의 계시를 읽어보라: “그 밤에, 나는 꿈을 꾸었다. 내가 배틀크릭에서 출입문 옆에 있는 유리창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일단의 사람들이 둘씩 짝을 지어 집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엄숙하고 단호해 보였다. 그들은 잘 아는 사람들이었으므로, 나는 그들을 영접하기 위하여 응접실 문을 열고자 돌아섰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장면은 바뀌었다. 그 무리들은 이제 천주교 행령의 모습을 나타냈다. 한 사람은 손에 십자가를 들고, 다른 한 사람은 갈대를 쥐고 있었다. 그들이 접근하자, 갈대를 쥐고 있는 자가 집을 빙 둘러 원을 그리고, 다음의 말을 세 번 되풀이했다. ‘이 집은 법률의 보호를 박탈당했다. 물건들은 몰수되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거룩한 명령을 거스려 말했다’”(교회증언 I, 592).
무엇이 예언의 신이 반박하는 거룩한 명령이었는가? 그것은 그 본질상 지배하고 박해하려는 성질을 띄게 된 교회조직의 명령이었다. 엘렌 화잇은 교회 직원들에 의해 빈번히 반대를 받았었다. 박해를 받았던 다른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는 지금 죽어있고, 존경을 받는다. 그러나 그녀의 우려를 반복하는 자들에게 대하여서는 박해가 계속된다.
1888년에 화잇 부인이 우려했던 것은 그저 교리 뿐만이 아니라 조직도 우려했었다. 분명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율법이 그 핵심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화잇 부인은 “둘[와그너 박사와 버틀러 목사] 다 율법에 관한 모든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둘의 입장이 다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The Ellen G. White 1888 Materials, 93).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말했다: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율법에 관한] 문제는 주요 문제가 아니며 그렇게 취급되어서도 안된다”(상동, 220). 그렇다면 화잇 부인의 우려는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가?
하늘로부터 오는 신선한 빛의 광선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모든 통로를 막으려고 결심한 듯이 보이는 많은 부류의 종교 교사들이 있다
그것은 조직의 지배에 관한 문제였다. 하나님께서는 와그너와 죠운스에게 한 기별을 주셨으나 형제들은 이 형제들이 그들의 기별을 소개하기 전에 가부를 판정받기 위해 “공식적인” 통로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1888년의 논쟁점은 “그리스도 우리의 의”였다. 그러나 화잇부인이 한 “그리스도 우리의 의”에 대한 화잇 부인의 말을 들어보자: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과 양심을 자신들을 위해서 사용하도록 고안하신다. 그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그림자가 되며, 오직 다른 사람의 정서를 말하도록 계획하신 적이 전혀 없으시다. 그러나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모든 일꾼들을 위한 마음과 양심과 판단이 되어야 한다는 오류가 우리 가운데 들어오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기초는 ‘그리스도 우리의 의’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개별적으로 책임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행동하시는 것처럼 행동해야지 다른 사람의 마음이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도록 행동해서는 안된다. 이는 이러한 간접적인 영향력이 계속될 때 영혼들은 스스로 있는 위대하신 분에 의해 인상과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되는 때문이다. 반면에 그들은 다른 사람의 경험과 섞인 경험을 갖게 될 것이며, 아무런 행동이나 선택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도덕적인 억제 하에 있게 될 것이다”(상동, 112).
“주님께서는 절대로 독재적인 권위의 활용을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그러나 이런 일들이 배틀크릭에서 하는 사업과 연관된 경영면에서 나타났다. 여러 해 동안 드러나고, 실행함으로 강화되어 온 지배하지 않으면 파괴시키자는 반대될만한 성격의 드러남에 대해서 너무 강한 표현은 할 수가 없다. 일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계획들이 놓여지고 있다. 이런 억압적인 계획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서 자유롭게 서야할 사람들이 그저 자신들의 동료 일꾼들인 사람들의 제약을 받아 구속받고 있다……종교자유를 이야기하는 우리 백성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 배워야 할 공과들이 있다. 주님께서는 실행되어 오고 있는 억압을 잘 기록해 두셨다”(상동, 1357, 1358).
“하늘로부터 오는 신선한 빛의 광선이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모든 통로를 막으려고 결심한 듯이 보이는 많은 부류의 종교 교사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규칙과 제약을 세워 그들의 교회의 교인들을 묶어 두어서 그들이 다른 예배장소에 가는 것을 금하고, 어떤 부류의 교사들 외의 기별자들의 말을 듣는 것을 금한다. 이런 방법으로 남녀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하신 자유를 포기하도록 인도되어지며, 그들 자신의 교회 외의 원천에서부터 방사되는 하늘빛의 광선을 모으지 못함으로 마음과 정신을 계발시키고 증진시키는데 실패한다”(Signs of the Times, 3권, 142).
이 나라를 강하고 번영하도록 이끈 것은 하나님 밑에서 얻는 종교 자유의 원칙이었다. “처음에 미국으로 도망 온 그리스도인 도망자들은 왕가의 억압과 신부들의 박해를 피할 한 안식처를 찾았고, 시민권적 자유와 종교적 자유의 넓은 기초위에 한 정부를 설립하려고 결심했다. 이런 원칙들은 한 국가로서 우리의 힘과 번영의 비결이다”(The Spirit of Prophecy, 4권, 277). 이 동일한 원칙들은 교회 내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도 동일한 원칙들은 교회 내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서도 동일하게 필요하다. 종교자유가 시작될 필요가 있는 곳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 자유는 거짓교리가 강단에 도입되도록 하는 방종이 아니요, 회중 가운데 무질서한 요소들을 도입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말할 자유와 이의를 말할 자유, 율법의 원칙이나 품성을 손상시킴 없이 출판할 자유를 주는 것이다. 교리의 차이가 있을 때에는 그 교리들을 공개적으로 정당하게 만나 토론할 필요가 있으며 오류는 마땅히 불리워져야 할 이름으로 불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대학들과 교회들에서 가르쳐지는 오류들은 그 오류들이 “정규 통로들”을 통해서 들어오는 한 가르쳐질 수 있는 듯이 보이며, 그와 반면에 어떤 진리들이 얼마큼 중요하든지간에 그 진리들이 공식적인 통로를 통하여 들어오지 않는 한 무시되거나 정죄 받는 듯이 보인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할 다른 통로를 선택하셔야만 했다. 민 11:27-29; 막 9:38-40 참조.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셨던 때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위대한 운동에도 그러하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업을 지배하고 저들이 지배할 수 없는 자들을 박해하는 자들과는 떨어져서 일하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마지막 사업에서 통상적으로 일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방법으로, 어떤 인간의 계획에 맞지 않을 방법으로 일하실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항상 하나님의 사업을 지배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며, 심지어 사업이 셋째 천사와 연합하여 세상에 주어질 기별을 전할 천사의 지도 하에 전진할 때 어떤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명령하려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손에 고삐를 잡고 계신 것이 보여지도록 방법과 도구들을 사용하실 것이다. 일꾼들은 그분께서 당신의 의의 사업을 완성시키기 위해 사용할 단순한 도구들로 인해 놀라게 될 것이다”(TM, 300).
교회는 다시 한 번 완전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완전은 하나님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며, 복음주의적인 세력의 지배나 종교자유를 위협하는 권세를 통해서 성취되지는 않을 것이다.
* 목사요 전도자인 필자는 캔사스 주, 위치타에 있는 Steps to Life Ministry의 책임자이었는데, 지난 1991년 7월 22일 비행기 사고로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