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 방법
엘렌 지 화잇
여러 세기를 내려오면서 교육은 주로 기억에 의하여 행하여 왔다. 이 기억하는 능력에 극도의 부담이 지워지는 한편 지적 능력은 그처럼 발달되지 못하였다. 학생들은 지식을 두뇌에 쓸어 넣기에 노력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마는 실지로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리하여 소화할 수도, 동화할 수도 없는 것들로 말미암아 짐 지워진 두뇌는 약하여지고 원기 있게 독립독행하는 노력을 할 수 없이 되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판단과 지각력에 의존함으로 자족하게 되었다.
이 방법의 폐해를 인식한 일부의 사람들은 다른 극단적인 방법으로 달려갔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사람은 다만 자기 안에 있는 것만을 발달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육에 의하여 학생들은 자기만족에 빠지고 필경에는 참된 지식과 능력의 원천으로부터 자기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기억력을 훈련하는 데 의존하고 자주적 사고를 방해하는 교육에서는 도덕적 의의한 것은 거의 그 진가를 인식치 못한다. 학생이 스스로 추리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희생하게 될 때에 그는 진리와 오류를 분간할 수 없이 되고 쉽사리 속임수의 밥이 되고 만다. 그는 간단히 전통과 습관에 따라가도록 된다.
오류는 그 정체를 나타내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이 매우 위험한 일이면서도 오히려 이 사실은 일반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오류는 진리에 섞이든지 또는 진리에 붙어서 받아들이는 바 되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우리 시조의 멸망을 일으킨 바 또한 선악이 섞인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오늘날 남녀들의 멸망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는 사람은 조만간에 과오에 빠질 것은 확실하다.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하는 능력은 우리 각 사람이 각각 하나님께 신뢰하는 일을 통하여서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각각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배워야 한다. 추리하는 능력은 우리로 쓰게 하려고 주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가 활용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고 부르신다. 하나님께 신뢰함으로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아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모든 참된 가르침에 있어서 개인적인 요소가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가르치시는 중에 저희를 각각 개인적으로 취급하셨다. 그가 열두 제자를 훈련하신 것은 개인적인 접촉과 교제를 통하여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한 사람의 듣는 자만을 두시고 당신의 가장 귀한 교훈을 개인적으로 베푸시는 일이 많이 있었다.
감람산에서 밤에 만나신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랍비를 향하여,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만난 세상에서 멸시를 받는 부인에게 그는 당신의 귀한 보물을 보이셨으니 대개 그리스도께서는 이 듣는 자들에게서 그 마음이 감동받을만하고 그 생각이 열려있으며 그 정신이 받아들일 힘이 있는 것을 알아보신 연고이었다. 여러 번 그리스도를 따라서 몰려 온 무리들까지라도 그리스도 자신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무분별한 사람들의 무리만은 아니었다. 그는 각 개인의 마음에 직접으로 말씀하시고 그 각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셨다. 그는 청중의 얼굴을 주목하시고 말씀하신 그 진리가 그 심령에 감응을 일으켜서 얼굴빛이 밝아지고 감응의 빛이 떠오름을 보신 바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 공명하는 즐거움으로 반응되어 깊은 감동을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각 사람에게 있는 가능성을 식별하셨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외관이나, 좋지 못한 환경의 까닭으로 그는 돌아서시지 아니하셨다. 그는 마태를 그 저자 세 받는 곳에서, 베드로와 그의 형제들을 고기잡이배에서 부르셔서 당신에게서 배우게 하셨다.
오늘날 교육 사업에 있어서 이와 같은 개인적 관심과 개인적 발달을 위한 그 같은 주의가 필요하다. 표면에는 유망하여 보이지 아니하는 청소년 중에는 풍부한 천품을 받아 가지고도 이를 사용치 않고 있는 자들이 적지 아니하다. 교육자의 편에 인식이 부족한 탓으로 저희 재능은 감추인 채로 있는 것이다. 표면은 보기 싫고 잘 다스리지 아니한 돌처럼 보이는 많은 남녀 어린이들 중에서 열과 폭풍과 압력의 시련에라도 능히 견디는 귀중한 소질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교육자는 자기의 학생이 어떤 사람이 될까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가 일하고 있는 재료인 학생의 가치를 인정할 것이다. 그는 각 학생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그 모든 능력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올바른 원칙에 일치되기 위하여서는 아무리 불완전한 노력일지라도 모든 노력을 다하도록 장려할 것이다.
청소년들은 누구나 근면의 힘과 그 필요성을 배워야 한다. 성공의 여부는 천품이나 재능보다도 훨씬 이 근면에 달린 것이다. 근면하지 않고는 아무리 훌륭한 재능이라도 별로 쓸데가 없지마는 그 반면에 평범한 재능밖에 없는 사람이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노력할 때에는 놀랄만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경탄할만한 업적을 가진 천재들도 거의 예외 없이 휘어지지 않고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인 것이다.
교사는 항상 단순한 효과에 목표를 둘 것이다
청소년들은 저희의 가진 재능은 무엇이나, 그것이 승한 것이나 혹은 못한 것을 물론하고 다 발달하게 할 것을 목표로 하도록 배워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저희가 나면서부터 가진 성질에 부합하는 어떤 방면에만 저희 연구를 국한시키려는 경향을 가졌다. 이 잘못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나면서부터의 소질은 사람의 평생 사업의 방향을 가리켜 주는 바 그것이 정당한 때에는 조심성 있게 이를 배양시켜야 할 것이다. 동시에 또한 균형진 품성과 모든 방면에 있어서 유능한 활동은 충분하고 원만한 교육의 결과인 균등한 발달에 의존하는 것이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한다.
교사는 항상 단순과 효과에 목표를 둘 것이다. 교사는 주로 실례를 써서 가르치고 나이 먹은 학생들을 취급할 경우일지라도 그 설명은 모두 간단명료히 하도록 주의할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 든 학생일지라도 그 이해력에 있어서는 아이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교육 사업에 있어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열심이다. 이점에 대하여 일찍이 어떤 유명한 배우가 한 말 가운데 유익한 암시가 있다. 한번은 「캔터버리」의 대승정이 그 배우에게 무대의 배우는 가상적인 일들을 말하여서 그 청중으로 매우 깊은 감동을 받게 하는데 복음의 목사는 참된 것을 말하면서도 그 청중을 별로 감동하게 하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것은 무슨 연고이냐고 물었다. 그 배우는 대답하기를 “송구한 말씀이오나 용납하시면 그 이유는 간단한 것이올시다. 그 이유는 열심의 힘에 있습니다. 무대에 선 우리는 가상적인 것을 마치 진실된 것인 듯이 말하지마는 강단에 서신 목사들은 참된 것을 가상적인 것처럼 말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교사는 자기의 하는 일에서 진실된 것을 취급하는 것이니까 그는 그것이 진실되고 중요하다는 것을 앎으로 하여 받게 되는 감명을 가지고 전력을 다하여 열심을 가지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교사마다 자기의 하는 일이 일정한 결과에 도달하고 있는 여부를 확인하여야 한다. 어떤 학과를 가르치려고 하기 전에 교사는 확실한 계획을 마음에 두고 자기가 무엇을 성취하고자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교사는 어떠한 학과를 가르칠 때에도 학생이 그 가운데 포함된 원칙을 이해하고 그 진리를 지각하여서 자기가 배운 바를 명백히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는 거기 만족하여서는 아니된다.
교육의 큰 목적을 생각할 때에는 청소년들은 저희 능력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 전지하도록 장려함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급의 학문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저들로 그 하급의 학문에 정통하게 하여야 한다. 이 일이 무시되는 수가 많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학생 중에도 보통 교육의 부문의 지식이 부족한 자가 있다. 많은 학생들은 간단한 치부도 할 수 없으면서 고등 수학에 저희의 시간을 다 바치고 있는 것이다. 웅변술을 습득하기 위하여 발성법을 공부하면서도 명료하고 인상적인 음조로 글을 낭독할 수도 없는 학생이 많다. 수사학의 과정을 마치면서도 일상하는 편지의 문장과 철자법을 완전히 못하는 학생이 많이 있다.
교육의 기본적 지식을 완전히 수득하는 여부는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조건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학업에 대한 계속과 진보를 위한 일상의 시금석이 되어야 한다.
어느 교육부문에 있어서도 단순히 기술적 지식을 습득하는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목적이 달성되어 한다. 언어에 예를 들어 말해보자. 현용어나 사어를 물론하고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의 모국어를 쉽게 그리고 정확하게 쓰고 말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러나 문법의 지식을 얻기 위하여 아무리 공부할지라도 그보다도 높은 관점에서 하는 언어의 학습과 비교하면 그 중요성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이런 언어의 공부가 인생의 행복과 불행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어에 있어서 가장 요구되는 것은 그것이 순결하고 친절하고 진실되어야 할 것이니 곧 “마음의 미덕이 외부에 표현된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그런 생각은 표현도 또한 그런 것이 되게 할 것이다.
언어를 배우는 최상의 학교는 가정이다. 그러나 가정에서 하는 이 일이 매우 등한히 되어 있으므로 학생들의 바른 말의 습관을 기르는 일은 교사에게 맡겨져 있는 형편이다.
교사들은 사회에, 이웃에게 가정에 화가 되는 악한 습관, 곧 훼방하고 말질하여 비열한 비평을 하는 습관을 못하게 하는 일에 크게 이바지 할 수 있다. 이 일을 위하여 수고를 아껴서는 아니된다. 이런 습관은 교양과 세련된 것과 마음의 참된 선량함의 부족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세상의 참으로 교양 있고 세련된 사람들의 사회를 위하여서나 또는 하늘의 거룩한 분들과의 교제를 위하여서도 못마땅하다는 사실을 명심케 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살이 따뜻하고 푸들거리고 있는 그 희생자의 고기를 먹고 있는 식인종의 모습을 공포심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보다도 더욱 무서운 결과는 그 진의가 거짓되이 전하여지고 훼손하는 비판을 받고 품성에 대한 자세한 비판을 받음으로부터 오는 고뇌와 파멸인 것이다. 어린이들과 청년들에게 아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하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 18:21).
성경에는 비방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들과 동류로 취급하였다.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인 것이다(롬 1:30, 31, 29, 32). 하나님께서 시온의 시민으로 치시는 사람은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시 15:2, 3)는 자들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데 가까운 의미 없는 말과 지나친 말도 역시 죄라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사회와 실업계의 풍조인 허위적인 찬사, 진실한 말을 회피하는 일, 침소봉대격의 설명, 장사하는 중에서 하는 거짓말 같은 일은 성경에는 죄라고 말씀하였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횃불을 던지며 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잠 26:18,19).
말질하는 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은 슬그머니 암시하는 일 곧 교활한 풍자인데 마음이 불순한 사람은 공공연하게 표현할 수 없는 악을 이런 방법에 의지하여서 암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이런 행위에 대하여 마치 문둥병자를 피하듯이 피하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언어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노소를 물론하고 간과하기 쉬운 과실은 경솔하고 참을성 없는 말일 것이다. 저희는 “생각 없이 한 말로 사실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고 하면 넉넉한 구실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를 가볍게 취급하지 아니한다.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 25:28).
조급하고 감정적이며 주의 없는 말로 인하여 일순간에 일생을 두고 후회할지라도 이를 취소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도움과 고침을 주어야 할 사람들이 냉혹하고 조급한 말을 발함으로 남의 마음을 상하고 친구 사이에 의가 갈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잠 12:18).
모든 어린이들의 마음에 특별히 품어지고 배양되어야 할 특성의 하나는 인생으로 무의식중에 행하는 미덕을 갖게 하는, 자기를 잊어버리는 정신이다. 이것은 모든 뛰어난 품성에도 가장 아름다운 것 중에 하나요, 모든 진실된 평생 사람을 위하여 하나의 가장 요긴한 자격이다.
아이들은 감사와 동정과 장려함을 받아야 하지마는 저희가 칭찬받기를 좋아하는 정신을 기르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어린이로 특별한 주목을 받게 하든지 저희의 재치 있는 말을 그 당자가 듣는 앞에서 반복하여 칭찬하는 것은 지혜 있는 일이 아니다. 부모나 교사가 어린이들에 대하여 참된 이상과 품성과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아이들에게 자족하다는 마음을 품게 하든지 조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부모나 교사는 청소년들에게 자기의 재능이나 우월한 것을 사람의 앞에 과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거나 노력을 하도록 조장시키지 아니할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더욱 높은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겸손할 것이며 또한 표면적인 과시를 하거나, 위대한 사람의 앞에서 부끄러워하거나 당혹해 하지 아니하는 위엄을 가질 것이다.
품성의 미덕이란 것은 임의로 된 법칙이나 규칙에 의하여 발달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순결, 고귀, 진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삶으로 말미암아 배양되는 것이다. 어디나 순결한 마음과 고귀한 품성이 있는 곳에는 그것이 순결하고 고귀한 행위와 말로 나타날 것이다.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잠 22:11).
다른 모든 학과들도 언어와 마찬가지이니 그는 학과를 다 품성을 쌓아 올리고 튼튼하게 하는 일에 유조하도록 지도하여야 할 것이다.
이 일은 다른 아무 학과보다도 역사에 있어서 진실되다. 역사를 신성한 관점에서 생각하게 할 것이다.
역사는 왕후의 흥망, 궁정의 음모, 군대의 승패 같은 일들에 대한 기록 곧 야망과 탐욕, 사기와 잔인과 유혈의 이야기만으로 가르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렇게 가르치면 그 결과는 해로울 수밖에 없다. 거기 묘사된 마음 아픈 범죄와 흉행의 반복과 무법과 잔학은 많은 사람의 생애에 씨를 뿌리고 악의 수확으로 결실을 보는 것이다.
모든 제국들의 흥망을 지배하고 있는 원인을 성경의 빛에 비추어서 배우는 것은 훨씬 더 유익한 일이다. 청소년들로 하여금 큰 개혁 운동을 배움으로 그 주의가 경시되고 미움을 받으며, 그 옹호자들은 노옥과 단두대에 끌려 나감을 받으면서도 그런 희생을 통하여 그 주의가 승리를 얻은 일이 얼마나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할 것이다.
그런 학문이 넓고 포괄적인 인생관을 줄 것이다. 그것은 청소년들에게 인류 사회의 의존 관계, 우리는 사회와 국가의 큰 형제의 관계를 가지고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었으며 그 일원의 압제와 타락이 얼마나 널리 모든 사람에게 손해를 기치는 것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산수의 학과도 실제적이라야 한다. 모든 청소년들로 하여금 단순히 가상적 문제만을 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수입과 지출을 정확히 치부할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이다. 돈을 씀으로 옳게 쓰는 법을 배우게 할 것이다. 남녀 어린이로 하여금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나 저희 자신들이 번 것이거나를 물론하고 그것으로 저희 자신의 의복과 책과 그밖에 필요한 것을 골라서 사는 일을 배우게 할 것이요 그 비용을 장부에 치부함으로 다른 방법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돈의 가치와 그 사용하는 길을 배우게 할 것이다. 이 훈련이 저희로 참된 절검과 인색을 구별케 하는 한편에 낭비를 식별케 할 것이다. 이 훈련이 올바르게 지도되면 자선하는 습관을 조장할 것이다. 이것이 청소년들의 주는 일을 배우게 할 터인데 그것은 무슨 감정이 움직여서 일시적인 충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규칙적이면서 계획적으로 하는 시여인 것이다.
이렇게 지도함으로 모든 학과는 모든 문제 중에 가장 큰 문제, 곧 인생의 책임을 가장 잘 완수하도록 남녀를 교육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육, 297-308.